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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시집 해설
‘그때-거기’를 위한 노래, 혹은 새로운 현실로서의 신화적 세계
―박해성 시집, 우주로 가는 포차의 시세계
황치복
1. 과거의 시간, 혹은 ‘그때-거기’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해성 시인은 그동안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루머처럼 유머처럼, 중남미불면클럽, 판타지아 발해 등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모두 매력적인 시집들이지만, 특히 판타지아 발해는 인류학적, 혹은 고고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발해’라는 상징의 숲을 구축한 뛰어난 시집으로 기억할 만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우주로 가는 포차라는 매력적인 시집이 눈앞에 있다. 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시집을 해설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한편 한편이 시적 완성도와 개성이란 측면에서 모두 매력적인 작품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발하고 그윽한 상상력의 향연들이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싶고,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내고 있는 욕망을 자극하여 너무 많은 생각들로 들끓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간략히 서술하면서 항목을 많이 설정해서 박해성 시인의 이번 시집이 지닌 매력을 입체적으로 포착해 보고자 한다.
박해성 시인의 이번 시집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 그때, 거기, 혹은 미증유의 비현실적 현실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열정이다. 시인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열정에 함몰된 것은 물론 지금, 여기의 현실이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 저 백석 시인의 명제가 여기에서도 작동하고 있지만, 그런 명제에서 박해성 시인이 갈라지는 지점은 현실을 도피해서 산골에 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현실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고 가치 있는 것으로 빛을 발하게 할 그때, 거기의 세계, 혹은 환상의 세계를 가져와서 현실을 정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아름답지도 신비롭지도 않은 권태로운 현실에 생동감을 부여하여 반짝이게 하고,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균열과 간극을 만들어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현실을 인위적으로 생성하기 위해서 시인은 다양한 시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적 전략의 주요 항목으로는 현실에서 잠깐 일탈하여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여 현실에 덧칠하기, 사이버 공간으로 현실을 대체하기, 카메라 렌즈로 현실의 특정 국면을 포착하여 순간적 현실을 고정하기(카메라로 포착된 현실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극지, 혹은 극한의 공간으로 탈출하여 그것으로 비루한 현실을 대체하기, 마지막으로 신화적 사건들을 현실에 착종시켜 현실을 신화적 공간으로 변형시키기 등의 시적 전략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현실과 환상, 혹은 현실과 신화, 현실과 가공현실, 현실과 비현실적인 공간을 결합함으로써 따분하고 지루한 현실에 놀라운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에 복무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현실을 무화시키거나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가상을 덧씌움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일탈적 가상과 혼융된 현실은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지닌 또 다른 현실로서 시적 주체에게 놀라움과 생동감이라는 정동을 생성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적 전략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지만, 우선 과거의 시간으로 일탈하여 현실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현실에 덧씌움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는 몽상과 백일몽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가방 위에 그려진 소녀가 윙크를 한다
한손으로 하늘 높이 흔들고 있는 핑크색 모자 위로는
파란 글자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I am a girl’
나는 핑크모자가 없어 저 하늘을 날아 본 적 없는 걸
엄마야 누나야 강남 살자 졸라 본 적도 없는 걸
뱅뱅 우물 안에서 허우적대다가 솔잎이나 갉아 먹다가
불휘 기픈 나무 그늘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던 걸
어미의 머리채를 잡고 북처럼 두드리는 아비 앞에
언젠가는 면도날을 씹어 뱉으리라 벼르던 걸,
폼 나게 풍선껌을 부풀리며 야반도주를 꿈꾸던 걸
이번 정거장에서 가방은 내렸다, 흔들리는 시내버스 안
차창에 비친 산전수전이 불쑥 묻는다 - Are you a girl?
느닷없는 질문에 쩔쩔매는 걸 – I’m fine, and you?
