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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休의 세월 ■
<번역 및 편저: 시인,수필가 정용하>
*休의 세월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 164명이 지은 서적인 “전모록(鐫慕錄:번역:441 페이지 분량)”에 의거하면, 4형제분은 같은 집에 거주하면서 하나의 몸이 되어 함께 활동하였기에 곡구 정 봉휴 선조의 집안 분위기와 대외적 활동에 중점을 두어 그 실상을 요약해 보았음.
고서를 번역한다는 것은 독립된 자유이며, 고독한 용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평생을 몸 바쳤던 직장을 조기 퇴직하고 사전을 스승으로 삼아 컴퓨터 앞에 앉기를 하루 17~18시간, 그것을 15년가량 지속하다 보니 우측 소매 팔꿈치에 구멍 뚫린 옷이 여러 벌이다. 세월을 초월하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정신문화’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른바 “대박 타령”을 운운하고 있지만 내 안에 휴식하고 있는 거친 본능은 “재수 없는 날 보다 더 재수 없는 날은 이유 없이 덕을 보는 날이다.”고 말할 때 우리들은 그나마 작은 그릇을 깨어버릴 수 있는 설거지하는 오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서(鐫慕錄)를 번역한 것은 “꿈과의 약속”이었다. 지난 2015년 4월 2일 밤에 꾸었던 꿈이 그것을 예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약관인 나이가 되어 초록색 한지로 만든 큰 나무 모형의 만장(輓章)을 한옥 천장 위의 다락에 올려놓고, 기역 자로 꺾어진 고택의 내부를 막 돌아설 즈음 두 개의 방문이 활짝 개방된 단출하고 깨끗한 방 한가운데 야윈 풍채에 금빛 한복 상의를 입은 처음 보는 50대 후반의 어른 한 분께서 햇살 비친 동쪽 창문을 등진 채 도인처럼 꼿꼿하게 정좌하고 있었다. 5~6초간 마주친 시선(視線)에 압도당한 필자가 그로부터 3일 뒤에 만난 것이 바로 ‘전모록’이라는 제하의 고서인바 이를 번역한 필자가 그 부제(副題)를 “休의 세월”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이다.
보기 드물게 지극히 희귀했던 休의 세월에는 장남이며 한 집안의 종손을 중심으로 하여 네 분의 형제께서 각각의 식솔들을 거느린 채 입구 자(口) 모형의 큰 가옥에 함께 살았던 것이다. 시와 예법을 사랑한 봉황 가문의 후손으로서 효와 우애를 상투처럼 받들어온 선조(곡구 정봉휴의 백씨이신 석윤 정인휴, 1776~1850 선조를 지칭)의 생애는 막연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삶이 아니라 한마디로 설계도에 의한 맞춤형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입보다 입안이 더 넓은 것처럼 겉보기에는 골짜기가 산으로 막혀있는 것 같으나 좁은 곳을 어렵게 통과하면 예상치 못한 넓은 공간이 새롭게 펼쳐지는 곳으로 도연명의 무릉도원과 일맥상통하며, 가을 경치가 유난히 아름답다는 중국 한나라 은거 선비인 정 자진(본명:정박)이 살았던 곡구(谷口)와도 닮은 곳이기도 하다. 개미굴 같은 깊은 협곡 속의 산중마을을 가리켜 선조의 증조부, 매산 선생(정중기:1685~1757, 영조 때 형조참의)께서는 “길쭉한 선박”을 닮았다고 하였으며, 선조의 손자인 만제 정 치건(1825~1875)께서는 “칼집처럼 생긴 산골짜기 청석마을”이라고 하였는데, 이 같은 산중마을에 사람(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이유는 잠시 접어두고, 우선 休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한자로서 休는 (1)쉬다 (2)사직하다 (3)멈추다 (4)따뜻하게 하다 (5)절망 (6)금지하다 (7)아름답다 (8)편안하다 (9)훌륭하다 (10)용서하다 (11)달래다 (12)이별하다 (13)너그럽다 (14)검소하다 (15)탄식하다 등 그 뜻이 다의적이나 자연과 풍류에 근거하여 그 근본을 대의에 바탕을 둔 ‘절의 정신’이라고 가정한다면, 선조의 집안은 ‘休의 가문’으로서 休 자로써 시를 짓고, 休 자로써 자호(字號)는 물론, 정자의 명칭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의 이름까지 休 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休의 발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앞서가는 사람을 역사가 뒤따르지 못했다는 고려 중기 문신학자(추밀원지주사) 동하 정 습명(1096~1151) 선생의 시, 「석죽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석죽화, 일명 패랭이꽃은 붉은 목단과 달리 서민의 꽃으로서 고대 중국의 문장가인 사마상여와 호흡을 함께하며 그 맥은 포은(정몽주)의 땅에서 태동한 산천의 혼이 우리네 삶의 소리와 모습 속에 스며들어 침묵하는 세월의 그늘로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처인 동시에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잊고 살아온 은장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백은 임란 의병장 호수 정세아(1535-1612, 사마시 진사, 병조판서 추증)로 하여금 도학과 창의로 이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부자유친이라 했던가. 의병장께서는 장남(長男:정의번, 성균관 생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좌토록 하였으나 32세 나이에 전사하여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장례를 치렀는데, 시총(詩 무덤)의 아픔을 후손들이 분담하고자 가문의 정신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더욱이 休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명예와 함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1600년 9월에 체찰사(군사 업무 파견관) 이원익 대감께서 경상도 순행 시, 경북 영천에 있는 자호정사를 방문하였는데, 호수 정세아께서 자신의 학구지소인 자호정사에서 오리 이원익 대감에게 지어 올린 휴시(休詩) 한 수를 인용해 본다.
