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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6 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서로 정죄하는가 (2)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살아나서 하나님 우편(右便)에서 우리를 위해 계속 빌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나를 섬겨 주는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한다. / 이 구절은 “누가 너희를 정죄하겠는가”로 시작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죽였다. 그러니 그분은 너희를 정죄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그분은 죽으셨다’(‘아포드네스코’, ἀποθνήσκω). 이 단어의 (‘드네스코, θνήσκω’)의 명사형은 (‘다나토스, θάνατος’)이다. 그분은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에게이로, ἐγείρω’) 다시 영으로 살아나셨다. / 하나님의 우편(右便) = (‘덱시오스, δεξιός’ = 영접하다, 받다) -> 하나님을 영접한 자, 그분을 받은 자를 오른편이라고 한다. -> 하나님의 편은 다 오른편이다. 그 오른편은 우리를 말한다. / 그래서 우리를 오른편에 있는 양이라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왼편의 염소라고 한다. / 우리가 오른편(right side)이라고 정의했으니 그 반대편을 왼편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 하나님의 편, 하나님 쪽이 오른편이고 그게 우리이다.
성경에 계속해서 “너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 편이라는 말. / 그리스도 예수가 우편에(하나님 편에) 계신다 => 죽었다가 다시 (‘에게이로’ 살아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 / 거기서 너희도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라고 간구하신다. 육으로 죽는 너희의 육은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이 증명 되었는데 그게 어떻게 정죄 거리가 되느냐? 그리스도 예수는 말씀의 완성으로 죽으셨다(=다나토스).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신의 죽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피조물이 앎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기 계시, 낮아짐,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죽음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이 육으로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서 우리 안으로 오신 것이 구원이다. / 우리가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육도 부정된다. / 진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똑같다. 그것을 내 안의 그리스도가 간구하고 있다. / 육이 부정되고 죽는데 그게 왜 송사거리가 되고 정죄거리가 되느냐? 그냥 육이 장렬히 전사하면 된다. / 그런데 죽기가 싫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육을 계발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그게 정죄 거리가 된다.
“너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하나님도 육으로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서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남편이 되셨는데 너희가 뭔데 육을 계발해서 하나님 앞에 가겠다고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너희 스스로 송사, 정죄하고 남들도 그렇게 정죄하고 송사하는 것이다. 너희를 의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이 세상의 시선과 판단 기준이 아니다. -> 너희가 여전히 송사와 정죄 안에 있으면 너희는 진리와 복음을 모르는 자다”.
여기서 (‘에게이로, ἐγείρω’)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역 성경은 그걸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정확히 하면 그 단어는 ‘죽어 있던 기능이 조합되어 존재가 되다’라는 말이다. / 에스겔서에 뼈다귀들이 골짜기 위에 흩어져 있다. / 사람을 죽여서 실온에 놔두면 뼈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지만 힘줄이 끊어지고 관절이 썩으면서 튕겨져 나가서 다 흩어진다. 그러면 산 자들의 기능은 전부 없어진다. -> 모든 기능이 상실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 [‘네크로스’, νεκρός]
성경에서 ‘네크로스’는 육의 죽음이라고 한다. 살아 있는 존재(‘네페쉬’)들이 진짜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고 진짜 봐야 할 것(‘호라오’할 것)을 못 보면 그 존재를 죽었다고 한다. 그걸 끝까지 못 보고, 못 듣고, 못 먹고 죽으면 그들은 그냥 죽은 자들이다. / 그들은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에도 죽은 자이고, 숨이 멈춘 후에도 죽은 자들이다. / 그들 중에 ‘내가 진짜 들어야 할 것은 이게 아니고 내가 진짜 봐야 할 건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알게 되어 진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에게이로’라고 한다. 그들에게서는 진짜 기능들이 조합되어 새사람이 된다. 이것을 부활이라고도 하고 ‘다시 살아났다’ 라고도 하는데 이 상태를 ‘다나토스’ 라고 한다. 이게 ‘말씀의 완성으로 죽다’라는 뜻이다. / 이렇게 죽으면 ‘내가 죽은 자 맞구나’라는 걸 알게 되어 진짜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된다. 이 상태가 된 이 사람들을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라고 한다. 이 ‘아나스타시스’가 부활이다. / 여러분이 이 땅에서 열심히 종교적인 행위를 하다가 (육이 죽은 후에) 나중에 언젠가 살아나는 것을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한다. / 산 자의 부활은 지금 이 땅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진리를 가진 사람을 성경은 [‘에게이로’ 살았다]고 하고 그런 사람을 ‘아나스타시스’라고 한다. / 아나스타시스는 아나(위로)와 이스테미(똑바로 서다)의 조합으로 ‘위로 똑바로 서다’라는 뜻이다. 쿰이란 단어와 똑같다. 위로 똑바로 서면 그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요한계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라고 나오는 게 바로 이 내용이다. / 나타난 현상과 현실에 대하여 그 안에 있는 진짜 내용을 보고 듣게 되면 그들은 거기서 해방되고 풀려난다. 더 이상 그것이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 자들을 살았다고 한다. /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현실이 감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들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 것이 들리고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한다. /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 기쁨, 수치, 자랑, 겸손, 교만 이러한 것들이 그냥 하나로 들리고 보이면 된다. ‘그렇지 그걸 이야기하려는 거지’라고 깨달으면 된다. / 모든 현상과 현실과 사건과 감정, 그 모든 것들이 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파스’)으로 보이고 들리면 그들에게 죄가 무슨 의미이며 악이 무슨 의미이고, 의가 무슨 의미이며 선이 무슨 의미인가? (註: 得道하여 通達의 경지에 이른 상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게 무슨 의미야? 심지어 생명은 뭐야?”라는 질문까지 이해가 되어야 한다. “내가 너희들이 갖고 있고 알고 있는 그 생명으로 진리를 설명해 주려고 내가 ‘생명, 생명’ 했는데 그걸 알아버린 자들에게 생명은 무엇이야? 그걸 알아버린 자들에게 그 생명이 생명인가??” / 그들에게 좌파는 무엇이고 우파는 무엇이며,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가? /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 그런 것들은 우리의 생명과 상관이 없으므로 세상은 나에 대해 침묵한다. / 그들은 내 이야기를 못 듣는다. / 듣는다는 것은 그릇이 되는 만큼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들을 능력, 그릇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큰 소리인데 그릇에 담지를 못한다. / 이처럼 세상의 소리는 우리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 내가 육으로 실패해야 그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듣지 않아야 한다. 아니 안 들려야 한다.
