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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 : 11. 천부
마 7 : 11. 천부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그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세상을 섭리하시며 특히 참된 교회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했다(롬 8: 28).
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죄인인 너희도 자식의 청구를 들어주거든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 사 49: 15 -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시 27: 10 -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좋은 것은 영적인 것들이니 곧, 성령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것들이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 아닌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간절한 기도를 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다.
* 눅 11: 13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2]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도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몬 1: 3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약 1: 27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벧전 1: 2-4 –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육신의 아버지들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하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는 주시되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3]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시 105: 3 -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 시 119: 2 -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잠 11: 27 -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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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21: 21 -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 사 65: 16상 -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4] 기도가 주는 유익 ( 마 7: 9-11 )
흔히 기도를 다른 말로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여 호흡의 중요성을 빗대어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며, 자주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다.
또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의 예를 들어 그보다 더 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심으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의 유익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기도는 성도의 신앙을 성장시켜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신다.
* 마 6: 8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는 분이다. 하나님도 그의 택한 백성을 태중에 짓기도 전에 이미 구별하시고, 모든 인생의 결국을 다 알고 계신다.
* 렘 1: 5 -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강조하시고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셨다. 그것은 성도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신앙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의 심령은 늘 평온하고 여유가 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이 충족함을 얻기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은 바로 이러한 영혼의 만족도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2)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하셨다. (요 14: 13)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인자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르쳐 주셨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더욱 그 사람이 생면부지인 경우나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들은 체도 안 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무엇을 요구해 오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진정 나를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로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는 정도뿐만 아니라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는 그분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류를 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인 늘 동행한다는 의미다. 성도들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그 길은 축복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동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두 사람에게 가져다준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아기는 부러울 필요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과 성도의 동행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최고의 감격이요 비길 데 없는 기쁨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간절한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것이다.
(4)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그들의 부모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부모들은 이러한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자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그들의 필요를 스스로 공급해야 하며 늘 근심과 걱정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책임을 지니고 계신다. 우리의 특권은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자녀의 특권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을 받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러한 축복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5] 성령 충만을 구하라 ( 마 7: 7-11 )
눅 11: 13에 보면 똑같은 말씀인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으면 내 인생이 변하고 삶의 목표가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는가?
(1) 응답의 약속을 확신해야 한다.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대로 성령을 확신하면 주신다. 성령은 위대한 신앙 영웅들에게만 주는 것 아니다.
* 욜 2: 28-32 –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할 일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세 가지다. 본래 세 번의 반복은 그만큼 간절함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 세 번은 간절함과 아울러 응답의 다양성을 말씀한 것으로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 구하면 주신다. 주셨는데 알지 못하겠으면 찾아보라. 찾았으나 누리지 못한다면 두드려 보라.
신학적으로 성령에 대해서 살펴볼 그럴 시간이 없다. 성령 받으면 살고 성령 받지 못하면 죽는다. 성령의 약속은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성령을 부인하지 않아야 한다. 성령을 부정하는 자에게 성령은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령의 약속을 믿기 바란다.
(2) 구하는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8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가만있어서는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구해야 열리며, 찾아야 찾을 수 있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린다. 이 구절에서 점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 두드리라는 말씀은 아주 강렬한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눅 11장에서는 이 말씀 앞에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다. 5-8에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그러므로 본문은 강청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누워서 성령 충만 받겠다고 하면 안 된다. 누가 입에다 떠 넣어 주기를 기다려선 안 된다. 일어나 성령 충만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적극적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바란다. 경배함이 성령 받는 방법이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란다.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내 생활의 부흥회를 열기를 바란다. 겸손한 자세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면 성령이 임하신다.
(3) 의심하지 말라.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상한 걸 주실까 봐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성령 받으려다가 악신을 받기도 하더라는 의심이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시니 좋은 것으로 주시지 나쁜 것으로 주지 않는다.
실제로 악신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마귀가 준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탐욕적으로 구하다가 마귀의 시험이 틈타 악신을 받는 것이지 진정 성령을 구한다면 악신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을 구하라. 성령을 구하라. 내가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장하도록 구하라. 참 신앙을 구하라. 참 신앙을 구한다면 어찌 악신이 틈탈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처럼 성령으로 충만 합시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계시고 더욱 충만히 임하실 것이다. 이제 성령을 충만히 받아라.
우리 모두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더욱 겸손히 적극적인 마음으로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가장 귀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6] 그리스도인이 배려해야 할 것 ( 마 7: 6-11)
(1) 구별(Discriminate)을 해야 할 필요성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방법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가를 조심스럽게 점검할 필요를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세속적인 사람에게 하나님 계시의 진주를 제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발로 진주를 짓밟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발로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렇다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 그들은 그들의 발로 하나님의 진리를 짓밟는 것이 된다. 이 말씀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님만이 우리에게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를 가르칠 수 있다.
