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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에티코넨이 노르트가우의 한 백작으로 시작하여 슈바벤을 얻고 왕관을 쓰기까지 삼백 년이 걸렸다.
그러나 제관(帝冠)은 종가에 오지 않았다. 제관을 먼저 쓴 것은 두 갈래의 방계였으니, 하나는 하로트링겐이요 하나는 프로방스다.
주후 1361년부터 1428년까지 육십칠 년, 신성로마의 제위는 이 두 계열의 손에 있었다.
그동안 슈바벤의 왕들은 신하로서 제관 아래 무릎을 꿇었고, 때로는 칼을 들어 그 아래에서 벗어나려 했다.
종가가 방계를 치고 방계가 종가를 죽였으며, 종가가 방계의 피를 끊고 그 끊어진 자리에서 종가의 제관이 나왔다.
두 계열의 내력을 여기에 함께 적는다.
따로 적으면 각각 한 집안의 흥망이 되지만, 함께 적으면 한 집안이 제 몸을 나누어 서로 싸운 기록이 된다.
상권 — 하로트링겐·헬러계 一. 미친 사람의 아들
주후 1242년 겨울, 슈바벤공 아달베르트2세의 동생 니더바이에른백 필리베르트 에티코넨이 미쳤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료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였는지 적지 않았다. 다만 그 아내를 적었을 뿐이다.
아내는 플라멘스 가문의 베르흐트로, 헬러의 백작이었다. 오라비가 죽고 남자 후사가 끊기자 여자의 몸으로 백작령을 받았다.
필리베르트가 미친 뒤에도 그 백작령은 그대로 있었다.
베르흐트의 아들 안셀름이 어머니에게서 헬러를 받았다. 아버지의 저지바이에른은 그의 아우 비게리히에게 갔다.
그리하여 한 집안이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미친 사람의 두 아들 가운데 형은 어머니의 것을 받고 아우는 아버지의 것을 받았다.
뒷날 비게리히는 늙어서 슈바벤왕에게 반기를 들고 연장자 상속을 주장하다 그 손자가 옥에 갇혔으며, 형의 후손은 제관을 썼다.
헬러백 안셀름은 하로트링겐의 여공 클라라 잘리어를 아내로 맞았다.
하로트링겐의 공작위는 본래 보존 가문의 것이었다.
주후 1210년, 보존 가문의 루트비히가 봉신의 반란에 시달리는 틈을 타 로타르 잘리어가 공작위와 트리에르 백작령을 함께 빼앗았다.
그 빼앗은 물건이 잘리어 가문 안에서 삼대를 내려가 클라라에게 이르렀고, 클라라가 에티코넨의 사내에게 시집오면서 다시 손을 바꾸었다.
칼로 얻은 것이 혼인으로 옮겨가는 데 백 년이 걸렸다.
하로트링겐계의 시작을 살피면, 사내가 스스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헬러는 어머니에게서 왔고 하로트링겐은 아내에게서 왔다.
이 집안은 여자들이 세웠다.
二. 세 안셀름
헬러백 안셀름의 아들도 안셀름이라 하였다. 그 아들의 아들도 안셀름이라 하였다.
둘째 안셀름은 헬러의 재무를 맡아보며 하로트링겐의 후계로 있다가,
조모 클라라에게서 하로트링겐공을 받고 부친에게서 헬러백을 받아 안셀름1세 에티코넨이 되었다.
중간에 그의 아우 미카엘이 있었으나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
셋째 안셀름은 주후 1295년에 났다. 아버지가 죽자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가 되었고, 헬러 백작령은 아우 군트람에게 넘겼다.
사료가 그를 두고 이르기를, 진을 치고 군사를 부리는 데 밝았으며 책을 가까이하였고, 검소하였으나 뜻이 컸다 하였다.
얼굴에는 흉터가 있었다. 사람을 쉽게 믿었다. 나이 들어 사람들이 그를 현자라 불렀다.
이 집안에서 이름이 셋을 이어 같았던 것은, 뒷날 사가(史家)들을 크게 괴롭혔다.
게다가 이 셋째 안셀름은 하로트링겐의 공작으로서는 둘째 안셀름이요 제국의 황제로서는 첫째 안셀름이니, 한 사람이 두 가지 서수(序數)를 지녔다.
이 편에서는 공작위를 좇아 안셀름2세라 적고, 제위를 논할 때에만 황제 안셀름1세라 적는다.
三. 왕이 놓아준 포로
주후 1323년, 슈바벤공 아달베르트4세가 바이에른을 빼앗아 왕국을 세우고 슈바벤왕 아달베르트1세라 칭하였다.
그해 시월, 그는 곧바로 프로방스로 군사를 돌렸다. 프로방스공 레오폴트는 그의 재종형제였다.
십일월,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가 프로방스 편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이미 백 년 전에 갈라져 나간 방계였고, 슈바벤왕과는 촌수가 멀었다.
그럼에도 프로방스의 부름에 응하였다.
같은 달 이십일일, 상부르군트공 발터 폰 뉴엔부르크가 또한 프로방스 편에 섰다.
