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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이 40여년이 지난 지금 살고있는 곳의 분포를 보면 여전히 난곡을 동심원으로 퍼져있다.
예전의 서울이라는 곳을 현재의 수도권이라는 메트로폴리스개념으로 확대해보면, 변방이었던 난곡이 지금은 수도권 인구분포지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나는 19669년에 아버지손을 잡고 낙골을 잠시 방문하였다가 이듬해 시골에서 전학하여 9년간 난곡에 살았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곳이자 우리모임 친구들이 같이 공부했던 곳이기에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고향같은 난곡은 어떤 곳이었는가? 어렸기에 어렴풋한 기억들을 나이가 들어 다시한번 회고해 보며 이해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적어본다.
시대의 변혁기때마다 행정구역은 크게 개정되거나 조정되어 왔는데, 근세이후로는 구한말 서양식으로 국가구조를 변모시키던 갑오경장(1985)직후와 한국을 병합한 조선총독부에의해 1914년 개편된행정구역 체계, 그리고 현대에 들어 공화당 집권시점인 1963년,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의 시행과 함께 광역시 및 도농복합시 개념이 도입된것이 비교적 큰 행정구역의 변혁기 내지는 조정기라 할 수 있겠다.
난곡이라는 곳은 조선시대 전기에는 금천현에, 조선후기에는 시흥현에 속해 있었다. 구한말에는 과천현(현 의왕,과천,서초,동작,강남일대)과 시흥현이 통합하여 경기도 시흥군이 되었는데, 시흥군 동면에는 봉천리,신림리,난곡리, 상도리, 가리봉리, 문교리, 시흥리등이 있었다. 시흥군은 왜정때 더 확대되어 안산군까지 포함하였다.
시흥군의 관청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이었는지만 철도역사주변의 발달에 따라 영등포리로 옮겼다가 영등포일대가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고난 후 해방되던해에 군청소재지가 안양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안양도 1973년 시로 승격되고 1981년엔 서면이 광명시로, 1986년엔 군자면과 수암면이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합쳐져 안산시로 독립하고 과천도 시로 독립하였다.
이어 1989년 나머지 지역이 군포, 의왕이 모두 시로 승격되면서 옛날의 시흥군은 사실상 없어진 셈이 되었는데, 부천군이 없어지면서 소래일대의 나머지 지역과 안산시로 편입되지 않은 수암면 군자면 일부지역이 시흥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시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향리에서 동네 구석구석을 부르는 이름은 어느골, 어느 말, 어느 터 하는 식으로 한자로 된 행정구역명 보다는 전통적으로 불려오던 이름으로 많이 불려졌다.
지금도 무슨골, 웃말, 아랫말, 샛터등의 이름들이 곳곳에 남아있는것을 보면 알수 있다. 낙골 역시 난곡리라는 행정구역명이 생기기 전부터 불려오던 순 우리말 이름이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예전의 란(蘭)골이 철거난민 수용기에 너무 외진곳에 떨어뜨려 놓은 곳이라 한탄조로 불리게 된것이 일반화 되어 낙골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중종때 우의정 아들 강서의 묘가 난곡에 있어 이분의 호를 따 난곡리가 정해졌다는 유력한 설도 있지만 구한말의 한자지명 작명동기로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낙골 또는 난ㅅ골 이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불리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시골의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손수건을 가슴에 단 아이들의 부모대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신 할머니들이 많았는데, 선생님이 이분들께 사는곳을 물어보면 "올코지 살유~"하는 식이었다. 옭호지는 옥호리라는 근대 행정구역명이 생기기 전의 우리말 이름이었는데(동네 선비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옥금동이라는 한자로 표기해 왔었으나 널리 통용되지는 못했다) 젊은 선생님은 각 고을에서만 통하는 옛지명을 모두 알수는 없었다. 그래서 재차 주소를 물어보면 할머니들은 "옭호지 오금홋골이유~"하는식으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어찌나 그때 소리가 와글와글 하였던지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옭호지는 동네 이름이자 오금홋골은 번지수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은 할머니들이 답답하였겠지만 당시 할머니들끼리는 선생님이 답답하였던 것이다. 지금 할머니들 보고 이메일 어드레스 불러달라는 것과 같다. 당시 나이가 좀 드신 주민들은 읍내나 면소재지처럼 한자이름이 일찌기 정착되어 일반화 된 지명이 아닌 리 단위의 작은 농촌산골 지역은 전통적으로 불리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불렀다.