우문우답이 무안해 시간의 뒷골목으로 달아나는 걸,
네 생일인데… 얘야 도시락에 달걀프라이를 싸줄까,
씨암탉으로 키워서 참외밭을 사자구요, 없는 건 많고
있는 건 없는 열일곱 살이 잘근잘근 손톱을 깨문다
달걀프라이만한 달이 뜬 하늘 아래 사춘기가 훌쩍인다
스톱 스토오옵 내려요, 창가에 달린 빨간 벨을 꾸욱 누른다
울컥, 버스가 선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한 걸,
―「 I am a girl.」, 전문
시집을 펼치면 나타나는 첫 작품으로 이 시집의 방향성과 특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도는 매우 단순해서 시내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가방에 그려진 소녀의 윙크하는 모습을 보고, 소녀시절이었던 자신의 사춘기를 회상하는 구도이다. 물론 그 사춘기 시절이란 풍족하거나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빈곤과 결핍에 허덕이고, 소외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일탈과 엑소더스를 꿈꾸던 시절, 그 아득하고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처럼 갑자기 현실을 벗어나 소녀 시절을 꿈꾸던 시적 주체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신이 뜬금없이 사춘기 시절을 회상하는 모습이 엉뚱하고 유치하게 보이는 자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핍과 소외, 부조리로 가득 찼던 유년의 시절은 매우 끈질기게 시적 주체의 상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데, 그리하여 그녀는 버스 정거장을 지나칠 듯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과거의 사건들을 회상하는 기제로서 반복되는 ‘걸’이라는 음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걸’이라는 기표는 걸(girl)을 의미하면서 사춘기 시절의 유년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했던 것을’의 준말로서 과거의 특정한 사건들을 환기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시는 걸(girl) 시절에 경험했던 다양한 ‘것을(event)' 현실적 공간으로 가져옴으로써 지루하고 권태로운 현실의 공간에 생동감을 부여하며 역동적인 정동이 파동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핍과 빈곤, 그리고 소외와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현실에 생동감을 부여하게된 것은 시간의 힘일 것이다. 시간은 거칠고 폭력적인 과거의 경험을 순화하고 정화하여 독특한 아우라(Aura)를 부여한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혼재하는 현실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그것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상황을 돌파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이처럼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복원함으로써 단조로운 현실을 갱신하는 이러한 시도는 이 시집에 곳곳에 편재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시간이란 반드시 실제로 발생했던 경험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상상적 구성물 또한 그것의 내용물을 이루기도 한다. 「곰탕이 끓는 동안」에서는 곰탕이 끓는 시간 동안 상상속의 “그이”가 “새로운 행성에서/계율을 어기고 마고할미와 불륜에 빠졌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우주로 가는 포차」에서는 “방파제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주저앉은 포장마차”를 보면서 스무 살 청춘 시절에 있었던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 장면이라든가 그 시절 빠져있었던 “랭보”라든가 “체 게바라”에 대한 열정을 떠올리기도 한다. 또한 「파이」라는 시에서는 신문의 사회면 기사를 읽다가 몽상에 빠져들어 녹아내리는 듯이 축 늘어진 “달리의 시계”를 연상하다가 이어서 보르헤스의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라는 작품을 패러디하여 “황제에게 꼬리치는 것, 뱀피구두를 신은 것, 훈련 된 것,/ 다족류, 발광하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 방금 막/신을 버린 것, 들여다보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것들,/백과사전에도 없는 것, 토마스 핀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거북이족, 천둥벌거숭이, 데스페라도 기타*등등”이라는 낯설고 기괴하고 연상작용에 빠져들기도 한다.
시인이 수시로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촉발되거나, 어떤 사건이나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과거의 생생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회상하거나 독특하고 기괴한 몽상에 빠져드는 것은 지루하고 자질구레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자잘한 시간에 낯설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든가 이미지를 끌어들여 와서 그것을 새롭게 갱신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다음 작품이다.
가을꽃축제가 흐드러진 이곳은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먼지와 악취, 연기가 다스리는 부패의 왕국
누가 잃어버렸거나 누가 버린 것들이 불귀 불귀
제 뼈와 살을 다 바쳐 번제를 지내는 곳
코스모스가 일렁인다, 살려줘 살려줘 응애응애
야아옹 우우우우 사라진 것들이 이명처럼 맴돈다
피 묻은 청바지, 꺾어진 붓, 시든 장미, 깨진 장난감,
봉투도 뜯지 않은 시집, 콘돔, 생선 대가리,
누군가의 손가락, 팔, 다리, 누가 끌안고 살던 꿈, 노래…
여기는 드림파크 망각의 유토피아,
샛노란 아기해바라기들이 까르르 까르르
목젖이 다 보이도록 깔깔거린다
꽃투성이 코끼리가 성큼 카메라 속으로 들어선다
- 몸이 온통 꽃밭이니 고통조차 환하구나, 나 혼자 중얼중얼
앵글을 돌리니 곧 승천할 듯 꼬리를 곧추 세운
거대한 용이 포효한다, 작은 사슴뿔에 비늘 대신 꿈틀꿈틀
황금빛 국화가 용틀임인데 세상에, 여의주가 너무 크다
- 저걸 물고 어찌 날아가누? 저러다 추락해
이무기로 사는 건 아닐까 몰라 별걱정을 다 하다가
그래, 여기는 드림파크, 꿈이 꿈을 꿈꿔도 좋은 꿈의 천국
-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나는 벤치에 앉아 발장단을 치며 사과 한입 베어문다
―「드림파크」, 전문