萬山環抱一溪頭 (만산환포 일계두)/ 數架松簷夏似秋 (수가송첨 하사추)
觀物愛吟閑裡句 (관물애음 한리귀)/ 傷時難遣醉中愁 (상시난견 취중수)
生涯草草隨雲冷 (생애초초 수운냉)/ 鄙吝輕輕遂水流 (비린경경 수수류)
蔬食只能供我飽 (소식지능 공아포)/ 更無思慮任浮休 (갱무사려 임부휴)
수많은 산으로 에워싸인 한 줄기 시내 어귀에
촘촘한 시렁인 솔 처마는 여름에도 시름겨운데
사물을 살피면서 한가함 속에 시를 지어 즐겨 읊어도
세월의 상처는 취중에도 근심되어 재앙을 보내오는구나
자질구레한 생애는 구름과 더불어 쓸쓸하고
지극히 가벼운 속세의 인색함은 물 따라 흘러가는데
한갓 나물밥이 나의 뱃속을 채워 줄지라도
다시는 번민하지 않고 홀가분한 휴식에 맡기리.
2연에서 “솔 처마”란 토담 위를 덮은 지붕으로서 그 재료는 주로 기왓장 또는 이엉으로 덮었으나 때로는 소나무 잔가지를 엮어서 덮기도 하는데, 솔가지일 경우 처음에는 푸르나 몇 년이 지나면 빨갛게 건조(秋=시름)하는바 작가이신 호수 정세아께서 전쟁터에서 전사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한 장남(당시 32세, 성균관 생원인 정 의번)을 잃은 슬픈 심정을 한 여름철에 빨갛게 타들어 가는 솔 처마에 비유한 것이다.
특히 호수 정세아 선생의 손자 정 호신(1605~1649)은 일찍이 과거시험에 뜻을 접고 자신의 호를 삼휴당(三休堂)이라 칭하고 삼휴정(三休亭)이란 정자에서 한평생 학문을 하였는데, 여기서 삼휴(三休)란 (1)꽃이 다 떨어져도 쉬고 (2)술이 다 떨어져도 쉬며 (3)달이 기울어져도 쉰다며, 욕심을 정벌하지 않고 편안하게 학문을 즐기면서 이치를 추구하였는데, 혹자는 삼휴(三休)에서 사휴(四休)를 추가하여 칠휴(七休)라고 명명한 후 이를 즐기면서 자신을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도 하였다. 추가한 사휴(四休)는 (1)포휴(飽休:심리적인 풍족한 멋) (2)난휴(煖休:따뜻한 인정의 멋) (3)과휴(過休:속세를 초월하는 멋) (4)노휴(老休:노련한 멋)이다. 따라서 오휴(五休)란 삼휴에서 2가지를 추가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休의 세월은 옳은 것들이 함께 모여 흰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아재와 손자 그리고 아우와 아들이 더불어 맹세하여 숲(단체)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한마디로 말한다면 족친들 간에 화합을 강조하는 깃발 같은 외침인 동시에 어떤 대상에 대한 ‘무언의 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주인공이신 정 인휴 선조의 4형제 역시 호수 정세아의 후손으로서 사람(亻)과 나무(木)가 만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전설상의 네 가지 신령한 동물인 기린(麟: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와 말의 발과 뿔이 1개인 상상의 동물로서 성인을 위하여 나타나며, 성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동물), 봉황(鳳), 거북(龜), 용(龍)이 극진한 조화를 상징하는 休와 만나는 삶을 추구하였기에 이름을 각각 인휴, 봉휴, 귀휴, 용휴 라고 지었던 것이다. 네 분의 형제는 모두가 보통 노인들과 달리 보기 드문 기다란 흰 눈썹과 백설 같은 턱수염을 지니셨기에 학덕은 물론이거니와 외모에서부터 특출하였기에 같은 고장의 선비들은 이들 4형제분을 가리켜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우상처럼 받들었던 “상산사호(商山四皓:진시황 때 산시성 상산에 은거한 4명의 절의선생 즉,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각리선생인데 모두가 백발을 지녔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장남과 막내의 나이 차이는 18세요, 장남과 차남의 연차적인 순서에는 일곱이 존재하는데, 문중에서 핵심이 되는 집안으로서 학문과 예법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고수하여 향기를 불러일으켰으니 등뼈 같은 집안의 본분은 뽕나무와 느릅나무(최첨단 학문)가 무성하였고, 들깻잎(짙은 향기)이 춤을 추게 하였다. 또한 그것은 두 여인의 몫을 하는 며느리들에게는 완벽한 행복이 되었던 것이다. 4명의 형제와 식솔들은 입구(口) 자 모양의 큰 집에 함께 거주하였는데, 방실의 배치는 각자의 역할을 의미하였기에 장남이신 선조(이하 정인휴 선조를 지칭)께서는 전면과 후면 건물에 거주하셨고, 나머지 형제들은 좌우 측 건물에 거주함으로서 장남은 선두에서 모범을 보이면서 동시에 뒤에서 형제들을 보살피고, 아우들은 날개가 되어 좌우 측에서 장남을 보필함으로써 집안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개미굴처럼 우묵한 깊은 협곡 속의 산중마을에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곳에 가면 항상 시와 예법이 있었고, 학문과 베풂이 있었기에 불원천리 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네 분 형제들의 가족, 학문을 탐구하기 위하여 임시로 숙박을 의탁한 선비 및 노비들을 합하면 최소한 30~40명이 함께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선생의 저택에는 상시 50~60명의 외부 손님(선비)들이 머물렀으며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손님을 맞이하는 겸손과 호탕함 그리고 남다른 지도력이 그 바탕이 되었다. 한 번 찾아오는 선비들은 짧으면 15일, 보통은 1~2개월은 머물다가 간다고 했다. 저녁 늦도록 마을 입구에는 새봄을 맞이하여 지팡이와 짚신들이 서로 방문하였으니 바야흐로 길에는 옷감을 진열해 놓은 것 같았으며, 인산인해로 인하여 방문을 열고, 닫음이 잦은 관계로 인하여 돌쩌귀가 빠지고 방문으로 오르는 흙 계단이 무너져 수시로 손질하였다고 전해진다. 하루에도 십수 명의 손님들이 새로이 오거나 떠났다고 한다. 선생의 기본 입장은 한결같았다. 곡식이 귀하게 되면 이웃은 거칠어지고, 소중한 것을 은근히 나누면 창고 안의 재물 상자에는 순전히 베옷만 남게 되는데 이것은 추운 겨울날 부엌의 땔감을 절약시켜 준다고 했다. 그곳은 살찌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구멍벌이 나방을 물어다가 새끼처럼 키웠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검소하셨다.