이런 경우처럼 낙골은 난곡리 라는 한자이름이 붙은 후에도 계속 낙골로 불리었던 것 같고, 1963년 영등포구 신림3동으로 편재되어 난곡리라는 이름이 없어진 이후에도 생활권이 신림동과는 구분되기 때문에 70년대 말까지는 낙골로 불리어 졌다.
1971년 국민학교 개교에 마추어 근거있는 좋은 이름을 찾아 난곡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철거난민 이미지를 벗어버리려는 윗낙골 주민과 윗낙골의 이미지를 씌우고 싶지 않은 아랫낙골 주민들의 공통적인 바램에 따라 70년대 초부터 난곡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알리고자 하였는데 70년대 후반에 가서야 노선버스 표기에 낙골이라는 이름을 지울 수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때부터 난곡 또는 난곡동이라는 호칭이 확산되었고 난곡동이라는 공식 행정동명이 생긴것은 그로부터 30년 남짓 지난 2008년 8월부터였다
낙골과 같은 빈민촌은 왜 생겨났을까?
6.25 이후 서울시에는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자본이 없던 이들 빈민들은 마찰이 적은 시유지나 국유지쪽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60년대에는 교통이 닿는 지역의 웬만한 산등성이는 물론 하천변까지 점령하며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주거형태는 한건의 수재나 화재에도 수백,수천명의 이재민이 생기는 등 위생과 방재, 도시계획과 정비 측면에서 대도시의 난제가 되었다.
1963년 서울확대계획에 따라 광주군 시흥군등 넓은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고 난 후, 하천이나 도로를 점령하였거나 화재나 수재를 입은 지역이나 취약한 지역이 도시미관과 도시정비를 위해 상당수의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철거민들에게는 무허가라는 이유로 별다른 대책이 주어지지 않은채 외곽으로 내몰리는 형편이었다.
일례로 66년 9월 흥릉지역 무허가 판잣집 200가구정도가 갑자기 철거되고 주민은 구리 인창동에 내려졌는데, 이들에게는 가마떼기 3장씩이 배급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수용지가 생업터전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고 그나마 수용지가 주어지더라도 집을 지을수 있는 형편이 안되는 영세민에게는 정착지를 옮긴다는 것이 큰 고통이었는데, 때문에 주민과 행정력 사이에서는 종종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하여 철거민 문제는 큰 이슈가되었다.
이후 박대통령은 비서관들에게 현장에 직접 나가서 철거민 촌락실태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내무부는 그해 3월 전국의 무허가 건축물은 23만4천가구로 파악하고 각 지역 경찰서장 책임하에 단계적으로 철거할 계획이라는 발표를 하였다.
1966년 9월 서울시는 천막에 수용된 영세민 대책으로서 이재민에게 8평씩의 대지를 주고 2호연립주택 8평짜리를 분양키로하는가 하면, 수재,화재,철거민등 3만가구에 각각 1만원과 구휼식량 3.6kg을 지급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런 가운데 1967년 1월 서울시장은 15만4천동의 무허가 건축물 중 8만5천동을 양성화 하고, 당시까지 미철거된 나머지 건축물은 3년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무허가 양성화 얘기는 오히려 무허가 판잣집의 양산을 부채질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968년에는 광주군 중면(현재의 구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일대) 지역인 200만평에 4만8천가구를 이주시켜 30만명의 위성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으로 철거민 이주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 서울 상계동 도봉동 뚝섬 천호동 마천동 거여동 목동 신림동 봉천동등이 철거민과 이재민들을 대거 수용해 오던 지역이었다.
1968년 당시 봉천동의 땅값 기사를 보면, 저지대가 평당 2만원, 고지대가 2천원 정도에 거래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철거민 촌락의 땅값이 너무 오른값 때문에 기사가 난 것이다. (67년 하일동 불하가격은 평당 400원~600원)
참고로 1972년 윗낙골 중간지대 집값은 평당 25,000원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물가며 땅값이며 하루가 다르게 뛰던 시기였다.
낙골의 형성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었을까?
낙골에 정착한 철거난민 대표가 1968년 9월 서울시장에 호소한 민원 하나를 살펴보면, 이들은 1968년 8월 20일 동부이촌동,구로동,대방동,신대방동,가리봉동,독산동에서 불시에 찰거되어 낙골에 정착하게 되었고 버스를 타기위해 대방동까지 1시간 반 이상 걸어나가야 하니 버스를 보내달라는 것과, 학교가 없어 국민학교에 등교시키질 못하는 문제와 화장실도 없고 쓰레기버릴 곳하나 없는 불편에 개울물을 식수로 하고 있으므로 바쁘시더라도 직접한번 와서 봐 달라고 요청하는 정중한 내용의 호소문이 신문에 나 있다.