발터는 레오폴트의 둘째 누이의 남편이었다. 이로써 프로방스와 상부르군트와 하로트링겐이 손을 잡았으니, 옛사람이 이른 합종(合從)의 형세였다.
주후 1326년 오월, 브리에이의 들에서 큰 싸움이 붙었다. 슈바벤왕의 군사가 만이천이요 상대가 구천이었다. 슈바벤왕은 육천을 잃고 팔천을 죽였다. 이 싸움에서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가 사로잡혔다.
슈바벤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몸값을 받고 놓아주었다.
옥에서 나오며 안셀름이 말하였다.
"값을 치렀으니 빚이 없소이다."
슈바벤왕이 답하기를,
"경의 값은 경이 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것이오."
안셀름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삼십오 년 뒤, 그 사로잡혔던 자가 슈바벤왕가의 주군이 되었다.
四. 제관
주후 1336년, 안셀름2세가 처음으로 제위 계승 서열의 첫머리에 올랐다.
그 뒤 스물다섯 해 동안 그는 몇 번 첫머리에서 밀려났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동안 샤테누아 가문의 황제들이 차례로 즉위하고 붕어하였다.
주후 1352년, 슈바벤왕 카를만1세가 자기 장녀 소피에를 하로트링겐공의 손자이자 후계인 안셀름과 약혼시켰다.
종가가 이 방계를 다시 붙들어 두려 한 것이다. 혼인은 주후 1359년에 이루어졌다.
주후 1361년 시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베르톨트 샤테누아가 후사 없이 붕어하였다.
하로트링겐공 안셀름 에티코넨이 제위에 올랐다. 에티코넨이 처음으로 제관을 쓴 것이 이때다.
즉위한 달에 그는 헬러 공작이라는 작위를 새로 만들어 아우 군트람에게 주었다. 그 아래 딸린 백작은 하나뿐이었으니, 이름만 공작이었다.
이듬해 십일월, 그는 슈바벤왕 카를만1세를 제국의 재상으로 삼았다. 브리에이에서 그를 사로잡았던 왕의 손자였다.
황제 안셀름1세의 치세는 팔 년이었다. 그 팔 년 동안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나는 여기에 적지 않는다.
제국의 행정록은 황실 서기청에 갖추어져 있어, 사람을 보내어 청하면 등본을 얻지 못할 바 아니다.
내가 청하지 않은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이 책이 슈바벤을 위하여 쓰이는 까닭이다.
황제의 조서와 제국 회의의 결의를 다 옮겨 적자면 종이가 모자랄 뿐 아니라, 이 책이 무엇을 위한 책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슈바벤에 닿은 것만 적는다.
헬러 공작을 세운 일과 슈바벤왕을 재상으로 부른 일과 그 아래에서 슈바벤왕이 상부르군트와 여러 차례 싸운 일이 그것이다.
노르트가우 백작이었을 적의 일을 해마다 적고 하로트링겐 공작이었을 적의 일을 달마다 적다가 황제가 된 뒤로 붓이 성겨진 것은, 그가 슈바벤에서 멀어졌다는 뜻이지 그가 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주후 1369년 이월, 황제 안셀름1세가 승하하였다. 제위 서열의 첫머리에 있던 그의 장남 안셀름은 이미 참살당한 뒤였다.
누가 죽였는지 사료는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카가 제위에 올랐다. 일찍 죽은 아우 미카엘의 장남으로, 큰아버지와 이름이 같아 황제 안셀름2세라 하였다.
참살당한 장남 안셀름은 슈바벤왕가의 소피에를 아내로 두어 아들 하나를 남겼으니 이름이 군터였다. 그 어미는 뒤에 두 번 더 시집갔다.
황제 안셀름2세의 치세도 칠 년이었으나, 슈바벤에 닿은 일이 없다. 앞서 밝힌 까닭과 같으므로 적지 않는다.
五. 돌아옴
주후 1376년 구월, 황제 안셀름2세가 요절하였다. 나이 마흔이 못 되었다.
제위는 프로방스공 만프레트에게 갔다. 사료가 이 대목에서 이르기를, 하로트링겐-안셀름 계열은 다시 공작위로 돌아왔다 하였다.
죽기 며칠 전 그 병상에 프로방스의 재상이 다녀갔다 하나, 그 일은 프로방스 편에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이 집안의 처음과 끝에 같은 사람의 조손이 서 있었다는 것만 적어 둔다.
십오 년이었다. 하로트링겐계가 제관을 쥔 것이 삼대에 걸쳐 십오 년이요, 그 삼대의 이름이 모두 안셀름이었다.
헬러공 군트람은 형이 죽은 뒤 한때 다음 황제로 점쳐졌다. 주후 1374년 십일월, 그가 미쳤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저 니더바이에른백 필리베르트가 미쳤던 지 백서른두 해 만이었다.
이 집안은 미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미친 사람에게서 제관의 희망이 끊겼다.
그 뒤로 하로트링겐과 헬러는 슈바벤 왕가와 거듭 혼인하였다.
주후 1397년, 헬러공 구젤린 에티코넨이 슈바벤왕 헤리베르트1세의 장녀 리치와라를 아내로 맞았다.
