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문산 계림사(甘文山鷄林寺) /전통사찰
-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419년(신라 눌지왕 3) 아도(阿道)화상이 처음 지었다.
전설, 계림사가 자리한 이곳 지세가 풍수로 볼 때 와호형(臥虎形)이라 강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 닭 1,000마리를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닭이 자꾸 죽어 절 이름을 ‘계림사’라 하고 닭을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1832년(순조 32) 성일(性日)이 중창, 1922년 춘담(春潭)이 중건하였다. 1990년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문화재는 1809년(순조 9)에 그린 높이 20m, 너비 5m의 괘불탱화(掛佛幀畵)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뭄이 심할 때는 동부리 마을 입구에 있는 쌍샘에 탱화를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이 탱화는 1978년 도둑이 훼손하였는데 그 때 탱화 가장자리에서 사리 1과가 나왔다.
감문산은 명당이지만 묘지가 없다. 감문사 명당에 묘를 쓰면 쌍샘의 물이 변색되어서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최근에도 종종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산을 뒤져 몰래 매장한 묘를 파낸다고 한다.
(인터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읽은 내용을 정리함, 위키백과도 참조함)
계림사 경내 안내문에 실린 내용을 간추려 본다.
아도화상이 창건.
감주계림사개건기(1804년), 계림사 사적기(1954년 현판 필사)에 따르면 순조 4년(1804) 여러 계인(契印)이 대웅전, 요사, 방랑과
공루를 확장, 향연각을 건립하였다.
게림사가 위치한 곳이 와호산, 산세가 드세서 건너 마을(아포 대신리)에 살해 같은 흉악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
닭 1,000마리를 길렀으나 닭이 자꾸 죽어 절 이름을 계림사로 바꾸고 닭을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계인(契印)은 계인(契人) 잘못 씀. 계인은 문서에 도장 찍는 일이고 계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모임(계)의 회원.
위 내용을 보면 계림사 이전에 다른 이름을 가진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아도화상이 처음 지었는지도 모르고, 고려 때도 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터라고 생각한 곳에서 유물 출토도 없다. 안타깝다.
승복은 입지 않았지만 머리 깎은 사람을 만났다. 중이 아니고 신도라고 한다.
그가 한 말은 계림사는 직지사보다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도 지금 개령향교와 마을이었다고 한다.
현재 자리는 계림사 산내 암자였다고. 교동 김산향교와 구화사, 같은 경우다.
어느 시기에 계림사가 직지사보다 규모가 컸는지는 알 수 없다.
직지사도 그렇지만 아도화상 창건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까운 선산 도리사에 눌리기 싫어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조선중기 이전 창건과 그 역사를 알려줄 자료는 현재까지 없다. 풍수도 신라후기에 들어온 사상이다.(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개령면은 231년 신라에 병합하기 전까지 감문국이 있었고, 김천 주위에 가장 규모가 큰 곡창지대다.
신라 때 사벌주 밑 개령군이었고, 조선시대엔 개령현이었다.
이런 역사를 살피는 것은 계림사를 이해하기 위한 일이다. 직지사보다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는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다.
멀리 구미 금오산이 보인다.
대웅전
계림사 석조불보살좌상 /경북 문화재자료
18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여긴다.
석가상과 보살상은 18세기 초반 승호파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판단.
약사상은 금문(金文)-청윤(淸允)의 계보에 속한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판단.
삼존불이 같이 만든 것은 아닌 모양이다. 두 불상과 하나의 불상은 몸매가 다르다.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경북 문화재자료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만든 것으로 여긴다. 인근 산기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바위에 3cm 깊이로 양각하였다.
결가부좌,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각지를 기고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런 손 모양의 불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건을 쓴 불상도 매우 드문 사례다. (나는 마애 나한상을 처음 본 것 같다. 봤지만 기억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백마산 신흥사(白馬山新興寺) /전통사찰
- 경북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산
신라 흥덕왕 9년(834 )에 창건되었다 하며, 그 이후의 내력은 자세치 않으나 1901년에 소실되었다가 1959년에 건립되었다.
(직지사 홈페이지, 말사 신흥사 관련 소개한 글을 발췌)
834년(신라 흥덕왕 9) 도의(道儀)가 창건하였다.
950년(고려 광종 1) 보조(普照), 1726년(조선 영조 2) 현각(玄覺)과 부암(浮岩)이 각각 중창하였다.
1901년에 불에 탄 것을 1959년 도설우(都雪牛)가 중창했으며, 1993년에 윤지원(尹智願)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인터넷 찾아보기, 김재호 카카오스토리에서 발췌)
인터넷 찾아보기를 하여도 만족할 만한 자료는 없다. 신흥사 내에도 설명문이 없다.
도의선사(?~825), 선덕왕 1년(780) ~ 헌덕왕 13년(821) 중국 유학, 위키백과에 적힌 내용. 이것도 뭔가 안 맞다.
도의선사가 중국 유학, 중국 남선종을 배워서 귀국, 선종을 펴려고 했으나 시절 인연을 만나지 못하여 양양 진전사에서
40년 간 칩거, 염거에게 전수, 장흥 보림사 가지산파 종조가 되었다.
신라 때 처음 절을 지었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고, 조선 말에 절을 세웠을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규모는 단출하다.
요사, 종무소
대웅전
삼성각
극락전
백마산 고방사(白馬山 古方寺) /전통사찰
- 경북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418년(눌지왕 2) 아도(阿度)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636년(인조 14) 옥청(玉淸)이 적묵당을, 현철(玄哲)이 설선당을, 1656년(명종 11) 학능(學能)이 청원루를 지었다.
현재 건물은 1719년(숙종 45) 수천(守天), 계현(戒玄)이 옮겨서 중창한 것이다. 1981년 주지로 부임한 법전화상이 중흥시켰다.
(고방사 안내문,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이 거의비슷)
직지사, 계림사, 고방사 등 아도화상 창건을 내세우고 있다.
아도화상은 선산에서 모례집에서 숨어서 전법을 하였다. 그런 이가 절을 짓는다는 건 뭔가 앞뒤가 안 맞다.
고방사는 경내가 어지럽다. 불사가 한창이다. 이 불사가 끝난 후 돌아보면 좋겠다.
보광명전
지장전
범종각
삼성각
관음전
보광명전 안, 고방사 목조아이타삼존불상 /경북 문화재자료
현종 11년(1679) 만들었고, 주불은 아미타불이며 협시보살은 관음(정병)과 대세지(경전)이다.
개산초조 아도화상 진영(오른편)
2023년 11월 24일, 오전 9시 조금 넘어서 용화사, 구화사, 김산향교, 옥률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문암사), 은기리 마애불,
광덕리 석조보살입상, 계림사, 개령향교, 서부리 삼층석탑,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김천 미륵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신흥사, 고방사 들을 보았다. 고방사에서 나올 때 오후 5시, 해가 서산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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