그만큼 1960년대 예상치 못한 서울로의 폴발적 인구유입에는 별 대책이 없이 임기응변식 처방만 하는 지경 이었는데, 서울시에서는 철거난민수용지에 40가구당 공동화장실 1개와 우물 1개를 지원하도록 하였지만 이곳은 그나마도 제때 지원을 해 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낙골은 버스종점 윗쪽부터 큰뮤모의 주거지가 형성되어 점차 농촌지역인 아랫낙골로 주거지가 확대되어 갔다. 필지당 8평씩 불하되었던 수용지는 입주권 매매를 통하여 두서너필지를 합하여 건물을 짓기도 하였고, 철거민에게 제공되어 루핑종이로 만들어진 판잣집은 대부분 이를 매입해 들어오는 새로운 주인들에 의해 시멘트블록 벽체와 기와를 얹은 모습으로 변모하여갔다. 현재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까지 윗낙골은 8평짜리 주택이 다수였으니 70년 전후 서울에서 서민이 이보다 알뜰하게 집장만 할 수 있는곳은 별로 없었다.
버스종점 위쪽의 윗낙골이 포화되어 있을때까지 아랫낙골에는 화재민촌에 몇십가구가 형성되어 있었고 십여가구씩의 전통촌락이 군데군데 있었다.1971년 난곡국민학교가 개교하고 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졌다. 중산층용으로 경찰주택단지 법원단지가 연이어 개발되어 점점 아래로 개발이 확대되고 윗낙골에 남은산지에는 국회단지가 개발되었다.
2008년 이후 난곡은 예전의 윗낙골을 난향동으로, 중간마을을 난곡동으로, 아랫말을 미성동으로 동명을 정하여 쓰고있다.
중등교육시설도 있었다. 1971년 남강 중고등학교가 개설되었다. 애초의 삼신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무리한 개교준비를 하여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 이전에는 산동네에 영일 청소년 중등구락부가 있었다. 1973년 남부경찰서가 신설되면서 관악교회에 개설된 제3직업소년학교도 있었다.
이중 제3직업소년학교는 학생수가 13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되자 1974년12월 관악교회 황의곤 목사는 부지190평을 제공하기로 하고 관악운수에서 목재를, 한국유리가 유리를, 대한전선이 전선을, 기아자동차가 페인트를 제공하고 동네 유지와 동네목수,미장, 건축기술자등이 노력을 보태어 교실수 3개의 남부고등공민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에앞서 산능선에 박재옥씨가 운영하였던 비인가 학교시설인 영일중등청소년구락부는 1978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으며, 토지소유권이 없었던 남부고등공민학교는 거듭된 화재와 함께 지상권마져 소멸되면서 사라졌지만 그 명맥은 재개발이 된 2008년 이후에도 동사무소를 통해 대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지역커뮤니티에서의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살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초창기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사연없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지금 베이비붐세대들이 어렵다고 하지만 난리통을 겪으며 예외없이 보릿고개를 겪었던 분들, 즉 베이비 붐 세대의 부모세대가 산동네에 정착한 세대주들이었다.
왜정때 농민의 75%가 소작농이요 전 농민의 48.3%가 춘궁민이었고 도시노동자의 1/3이 매일 한끼 이상을 굶고있으며 이들중 2/3는 두끼니를 거르고 있다는 총독부 조사결과를 보면(*변혁시대의 한국사, 조선총독부자료1930) 그 시기를 전후해서 태어났던 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모질지 못하고 순박한 성품을 지녔던 분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집이 좁았으므로 내집 대문에서 팔을 벌리면 앞집 대문이 닿을만한 넓이의 비탈진 골목길은 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자 인사를 나누지 않고 지나다니기에는 더 어색한 공간이었다.
앞집에서 조금만 큰 소리를 내면 다 들렸으므로 자연히 집집마다의 사정을 다 알수 밖에 없었고 욕을 먹지 말아야 했다.
집앞청소를 게을리 할 수도 없었고 앞집에서 국수를 끓이는지 밥을 짓는지 어떤 반찬을 하는지 대충 아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없는 가운데도 인심은 그 어느곳보다 좋은 동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이런곳에서 자란 친구들이 여전히 선행도 많이하고 나눌줄 아는 여유가 있어 바라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