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여행기09-똔레샵 호수
캄보디아 똔레샵 호수에 갔다.
영어로는“Tonle Sap Lake"다.
똔레샵에서 캄보디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똔레샵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베트남 보트 피플들이 살고 있었다.
캄보디아 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똔레샵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낙후된 빈민촌이다.
건기와 우기에 따라서 호수의 수위가 달라진다.
건기와 우기의 수위 차는 5미터 이상 10미터까지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수위가 변하면 집을 옮겨 다닌다.
삶의 터전이 호수이기 때문이다.
이사를 갈 때는
집을 통째로 배에 싣고 옮기기도 하고
트럭에 싣고 옮기기도 한다.
어떤 집은 하도 작고 볼품없어 몇 사람이 들어서 옮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이라기보다는 움막이라고 해야 맞다.
호숫가에 움막처럼 서 있는 집도 있고
배위에 지은 집도 있다.
이들의 삶은 호수와 함께였다.
똔레샵 호수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문명이 아니었다.
동물의 삶이었다.
짐승의 삶이었다.
학교도, 교회도 행정 관청도 모두 선상(船上)에 있었다.
말하자면 수상촌(水上村)이다.
사람들이 수위에 따라 옮겨다니니 학교도 교회도 행정관청도 옮겨 다닌다.
한국에서 만들어 준 교회도 보였다.
대구 칠곡 어느 교회에서 교회를 세웠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선상 교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를 잡아먹고 살고 있었다.
투망질을 하는 사람들
어망을 치는 사람들
구걸하는 어린 아이들
수많은 사람들이 극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관광객만 가면 떼거리로 몰려 다녔다.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
옷도 겨우 겨우 걸치기만 했다.
세수라고는
목욕이라고는 평생 해보지 않은 아이들처럼 보였다.
똔레샵에는 문명이 없었다.
윈시인들이었다.
똔레샵에는 원시적 삶을 투쟁하고 있었다.
고무 다라이 배를 타고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커다란 고무다라이를 타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고무다라이를 타고 호수를 떠다니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나무 막대기 하나로 노를 저었다.
전진, 후진을 기가 차게 했다.
가히 예술이었다.
팔이 하나 없는 아이도 있었다.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아이가 한 손으로 고무다라이 배를 타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노를 잡고
전진, 후진을 마음대로 했다.
고무다라이를 타고 구걸하는 아이에게 사탕 한 봉지를 던져 줬다.
가이드는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달러는 주지 말라고 했다.
그네들을 도우는 방법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거지 근성만 키워주고 자기 성장을 위한 노력을 방해한다고 했다.
공부하는 것보다 1달러 구걸하는 것이 당장은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똔레샵 사람들은 버림 받은 사람들이다.
국가에서도 버림 받고
국제 사회에서도 버림 받았다.
이네들에게는 미래가 안보였다.
배움도
문명도
희망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주어진 삶을 살다가 갈 뿐이다.
동물처럼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 삶이었다.
이들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은 사치였다.
자유, 평등, 박애
이들과는 상관없는 단어들이다.
이들에게는 먹는 것과 배설만 있을 뿐이다.
똔레샵은 관광지다
관광 코스로 유명하다.
무슨 대단한 문화재가 있어서가 아니다.
최고로 비참한 삶을
인간 이하의 삶을 보는 것이 관광거리다.
똔레샵을 찾는 관광객들의 감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구경거리로 삼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똔레샵의 이러한 삶을 보고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외면할 것인가?
구체적 액션을 취해야 할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이들을 이대로 둘 것인가?
사진 설명
사진1 : 고무다라이탄 아이, 다라이타는 재주가 신기에 가까웠다.
사진2 : 태극기가 보인다. 칠곡 어느 교회에서 세워준 수상 교회다.
사진3 : 호숫가 집, 이 집은 휴가철 때나 이용하는 별장이 아니다. 삶의 터전이다.
사진4 : 구걸하는 아이들이다. 이들의 생존 수단은 구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