리치와라는 이미 두 번 남편을 여읜 몸이었고, 앞의 두 남편이 모두 스물하나에 죽었다.
주후 1418년 삼월, 슈바벤왕 헤리베르트2세의 누이 게르트루트가 하로트링겐공 피터 에티코넨과 약혼하였다.
그해 팔월에 혼인이 이루어졌으니, 모계혼(母系婚)이었다. 곧 태어날 자식은 공작의 집안이 아니라 왕의 집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를 통해 나갔던 것이 여자를 통해 돌아왔다. 백칠십여 년 만이었다.
논찬 — 하로트링겐계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성경에 이르되 나오미가 두 아들을 잃고 모압의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그 룻이 보아스에게 시집가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으니, 다윗의 조상 가운데 이방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주님의 족보를 적을 때에도 사내들 사이에 네 여인의 이름을 끼워 넣었다. 하느님께서 계보를 이으실 때에 반드시 사내의 힘을 빌리지 않으심을 보이신 것이다.
하로트링겐의 에티코넨이 이와 같다. 헬러는 어미가 가져왔고 하로트링겐은 아내가 가져왔으며, 끝내 그 집안이 종가로 돌아간 것도 누이의 혼인을 통해서였다. 사내들은 다만 그 사이에 서서 이름을 물려주었을 뿐이니, 세 대를 이어 안셀름이라 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물려줄 것이 이름밖에 없는 자는 이름이라도 물려주는 법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가벼이 볼 수 없는 까닭이 있다. 안셀름2세는 슈바벤왕의 포로가 되었다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난 자다. 왕이 그를 죽였다면 이 집안은 그날로 끝났을 것이요, 제국의 왕조도 다른 곳에서 났을 것이다. 놓아준 자가 삼십오 년 뒤에 주군이 되었으니,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르되 사람이 제 손으로 심는 것과 그것이 자라 맺는 것은 같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하였다. 아달베르트1세가 몸값을 셈할 적에 그 셈판 위에 제국이 놓여 있는 줄은 몰랐다.
또 하나 볼 것이 있다. 이 집안은 미친 사람에게서 시작하였고, 제관을 잃은 것 또한 미친 사람 때문이었다. 군트람이 미치지 않았더라면 제위는 프로방스로 가지 않았을지 모르고, 그리하였다면 뒷날의 모든 일이 달라졌을 것이다. 필리베르트의 광증과 군트람의 광증 사이에 백삼십이 년이 있으나, 두 광증이 이 집안의 처음과 끝을 지었다.
세상 사람이 흥망을 논할 적에 군사와 재물과 계략을 말하나, 이 집안의 흥망은 한 여인의 오라비가 아들 없이 죽은 데서 시작하여 한 사내의 정신이 흐려진 데서 끝났다.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적다.
중권 — 프로방스계 一. 어머니의 공작령
프로방스도 본래 보존 가문의 것이었다.
보존 가문은 한때 하로트링겐과 프로방스를 아울러 쥔 이중공작이었으나, 두 공작위가 갈라져 하로트링겐은 루트비히에게 가고 프로방스는 '늙은' 알브레히트에게 갔다.
루트비히의 것은 잘리어에게 빼앗겼고, 알브레히트의 것은 그 장손 야코브가 열한 살에 물려받았다.
주후 1241년 유월, 슈바벤공 아달베르트2세가 아내 게르힐드 보존의 프로방스 소유권을 명분으로 알브레히트에게 선전포고하였다. 게르힐드는 저 루트비히의 누이였다.
아프트에서 이기고 비엔나에서 남은 군사를 쓸어버려, 주후 1243년 유월에 게르힐드가 프로방스공에 올랐다. 사람들이 그를 '찬탈자'라 불렀다.
주후 1246년 유월, 아들 안드레아스3세가 어머니에게서 프로방스를 물려받아 슈바벤-프로방스 이중공작이 되었다.
그 뒤로 프로방스는 종가의 것이었다.
프로방스 백작 클로테어 드 페롤이 공작위를 노리다 주후 1267년 십일월 멘톤에서 군사 천팔백여가 하나도 남지 않고 스러졌고, 그 몸이 붙잡혀 백작령을 잃었다.
브네생의 드'오랑게 가문은 두 대에 걸쳐 프로방스의 소유권을 꾸며내려다, 하나는 옥에 갇히고 하나는 반란 끝에 백작령을 잃었다.
주후 1254년 정월에 이르러 안드레아스3세가 프로방스 백작령까지 온전히 손에 넣었다.
곧, 프로방스는 어머니가 칼로 얻어 아들에게 물려준 땅이요, 아들이 삼십 년 동안 반란을 다스려 지킨 땅이다.
二. 나뉨
주후 1298년 이월, 슈바벤공 아달베르트3세가 죽었다. 그때의 상속법은 아비의 작위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장남 페르디난트가 슈바벤을 받아 슈바벤공 페르디난트1세가 되었다. 차남 만프레트가 프로방스 공작령과 프로방스·포흐꺌끼에·브네생의 백작령을 받아 프로방스공 만프레트1세가 되었다. 삼남 스테판이 슈타이어마르크를 받았다.