선조께서는 황혼과 새벽에는 별도의 방에서 명상을 하였으며, 아침과 정오 사이에 잠시 집을 나가셨는데 문득, 일상을 초월하시어 “진리는 네게 말한다. 나를 보지 마라.” 그러고는 완전한 인격체를 의욕 하며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였다. 선조께서는 그 시간 동안에는 집 없는 사람이 되어 무소유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자 자기 나름의 기법(技法)을 개발하여 훈련에 임하신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나의 집이 곧 세상이니 마음의 중심을 두텁게 하여 서로 소통하면서 거주하고 있는 집안의 일을 오직 세상과 접하고 있는 사물과 교섭하듯이 하였는데, 이는 주역에서 일컫는 “대대(待對:자신 이외의 가족은 물론 모든 사람과 사물을 저항 세력으로 간주하고, 나와 장애물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을 삶의 본질로 여김, 예컨대 빛과 그늘처럼 상반된 독립체의 결합, 원수와의 동침, 태극 문형에서 청색과 홍색의 조화)”를 몸소 생활 습관으로 실천하신 것이었다. 우리들은 구휼문화하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경주 최 씨 문중을 생각하고, 무소유 정신이라 하면 법정 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현대 언론이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잠식시켜 놓았기 때문이며, 조선시대에는 대다수의 문중에서 보편적으로 위와 같이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선조께서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상시 걱정하시면서 그 해결책에 고심하셨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하여 자신을 지극히 낮추면서 식량을 중단하지 않고 한평생 베푸셨기에 지역에서의 명망 또한 높았다. 선생께서는 가을이면 상당한 분량의 곡식을 구입한 후에 이듬해 봄이 되면 가을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주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자신도 손해를 보지 않고, 주변 사람들 또한 부담 없이 곡식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을 구휼제도로 생각하시고 이를 실천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이를 가리켜 “보관의 묘미”라고 명명하셨다. 또한 고대 중국학자 장 횡거(본명:장 재)의 자치 규약에 근거하여 문중 단위로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공적 자금으로써 교육비를 부담하는 주민자치의 전략적인 교육방안인 장학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씨 성(李氏 姓)을 가진 어느 선비가 연회가 임박한 날에 손님이 되어 선조의 집안을 남몰래 엿보니 덕(德)을 갖춘 집안으로 옷깃을 깊게 여미면서 예법을 숭상하고 온화함과 관대함이 뚜렷하고도 분명하였으며 장부들의 기질은 풍요롭고 또한 고풍스러웠다. 세간의 사치를 끊어 없애버리고 도와주는 몸가짐은 석가장(중국 하북성의 석씨 집안)처럼 정성이 극진하면서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일행인 강 씨(姜氏)와 나란히 누우니 즐거움이 아침 햇살처럼 빛났고, 방 한 칸의 풍류는 돈독하고도 후덕하였으며, 출입구의 신발은 항상 굽 둘레가 모두 부들처럼 가지런했다. 여러 벌의 옷들은 큰 띠처럼 행렬을 이루며 걸려있었다. 숨김없이 드러낸 집안은 왕래하기가 편안했으며 어찌나 지극하고 지극한지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에 감탄했다. 존경심이 생겨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처럼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함은 길고 짧은 것을 무시한 채 매양 베풀고 보살피는 부담을 ‘구휼의 계책’으로서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후덕한 마음은 전자체(篆字體:서체의 일종)로써 아름답게 가슴속에 새기는 것을 권장하고, 씩씩하게 입으로 동작하면서 암송했다. 또한 벗들 간에도 품평(品評)을 한 후에 널리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우리네 유림에서는 큰 덕을 갖춘 집안으로 천거하는 것은 공공연한 일반적 관념인지라 가히 평미레(곡식을 수평으로 가르는 기구, 표준을 뜻함)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피부에 느껴지는 것이 내게 넘쳐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또한 나의 깨달음이 부족했기에 말로써 다 할 수 없었다. 때늦은 후회를 하며 스스로 울면서 장차 돌아와야 할 곳이기에 우러러 사모하니 절실함이 더했다. 더욱이 ‘은혜로운 정기’가 풍경이 되어 높이 솟아 우뚝하였기에 입에 저울추를 매달아 재갈을 물리고만 싶은 처지였다. 적당한 시기에 일행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도리에 순응하는 편안함이 감화를 받아서인지 철저하게 본성으로 되돌아온 상태에서 오래도록 가식이 벗겨져 있었다. 아! 공평함을 키(곡물 따위를 골라내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로써 다스렸고, 원만함은 창포를 닮은 품성이니 현자의 후손으로서 수많은 예법과 식량으로써 베풂을 계승하고 이어받았기에 여운이 남아도는 법전(모범이 되는 행동)은 추락함을 몰랐구나. 무성하게 배열된 후손들은 훌륭함이 특별하였으며 더군다나 일찍이 바른 세상으로 나아갔으니 마땅히 정통한 젊은이가 되었도다. 다만, 그것이 ‘곧은 병’으로 축적되어 세월 속에 잠긴 고질병이라면 어른께서는 자리를 유지하려고 항상 우려하였을 것이며 점차 기술로서 습득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조속히 그렇게 하도록 효율적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어른께서 이를 비호하고 감쌌으니 훌륭함이 이미 습관이 된 것을 어찌 알지 못하랴. 먼 훗날 자손들에게는 은혜가 될 것이다.