서울의 하늘공원과 마찬가지로 생활과 건축 쓰레기를 매립하여 이루어진 인천의 드림파크는 도시적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대변해준다. 이 시의 세 번째 연에서 언급되고 있는 잡동사니들, 즉 “피 묻은 청바지, 꺾어진 붓, 시든 장미, 깨진 장난감, 봉투도 뜯지 않은 시집, 콘돔, 생선 대가리” 등등의 자질구레한 사물들이 현대인들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사물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과 같은 평범하고 진부한 삶의 양식인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일상의 사물들이 지배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에 대해서 “먼지와 악취, 연기가 다스리는 부패의 왕국”이라고 정확히 진단하면서도 그것을 재해석하여 “제 뼈와 살을 다 바쳐 번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하면서 제의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만다. 쓰레기더미로 이루어진 드림파크, 혹은 현대인의 삶의 공간이 제의의 제단이 되자 그것은 어떤 성스러움을 지닌 영역이 되면서 세속적이고 진부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드림파크’라는 기표가 공허한 기표가 아니라 적절한 기의를 내포한 것으로 바뀌면서 “꿈이 꿈을 꿔도 좋은 꿈의 천국”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카메라를 들어대자 드림파크는 환상의 공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곧 “승천할 듯 꼬리를 곧추 세운/ 거대한 용이 포효”하는 상상속의 공간으로 변하기도 하고, “황금빛 국화가 용틀임”을 하는 역동적이고 찬란한 “유토피아”와 같은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적 주체는 쓰레기 매집장인 이곳이 곧 “망각의 유토피아”이며 “꿈의 천국”이라고 명명하며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상상을 한다. 쓰레기 매립장이 곧 꿈의 천국이고, 유토피아라는 것은 곧 자질구레한 일상이 곧 드림파크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잡다한 욕망과 사건으로 얼룩진 일상의 공간에서 잊어버린 유토피아를 발견하고 꿈의 천국을 찾아내는 셈인데, 이러한 구도는 시인이 시적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비루한 현실과 신비한 꿈의 세계, 혹은 진부한 일상과 특별한 과거라는 이원적 대위법이라는 시적 발상과 시적 구도를 표상해준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이러한 대립적 구도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장면은 10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마포」라는 작품들일 것이다. 시인의 과거 유년기와 사춘기의 추억을 담고 있는 듯한 마포라는 공간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시인 백석의 「여우난골족」 등의 작품들이 구축한 우리 민족의 원형적 삶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문명에 때 묻지 않고 자연과 운명, 그리고 관습과 천성에 따라서 살아갔던 과거의 전근대적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있다. 시인이 그려내는 “마포”에는 “곰보다 힘이 센 사내”(「마포1」)가 등장하여 욕망이 시키는 대로 노름판과 화류계에 빠져 시간을 탕진하는 삶이 있고, 이복 자매의 따스한 공감의 세계(「마포4」)가 있으며, 양공주 언니를 둔 끝순네(「마포6」)의 안타까운 배고픈 시절이 숨어 있기도 하다. 또한 엄마가 텍사스 골목에서 술장사를 했던 사내아이와 열병과 같은 첫사랑을 앓았던 시인의 “열 세 살 초가을”(「마포7」)이 있으며, “동춘 서커스”단의 단원이었던 “눈빛 맑은 청년”(「마포8」)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한 소녀가 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밤톨만한 한강의 섬에 살던 젊은 어부와 딸을 낳은 열여덟 살의 달래(「마포9」)가 살고 있었는데, 어부는 홍수에 떠 내래가 실종되고, 달래는 반미치광이의 무당이 되어 다시 마포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마포 연작의 성격과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은 「마포10」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이 검게 타들어갔다, 달이 붉게 물들었다
눈먼 스라소니처럼 웅크렸던 제금소리가 발작인 듯
소스라쳤다 하얀 서리화가 핀 굿청, 언월도가 번쩍였다
너나없이 가난이 부스럼처럼 만발하던 시절
아이들은 예의바르고 어른들은 정직했다
착한 아비들은 무능했고 아해들은 소꿉장난인 척
뒷동산 흙을 파먹었다, 감자를 삶다 맨발로 달아난
바우네 큰누이는 기지촌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다
열일곱 살 딸의 시신을 끌안고 실신한 어미는 그날부터
베개를 들쳐 업고 실성실성 아래 윗마을로 쏘다녔다
당골네 굿판에 온 동네가 들썩였다
시루떡을 얻어들고 히죽거리던 삼대독자 바우는,
밤새도록 신이 나서 안팎으로 드나들던 내 동무는
다음날 샛강 방죽에서 졸다 물에 빠져 죽었다
낯선 행성을 전전하며 나는 살아남았다
돌아와 보니 거기, 울울창창 아파트 숲이 도도하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마을에서 치성 드리던 당산나무를 찾았는데…
바우 아부지가 목을 맨 줄기에는 잔가지가 무성했다
신줏돌 자리에는 수령 250년
‘보호수’라 쓴 번듯한 빗돌이 떠억 버티고 있었다
―「마포 10」, 전문
이 시의 시적 공간은 아련한 추억과 아름다운 과거의 시간이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적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몰락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우네 큰 누이는 기지촌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고, 바우는 “다음날 샛강 방죽에서 졸다 물에 빠져 죽”는다. 그리고“열일곱 살 딸의 시신을 끌어안고 실신한 어미”는 실성해서 위아래의 마을을 쏘다니며, 바우 아버지는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당산나무 줄기에 목을 매에 자살한다. 죽거나 미치거나 자살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서 한 가족이 파멸해가는 과정의 서사가 시적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슬픔이라거나 고통 등의 인간적인 감정으로부터 초탈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시적 효과는 그러한 비극적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을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시적 전략에서 나온다. 