한 아비가 죽자 오십오 년 동안 하나였던 이중공작이 다시 둘로 쪼개진 것이다. 게르힐드 보존이 칼로 얻은 것을 그 증손이 문서 한 장으로 잃었다.
만프레트1세는 안달루시아의 무르시아 에미라 디마 메이무니드를 아내로 맞았다.
디마는 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무르시아는 그 딸 엘리자베스에게 갔다. 만프레트는 다시 아지지드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 네 딸을 두었다.
주후 1303년 유월, 아들 레오폴트가 났다. 사료가 이 대목에 이르기를, 프로방스계의 존속이 이로써 정하여졌다 하였다.
주후 1308년, 무르시아백 엘리자베스가 이슬람의 군주에게 시집갔다. 에티코넨의 무르시아 갈래는 이로써 끊겼다. 남쪽으로 뻗었던 가지 하나가 한 번의 혼인으로 사라졌다.
주후 1313년, 만프레트1세가 폐렴으로 죽었다. 레오폴트가 열 살에 프로방스공이 되었다.
슈바벤공 페르디난트1세가 이 어린 조카의 땅을 노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황제의 권위가 높아 봉신끼리의 전쟁이 금하여져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三. 육 년
주후 1323년 삼월, 아달베르트4세가 바이에른을 빼앗아 슈바벤 왕국을 세웠다. 같은 해 시월 이십오일, 그는 프로방스공 레오폴트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프로방스공 레오폴트는 성직에 몸담았던 자로, 성미가 급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여색을 멀리하였고 겁이 많았다. 사료의 어느 줄에도 그가 군사에 밝았다는 말이 없다. 스무 살의 겁 많은 성직자가 왕관을 갓 쓴 왕과 마주 선 것이다.
그런데 육 년이 걸렸다.
프로방스에 재상이 있었으니 이름을 란돌프 드 아를이라 하였다.
선전포고를 받던 날 레오폴트가 말하였다.
"적의 세력이 막강하니, 홀로 막기 어렵다."
란돌프가 답하였다.
"상부르군트공 발터와 하로트링겐공 안셀름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어찌 우리를 돕겠는가."
"신이 가서 설득해 보겠나이다."
란돌프가 먼저 상부르군트로 갔다. 발터는 프로방스공의 둘째 누이를 아내로 둔 사람이었다. 그가 슈바벤왕의 세력이 강대함을 들어 머뭇거리자, 란돌프가 무릎을 세우고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상부르군트의 기병 만이면 슈바벤의 보병 삼만을 깨뜨릴 것이요 성채 하나면 슈바벤의 온 군대를 막을 것이라 하였다. 이어 조상들이 로마의 발길과 사라센의 칼날을 꺾은 땅에서 난 자가 한 번의 위협에 굽히겠느냐 물었고, 끝으로 성사 앞에서 맺은 혼인의 맹세를 들었다. 발터가 칼자루를 잡고 일어섰다.
"옳은 말이다. 상부르군트의 창날이 무뎌졌다 여기는 자들을 깨우쳐 주겠다."
란돌프가 다시 하로트링겐으로 갔다. 안셀름은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온 것인가."
"공께서는 현자라 불리시니 한 가지만 여쭙겠나이다. 아달베르트와 레오폴트 가운데 누가 옳은 명분을 가졌나이까."
안셀름이 책을 덮었다.
"레오폴트는 선대에게서 받은 땅을 지키려 하고, 아달베르트는 남의 땅을 빼앗으려 한다. 명분은 자명하다."
"그러면 공께서는 어찌하시겠나이까."
"현실을 헤아려야 하니."
란돌프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하로트링겐의 정예 오천이면 슈바벤의 잡병 이만을 칠 것이요, 공의 지략이면 아달베르트의 계책을 다 꿰뚫을 것입니다. 공께서는 에티코넨의 피가 아니십니까. 한 조상에서 난 형제들이 서로 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온 제국의 에티코넨이 공의 거취를 보고 있나이다."
"계속 말하여 보라."
"지혜로운 자는 옳은 편에 서야 하고, 뜻이 큰 자는 의로운 명분을 골라야 합니다. 아달베르트를 도우면 침략자의 편이요 레오폴트를 도우면 정의의 편이니, 공의 이름이 어느 쪽에 달렸겠나이까."
안셀름이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
"네 말이 옳다. 하로트링겐의 창은 정의를 위하여 들리는 것이다."
십일월에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가 왔고, 이십일일에 상부르군트공 발터 폰 뉴엔부르크가 왔다. 발터는 물러설 곳을 헤아려 진을 치는 데 밝았고, 홀몸으로 지내며 술을 삼가고 사람을 후하게 대하였다. 그가 레오폴트의 매부였다.
주후 1326년 오월, 브리에이에서 슈바벤왕이 이겼다. 하로트링겐공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시월 십일, 엠브룬에서 발터가 산의 형세를 이용하였다. 슈바벤왕의 만이천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삼분의 일에 미치지 못하였다. 지휘관 둘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롬바르디아 용병단의 두목 빅토르도 죽었다. 삼 년의 싸움이 하루에 지워졌다.
