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교단이 형성하다
석가 시대에는 수행자(사문)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현하려 서로 결속하여 수행, 정진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초기 불교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라서(수행 정진함으로) 자기완성의 지혜를 얻으므로 평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불렀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즉 성인에 해당한다. 아라한은 착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비심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도 가진다.
아라한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는 사람이다.’와 ‘자비심을 베푸는 사람이다’라는 해석상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석가는 자신의 가르침을 문자로 남기지는 않았다. 석가가 죽은 직후에 석가의 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대가섭은 제자들을(500인) 왕사성 근교의 칠엽굴에 모아서 석가의 말씀에 대한 통일을 꾀하였다. 아난은 경전을, 우팔리는 계율을 낭송함하여 결집을 하였다. 이것은 석가의 제자들 중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으므로 ‘상좌결집’이라고 불렀다.
상좌결집은 불교의 근본 사상에 가장 가깝다. 이 결집을 만든 지도부가 ‘상좌부파’이다. 이 경전이 불교의 근본이며, 불교의 시작시기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또한 이 결집을 중심한 불교를 소승불교라 하며, 오늘에 동남아 지역에 퍼져 있다.
불멸 후 100년 경에 엄격한 계율을 주장하는 ‘야시’의 발기로 700명의 비구가 비사리에 모여서 계율에 관하여 새로운 결집을 하였다. 계율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비구와 불교의 전파에 더 무게를 두고 계율을 조금 완화하자는 혁신주의(대승불교)자 사이에 대립이 나타났다. 이것이 소승(상좌부파)과 대승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비사리 결집 또는 700인 결집이라고 부른다.
(탁발을 할 때 시주를 소액만 받고, 규정 이상을 받는 것을 금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하위급 스님은 많이 받더라도 대중에게 되돌려주면 좋은 일이 아니냐라고 주장하면서 상좌부 지도자와 대립하여 분파한다. 소승, 대승으로 갈린다.)
불멸 후 200년 경에 아쇼카 왕이 호불 정책을 펴면서 불교를 새롭게 정리할 일이 생겼다. 1000명의 비구가 모여서 결집을 하여,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하여 남겼다. 불경을 경, 율, 논, 삼장으로 나누어서 결집하였다. 이를 삼장이로고 하며, 1000인 결집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출가 공동체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조직은 대단히 느슨하였고, 비관료적이었으며, 석가 자신이 한 사람의 수행자(사문)로서 직접 탁발을 하였고, 수행도 하였다. 제자들도 스승의 수행을 본 받아서 그대로 따랐다. 또 석가의 설법은 암송하였다. 석가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석가는 제자더러 각자가 자기의 길로 나아가서 대중을 계도하고, 불법을 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