시인은 비극적인 서사의 공간을 샤머니즘적인 운명론적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바우네 가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마치 자연의 운행의 일부인 것처럼 취급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의 비극적 역사를 감싸 않는 수령 250년의 시간을 담고 있는 “보호수”를 내세움으로써 그러한 인간의 역사란 지극히 찰나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자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도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비극을 상대화하여 희석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250년이라는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보호수에 흡수되어 바우네 가족의 비극적 역사는 자연의 일부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과거의 시간, 전근대적인 삶의 방식이 작동하던 사춘기의 시간을 복원함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러한 시적 전략에는 아마도 우리의 문화적 유전자에 담겨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삶의 원형적 모습에 대해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결핍을 모르는 시대, 과시소비와 같은 가짜 욕망에 탐닉하는 시대, 이성과 합리의 가면을 쓰고 모른 채 하고 있는 우리의 근원적인 토대로서의 야생성과 잔혹성, 그리고 천성과 자연성 등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물론 천편일률적인 현대 도시 생활의 얄팍하고 무미건조한 삶의 방식을 개선하고 갱신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목적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단조로운 현실에 과거의 시간과 꿈, 환상과 몽상의 이미지를 가져와 혼종시키는 시적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사이버 공간,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인이 과거의 시간과 상상의 이미지를 현실 공간에 틈입시켜 혼종의 현실을 만드는 것은 계기적이고 선조적인 흐름, 그것도 시계에 의해서 정확하게 측정되어 흐르는 시간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과거의 회상이라든가 현실의 시공을 벗어난 환상의 도입은 균질적이고 질서정연하게 흐르는 현실의 시간을 무너뜨리고 이질적인 시간이 같은 공간에 존재함으로서 생기는 다양한 혼란과 착종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한 시간 질서의 붕괴는 단조로운 일상의 붕괴라고 할 수 있으며, 예측 가능한 합리적 질서의 교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파괴와 교란을 통해서 시인은 진부한 현실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독특한 시공으로서 그곳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현실에 덧붙이게 되면 현실의 질서와 규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시공이 탄생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바로 신화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컵과 컴 사이 종이고양이가 산다. 활짝 웃고 있는 그이는 수미산 북쪽 울단월이라는 땅에서 왔다는데 그곳에 사는 이들은 살아 천년을 누리고 죽어서는 복사꽃 동산에 환생한다는데 빨강리본 고양이가 ‘Happy Birthday!’라고 쓴 풍선을 번쩍 들고 있는 것은 그이가 무사히 환생했다는 암호일지도 모르는데
컵과 컴 사이 플라스틱 돼지가 산다. 시도 때도 없이 공양 받는 동전에 만성소화불량인 분홍돼지는 철륜왕이 다스리는 남염부제 출신, 거기는 히말라야 설산과 갠지스, 인더스 같은 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는데 어느 생인가 그는 구름수레를 타고 절경 속에 노닐다가 벼락을 맞아 펄펄 끓는 불가마에 떨어졌다는데 그러나 다시 태어난 그이는 무슨 연유인지 다리가 없는데
컵과 컴 사이 섬유근육통이 산다. 오른쪽 검지가 반란을 일으켜 왼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는 혁명의 저녁이 산다. 빈 컵을 들었다 놨다하는 맹물 같은 이녁이 산다. 그네는 구월산 신단수 아래 천구백여덟 살에 돌아가신 신의 핏줄이라 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많다는데 주검의 살점을 쪼는 천산의 독수리처럼 컵과 컴 사이를 배회하는 수상한 그 자는 밤마다 부처인양 앉은 채로 삼천대천을 주름잡는다는데 ―「C와 C 사이」, 전문
빈 컵의 세계와 컴퓨터의 세계란 곧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적 주체는 “빈 컵을 들었다 놨다하는 맹목 같은 이녁”에 살면서 “왼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가상의 공간으로 일탈을 감행한다. 그런데 맹물 같은 이녁과 달리 가상의 세계는 온통 원시불교의 거대한 상상력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현실화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즉 그곳은 “수미산 북쪽 울단월”이라는 공간이 등장하고 “살아 천년을 누리고 죽어서는 복사꽃 동산에 환생한다는” 설화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현실 공간이란 아무리 넓어도 유한한 곳이기에 “빈 컵”과 같은 좁은 공간이라 할 수 있으며, 사이버 공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불교적 상상력에서 제시하는 무한한 수미산의 세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이버 세계, 혹은 “삼천대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유한한 현실의 논리로 포착하기 어렵기에 신들이 거쳐하는 세계의 논리를 대변하는 신화적인 사고가 또한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주검의 살점을 쪼는 천산의 독수리처럼 컵과 컴 사이를 배회하는 수상한 그 자는 밤마다 부처인양 앉은 채로 삼천대천을 주름잡는다”고 한다. 컵과 컴 사이를 배회한다는 것이 곧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넘나든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는 현실 공간에 가상공간의 도입하는 것이 초래하는 효과를 지칭한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 실재와 가상 등의 인위적인 구분을 뛰어넘어 그것들을 포용하고 초월하는 어떤 드넓은 세계를 상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불광 혹은 발광 너머」에서는 사이버 공간이 차안과 피안을 연결하는 매개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설정을 볼 수 있다. 즉 “피안과 차안을 넘나드는 발 없는 말”이라는 표현이라든가 “삼천대천 다 통하는 화통 쾌통 5G시대”라는 표현들이 사이버 통신망의 발전이 초래할 미래의 한 모습을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에서도 “발광發光하는 창힐의 뒤통수를 치셨나요?”라는 구절을 통해서 신화시대 문자를 발명했다는 신적인 존재인 창힐을 내세우면서 사이버 공간을 신화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다. 또한 「배꼽에 대한 단상」이란 작품에서는 “눈뜨면 습관적으로 휴대폰 배꼽을 누르지요”, “그래서 이제는 전화기를 ‘어머니’라 부르고 싶어요”라는 구절을 통해서 사이버 공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현실적 삶의 토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휴대폰에게 “밤사이 세상엔 별일 없었나요?”라고 묻자, 어머니인 휴대폰은 “유디트가 잠든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구나, 카라바조를 조심해”라고 하면서 갑자기 시적 공간을 구약에 나오는 베투리아 마을의 과부로서 아시리아 군이 공격할 때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인하여 그 목을 잘라가지고 돌아왔다던 유디트가 활약한 구약시대로 인도한다.