같은 해 십이월 일일, 알본에서 슈바벤왕이 사천으로 상부르군트의 육천오백을 맞아 오천을 베었다. 발터의 전법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이 싸움에서 우익을 맡은 자가 브뤼게백 군터 에티코넨이니, 그 군재가 프로방스공의 대장군과 더불어 당대의 쌍벽이라 일컬어졌다. 군터가 뒷날 어찌하여 백작령을 잃고 어디로 갔는지는 그 열전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주후 1329년 십이월, 니온스에서 이겨 엠브룬 이전의 형세를 겨우 되찾았다. 그달 이십팔일, 슈바벤왕이 봉신들의 원망과 성을 칠 군사가 남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붓을 들었다.
무승부였다.
육 년을 싸워 얻은 것이 없고 잃은 것이 사람뿐이었다. 왕관을 쓴 종가가 겁 많은 방계 하나를 꺾지 못하였다. 뒷날 레오폴트를 일러 '폭군'이라 하였으나, 그가 폭군이라 불릴 만한 일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가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 뒤로도 레오폴트는 종가의 반대편에 섰다.
주후 1340년, 상부르군트공 발터가 슈바벤왕에게 몰리자 레오폴트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땅은 이미 전란으로 피폐하다. 더 싸울 힘이 있겠는가."
란돌프가 말하였다.
"발터공을 기억하소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창을 들었나이다. 이제 우리가 그를 버리면 무엇으로 친족이라 하겠나이까. 명분 없는 자는 홀로 서야 하고, 신의 없는 자는 모두에게 버림받나이다."
레오폴트가 한숨을 쉬었다.
"네 말이 옳다. 군대를 준비하라."
그해 유월, 프로방스군이 상부르군트를 도우러 북으로 올라갔다. 주후 1354년에는 플란더렌공을 도와 브뤼게를 두고 슈바벤왕 카를만1세와 맞섰다. 종가가 칼을 뽑을 때마다 그는 칼끝의 반대쪽에 있었다.
란돌프 드 아를이 세 사람을 움직인 방법을 보면 저마다 달랐다. 발터에게는 명예와 서약을 말하고, 안셀름에게는 지혜와 명분을 말하고, 제 주군에게는 신의와 셈속을 말하였다. 세 치 혀로 육 년의 전란을 견디고 삼십 년의 동맹을 맺었으니, 그 행적은 그 열전에 갖추어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프로방스에 닿은 것만 적는다.
四. 네 황제
황제 안셀름2세가 병들어 눕자, 프로방스의 재상이 궁으로 들었다. 란돌프 드 아를의 손자로, 이름 또한 란돌프였다.
"폐하께서는 후사를 정하셨나이까."
안셀름2세가 가늘게 말하였다.
"슈바벤의 피에서 고르든지 내 직계에서 골라야겠다."
란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땅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시나이까. 제후들이 어린 군주 아래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폐하께서도 아시나이다. 슈바벤의 피는 어떠하였나이까. 아달베르트1세는 친족의 땅을 쳤고, 카를만1세는 플란더렌공에게서 브뤼게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세우라는 말인가."
"프로방스의 만프레트를 보소서. 그 아비 레오폴트는 침공을 받고도 제 땅을 지켰을 뿐, 남의 땅을 넘보지 않았나이다. 프로방스는 침략당하였으되 굽히지 않았고, 도움을 청하였으되 배신하지 않았으며, 은혜를 입었으되 갚지 않은 일이 없나이다. 이런 자가 제국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나이까."
안셀름2세가 오래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말하였다.
"네 말을 깊이 새기겠다."
며칠 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주후 1376년 구월, 프로방스공 만프레트2세가 제위에 올라 황제 만프레트1세라 하였다.
프로방스가 갈라져 나간 지 일흔여덟 해 만이요, 슈바벤왕이 그 땅을 치다 물러선 지 마흔일곱 해 만이다.
그리고 조부가 하로트링겐의 서고에서 안셀름을 일으켜 세운 지 쉰세 해 만에, 그 손자가 같은 이름의 사내를 병상에서 설득하였다.
두 계열 사이에 제관이 건너간 다리는 이 조손(祖孫)의 혀였다.
황제 만프레트1세의 치세는 오 년이었다. 폴란드를 쳐서 상트갈렌의 소유권을 다투었고, 수사공에게서 작위를 거두려 하였다. 주후 1381년 오월, 병으로 승하하였다.
이때 제위 서열의 첫머리에 그의 장남 만프레트가 있었다. 그러나 제위는 삼남 고트샬크에게 갔다. 어찌하여 그리되었는지 사료는 적지 않았다.
뒷날 주후 1391년, 그 장남 만프레트가 베네벤토 백작으로 있으면서 제국의 제위를 장자에게 물려야 한다는 파벌을 세웠다. 십 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 고트샬크1세의 치세는 이 년이었다. 상트갈렌을 빼앗았고, 룩셈부르크 백작의 종주권을 슈바벤왕 헤리베르트1세에게 넘겼으며, 수사공에게서 공작위를 거두어 백작으로 내렸다. 주후 1383년 오월에 승하하였다.