선조께서는 한번 자리에 앉으시면 장시간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도인(道人)과 같았고, 평상시 풍채와 태도는 우두머리로서 위대하였으며 또한 ‘소 씨(소동파) 집안의 목가산(木假山:막대기를 심어 나무 산이 됨)’ 형상과도 다르지 않았기에 방임된 숲(단체)과 산(사대부)을 다스림에도 하늘처럼 통달하셨다. 남산에 난초가 있다면 북산에는 영지가 있어 향기와 풍채가 서로 도와가며 답습하였으니 정자 위의 어른이 누구이며, 병풍 속의 신선이 누구인가. 염증을 느낀 세상에서도 옥 같은 신분은 가히 무쇠 그릇인지라 뜰 아래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비단으로 펼쳐진 부용성(芙蓉城:꽃이 만발한 연못 위의 누각) 한가운데를 향하여 걸어갔으니, 재미를 본 선생께서는 곳간에 거꾸로 넘어지거나 비스듬히 넘어지거나 그것은 곳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평소, 고대 중국 정(鄭)나라의 신무(神巫:뛰어난 무속인)인 계함이 지은 책으로서 마음을 안으로 수렴하여 부동(不動)의 경지를 견지하는 소위 안심법(安心法)인 “계함집(서적 이름)”을 즐겨 읽으셨다. 선조께서는 반드시 서당(오록서당 곧, 매곡마을 서당)의 주된 건물의 동쪽 창문 아래 정좌하셨고, 필체 또한 태양처럼 빛났으며, 미혹함이 전혀 없었다. 의뢰받은 고장의 장(군수)의 지위를 스스로 사양한 것에 대하여 조카들은 마음 아파하면서 그것은 명예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長)이라 일컬어질 뿐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선조께서는 태산북두로서 구름 위에 등극하셨으니 창포가 자라는 뜰에는 난초가 옥처럼 상서로웠고 화려함이 또랑또랑한 숲 동산은 풍요로움에 만족함으로써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하였으며 사양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정자 난간에 앉아 있으면 웬만큼 떨어진 앞쪽에 연못이 보이고 그 연못에 부들을 심어서 자라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구조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난간이 부들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부들의 입장에서는 난간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보게끔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서로에게 공평한 상황이 보장되는바 어느 일방이라도 이에 어긋난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풍치가 넘치고 멋스러움이 펼쳐지니 인륜이 바야흐로 앞은 옷깃이요, 뒤는 자락의 날들이구나. 합당한 연고도 없고, 또한 집 뒤에 노구솥과 가마(재물)가 기다려주지 않는 사람이 어찌 덩굴을 뻗어 올릴(자신의 소원을 성취함) 수 있으랴. 자신을 타일러 보니 가진 것이라고는 대파(권력)도 없고, 작은 매미(입담)도 없으니 아첨할 줄 모르는 내가 다음 생애에 머무를 장소(다음 생애에는 매곡마을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뜻임)가 되기를 다만 흠모하여 본다고 어느 선비는 말했다.
선조의 학문은 情의 경지(진리가 부드러운 상태)에 이르렀고, 성인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르침의 방법에 도달하셨기에 고상하고 가지런한 모습과 몸가짐이 앉은 자리는 한결같은 마을에 위치한 한 채의 집과 같았고, 한결같은 마을의 시선이 한 지점으로 모아진 곳에는 선생께서 앉아 계셨는데, 한결같은 집과 한결같은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또한 가르침이 있었도다. 어른의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윤리가 작동되고 있음을 상징하며, 또한 깨우침의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 선조에게는 평일 그 자체가 덕행이었던가. 조상을 우러르고 추념하는 것은 마음이 중요하다며 수백 년간 이어온 ‘산 제사’를 기꺼이 폐지하셨다.