사이버 공간이 무시간의 공간이라는 것, 그래서 시간의 계기적이고 선조적인 질서를 붕괴시키는 특성을 지닌 현실과는 매우 이질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이버 공간의 도입은 질서정연한 현실의 공간에 균열과 간극을 마련하고, 그러한 카오스적 공간은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성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데, 「생쥐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은 사이버 공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려지는 것과 같은 환상의 공간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어둠이 낳고 음력이 키워낸 달이 모니터에 걸려있네”라는 첫 구절은 사이버 공간이 지닌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성격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간을 현실에 도입하는 것은 곧 현실을 마법과 환상 같은 동화적 세계와 착종시키고 그러한 작업은 현실의 매너리즘과 진부함을 깨부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3. 카메라 속의 세상, 재구성된 현실 혹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
박해성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카메라 앵글과 관련된 용어를 비롯하여 유독 사진과 관련된 전문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특정한 국면에 대해서 사진을 찍는 장면들이 빈발한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시인의 사진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 대한 변형을 꿈꾸는 시인의 시적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곧 카메라의 앵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며, 실재의 현실에 어떤 변형을 가하는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 앵글로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특정한 현실에 대한 선택과 배제가 포함된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특정 부위가 앵글 속으로 들어오고 그렇지 않는 부분은 앵글 밖으로 사라진다. 현실 그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체의 선택에 의해서 현실이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앵글 초점의 확대와 축소를 통해서 실재는 육안으로 볼 때와 달리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면서 변형이 일어난다. 또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시간을 분리하고 공간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계기적 흐름의 시간성을 무화하고 현실의 특정 국면을 영원한 현재에 머물도록 한다는 점에서 시간성의 무화를 통해서 현실을 변형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리하여 사진 속의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한 현재를 실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속성을 바로 신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인해서 현실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새롭게 창출될 수 있는지를 다음 작품이 잘 보여준다.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미라가 된 물고기를 만났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 저도 몰래 솟구쳤을까
투명한 관棺속에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어
머잖아 태어날 태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천 이백년 전에 죽은 미라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이때 겨울 강을 무어라 불러야 하니,
신성한 무덤? 물의 자궁?
지금 내가 그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야, 고로 연민 따위 생략하고
접사接寫로 다가서기로 했어 이 순간
앵글은 담담해야 마땅하지, 얼마나 추웠느냐
얼마나 외로웠느냐 묻는 대신 반셔터를 누르고
호흡을 참는거야, 죽은 자 아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침묵 밖에서
아웃포커싱 되는 배경은 관념적이어도 좋아
대한大寒강가에는
노숙으로 뼈가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지
나도 그이처럼 겨울 강을 바라보며 오래 서 있었으나
아무도 아프냐고 묻지 않았어 찰칵, 착각
셔터소리에 열리거나 닫히는 풍경 속이었어
―「두물머리」, 전문
물론 “얼어붙은 강바닥에 미라가 된 물고기”라는 풍경은 사진 속의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결의 흐름이 멈춘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진에 포착된 풍경과 유사한 속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바닥에 미라가 된 물고기란 계기적 선조성을 무화하고 찰나의 순간을 영원화 하는 사진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미라가 된 물고기는 “머잖아 태어날 태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천 이백년 전에 죽은 미라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미라가 된 물고기가 있는 겨울 강은 “신성한 무덤”이기도 하고 “물의 자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이라는 것도 실은 삶과 죽음의 공존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특정한 시점의 어떤 현실을 포착하여 항구화하는 작업이기에 영원한 삶의 한 형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계기적 흐름의 지속이라는 생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절단하여 제거했기 때문에 죽음의 형상이기도 한 셈이다. 