그렇게 ‘에게이로’한 이들을 아래에서 위로 똑바로 선 자들(=‘아나스타시스’)이라고 한다. 그게 부활이다. / 부활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서 그 세상에 묶이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좌우도 없고 명암과도 무관하게 똑바로 선 존재들의 상태(‘아나스타시스’)를 뜻한다. / ‘이스테미’에서 [‘스타우로스’, 십자가]가 나왔다. / 그 (똑바로 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기둥이 똑바로 선 것이다. / 성도는 반드시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 빛으로 그 어두움의 내용을 볼 줄 아는 ‘에게이로’의 부활을 해야 한다. 그들이 산 자이다. /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죽은 육신을 열심히 채찍질하면서 육신의 열매를 근거로 먼 훗날에 부활할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책을 이마와 손에 경문으로 차고 다니면 뭐하나? 그게 무슨 말인지 뜻도 모르는데 경문만 크게 만들면 뭐해?” 꾸짖으신다.
(마22:24-32)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부활은 그런 식의 시집, 장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네 안에 남편으로 받아들여 그 남편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 유대인에게는 ‘형사취수제’라는 율법이 있는데 그 법에 따르면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 그 형수는 그 동생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 말씀에서는 그 동생이 죽고 또 밑에 동생이 죽고 또 그렇게 죽고 죽어서 일곱 형제가 다 죽고 결국엔 형수들도 다 죽었다. 나중에 부활하면 그 형수들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이 이 땅에 혼인제도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남편과 신부인 교회의 연합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데려와!” 하셨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 있었다고 답한다. 여기서 다섯 남편은 당연히 율법으로서의 남편이다. / 예수님은 “그 다섯 남편은 네 남편 아니다”라고 하신다. 그 율법은 내 밖의 법인데 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면서 주님은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이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육으로 그 여인에게 들어갈 수는 없다. / 그 남편은 어떻게 와야 하나? 죽고 일곱 번째 남편인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칠로 완성된 일곱 번째 남편이다.
주님은 형사취수제를 예화로 “진짜 남편이 뭔지를 진리로 설명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그 일곱으로 완성되는 남편을 설명해 주셨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그들을 산 자라고 하신다. 그들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인데 주님은 그들을 산 자라고 하신다. / 육은 죽었지만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 생명력으로 살아난 것을 말한다. 그게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삶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요셉의 삶이 된다. / 요셉에게는 섭섭하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한다.
아브람은 위대한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란 뜻이다. 위대한 아버지는 무엇이고 위대한 하나님은 무엇인가? 내 밖의, 나의 섬김의 대상인 그 하나님이다. / 아브라함의 인생 자체가 열국의 아버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려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은 약속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야곱은 하나님 없이, 그 은혜와 사랑 없이는 절대로 홀로 설 수도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팡이로 짚고 그것과 한 몸이 되어 걸어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가 곧 이스라엘이다. / 그걸 다 알아버리면 그 상태를 ‘살았다’고 한다. -> 그래서 그들을 ‘산 자’라고 한다.
말씀은 “너희가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외모나 됨됨이, 자격이나 행위 등을 그 아들 됨이나 성도 됨의 잣대로 사용해서 그들을 정죄하거나 송사하는 것이 어찌 가당한 일이냐?” 반문하신다. / 그러한 자들이 진짜 죽은 자들이다. 그 의미를 아래의 예화로 설명해 주신다.
