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김난주 譯/현대문학 2022년판/271page
상상, 즐겁고 행복한 생각
1
잔잔한 호수에 얇은 파문이 천천히 넓게 퍼져가고, 해안가에 도착하는 마지막 작은 파도가 거대한 암석을 조금씩 부드럽게 깎아내리듯 감정이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전이된다.
늙고 외로운 독신 수학자인 박사와 그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파견된 내가 좌충우돌 살아가지만 나의 아들인 루트가 끼어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사랑의 기쁨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경이로움을 나와 아들 루트가 깨달아가는 즐거운 과정 등에서 오는 감동이 파문처럼 서서히 전이된다.
2 : 수학자인 박사
작품 속 수학자인 박사는 젊은 날 영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지만, 자동차 사고로 뇌를 다치며 과거는 1975년에 멈춰져 있고 기억력은 카세트테이프처럼 80분만 유지되고 있는 불우한 사람,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수학에 관해서는 여전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활동하는 조직생활은 불가능하지만(기억력의 한계로) 외국에서 발행하는 수학 잡지의 현상금 걸린 문제를 연달아 풀어낼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 힘든 기인(奇人)으로 수학이라는 영역에서 마치 도(道)를 이룬 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감이 아니라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해 덜거나 더할 여지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본문중)
-박사는 쌍둥이 소수를 동그라미로 에워싸면서 말했다. 박사의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가 모른다, 알 수 없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모른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향한 길잡이였다. (본문중)
다음은 박사가 주인공인 나와 아들 루트를 상대로 수학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간간히 들려준 어록이다. 수학에 대한 박사의 철학적 면모를 보여준다.
-숫자는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아니 이 세상이 출현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
-아주 멋없는 계산 문제가 한 편의 시처럼 들리더구나.
-어떤 식에든, 어떤 숫자에든 의미가 있으니까 함부로 나누면 가엾지 않겠니?
-정말 옳은 증명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지. (본문중)
하지만 박사는 8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없다. 주인공 나와 아들 루트는 힘을 합해 그런 박사의 심중을 건드리지 않고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무엇보다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종류든 혼란은 박사를 슬프게 했다. 우리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박사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으니,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문중)
3 : 나, 가사도우미
작중 주인공인 나는 고졸 중퇴로 일찍 임신하게 되면서 출산과 동시에 사회생활을 가사도우미로 시작하게 된다. 역시 홀어머니 밑에서 나고 자라며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던 터라 가사 일만큼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가사도우미로 파견된 늙은 수학자인 박사의 집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배우게 되는 수학과 관련해서 느끼는 감정의 소회들을 따라가 보자.
-그때 난생처음 경험하는, 아주 신기한 순간이 찾아왔다. ...(중략). 사막에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눈앞에 똑바른 길 하나가 나타났다. 길 앞에서 반짝이는 빛이 나를 인도했다. 그 속에 발을 내디디고 한껏 몸을 적시고 싶은 빛이었다. 깨달음이란 이름의 축복이 내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문중)
n(n-1)
2
내가 보아도 아주 멋졌다.
미로에 빠져 헤매던 상황의 혼란스러움에 비하면 이 도착점의 단정함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본문중)
-그러나 실제로 수학에 넌더리가 나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같은 소수 이야기인데 조금만 구성이 달라져도 자신의 착각을 깨닫게 되거나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다. 날씨나 말투만 달라져도, 소수를 비추는 빛의 색이 달라보였다.
나는 소수의 매력은, 그것이 어떤 질서 속에서 출현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1과 자기 자신밖에는 약수가 없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각각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찾아내기 힘든 것은 분명한데, 어떤 규칙에 따라 그들의 출현을 예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무질서가 완벽한 미인을 추구하는 박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었다. (본문)
4 : 작가
작가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다. 공상이나 상상을 즐겨하면서 그걸 기반으로 소설을 쓰고 소득을 올리며 다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일련의 사이클 안에서 살아가는 직업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에는 작중의 주인공인 내가 하나뿐인 아들 루터와 박사가 서로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고, 셋이서 날마다 저녁을 오붓하게 같이 먹고, 때로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보는 등의 장면에서 기쁨과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기쁨이며 인생의 행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쁨과 행복은 작가가 상상하고 공상한 환경에서 누리는 시간인 것이다. 즉, 평소 자기가 동경하는 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공상하는 시간이 많으며 그 시간들을 즐기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이다. 작가든, 작품 속 주인공이든, 작품을 읽으며 그 분위기에 젖어 역시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독자든 모두는 아무튼 즐겁고 행복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도 루트는 박사의 등에 업혔다. 밤이 늦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눈에 안 띄겠다 싶어 안심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박사의 마음을 배려한 것인지 루트는 모자의 챙을 뒤로 올리고 순순히 업혔다. 가로등이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비추고, 높은 하늘에는 살짝 깎여 나간 달이 떠 있었다. 밤바람은 상쾌하고, 배는 잔뜩 부르고, 루트의 왼손은 무사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박사와 나의 발소리가 겹쳐지고, 루트의 운동화는 덜렁덜렁 흔들렸다. (본문중)
-우리 세 사람에게 저녁은 아주 귀중한 시간대였다. 아침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로 만나서, 다소나마 박사의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루트가 학교에서 돌아와 천진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가, 내가 기억하는 박사의 옆얼굴에는 늘 저녁 해가 비치고 있는 것 같다. (본문중)
5 : 빛나는 대화와 문장
-세계의 성립 과정을 수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숫자를 집어넣으면 어떤 마법에 걸리는지..
-끈질기게 생각하는 나와 아들
-박사는 ...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다 못해 엉뚱한 실수를 저지를 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
-아주 조심성이 많은 숫자라서 말이야. 눈에 띄는 곳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분명히 있어. 그리고 그 조그만 두 손으로 이 세계를 떠받들고 있지.
-마치 내가 제시한 증명이 하나의 진리를 향해....., 그리고 그 진리가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라도 한 듯 포스터에 넋을 빼앗겼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언어와 빛나는 눈동자
6
작가 ‘오가와 요코’가 쓴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수학과 수학에 나오는 숫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리의 한 도정, 수학의 수식과 숫자의 발견과 그 사용에 있어서 경이로움 등을 전문수학자 ‘박사’와 학력이 짧은 나와 아들 루트가 어우러지며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또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점차 그 소중함을 잃어가고 퇴색되어지는 인간과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움이다.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며 하루하루를 이겨나가는 세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어떤 면에서 눈물겹다.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사례를 소설로 창조한 것인데, 인간의 내면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리고 또 있다.
프로야구.
서로 어려운 상황의 세 사람을 한데 묶어주는 유일한 화제, 프로야구 팀의 경기 소식과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다. 일본에서 프로야구 역사는 얼마 되지 않지만 벌써 몇 세대를 거치며 서로 화합하기 힘들 것 같은 세대사이에서 소통의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7
-아주 멋없는 계산 문제가 한 편의 시처럼 들리더구나
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 동의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