제위는 다시 옆으로 갔다. 전 프로방스공 레오폴트1세의 늦둥이 차남 레오폴트에게 갔으니, 죽은 황제의 숙부뻘이었다.
황제 레오폴트1세의 치세는 서른세 해였다. 에티코넨이 쓴 제관 가운데 가장 길었다. 그 서른세 해의 일도 앞서 밝힌 까닭으로 다 적지 않는다.
슈바벤에 닿은 것만 들면, 슈바벤왕 하르트만1세를 두 번 대장군으로 삼았고 뒤에 그와 싸웠으며, 주후 1416년 칠월에 승하하였다.
장남 아르놀트2세가 열여덟에 제위에 올랐다. 신학에 밝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욕심이 많고 뜻이 컸다.
곧 만프레트1세, 고트샬크1세, 레오폴트1세, 아르놀트2세 넷이 오십이 년 동안 제관을 썼다. 하로트링겐계의 셋이 십오 년을 쓴 것과 견주면 세 곱이 넘는다.
五. 두 번의 피
프로방스계와 종가 사이에 두 번 피가 흘렀다.
처음은 주후 1383년이다.
황제가 되기 전의 레오폴트는 비잔티움의 바실리사 크리소고네 두카스의 남편이었다. 둘 사이에 아들 만프레트와 딸 헬레네가 있었다.
그해 칠월, 슈바벤왕 헤리베르트1세가 만프레트를 죽일 계획을 꾸몄다.
만프레트가 없어지면 비잔티움의 계승권이 헬레네에게 가고, 헬레네는 그의 아들 카를만의 약혼녀였다.
팔월에 일이 어그러져 배후가 드러났다. 구월에 계획을 거두었다가, 같은 달에 다시 손을 썼다.
십일월, 만프레트가 죽었다. 배후는 또 드러났다.
이 일로 헤리베르트1세는 겨레붙이를 죽인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오월, 죽은 만프레트의 친척 레오폴트가 황제가 되었다.
사료는 두 사람이 이 일을 두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적지 않았다.
다만 주후 1388년 정월, 헤리베르트1세가 황제 레오폴트1세의 연회에 참석하였다고 적었을 뿐이다.
두 번째는 주후 1417년이다.
슈바벤왕 하르트만1세는 헬레네의 남편이었으니, 곧 죽은 만프레트의 매부요 황제 레오폴트1세의 사위였다.
그런데 주후 1414년 정월, 황제가 하르트만의 둘째 딸 엠마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제 딸 헬레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아비가 딸을 친 것이다. 그달에 하르트만은 아내에게 칠백칠십사 두캇을 선물로 보냈다. 그가 한 해에 걷는 돈으로도 다 채우기 어려운 액수였다.
이듬해 팔월, 하르트만1세가 제국에서 벗어나겠다며 황제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제국의 땅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법 때문에, 비잔티움을 물려받을 장남에게 슈바벤을 물려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임스트에서 이기고 주마르쇼센에서 이기고 라반트에서 간신히 이기고 취리히에서 이겼다.
주후 1417년 십일월, 승점이 가득 찼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 없었다.
십이월, 하르트만1세가 황제 아르놀트2세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독립은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반란 중에는 법이 미치지 않는다 하여, 장남 헤리베르트가 스무 살에 슈바벤 왕국을 물려받았다.
네 해 뒤인 주후 1421년 팔월, 그 헤리베르트2세가 황제 아르놀트2세에게 황권을 낮추라 요구하였다. 황제가 거절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같은 달에 황제가 스스로 항복을 선언하고 제한된 황권을 받아들였다.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아비를 죽인 자가 아들 앞에서 칼을 뽑지 않고 물러선 것이다.
논찬 — 프로방스계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사사기에 이르되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형제 일흔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세겜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였고, 그는 데베스의 망대 아래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가 깨어져 죽었다. 성경이 이르되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이 그 형제에게 행한 악을 갚으셨다 하였다.
루카누스가 노래하기를, 로마의 창끝이 로마의 가슴을 겨누었을 때 이긴 자에게도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하였다. 겨레붙이끼리의 싸움에는 이겨도 얻을 것이 없으니, 죽인 자와 죽은 자가 같은 이름을 쓰기 때문이다.
프로방스와 슈바벤이 이와 같다. 아달베르트1세가 육 년을 싸워 얻은 것이 없고, 헤리베르트1세가 사람을 죽여 얻은 것이 겨레붙이를 죽인 자라는 이름이며, 아르놀트2세가 하르트만1세를 죽이고도 그 아들 앞에서 싸우지 않고 물러섰다. 셋 다 이겼다 할 수 없고 셋 다 졌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 더 깊은 것이 있다.
헤리베르트1세가 만프레트를 죽인 것은 며느리 될 자에게 로마의 상속권을 안기기 위함이었다. 그 뜻대로 되었다. 다만 그가 짝지어 주려던 아들 카를만은 이태 뒤에 병으로 죽었고, 헬레네는 그 아우 하르트만에게 시집갔다. 헬레네가 로마를 물려받았고, 그 아들이 슈바벤을 물려받았으며, 그 손자가 지금 로마의 관을 받으러 간다.