선조의 형제분들은 평생을 그림자처럼 같은 공간에서 학문을 토론하거나 연마하였으며, 외출을 함께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가 또한 반드시 함께 하셨다. 休가 休에게 덕을 베푸는 거동은 야생 닭이 악수를 재촉하면서 이별을 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결정에는 형제간에도 필히 토론의 과정을 거쳤으며 문전옥답에 과일나무를 심어 풍요로움을 더불어 만끽하기도 하였다. 백씨의 덕행과 숙씨의 향기, 중씨의 명성과 막내의 아름다움(伯芳叔芳仲芳季芳)이 한자리에 앉았으니 네 분의 노인은 지상의 신선이었구나. 형제분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1)겸손으로서의 학문 (2)호응하는 학문 (3)절제하는 학문 (4)부지런한 학문 (5)향기로운 학문 (6)흠모하는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씨이신 정 봉휴(1782~1854)께서는 학문이 뛰어난 강학자로서 향리는 물론 인근 고장의 선비들로부터 스승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경서뿐만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이치에 형통하고자 장기간에 걸쳐 공흘산 등 경치가 빼어난 곳을 두루 순회하셨는데, 그때마다 임시로 거처(寓居 또는 橋居)했던 방에는 시간을 준수했던 달이 수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중씨의 서옥(書屋)인 곡구당은 주거 가옥과 조금 떨어져 있는 별채로서 죽림칠현을 흠모하셨는지 마을 뒷산 기슭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 있었다. 올라가는 길은 대숲 사이 자연 상태의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었으며, 평지에서 50미터 가량 올라가는 언덕이다.
군자는 연령 여부를 불문하고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규칙을 소중히 여기신 중씨(仲氏)께서는 산기슭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서재를 찾아오는 손님이 비록 힘들지라도 아랫사람을 시켜서 부축하게 하거나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곡구당 좌측에는 붉은색을 띤 낙락장송이 우뚝함을 뽐냈는데 한 겨울에 눈 덮인 소나무의 모습은 운치가 있었다. 우측에는 큰 살구나무가 있어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붉은 살구꽃에 비친 달빛이 아름다웠기에 필자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고려시대 문신학자 이 조년 선생의 시조를 읊을 때면 항상 유년 시절에 보았던 이곳의 행화(杏花)를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중씨께서는 처소에 머무르시며 대숲을 깨끗하게 청소하셨는데(참신한 학문을 심화 발전시킴), 특히 화합과 규칙을 풍속이 열등한 마을에 햇볕으로 전파시켰다고 한다. 벼(稻:화합)는 함께 모여 있어야 곡식이 되어 사람들에게 식량이 되고, 삼(麻:규칙)은 올곧은 실이 될 때 종과 횡으로 결집하여 비로소 따뜻한 의복이 되어 공공의 선(善)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학문이 심오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의 걱정거리에 침범(음해)을 당하여 물소리가 깊고도 멀리까지 다다랐으나 효자(아드님)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부담했던 쌀은 애쓰는 마음이요, 고집스러운 본성은 마침내 기쁨을 안겨주었던 것이다(중씨의 장남이신 정 희승께서 아랫사람을 믿고,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마침내 사실관계를 규명하였다는 뜻임). 곡구(谷口)는 중국 한나라 은거 선비인 정 자진(본명 정 박)이 거주했던 고장이다. 어느 날 지나가던 창헌(蒼軒:조 우각의 호) 조(趙) 처사께서 호를 곡구(谷口)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는데, 중씨께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며 거부하였으나 아드님께서 강화도에 거주하는 일가이며 양명학을 학문으로서 체계화하여 완성시킨 조선 후기 문신학자 하곡 정 제두 선생의 집안 어른들의 승인을 받아서 “곡구”라는 호를 사용하였으며, 옛 곡구당 건물은 습한 대나무 숲속인 관계로 인하여 낡아서 오래전에 철거되었고, 지금의 곡구정사(谷口精舍)는 후손들이 1965년에 마을 앞산 기슭에 위치한 현재의 장소로 중건한 건물인 것이다.
숙씨(叔氏) 정 귀휴(1786~1852)께서는 호가 향양(向陽)이다. 맑고 순수하였으며 도(道)는 자신의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학문을 탐구하셨다. 저서로는 향양집(向陽集)이 있으며, 향양정자는 지금도 매곡 마을에 존재하고 있다. 백씨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숙씨가 지은 추모 글 일부를 인용해 본다. “모범을 보여주는 학은 능히 인간 세상에 날아들고, 천만 겹으로 격리된 자라는 산으로 되돌아오는데 창문에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소나무 숲 사이로 가을바람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구나.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그윽한 맑은 공간에는 전해지는 법전(모범이 되는 행동)은 보이는 듯 들리는 듯 음악 소리와 함께 비등한데, 존재는 하나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끌리는 것은 이치가 서로 감응하는 것인가.”
네 줄기(4형제)의 곧은 언어는 한결같은 산앵두나무(시골 선비를 상징) 방에서 온화한 기운을 깊고도 넓게 하였으며, 세 줄기 난초의 새싹(아드님 3명)은 창포가 무성한 정원의 아들이었으니 타고난 천성은 공중에 높이 떨쳤구나. 매화마을 서당에는 꽃별이 아득하게 반짝이고 개울에는 가을 달이 오고 갔으니 근원 속의 근원인 빼어난 언어가 장황하고도 장황한 미소를 깃들게 하도다. 봄날에는 원숭이와 더불어 시를 읊고, 가을에는 학과 더불어 비상하면서 빙산 같은 매화계곡에는 달을 캐고 수집하였는데, 남은 향기가 시(詩)와 예(禮)가 되어 업(業)으로 전해지니 대롱 속의 표범 얼룩(管窺)은 여분이 남아돌았기에 강의와 토론은 저절로 자유롭고 다양하였도다. 가르침을 받은 아들과 손자들이 좌측에서 시중들고, 우측에서는 도열 하고 있어 대가족의 풍성함이 존재하였기에 선조께서는 팔순의 연령에도 강령하심이 백 천의 기한을 가능하게 하였구나.