진리에는 하나님이 소상하게 가르치신 것들이 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친 것은 구원과 성화의 길이다. 우리의 이해는 온전히 우리의 빛 가운데서 걷는 것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타 묽게 해서 세속적인 것에 맞추어 간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돼지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된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개들, 곧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 당신의 거룩한 것을 그들 앞에 던지지 말고 하나님 진리의 진주를 돼지 같은 사람에게 주지 말라. 바울은 성화라는 진주가 음란이라는 진흙탕에 묻힐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강하게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깨달은 귀한 것들을 언제나 말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친교 시에 이러한 진주와 같은 귀한 것들을 열어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는 수단으로 그러한 귀한 경험들을 과시할 때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발로 그것들을 짓밟는 일을 목도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주님 외에는 다른 것을 고백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마 10: 32).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한 간증들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증언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간증은 우리 주 예수님이어야 한다. 주님을 고백하기 바란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나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것보다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기가 훨씬 쉽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증언하는 자들의 특별한 종교 개념 때문이다. 중심 진리는 복음도 아니고 성화도 아니고 재림도 아니다. 중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 32). 예수님이 행하신 일 중 어떤 것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진리로 가르치면 언제나 오류가 따라오게 된다. 그것은 진리의 한 부분인데 만일 우리가 그 부분을 진리의 전부인 것으로 취하면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 그분 대신에 어떤 종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개념(idea)의 특징은 개념은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기독교 교리에만 충실하면 우리는 우리의 집을 “개념”이라는 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라고 말하지만, 표현되는 방법에 분개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주장하는 자세와 독단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모습이 들어오게 된다.
(2)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이 구절의 말하는 간단한 핵심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하게 해서 완전한 신뢰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있는 자들을 향하여 행위의 규범들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생각으로 당신의 마음을 연마하라.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선상에서 훈련되면 당신이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신다!”라고 쉽게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해 낼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된다. 전에는 혼돈이 닥칠 때마다 당신은 여기저기에 가서 묻고 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의식이 강력하게 당신 안에 있기에 당신은 간단하게 하나님께 나가게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 의식이 역사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구에게 먼저 갑니까? 맨 처음에 무엇을 합니까? 누구를 가장 의지합니까? 마태복음 6: 25-34절에서 말한 이치는 이러합니다. –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이 나에 관한 그 어떤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왜 나는 걱정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강한 의식을 언제나 지키고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다스리는 손길을 체험하며 자라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은 일은 발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벽한 확신 가운데 쉴 수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제거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면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하나님께서 불친절한 친구로 보일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며, 매우 자연스럽지 않은 아버지처럼 보일 때가 있어도 실제로는 아니며, 심지어 불의한 재판관으로 보일 때가 있어도 실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하셨다. 모든 것이 설명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기도는 단순히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마음의 자세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구한 모든 것을 삶을 통하여 얻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will)가 없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귀를 구하면 그 사람은 부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도는 그를 바보로 만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요 15: 7).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중얼거리며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은 꼴이다. 구한다는 것은 모든 의지가 구하는 것에 담겨야 한다.
당신은 말하길, “나는 하나님께 나의 삶이 주님의 에덴동산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슬픔의 쟁기를 쥐고 살게 되었다. 정원 대신 광야를 주셨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잘못된 답변을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당신의 삶의 정원이 땅을 갈아야만 하는 거친 땅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주님의 에덴동산으로 바꾸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간섭하시는 것을 분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위 바울이 말한 “자의적 숭배”에 빠지기 쉽다.
* 골 2: 20-23 –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의지는 한 사람의 전인격적인 활동이다. 의지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다.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만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의지였다.
죄는 인간에게 들어온 타락한 성향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는 의지가 있으며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 의지는 온갖 종류의 욕구들과 동기들로 덮여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성령께서는 사람 의지의 뿌리까지 내려가서 역사하신다. 이때 의지는 매번 하나님께 돌아온다.
우리가 사람을 얻으려는 것도 그 사람의 의지를 바꾸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높이면 주님은 사람들의 의지를 주장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사람의 의지가 기도하고 싶은 방향으로 향한다면”이라고 결코 말씀하신 적이 없다.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가장 간단한 마음 자세로 기도하라 하신다. – 구하라. 우리가 이유를 대면서, “네. 그러나….”라고 한다면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 7).
(3) 분변의 필연성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그 하나님께 합당한 것들과 또한 주님의 영역에 합당한 것들을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점쟁이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품을 자라나게 하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 듯이 “하나님의 사정은”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될 수 있다.
* 고전 2: 9-14 –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서 분변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주권적 은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자신에게 해 보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것을 받기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라고 하신다.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격이 되는 사람만 도와야 한다”는 저속하고 인색한 이러한 의식은 사라져야 한다. 누구든지 성령이 마음속에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구원을 너는 받을 자격이 있느냐? 성령으로 충만할 자격은 되는 것이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에 의해서만 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48).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 12). 이것은 단번에 끝까지 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습관이다.
겸손과 거룩은 언제가 동행한다. 나의 완고함과 거친 자세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나타날 때마다 나는 빛으로부터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엄중하고 진실해야 한다. 조금도 희석하면 안 된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지금 당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던 당신도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는 죄인이란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찬 곳에 서 있다면 이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치하셨다고 하나님을 종종 비난한다. 말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자세로 하나님께서 할 일을 잊고 계신다고 암시한다. 이런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라. 이런 생각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 오히려 일반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할 일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처하게 되었노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오늘날 가장 큰 유행은 사회주의다. 사람들은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 개혁자로 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우리가 사회 개혁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주님께 넘겨버렸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옳은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원칙대로 우리는 사회 개혁자가 된다. 이 원칙은 우리가 사는 그곳에서 즉각 역사하기 시작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친구, 고용주, 고용원의 관계에서 우리는 개혁을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가를 고려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당신이 받은 대로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