곧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이 일은 사십오 년 전 어느 밤에 사람 하나를 없앤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없앤 사람은 프로방스공의 손자요, 곧 이 집안 자신의 피붙이였다.
프로방스계는 제 몸을 잘라 종가에게 로마를 먹였다. 그것이 스스로 원한 바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비멜렉의 맷돌은 그가 쌓은 망대 위에서 떨어졌으니, 사람이 제 손으로 쌓은 것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데에는 대개 한 세대가 걸린다.
끝으로 하나를 더 적는다.
내가 일찍이 란돌프 조손의 전(傳)을 적으면서 그 혀를 크게 기렸다. 지금도 그 말이 그르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이 편을 적으며 헤아려 보니, 손자 란돌프가 병상 앞에서 프로방스는 침략하지 않았고 배신하지 않았노라 아뢴 지 서른여덟 해 만에, 그가 세운 그 집안의 황제가 제 딸에게 선전포고하고 제 사위와 싸웠으며, 그 아들이 그 사위를 전장에서 베었다.
말이 그르지 않았어도 뒤가 그러할 수 있다. 유세하는 자는 그날의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 그 말이 세운 집안이 뒷날 무엇을 할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전을 고치지 않되, 여기에 이 한 줄을 덧붙여 둔다.
하권 — 제위 육십칠 년 一. 정리
에티코넨이 제관을 쓴 것을 차례로 적으면 이러하다.
대 황제 계열 재위 비고
| 1 | 안셀름1세 | 하로트링겐 | 1361–1369 | 하로트링겐공 안셀름2세. 장남 참살 |
| 2 | 안셀름2세 | 하로트링겐 | 1369–1376 | 선제의 조카. 요절 |
| 3 | 만프레트1세 | 프로방스 | 1376–1381 | 프로방스공 만프레트2세 |
| 4 | 고트샬크1세 | 프로방스 | 1381–1383 | 선제의 삼남 |
| 5 | 레오폴트1세 | 프로방스 | 1383–1416 | 선제의 종조부뻘. 삼십삼 년 |
| 6 | 아르놀트2세 | 프로방스 | 1416– | 선제의 장남 |
여섯 황제 가운데 아비에게서 아들로 곧게 이어진 것은 오직 레오폴트1세에서 아르놀트2세로 간 한 번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옆으로 갔다. 조카에게 가고, 아우에게 가고, 종조부에게 가고, 아주 다른 갈래로 갔다.
또한 이 여섯 가운데 종가의 사람은 하나도 없다. 슈바벤의 왕들은 여섯 번 신하로서 무릎을 꿇었고, 그 가운데 넷은 제 종형제나 재종형제 앞에서 꿇었다.
二. 두 계열의 견줌
하로트링겐계는 아무것도 스스로 얻지 않고 제관에 이르렀다. 미친 자의 아들로 시작하여 어머니의 백작령과 아내의 공작령을 밟고 올라섰다. 종가와 한 번 싸워 사로잡혔고, 놓여난 뒤로는 종가와 혼인하였다. 십오 년 만에 제관을 잃고 공작으로 돌아왔으며, 끝내 종가의 공주를 맞아들여 종가로 스며들었다.
프로방스계는 처음부터 종가의 땅을 떼어 받았고, 그 뒤로 한 번도 종가와 나란히 서지 않았다. 육 년을 싸워 종가의 침공을 막았고, 두 번 다른 제후를 도와 종가와 맞섰으며, 종가의 왕 하나를 전장에서 죽였다. 오십이 년 동안 제관을 쥐었고, 종가의 손에 그 피 하나를 잃었으며, 그 잃은 자리에서 종가에게 로마가 흘러갔다.
하나는 순하여 흡수되었고 하나는 굳세어 삼켜졌다. 결과는 같다.
三. 적지 않은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이 두 계열을 적으면서 붓을 멈춘 곳이 있다. 그 까닭이 하나가 아니므로 둘로 나누어 밝혀 둔다.
첫째, 적지 않은 것.
황제 안셀름1세의 팔 년과 안셀름2세의 칠 년과 레오폴트1세의 서른세 해가 이 책에서 거의 비어 있다. 육십칠 년 가운데 마흔여덟 해다.
그것이 기록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국의 행정록과 서기청의 등록부에는 해마다 달마다의 조서와 결의가 갖추어져 있고, 황실에 사람을 보내어 청하면 등본을 얻지 못할 바 아니다. 다만 내가 청하지 않았다.
이 책은 슈바벤의 책이다. 슈바벤의 후원으로 쓰이고 슈바벤의 서고에 놓인다. 제국의 일을 다 옮겨 적자면 종이가 모자랄 뿐 아니라, 이 책이 무엇을 위한 책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슈바벤에 닿은 것만 골라 적고 나머지는 놓아두었다.
뒷날 누가 제국의 편을 따로 세우려 하거든 그 문서는 있는 곳에 있다. 다만 내 일이 아니다.
둘째,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은 청하여도 얻지 못할 것들이다.