그래서 강물의 흐름이 멈추고 미라가 되어 고정되어 있는 물고기는 바로 이러한 사진의 속성을 대변해주는 하나의 은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시적 공간에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풍경은 사진의 셔터를 눌렀지만, 아직 찍히지는 않고 있는 상태 즉 ‘반셔터를 누르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셔터를 누르기는 했지만, 아직 피사체가 포착되어 고정되지 않는 상태, 즉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그 중간의 어떤 미규정의 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카메라라는 장치가 새롭게 창출한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대한(大寒)의 강가에서/ 노숙으로 뼈가 늙은 느티나무”와 겨울 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사실은 사진 속에 들어가 있다. “셔터소리에 열리거나 닫히는 풍경 속이었어”라는 구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적 주체는 늙은 느티나무와 함께 겨울 강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사진이 창출한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미라가 된 물고기가 있는 겨울 강이 사실은 사진이 창출한 새로운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처럼 창출된 세계란 “찰칵, 착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착각과 같은 왜곡과 변형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현실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사진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혹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비현실의 현실을 창출하는 기제로서 시적 주체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매개물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찰칵, 착각」이라는 작품에서는 상사화를 찍으러 가서 상사화를 찍으면서 실은 상사화가 환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사의 상념을 찍는 것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사진이 사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풍경에서 야기되는 내면 풍경을 찍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비명도 없이 찰칵, 매크로렌즈에 갇히는 기다란 속눈썹이/찰칵, 사무치도록 붉어서 찰칵, 방울방울 유혹이어서 찰칵,/想思가 난치병인 줄 찰칵,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찰칵,/꽃 속에 파묻힌 돌부처는 찰칵, 여전히 묵언 삼매경이어서/찰칵, 나는 앵글을 돌리는 척 찰칵, 슬픔이나 살피는 것이어서/찰칵, 도끼로 발등을 찍듯 사진만 찍네, 찰칵, 찰칵, 착각, 착각,”라는 구절을 통해서 시적 주체는 상사화를 찍으면서 실은 내면의 복잡한 심경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의 “찰칵, 찰칵, 착각, 착각,”이라는 구절은 역시 사진을 찍는 작업은 하나의 “착각”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것, 곧 현실의 왜곡과 변형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사진이 현실에 대한 왜곡이고 변형이기 때문에 「새는 사라지고 하늘은 텅 비었고」라는 작품에서는 툰드라에서 날아온 고니를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숲속에서 과거의 시간들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적 주체는 숲을 관찰하다가 숲속에서 “양잿물을 삼키고 피를 토하던 귀남이 누이가 따라온다 전나무에 목을 맨 재당숙네 첩실이 따라온다 열길 우물에 빠져죽은 바우엄마가 따라온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더 큰 날개를 퍼덕이고 나는 죽어라 달아나도 제자리인데 칡넝쿨에 발목이 턱, 걸렸는데”라는 백일몽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사진찍기라는 작업은 시간 질서의 붕괴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숲속의 풍경과 과거의 추억을 오버랩 시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수용되는 것이다.
사진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현실은 매혹적인 것이며, 유혹적인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서쪽으로, 서쪽으로」라는 시에서 서쪽의 세상을 상상하면서 “거기, 어둠으로 닦아 낸 별빛에 눈이 시린 땅/ 찰각, 착각, 명랑한 카메라가 묻겠지, 우리 여기 살래?”라고 하면서 카메라가 창출한 피안의 세계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포착한 서쪽의 세상이란 “치매를 따라가 돌아올 줄 모르는/ 울어메가 사는 나라”라는 점에서 그 신비하고 비의적인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는 놀라운 기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왜 시인이 그토록 카메라의 세계에 주목하는지를 알 수 있다.
4. 극지, 혹은 극한의 공간적 상상력
오아시스가 만든 그 나라에는 사람의 얼굴에 익룡의 날개
표범의 발톱을 가진 영물이 살고 있다 전해지는데
안개 같은 지느러미로 허공을 나는 물고기라 하기도 하고
모래바람처럼 갈기를 휘날리는 맹수라 하는 이들도 있고
그것이 가릉빈가라거나 혹은 염라국 왕자라는 풍문도 돌았지
―「투루판 가는 길」, 부분
극지, 혹은 극한의 공간이 새로운 현실을 창출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산해경의 그 기괴하고 상상적인 동물과 풍물에서 알 수 있듯이,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어떤 극한의 공간은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독특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환상의 공간과 사물들을 창출해낸다. 이 시에서 “익룡의 날개”와 “표범의 발톱”을 지닌 영물은 “가릉빈가‘라는 상상의 동물일 수도 있고, ”염라국 왕자“일 수도 있을 정도로 그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부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 톈산산맥이라는 거대한 고원지대가 야기하는 무한한 상상력과 신비로운 자극으로 인해서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기괴하고 경이로운 어떤 현실이 창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이 이를 더욱 잘 보여준다.