(마8: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휘파쿠오’, ‘ύπακούω‘, 듣다, 순종하다’] -> ‘자연이 이 사람의 말을 듣네’ /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립네’ 호수를 건너가신다. 그 단어는 불과 유황불 못에 쓰는 말이다. ‘실로암’ 못에 쓰인 단어와 다르다. 거기에 빠지면 죽는다. 거기를 건너려면 반드시 예수와 함께 가야 한다. / 그들이 잠들어 있는 상태(‘네크로스’, 죽어 있는 상태)로는 못 건넌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시고 있다. 이게 너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잠은 항상 죽음을 ‘메타포(비유)’한다. / 누가복음에는 ‘아핌노’라고 써있는데 그 단어는 영적 무감각, 영적 무능력을 의미한다. 단어가 다르다. /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카뒤도, καθεύδω’]라는 단어를 썼고, 그건 진짜 잔 것, 곧 죽음을 ‘메타포’ 하고, ‘아핌노’는 영적 무능력, 죽음을 뜻한다. / 이렇게 조합된 것이 죽음이고 그들의 상태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 그 내용을 진짜 듣고 볼 수 있다. 그래야 죽음의 립네를 건널 수 있다. -> 그들을 ‘이스라엘’, ‘히브리’, 건너간 자라고 한다.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다.
제자들이 바다를 무서워 했다. 거기에 광풍이 일었다. [‘아네모스’, άνεμος]는 미친 바람, 세상 사람들이 합의하여 끌려가는 풍조, 사조를 뜻한다. 그 미친 바람이 불면 모든 인간은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서는 그 기대에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에 못 미치면 다 실패자다. 그래서 전부 대기업 들어가고 판사,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판박이로 찍어내는 벽돌. 하나님은 그런 벽돌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하나가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죽어 있는 자들은 ‘에게이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을 ‘에게이로’ 하라고 한다. “일어나세요.” / 성경이 일부러 그 단어를 주님에게 쓴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무서워한다.
창세기 1장에서 아랫물을 바다라 하고 ‘얌’이라고 쓴다. [‘얌’=‘진리를 주다’] 그것으로 진리를 받으면 된다. 그 바다, [‘아네모스’, άνεμος, 광풍], 세상의 풍조, 사조, 세상의 기대, 잣대, 그것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무서움의 상대가 되면 안 된다. 그것들은 죽은 것이다.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게이로’ 해야 한다. 그 기능이 조합되어 진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무서워하는 그들 앞에 [‘에게이로’, 일어났다]고 하신다. 주님이 ‘아포드네스코(ἀποθνήσκω)’, ‘다나토스’로 죽고 ‘에게이로’ 하셔서 너희 안에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시는데 무엇으로 너희가 자신과 이웃을 정죄하고 송사하겠느냐는 게 말씀의 중심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주님이 ‘에게이로’ 했다. 그리고 “이게 믿음이 없는 거야. 진리는 이 세상 풍조를 진리로 오히려 누르는(제압하는) 것이다. / 이어서 일어나시더니, 그 세상의 풍조와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이야기 하신다. / 그런데 우리는 그것(세상의 풍조)이 진짜 가치인 줄 알고 그것에 못 미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 바다는 당연히 풍랑이 일어야 한다. 바람이 일어나야 배를 밀 수 있다. 바다에 풍랑이 없고 파도가 치지 않으면 그 배는 그대로 서 있게 되는데 바로 그게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러면 바다에 속하여 죽게 된다.
여러분이 속한 이 세상은 풍랑이 일고 무시무시한 곳이 맞다. 그러나 ‘육의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기 때문에 난 여기서 나가야 하는 곳이다.’를 알게 되면 그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일지만 나를 밀어 가나안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바다가 내 말을 듣고 잔잔해지는 것이다. / 삶에 풍랑은 언제나 일지만 그래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 이것으로 내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다’라고 깨달으면 그건 이제 내게 풍랑이 아니다. 그때 내 안에 있는 내 말로 바다를 밟고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바다를 딛고 서서 걸어오신 것이다. “이게 믿음이 있는 자들의 삶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 몇 가지 기준을 정해 놓고 그것으로 정죄하고 송사하면서 “나는 안 그렇다”는 것을 자랑해야 하나? 그 바람과 바다는 여러분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평생 정죄와 송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음의 삶을 살 수도 있고, 반면 정죄와 송사와 무관한 자로 산 자의 삶을 살 수도 있다.
20년 전 즈음 조디 포스터가 나오는 〈넬〉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노스캐롤라이나 숲속에서 혼자 살아가는데 문명인들이 발견한 그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었다며 신기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그가 한 말은 영어였다.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살펴보니 엄마가 안면 마비였다. 엄마가 영어로 의사소통은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안면 마비된 엄마의 소리만 들어서 발음이 다른 것이었다. / 우리는 이처럼 발음이 뭔가 조금 이상한 말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말로 네가 심판받게 될 거야”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있는가? 여러분을 정죄하고 송사하는 말인가, 아니면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는 말인가?
<기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은 인생이지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을 폭로시키고, 그런 세상에서 나와서 “내 땅으로 오라”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안 자에게 어찌 그것이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세상, 풍랑 이는 바다가 가치라고 상정해 놓은 그곳에 닿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성도가 자신을 정죄하고 송사하는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그런 세상과 무관한 자가 되게 하시고 그 세상에서 풀려나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