선조께서는 한양에서 가진 즐거운 모임 자리에서 항상 버금에 합치하는 평판을 들었는데, 하례를 받으신 풍류를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절친한 어른(정 인휴를 가리킴)의 산과 바다 같은 말씀과 뜻은 거문고 속의 가락이었구나. 산수국과 칡에다가 꽃을 보태니 아! 비단 위에 쓰신 절제된 문장의 향기가 함께 비상하니 자연의 분수를 벗어나지 않았구나. 방석 위의 풍류를 즐기고자 작년 섣달, 봄을 맞이하려는 자리에는 바깥은 차가운 설한풍이 몰아치는데, 따뜻한 방안에서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모여 고당에서 밤늦게까지 등불 아래서 하루아침에 서리를 맞은 화려한 터럭을 공감하면서 손님으로 대접받았던 벗들이 연민을 가지고 무릎을 맞댔는데 온전하게 아름다운 선생의 희학질에 허리가 끊어질 듯 우리들은 반미치광이가 되었구나. 부족함의 한계를 지닌 천하는 어떤 세월이었던가. 버들 잔에 술이 깨고 취했으니 왕성했던 모임은 기억만 절절하구나. 이상은 고인이신 선조와 함께 어울렸던 어느 선비의 회고담이다.
겹겹으로 둘러싸인 큰 가옥의 적막함 한가운데 계셨으면서도 불구하고, 공적을 업신여김 당한 대물(大物)이셨던 우두머리 환어(전설상의 물고기: 선조의 부인이신 인동 장 씨)께서는 애를 태우며 친정으로 떠나가셨고, 둘째(중씨의 배우자, 안동 김씨)는 병약했으며, 막내(계씨의 배우자, 여주 이씨)는 새사람이라 경험이 없었으니, 화친함은 길을 잃고 말았던가(종부인 인동 장씨와 셋째 동서인 진주 강씨 사이의 갈등 관계를 묘사함). 예부터 몽매하지 않는 사람은 흙탕물로 얼룩진 사람을 이길 수 없었기에 하늘이 울면서 알리는 말씀은 아내가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재치가 없어 큰 허물이 있는 것은 그 덕성이 안방의 법도를 소중히 여겼음이며, 장유유서의 위계질서를 존중했건만 가깝고도 멀리 있는 곡(哭=죽음)의 위상이란 것도 결국은 노쇠함이 보여준 비천한 것이며(선조의 처남인 장 술도께서 누이인 인동 장씨 죽음을 자신의 노쇠함에 기인한 비천한 것이라고 하였음), 세상에 부재중인 누이에게 말하기를 “우리네가 복이 없는 것인데, 사대부 집안에서 깨우친 그대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못난 자식으로서 지아비의 자리를 면하는 것인가(*잘못은 교묘한 술수로써 하극상을 일삼은 셋째 동서에게 있었으나 선생께서는 군자로서 가장인 자신의 책임과 공평성과 관련된 선택의 문제에 있어, 대국적인 차원에서 아들 대신 조카를 살린 중국 고사를 염두하셨는지, 자신의 부인을 친정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5년 뒤에 인동 장씨께서는 56세의 나이로 친정에서 별세하였음).
아! 동쪽을 가리키는 한결같은 꿈속의 옛 풍경에 의지한 실개천과 산은 기억 속에 모호하였구나. 하나의 맥락에 마땅히 존재하는 도리는 동쪽에 있었기에 장차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야 하고, 급한 것이면 기필코 즉시 가서야 하는데 그 시기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것의 탄생을 잊어버렸구나(별거 당시에 누이의 시집을 방문하지 않았던 친정 오라버니의 후회). 지금의 생각이 영원하다면 仁은 분명히 동쪽 땅에 있었건만 지금은 끊겨 있어 나의 발자국이 다시 동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은 옛 서주(西周)의 도로와 닮았구나(주나라가 분할되어 서주 사람은 동주로 갈 수 없음을 친정 오라버니께서 자신의 처지에 비유, 묘사한 것임).” 부인(인동 장씨)께서 시집오신 초창기에는 재주가 영특하고 빼어난 자손들이 창포가 자라는 연못 앞 하늘에 기대어 있었건만(하늘이 물속에 비치는 연못가에 아이들이 서 있는 모습을 문학적으로 묘사) 아~ 세월은 한결같았기에 서로 간에 만남이 달성되었더라면 삼십 년의 고사는 무르익어 봄날에는 꽃과 버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풍스러운 고장을 찾아갔었을 것이며, 전형적인 가을날에는 단풍이 붉게 물든 언덕 기슭에 위치한 역참으로 통하는 길에는 여유로운 산을 구경하면서 일천 겹으로 연이어진 말머리(馬頭)들의 행렬이 멀어져 갔을 것이다.
어느덧 세상을 떠나간지 1주기가 되어 경인년(1830년) 시월 초이튿날, 지아비 정 인휴는 아내인 유인 장씨 묘소가 있는 산언덕에 의탁하니 백년가약 만사가 한숨을 짓게 하는데, 아들 낳고 딸 낳고, 얼마만큼의 식사를 기약하며 먹어왔던가. 그 옛날 함께 고생해 온 날들을 회고하니 눈물이 비가 오는 듯하구나. 배회함을 빌렸던 세월 동안 만나기를 소망하였기에 어찌 작게나마 편안하게 음식을 끌어들일 수 있었겠으며, 혹여 감정이 통한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자위 주변을 채웠던 눈물이 그 얼마이었던가.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돌아가신 부모님의 그윽한 유택을 귀가 축 늘어진 채 바라보는 것인데, 홀로인 것이 뚜렷하고 분명하니 외롭고 쓸쓸한 나의 흔적은 마치 마음속을 비운 군자의 무덤이 도와주는 듯 의심스럽고, 인간 세상에서 조만간의 기한을 연모하고 위로한다면 이후에 기다리는 계절은 오직 초겨울(죽음)인데, 서리와 이슬(차가운 시련)은 이미 내렸으니, 이를 빗자루로 쓸고 분묘를 받든다면(위로한다면) 서러운 감정이 폭발하여 슬픔으로 흐려질 것이나 이로 말미암아 세월의 애씀을 간략하게 펼친다면, 그대는 가슴을 채우는 일에 매진하고 흠향하시라.
