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명철
파릇한 새싹을 틔우며 찾아온 봄은 청매실(靑梅實) 곱게 익어가는 숲을 가꾸어 미모를 자랑하는 계절. 도솔천 물소리 부처님 오심을 찬탄하듯 오월은 자연 그대로가 오묘한 법문이며 초록의 물결이다. 새초롬히 얼굴 붉혀 유혹하던 꽃들은 피고 지고를 거듭하더니 이윽고 꽃을 버리고 튼실한 열매를 맺혀간다.
오월의 한 중간이 부처님오신 날. 태어나시자 일곱 걸음 걸으시며 “내 마음 편안하게 할 주인공도 바로 나요, 타인의 마음 편안하게 할 주인공도 바로 자신이다.”란 말씀을 생각해보는 산책길에서 청매실을 본다.
청록의 푸르렀던 내 젊음의 추억, 연초록 새싹만큼이나 단아하고 발랄했던 시절을 거쳐 푸르고 싱싱하게 푸른 잎으로 번져가는 젊었을 적의 향기로운 추억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회억(回憶)에 잠겨본다.
오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신선함. 내 지나간 청춘도 진정 오월의 저 푸르름처럼 그림으로 그려지는 때가 있었던가!
달빛에 커가고, 햇빛에 영글며 비바람 눈보라에 견디어온 세월, 오월은 동경(憧憬)의 세계를 한없이 꿈꾸었던 내 젊음의 상징 같은 희망의 달이기도하다.
우주의 중력이 언제나 하나의 사물을 중심으로 운행되듯, 나 역시 일렁이는 초록의 녹음 속에 짙어지는 청록의 과정을 거쳐 내 가슴속 마음이 오월의 우주에 머물며 사유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에 좌정(坐定)한다.
같은 나무에서 같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순리는 쏟아져 내리는 오월의 눈부신 햇빛에 절개 높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고고(高古)한 여인처럼 터질 듯한 봉우리의 풍요에 절로 고개 숙여 감사하는 그 계절이다.
뻐꾹새 울어 만물이 온통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숲속에선 꽃으로 열매로 장식이나 꾸밈이 아닌 자연을 살찌우고 있다. 꾸미고 가꾸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람일 뿐이다. 외롭고 적막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부여한 의미. 그 의미는 우리의 문화가 되어 면면히 이어온 사랑의 윤회가 아닐 까!
사월이 은근한 달빛 문화라면, 청매실 익어 가는 오월은 푸른 잎에 쏟아지는 햇빛문화다. 사월이 달빛 속에 은근함과 정갈함의 미학이라면, 오월은 새콤함과 달콤함이 살며시 스며드는 달이며, 오래도록 싫증나지 않게 하는 오묘함을 지니고 있는 계절이다.
이렇듯 사월은 꽃으로 우리들에게 문화적 정서를 준다면 오월은 열매로서 단아하면서도 사실적인 마음의 정화나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달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월은 창가에 앉아 님을 기다리는 이른 봄의 계절이라면, 오월은 달과 별, 태양의 빛이 다녀간 자리, 한여름이 아닌 청매실 나무그늘 밑에 사뿐사뿐 정적을 밟고 걸어오는 임의 모습을 그리는 계절인 것이다.
오월은 계절의 완성으로 가는 시집갈 처녀의 청록의 치마폭, 어딘가 수줍은 듯, 명주털이 가시지 않은 설익은 모습에서, 건드리면 깔끄러울 것 같은, 새콤하고 달콤함을 주는 희망이 부푼 달이다.
노랗게 익은 완숙이 아닌 미완(未完)이 주는 여운의 신비함 같은 것, 농익음이 아니어서 정겹고 구수한, 오월이 노랗게 익어가는 사이(間), 변해가는 계절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스스로 상상하게도 해준다.
어느덧 봄을 보낸 아쉬움에 멧비둘기 구슬피 울어쌓는다.
오는 여름 옴시레기 품에 안은 저 푸른 숲속에서 장끼 훼치는 소리에 녹음은 짙어 가는데, 나는 어찌 걸어온 자취마다 내 젊었던 날들의 추억이 하나 둘씩 세월에 밀려 허무만 한없이 쌓여 가는가!
오월의 청록! 사랑하자! 그림자가 나의 형체를 따라다니는 그날까지.
늙지 않는 그림자처럼 푸른 청춘의 오월 같았던 우리의 인생을 사랑하자.
오월의 창공에 나의 황혼을 보상 받는 기대감으로 두 손을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