하나. 황제 안셀름1세의 장남 안셀름이 누구의 손에 참살당하였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죽은 해와 그 아내 소피에가 다시 시집간 해 사이에 세 해의 어긋남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가릴 길이 없다.
둘. 황제 만프레트1세의 제위가 장남을 건너뛰어 삼남에게 간 까닭을 알 수 없다. 그 장남이 십 년 뒤에 장자 상속의 파벌을 세운 것을 보면, 스스로 물러난 것은 아닐 터이다.
셋. 황제 레오폴트1세가 마귀에 홀려 칼라트라바 기사단에 몸을 던진 뒤로 다시는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하는데, 그 뒤를 이은 아르놀트2세는 그의 늦둥이 장남이라 한다. 두 말이 함께 설 수 없다. 기사단에 든 것이 아르놀트를 얻은 뒤의 일이었으리라 짐작하나, 확언하지 못한다.
넷. 만프레트2세가 제위에 오른 뒤 프로방스 공작령이 누구에게 갔는지 적힌 데가 없다.
앞의 것은 내가 적지 않기로 한 것이요 뒤의 것은 아무도 적지 못한 것이다. 이 둘을 한데 묶어 사료가 없다 하면, 게으른 말이 된다.
종합논찬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다니엘이 바빌론 왕 앞에서 이르되, 하느님께서 때와 철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신다 하였다. 그때 왕이 본 것은 금과 은과 놋과 쇠로 된 거대한 상(像)이었고, 그 발은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이어서 굳으면서도 부스러졌다.
에티코넨의 육십칠 년이 그 발과 같다. 여섯 황제가 잇달아 섰으되 곧게 이어진 것이 한 번뿐이었고, 아비의 것이 아들에게 가지 않고 옆으로 흘렀다. 쇠와 진흙이 한데 뭉쳐 서 있었으나 서로 붙지는 못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이르되, 지상의 도성은 로물루스가 아우를 죽이고 세운 것이요 카인이 아우를 죽이고 세운 것과 다르지 아니하니, 땅 위의 나라는 형제의 피 위에 주춧돌을 놓는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이 옛 로마에만 해당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우리 슈바벤에도 그러하다.
한 집안이 셋으로 나뉘어, 종가는 왕관을 쓰고 두 방계는 제관을 썼다. 종가가 방계를 육 년 동안 쳤고, 방계가 종가의 왕을 전장에서 베었으며, 종가가 방계의 아들을 어둠 속에서 없앴다. 그리고 그 없앤 자리로 로마의 제관이 흘러들어와, 오늘 열한 살 난 아이가 그것을 받으러 동쪽으로 간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헤아려 본다.
만일 아달베르트1세가 브리에이에서 안셀름의 목을 베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만일 란돌프가 하로트링겐의 서고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만일 군트람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만일 헤리베르트1세가 그 밤에 손을 거두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만일 아르놀트2세가 하르트만1세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다섯 가운데 어느 하나만 달랐어도 오늘의 일은 없다. 그리고 그 다섯 가운데 셋은 죄악이요 하나는 병이며 하나는 세 치 혀다. 곧 오늘의 영광은 세 번의 죄와 한 번의 병과 한 번의 말솜씨 위에 서 있다.
성경에 이르되, 요셉이 그 형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으나, 여기에 그대로 옮겨 적기가 두렵다. 요셉은 해를 입은 자였고 우리는 해를 입힌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해를 입은 자가 하는 말과 해를 입힌 자가 하는 말은 같은 소리를 내더라도 같은 뜻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렇게 적는다.
두 방계가 제관을 쓴 육십칠 년 동안, 종가는 한 번도 제관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제 종가의 아이가 더 오래된 제관을 받는다. 콘스탄티누스가 쓰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쓴 그 관이다.
그것이 이 집안의 공로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 집안이 서로에게 저지른 일들의 값으로 치러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아이가 아직 어려 그 값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는 것만은 안다. 그것이 이 기록을 적는 까닭이다.
첫댓글 Namesake(동명이인), 즉 조상의 이름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관습은 피휘 문화가 있는 동양에서 이색적으로 느껴지죠. 자기들끼리도 구분이 안가니 세대 번호를 매기거나, 별명을 부르거나, 작위로 부르거나...
크킹을 하다보면 느끼는 게 결국 하나로 수렴해요. 카인이 아벨을 친 최초의 살인 이후, '우리는 모두 살인자의 자손이다.'
???: 필리베르트? 그 눈을 바친 자 말인가?
???: 아니, 필리베르트라고 하면 이양반아, 당연히 프리슬란트 백작이겠지
???: 내가 말한건 슈바벤공 필리베르트인데?(..)
살인자의 자손이라도 연좌제가 아니니까 살인을 안하면 됩니다 크킹인은 그걸 몰라요(?)
@통장 구 버전에서 카톨릭의 경우는 사도좌에 읍소하면 아주 낮은 확률로 친족살해자를 떼주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ㅋㅋ
아 오랫만에 크킹2땡기네요
막상 하려고 하면 크킹3이 아른거리는데, 그러다가도 간혹 생각 날 때가 있는 갓겜이죠 ㅋㅋ
@통장 인생게임(진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