사람이 사는 한평생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연속된 상황이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예법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예법이란 한 번 정해놓으면 세월과 함께 변화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의 한평생을 하나의 ‘완성되지 않는 소장(訴狀)’이라고 하였던가. 선조께서는 친족 간의 예의범절은 수평적 관계를 기본 바탕(예법을 완화시켜 친족 간에 화목 도모)으로 하고, 문중 간의 예의범절은 수직적 관계에 기본을 두어 자신의 문중을 낮춤으로써 평등과 화합으로 지역을 발전시켰다. 또한 고장의 예법과 풍속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향음주례(풍속 등을 관장하는 정례모임)에 참석하여 강의를 하시는 등 대외적으로 위상을 제고하였으니 이는 산의 무게를 보태고 경치를 증가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선조를 가까이에서 모셨더니 부근에 아름다운 빛이 나는 것을 체험하였다고 했는데, 친인척을 불문하고 모두가 앞다투어 선조를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기에 우리에게 ‘배종 문화’의 의미를 일깨워주셨다. 선조께서는 외형상 동일하게 보이는 정당한 행위일지라도 그 이치를 알고 행동하는 것과 모르고 행동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부당한 행동은 설령 사람들에게 밝게 보일지라도 인의(仁義)에 위배되기 때문에 군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새로 제정된 가법(家法)이 엄하면서도 참신하니 엄한 것은 아버지를 닮았고, 참신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데, 비록 작은 잘못이라 하더라도 피부를 진열하는 것(지도 편달)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시골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군자로서 항상성과 지조를 고수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합함으로써 ‘차별화된 내적 인격체’를 갈망하시고 이를 실천하는데 의미를 두셨다.
젊은이의 얼굴을 지닌 백발(정 인휴 선조 지칭)께서는 지상의 노인과 신선의 중간에 계셨으며, 극기복례하여 자신의 부존재를 염두하시고 스스로를 멀리함으로써(자신을 객관화시킴) 사물이 지닌 본성의 징후를 감지하고 이를 공경하셨다. 선조의 가문은 기네스북과도 같은 ‘주자가례’에 임란 의병장인 호수(정세아)와 백암(정의번)선생 부자의 충효와 더불어 함계(성리학자 정석달)와 매산(형조참의 정중기)선생 부자의 시와 예법이 등재되어 전해지는 것은 세상에서 매우 드문 일이요, 동시에 공경함이 크다고 할 것이다. 어떤 일에 몰두하여 그 일이 즐거우면 그것은 곧 휴식 중에 최상의 휴식이 되는데, 선조께서는 사랑하고 아끼시는 일에 마음을 태우고 애쓰심이 멀리까지 영향력이 도달하여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며, 평일에도 따뜻한 사랑의 정을 반드시 생각하셨기에 음지에 머물며 지극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수컷 말에게도 인정을 내리셨다. 또한 선조께서는 부모님 병환으로 인해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약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위로하고자 우스개 이야기를 하여 그 사람을 허물 허물한 사람으로 만들어 옆으로 넘어지게 하셨다. 인간사에는 모두가 원인이 있는데, 이유 없이 선조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마치 청소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 더하여 조상의 이념이나 생각이 담긴 두건 상자를 열어본 사람들은 세상은 망하여도 선조의 가문은 온전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선비는 선조의 업적은 후세에 반드시 전해질 것이라고도 했다.
마치, 길거리에 매어둔 소를 지나가는 행인이 훔쳐 간 형국이 웬 말인가. 집안의 장손(정치규 27세)이 고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렸으니 주변의 관심과 함께 소문이 나돌자 며느리는 집안의 입장과 외부 사람들의 처지를 아울러 배려하여 외견상 경계 지점을 마중하나 속마음은 근심으로 인하여 정신에 상처를 입고 있는지라 지나친 개입과 말 많은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낀 세상은 가르침을 재촉하는 빌미를 제공하는구나. 의술로써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것이라며 선조께서는 손자의 아픔과 함께 하시며 밤새도록 시중을 드셨는데 이미 여섯 차례나 달성(대구 약령시장)을 다녀오셨다. 어리석은 나를 구제하는 것은 내가 이슬이 되는 것인데, 삼대의 종통(宗統)이 여덟 살 난 외로운 아이(증손자 정 진원, 후에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역임)에게 전속될 처지이니 흐릿함이 절박하여 터럭이 연못가에 임할까 염려(자살할 우려)되어 축성이 무너지는 아픔은 안쪽에 있건만 밖에서 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원망스럽구나.
