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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경건
제목 : 참된 경건의 열쇠(3)
성경 : 약 3:9~18
찬송 : 31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211 낙양교회 주일 오후예배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약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약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통제를 잃는다는 것은 질서를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질서를 잃었을 때 오는 것은 무질서, 곧 혼동(confusion)입니다. 그래서 죄란 곧 혼돈이기도 합니다. 뒤바뀌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거나, 사람이 그가 다스려야 할 해와 달, 쥐와 개구리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그 정욕을 불일 듯 하는 것,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 짐승이 짐승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뒤바뀌는 것, 그런 것들이 혼돈입니다. 창조 질서의 혼돈, 그것은 타락의 뚜렷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창조 세계가 그 질서를 유지하는 때에도 사람의 ‘말’은 혼돈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타락한 것이 사람의 ‘말’인 셈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혼돈의 원인인 ‘말’이 어떻게 바로잡혀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과 창조 세계의 혼돈
야고보는 이미 6~8절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주신 세상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했음을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원인은 그의 ‘말’을 다스리지 못한 사실에 있었습니다. 혀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참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을. 그래서 온 세상을 다스려도 자신의 혀, 곧 말을 다스릴 수 없다면 그는 여전히 재앙을 막을 길이 없는 사람인 셈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대가로 온 세상에 죽이는 독이 퍼진 것이고, 지옥의 불길이 옮겨 붙었다는 것입니다(6절). 지옥의 불이 이 창조 세계에 옮겨 붙었다는 것처럼 큰 혼돈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야고보는 혼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금 9~12절이 예시하듯이 타락한 세계, 특별히 ‘말’의 불의한 세계(6절)는 곧 혼돈의 세계입니다. 무질서의 세계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그 나라의 통치가 뒤틀린 곳입니다.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약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여기서는 사람이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을 저주합니다. 도무지 맞지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혼돈스럽습니다. 그것은 같은 샘의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이 나온다는 것처럼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작 혼돈스러운 것은 사람의 입입니다. 사람의 혀이고, 사람의 말입니다.
√약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아직도 자연 속에서 무화과는 무화과를 맺고 올리브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아직도 포도나무는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신실하고 일관되게 포도 열매만 맺습니다. 포도나무이면서 무화과를 맺지 않습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에 대한 순응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 사람의 입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짠물은 단물을 내지 않습니다. 짠물은 짠물이고, 단물은 단물입니다. 바닷물을 떠서 맛보았는데 민물 맛이 나겠습니까? 민물을 떠서 맛을 보았으면 민물 맛이 납니다. 짜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입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입에서 단물과 쓴 물이 나옵니다. 혼돈 그 자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말이 나오는 마음, 그 심령 자체가 ‘두 마음’, 곧 ‘나뉜 마음’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혼돈의 근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떠나 그 안에 세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뉜 샘에서 나온 물은, 동시에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뉜 마음에 뿌리 내린 무화과나무는 올리브를 맺고, 이 두 마음에 뿌리 내린 포도나무는 무화과를 맺는 것입니다.
약 3: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한 입에서 찬송가 저주가 나온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마 4:4, 신 8:3).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혼돈스럽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신실하며 일관됩니다. 거짓이 없고,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풀과 꽃은 그 영광과 함께 시들고 없어지지만, 그분의 말씀은 ‘세세토록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으로 점철된 인간의 타락한 세상 속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고 그런대로 인정받는 교인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이웃을 향해 거짓을 일삼고 가증한 말과 분노의 말로 이웃을 괴롭히고 있다면, 여러분은 훌륭한 교인이고 그런대로 성공한 사람일지는 모르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끄럽고 실패한 시민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헌금과 봉사, 예배와 교육을 열심히 받아 인정받는 교인이 되었어도, 세상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믿을 만하지도 덕스럽지도 않다면 여러분은 교인일 수 있고 성공한 사람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 곧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지 않는 불법자요 하나님 나라의 불량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꽃입니다. 세상이 장차 맺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먼저 맺힌 곳입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놀랍고 아름다운 새로운 열매들을 세상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심을, 그들의 말과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하고 맛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통치, 그분의 나라가 펼쳐지는 그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보여 주지 않으면, 누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땅의 교회가 드러내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불렀던 그 찬양이 세상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 대한 축복과 신실한 말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나라 어디에서나 찬양은 계속 하나님께 올려져야 합니다.
√말의 회복
그렇다면,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가장 교란하는 이 혀, 이 말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말이 지혜와 지식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말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조차도 어떤 이단이 와서 성경을 풀어 주면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선거철마다 나와서 공약(公約)인지, 공약(空約)인지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남발하는 불량정치인들에게, 유권자들은 때마다 다시 쉽게도 속아 넘어갑니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목사가 강대상에서 설교는 그리도 유창하게 잘합니다. 그 안에 참된 복음과 진정성이 없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 말들 때문에 그런대로 속게 됩니다.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말들이지만, 그럴 듯하게 치장해서 말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런 말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1)말에 속지 않으려면?