파미르고원 접경에 도착했다
흉노공주와 이리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위구르족의 자치구,
총을 멘 군인들과 붉은 완장들이 앞을 가로 막는다
몽둥이가 늘어선 검색대를 벌벌 통과한다, 여권을 코앞에
대조하고 신발까지 벗기는 황당한, 무례한, 불쾌한,
다시는 오지말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천산산맥 자락
해발 2000m 호수 앞에서 불온한 결기는 무장해제 당한다
비단 같은 운해를 허리에 두른 설산 아래 늙은 가이드의
구전설화가 신의 치마폭처럼 수면에 일렁이는 사리무호,
해맑은 이마에 물방울이 맺힌 야생화가 함부로 눈물겨운데
당신은 내일 아침 떠난다, 떠나겠다 말한다
들은 듯 못 들은 듯 나는 마른 살구만 씹는다
낡은 파오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양고기를 굽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새도록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
는개비는 내리고 잠자리는 눅눅하고 꿈자리는 발이 푹푹 빠지고
이국의 무녀가 알비노 염소 피에 절인 도마뱀 눈알과
전갈의 혓바닥, 지네 발톱을 갈아 마구 휘갈긴 부적을 내민다
언뜻 퇴마록에서 본 듯도 한 저 발칙한, 저 요망한
으슬으슬 눈을 뜨니 덜렁 혼자다, 춥다, 뼈가 시리다
속울음처럼 들려오는 빗소리, 아아 빗소리, 이 비가 그치면
나 또한 떠나리라, 남염부주 대궐 북쪽 붉은 산으로 가리라
화답인 듯 천둥 친다, 하늘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한다
―「우루무치에서 석양까지 달려」, 전문
태양신의 자리라는 어원을 지닌 파미르 고원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고원을 말하는데, 히말라야 산맥 북서쪽으로 평균 높이 3500~4500m로서 톈산 산맥, 알라이 산맥, 쿤룬 산맥, 힌두쿠시 산맥 등이 뻗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그야말로 신들의 거주지로 적합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들의 거주지로 적합하기에 흉노공주와 이리 사이에서 위구르족이 태어났다든가 사리무호에는 “늙은 가이드의 구전설화가 신의 치마폭처럼 수면에 일렁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이국의 무녀가 알비노 염소 피에 절인 도마뱀 눈알과/ 전갈의 혓바닥, 지네 발톱을 갈아 마구 휘갈긴 부적을 내미”는 행위 또한 적절하게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적 주체가 “이 비 그치면/ 나 또한 떠나리라”라고 선언하면서 그 목적지로 “남염부주 대궐 북쪽 붉은 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염부주란 불교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공의 지리로서 수미산 남쪽에 있다는 대륙인데 인간들이 사는 곳이며, 여러 부처가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하나인 이곳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적 주체가 떠나겠다고 한 남염부주란 상상적인 공간으로서 현실 너머에 있는 피안의 어떤 이상적인 대륙인 셈인데, 시적 주체는 파미르 공원이라는 차안에서 피안인 그곳을 향해 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가능한 것은 파미르 공원이 인간의 거주지보다는 신의 거주지로 적합하다는 것, 그래서 그곳에서는 도시의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극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에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미국 남동부의 고지대 사막을 배경으로 한 「모하비」라는 작품에서는 “왼쪽 팔뚝을 꿈틀꿈틀 타고 오르는/검푸른 용” 문신을 하고 있는 야성적인 사내를 보면서 그에서 “사과조각이 목젖에 걸린” 아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모하비라는 극지의 사막이 야기한 효과일 것이다. 사막은 시적 주체를 어떤 근원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근원인 아담을 호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베리아의 북극 가까이에 있는 앙카라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앙카라 강가에서」라는 작품에서는 그 동토의 눈보라에서 “푸른 용이 허연 입김을 내뿜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도도하게 흐른 강에서 “삼천년 묵은 이무기”를 상상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것은 모두 북극이라는 그 지리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강과 강 사이 작은집들이 전생인양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대목을 보면, 역시 극지라는 공간은 현실 너머의 어떤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극지가 야기하는 이러한 초월적이고 비의적인 세계에 대한 상상은 현실의 비루함과 속악함을 단숨에 극복하여 우리를 어떤 근원적인 지점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5. 영원한 현재, 혹은 신화적 세계
박해성 시인의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현실에 수시로 개입하는 신화적 세계일 것이다. 시인이 현실에 도입하는 신화는 그리스로마의 신화에서부터 인도와 중국의 신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신화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수시로 출몰하기에 현실과 신화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신화라는 것이 그리 먼 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상주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인은 인천의 한 시가지를 걷다가 쇼윈도의 향로에서 “황금빛 새가 동공 속으로 사라지는”(「미추홀은 안녕해요」) 가상의 풍경을 보기도 하고 깨어나는 미추홀과 백제의 초기 왕국인 비류 왕국을 상상하기도 한다.
또한 “포보스 외신을 사칭하는 자들은 테베의 무녀가 그 사내의 변심한 애인이라고 함부로 떠들었다. 사실 아름다운 그녀가 페니키아 문자로 점을 치거나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춤을 추면 남자들은 접신된 듯 사랑에 빠져들었으니…”(「보르헤스 식으로」)라는 대목을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공포의 신인 “포보스”라든가 “테베의 무녀”, 그리고 “종려나무 잎” 등의 신화적 연상물들이 자연스럽게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율도국에 갈 때는 상비약이나 보험을 챙기세요」라는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일상과 신화가 결합되어 있는 형국을 암시하고 있는데, “신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국사봉”이라든가 “영원이 산다는 율도국”이라는 표현, 그리고 무릉도원과 샴발라 등의 어휘들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이상향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기도 한다.