뜬구름 위에 편안히 앉아 서재에서 즐겁게 보낸다면 남아 있는 세월의 명령을 듣게 되는가. 선조께서 타계하시자 문상을 오신 어느 선비는 말했다. 평소, 자주 방문하지 못한 게으른 말(馬:자신)에게 나태한 채찍을 강하게 사용하여야 하건만 오래된 좁은 길의 슬픈 풍경(오랜 우환)이 이를 억제시키고 있었는데, 번성한 잎을 지녔던 오래된 나무(선조를 지칭)가 슬프고도 쓸쓸한 내 마음을 거듭 훔쳐 가고 있으니 휴식했던 문중의 명성이 크게 뻗쳐오르는구나. 내가 이곳에 오면 선조께서는 반드시 문 앞에서 반겨주셨건만 지금은 회수하기가 곤란해서인지 어찌하여 끝내 말씀 한마디 없으시구나. 방석에서는 베푸셨고, 책상에서는 옛 것의 탐구(선조에 관한 연구)에 충실하셨구나. 따님이 시집에서 조문하는 마음으로 임하며 머리를 풀어 헤친 것이 여러 날이 되었기에 비녀가 제 역할을 하고 싶어 더딘 머리를 만류하였다고 했던가. 구름은 근심하는 시냇가에 머물고, 거리의 달은 대들보를 가린 지붕을 의심하는지 세상의 인심은 이미 선조에게서 멀어져가는구나. 어릴 때부터 뇌의 곳간을 비워둔다면 화장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데, 저울이란 것이 각박하고도 각박한 도(道)를 행하고 있는가.
치솟은 큰 산이 무너져 쓰러지니 산봉우리들(군자들)은 근심을 하고, 각각의 언덕(소인배들)은 이미 우왕좌왕하는구나. 여러 세대가 같은 집에 거주하다 보니 자아의 외로운 번민이 지닌 무궁한 짠맛과 신맛은 선조께서 생존 시에는 약과 침으로서 유익한지라 이에 대하여 책망하려는 사사로운 마음과 감정은 오히려 축하를 하게 하건만, 지금처럼 잘못된 처사를 형편이 시키는 일이라고 둘러댄다면,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어둡거나 어슴푸레한 것에 연결시켜 비유할 수 있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마른 장작과 화기가 없는 식은 재의 차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을 일컫는 것은 슬픈 일이며, 혹여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일컫는 것 또한 슬픈 일일 것입니다.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건성으로 당실(堂室) 안의 여러 채의 집과 방을 다스린다면(방실별로 지급하는 물자 분배의 불합리) 지붕이 큰 집은 분명히 텅 비게 될 것이며 번창한 빈소에는 눈물이 말라버린 외로움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종전 같으면 선조의 화살처럼 곧은 말씀이 경고를 하였을 것이나 선조께서 계시지 않으니 경고가 급박하나 자행되는 수법이 원칙과도 교묘하게 닮았고, 나름대로 논리성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저항 또한 만만하지 않으니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생각은 불의를 묵과하려는 마음 또한 불편해하는지라, 자신을 스스로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잘못된 처사에 대하여 그 동기나 과정에 관대하게 접근하고, 폭넓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이에 의지하여 마침내 경고를 하지 않게 되는구나.
벼슬아치가 ‘게으름을 피우면서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 군자’를 방문하여 꼴을 베도록 시키는 것을 비방하는 학(鶴)을 도리어 원망한다면 합당한 언어가 마치 적막한 허공에서 대들보를 향하여 희미하게 떨어지는 달의 모습과도 닮았는데, 그릇이 아름다우면 담긴 재료는 오히려 서운해 하는지, 빼어난 것이 꺾이면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지라 훌륭한 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에 앉아 있는 까마귀가 대나무가 빼어나지 않다고 한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근본적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신비스러운 이치로서의 진리와 인간 사회의 실용(實用)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관대하신 거동과 자애로운 품성, 정당한 논리와 인후하신 덕망을 지니신 선조께서는 휘장이 드리워진 중앙에 계셨으나 항상 질박함을 펼치셨고, 마땅히 밝은 마음의 맹세를 연마하여 거듭 참마음의 열매를 도모하셨다. 모임 도중에 분위기가 정상으로 회복되면 넉넉한 두건에서 나오는 사양하는 아름다움은 모두가 군자이신 어른의 견해인데, 시초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을 주었기에 품을 팔아도 여한이 없었으며, 끝날 무렵에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눈물을 흘리게 하였도다. 묘향산 학의 깃털과 적산 봉우리의 영지버섯 눈썹을 지니신 선조께서는 “나루(津:만남과 이별의 장소) 주변이 가난하고 어려운 것이 곧 성인의 도(道)이다.”고 하셨기에 한평생, 몸소 수염을 늘어뜨리는 것을 능히 두텁게 하셨고(언행을 절제함), 식사는 반드시 같은 그릇을 사용하셨다. 또한 잠자는 곳도 같은 장소였으며, 걱정스러운 일을 당했어도 즐기면서 하셨다. 도덕산 꼭대기에서 기쁘게 넘어졌던 선조께서는 어리석은 수컷 말이 다수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꼬리가 짧은 개의 떨침(근시안적 시각)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네의 삶이 영(0)으로 남는다면 “마지막에는 무엇을 도모하여야 할까?”라며 세상에 물음표를 남겨 놓으셨다.
간절함을 품으니 화살이 지나가는 소리 한가운데 새어 나오는 일약 만년을 고하는 거친 문체(비백체의 거친 무늬)는 장차 천년을 이별하는구나. 잠겨있는 세월 속에 감추어진 은덕을 어떻게 헤아려 드릴 수 있으랴마는 누군가는 말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사물의 현상),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사물에 내재된 진리)”고 했다. 누이를 만나기 위해 아들과 조카들은 뒤따르고 손자들이 앞장서니, 4대의 수레가 흰 눈썹(白眉)과 수염을 휘날리며 경주 양동마을 앞을 지나가고, 자부심을 느낀 생질들은 외갓집으로 인하여 고무되었던 전성기 시절의 ‘休의 풍경’은 아련함 속에 피어오르는 환상이런가.
- 休의 세월의 발원지인 산중마을의 풍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