야고보는 한 마디로 ‘말에 속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만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며, 결국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분간하라는 주문입니다. 말만 들어서는 모릅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속을 수 있고, 얼마든지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제어하려면, 그 말이 나오는 근원과 그 말이 함께 동반하는 특성들 그리고 그 결과인 열매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말을 다스리려면 우선 ‘분별력’과 ‘분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3절은 말을 할 때 그리고 말을 들을 때, 과연 어디에 촉각을 세워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말과 행실이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 지혜 있는 자입니까? 누가 잘 배우고 또 잘 아는 자입니까? 이 모든 것을 말로 쏟아 놓는 자입니까? 적어도 야고보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지혜롭고 유식한 말을 하기 전에, 그 자신의 행함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지혜롭고 유식한 말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의 행함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꼼짝없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말의 참된 의미는 그 행함에 있습니다.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라고 말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2:16) 이런 말들은 속이 텅 비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지혜와 선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지혜나 참된 지식은 원래 선하고 또한 아름다운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 곧 진선미가 서로 구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컨대, 참된 진리임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는 모습이 전혀 선하지 않고 악하다면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이념이나 주의 주장을 하는데, 전부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선한 행실이 따르지 않고, 하는 짓이 괴악하고 몰상식하고 추악하다면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것이 선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참되지 않다면 그리고 아름답지도 않다면 그것은 선한 것도 아닙니다. 선한 행실이라고 행한 것보다 더 크게 광고하며 오만 군데서 자랑하고 사진을 찍어댄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으로 전혀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선한 행실이라고 높이 숭앙받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하지도 참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말을 하면서 스스로 속아서도 안 되고, 말을 들으면서 속아서도 안 됩니다. 야고보는 어떤 지혜로운 말, 유식한 말을 듣거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행실을 보고 분간하라고 권면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를 주장하고 지혜로운 말을 하고 많은 지식으로 말하는데 그의 행실이 선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지혜나 지식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실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3절 전반부의 의미입니다.
√2)지혜의 온유함으로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절 하)
지혜의 온유함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 자체를 지혜라고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13절에서 지혜나 지식이 그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면, 온유함은 참된 지혜 자체라기보다는 그 특징이나 결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 진정한 지혜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그런 지혜는 항상 온유함을 특징으로 하고 온유함을 드러냅니다.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반대로 스스로 지혜라고 주장하는데 거기에 온유함이 아니라 독한 시기와 다투고 싸우는 기운이 충만하다면, 그리고 그런 ‘지혜’를 퍼뜨릴수록 더욱더 시기심이 발동하고 이기적 욕심이 자극되어 다투고 싸우는 일들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라든지 지식이라든지 단지 그것이 말로만 나타날 때 그것 자체로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지혜나 지식이 과연 어떠한 특징을 드러내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분쟁이 있을 때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모두가 부분적으로 맞는 소리를 합니다. 논리 정연합니다. 성경을 들이댑니다. 상식을 들이대고, 정당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주장들은 그런대로 다 맞는 것 같은데, 거기에 온유함이 빠져 있습니다. 다 듣고 나면 교회를 떠나고 싶어집니다. 다 듣고 나면 왠지 편을 갈라 싸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속이 상하며 혈과 육이 자극되고 시기와 분노와 저주의 말이 솟구칩니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그런 주장이나 그런 지혜나 그런 지식은 야고보가 말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결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혜는 언제나 온유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온유함과 함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3)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 성결합니다. 화평합니다. 관용합니다. 양순합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A.성결함(순전함)(하그노스)
a.1 화평(에이레니코스)
a.2 관용(에피에이케스)
a.3 양순(유페이테스)
√B.긍휼(엘레오스)
b.1 선한 열매(아가쏘스)
b.2 차별함이 없음(아디아크리토스)
b.3 위선이 없음(아뉘포크리토스)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은 성결(순결)과 긍휼로 특징지어집니다. 특별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화평은 순결하고 순전한 마음, 곧 세상에 의해 나뉘어 있지 않아서 결코 독한 시기나 다툼에 격동되지 않는 그런 심령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에 대해 관용과 양순함으로 화평을 지켜내며,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차별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은 참된 긍휼을 행하여 결국 풍성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의 열매’,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들 속에서 지혜 있는 자가 맺는 하늘의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을 들을 때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동기로 그런 말을 하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말들을 할 때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씻고 그분의 은혜와 진실함의 풀무에 넣었다가 꺼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제단 숯불에 데인 입으로 말을 했습니다(사 6:1~8).
사람의 말은 나오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 존전에 머물다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말씀의 풀무, 그분의 거룩하고 따뜻한 성령의 품속에, 그 은혜와 진리의 생명수에 충분히 젖어 있다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동반하는 영적 정서가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그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그 말이 나온 출처, 그 말이 창조되고 머물다가 걸어 나온 그 숨겨진 세상의 향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것이면 하늘의 향기가 나고, 그것이 지옥의 것이면 지옥의 불길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말만 보지 말고 그 말이 동반하는 영적 정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말은 오랫동안 주의 품에 머물다가 나온 말들 이어야 합니다. 거기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늘의 지혜의 이슬에 충분히 젖어 있다가 나와야 합니다. 마치 퍼석한 메주가 발효되어 구수한 된장이 되듯이, 마른 고춧가루가 충분히 숙성하여 맛깔 나는 고추장이 되듯이, 충분히 하나님 나라의 풍미가 배어든, 그 천국의 맛을 보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피스 메이커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가 가득한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