시인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상의 그것이 되어 있기에 평범한 행운목을 보고서도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고구려 무희와 청룡을 타고 야반도주 했었더냐 그대/ 천마총 백마를 몰고 신의 사냥터를 누볐더냐 그대/ 구백 살 바람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딸을 낳는 동안/ 소식 한 자 없는 이녁을 기다리던 나는/ 꽉 잠긴 그대 문 앞을 오래 서성였노라/ 부치지 못 한 편지를 불살라 강물에 띄웠노라”(「꽃멀미」)라는 대목을 보면 신화를 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화가 우리 곁에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인은 곤륜산에 산다는 선계의 성스러운 어머니인 서왕모의 신비스러운 복숭아를 훔쳐 먹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면서 “한평생 헤맸더니 다리도 풀리고 배고 고프네요”(「무릉도원행」)라고 하면서 “무릉도원”이라는 신화적 공간인 유토피아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바로 곁에 있는 신화적 세계라는 의식을 다음 작품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뻥튀기를 사와야지, 병원을 가던 중이었어요, 때는 물론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스의 갑옷을 물려받은 후의 일이죠
공사중! 붉은 테두리의 삼각 팻말이 완강하게 막아서는데요
얼핏 보니 하수도관 뚜껑이 열려있는데요 풍문으로는
그 안에 머리 아홉 개 달린 이무기가 산다는데요 하데스의
개를 키운다는데요, 나는 지금 내 안의 하수도를
점검하러 가는 길이라 그 구멍의 침묵이 궁금했는데요
길은 암흑 속 그들의 배설물 같은 게 질척질척한데요
용감한 시민들이 발자국을 콱콱 찍으며 지나가는데요
형광색 화살표를 따라 나도 골목으로 들어섰는데요
좁다란 미로에는 화살표가 끊일 듯 이어졌어요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파괴되고 창녀 프리네에 의해
복원되다’라는 글이 새겨진 테베의 성벽 같은 축대가
나타났지요 거기, 그녀의 머릿결처럼 흘러내린 능소화가
이글이글 타올랐어요, 아마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라도
꽃에 취해 행복하게 항복했을 것 같은데요?
푸른 마스크를 쓴 의사는 팻말도 경고도 없이
내 창자 속을 염탐 중인데요, 내 안의 천길 동굴 속에서
외눈박이 키클롭스가 깨어나 화를 내면 어쩌죠?
순순히 무릎을 꿇으면 세상살이가 좀 편해질까요?
열두 번 죽음을 건너 고향에 돌아 온 이타케 섬의 전사처럼
운명의 추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분의 황금저울 위에서
나는 어질어질 흔들리고 있어요, 뻥튀기고 뭐고 다 잊은 채
―「뻥튀기를 위한 일리아드」, 전문
“오딧세우스”와 “아킬레스의 갑옷”,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두 번째 모험에서 물리친 히드라는 연상시키는 “머리 아홉 개 달린 이무기”, 제우스, 포세이돈과 함께 세상을 삼분하고 있는 지하의 신 “하데스” 등의 어휘들은 모두 저 호머가 일리야드와 오딧세우스에서 그려낸 신화적 세계를 복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좁다란 미로”는 그리스 최고의 건축가인 다이달로스가 구축했다는 미로를 연상시키고,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파괴되고 창녀 프리네에 의해 복원되다’라는 글이 새겨진 테베의 성벽”이라든가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 그리고 “외눈박이 키클롭스” 등의 구절들은 역시 저 호머의 신화적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적 세계가 어디서 출몰하는가? 건강검진을 위해서 병원에 가는 공사중인 길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화적인 세계란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의 도시의 골목에 스며들어 있는 세계인 셈이다. 그리고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이러한 신화적 세계는 곧 내 몸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즉 테베의 성벽이라든가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 그리고 외눈박이 키클롭스 등의 대상들은 모두 “내 안의 하수도”, 혹은 “좁다란 미로”인 “내 창자 속”의 세계인 것이다. 물론 “푸른 마스크를 쓴 의사”가 그 신화적 세계를 염탐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도는 내안의 신화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즉 신화적 세계란 멀리 떨어진 어떤 이국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신화적 세계란 곧 내 몸 안에서 유구하게 전승된 육체적 DNA로서 영원히 후손들을 통해서 전승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신화적 세계란 바로 우리 곁에 있으며, 더욱 가깝게는 우리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적 세계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시적주체는 건강검진을 위해서 병원을 찾아가고, 병원에서 의사에게 내시경 검진을 받는다. 이러한 행위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정례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병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킬레스의 갑옷을 상상하기도 하고, 머리 아홉 개가 달린 히드라는 괴물, 그리고 하데스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테베의 성벽을 연상하며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를 떠올리기도 하며, 외눈박이 키클롭스가 자신의 창자 속에서 잠들어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상과 경험은 단순히 건강검진을 위해서 병원을 방문하고, 병원에서 내시경 검진을 받는 일상적 경험을 놀라운 세계의 경험으로 변모시킨다.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평면적이고 표면적인 삶의 경험에 입체성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그것이 되도록 한다. 시인이 현실에 신화적 세계를 끌어들이거나 언제나 신화적 세계로 비상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혹적인 박해성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특히 진부한 현실을 갱신하는 시적 전략에 초점을 맞추어 그 방법과 효과를 조감해 보았다. 그 시적 전략의 주요 항목으로 현실에 과거와 환상의 내용물을 중첩시키기, 그리고 사이버 공간과 현실의 공존을 통한 대비효과를 증폭시키기, 현실의 특정한 국면을 선택하고 그것을 영원화 하는 전략으로서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 바라보기, 극지의 경험을 통해서 초월적 현실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적 현실에 신화적 세계를 중첩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적 전략들은 모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면서 우리를 ‘지금-여기’가 아니라 놀라운 환상의 세계, 혹은 신화의 세계로 데려감으로서 진부한 현실을 정화하고 갱신하도록 했다. 현대인들이 일상에 지쳐있다면, 그리고 무미건한 생활과 유한한 삶의 ‘의미-없음’에 지쳐 있다면 이 시집은 그러한 영혼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