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계간평 수필
인간애의 정신, 인간성의 모습
지구문학 겨울호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문학이란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인 표출이어야 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이 작가의 주관으로 들어온 경험의 여과된 재현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수필가가 다루는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소재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부분이지만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사회사’이자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지구문학』겨울호에는 이 달의 수필 1편과 테마수필 1편 그리고 신작수필 6편이 실려 있다. 이번 계간평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할 작품은 인간을 소재로 다룬 4편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 또한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수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고임순의 <사랑의 선물>, 차동희의 <첫눈 내리는 날 생각나는 친구>, 한경선의 <엄동설한 고목에 매화 향기 흐르듯>, 박귀순의 <꽃피는 땀방울>이다. 네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뛰어났다기보다는 ‘인간애의 정신과, 인간성의 모습’이라는 비평의 관점을 충족시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임순의 <사랑의 선물>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C여사의 꽃바구니 선물을 받고나서 ‘선물’을 제재로 해서 쓴 수필이다. 발단은 C여사의 꽃바구니를 받고 새로 이사 온 아파트가 주는 닫힌 세계의 답답함을 피력하는 진술로 시작하면서, 작가는 ‘꽃바구니 속의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창문 안에 갇힌 낯선 얼굴들이 다정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것만 같다’는 진술을 통해 주제의식을 암시하였다. 전개부 첫 문장은 바로 꽃바구니를 ‘선물’로 상위 개념화하여 ‘선물이란 정을 나누는 징표다’라는 주제문을 위치시켰다. 작가는
김학의 <조손상봉기>는 위트가 넘치는 재미있는 글이다. 평범한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는 자칫 실패하기 쉽다.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연륜에 따라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인연을 수필화해서 성공하기란 어렵다는 의미다. 이 작품의 강점은 사소한 문제를 다룬 글의 내용과는 격에 맞지 않게 한문으로 제목을 무겁게 한 데 있다. 제목으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 일단 성공하였다. 재미를 주는 또 하나는 할아버지의 자격을 얻은 데 대한 작가의 호들갑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곧 죽을 때가 다 되었다거나, 이젠 나도 늙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작가는 할아버지가 된 데 대하여 일반인의 반응과는 아주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더욱더 재미있는 대목은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우리 집에 태어나게 해준 조물주에게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이 조물주의 핸드폰,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하고 너스레를 놓는 부분이다. 단순히 손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감정 표출만 기술했다면 수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작가는 ‘조손상봉기’를 수필화하는 전략을 잘 짰다. 결말부 두 단락에서 주제의식을 의미화한 것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존귀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태적 세계관을 손주의 탄생을 통해 깨달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심순자의 수필 <피설>은 ‘피서’와 대비시켜 ‘피설’의 의미를 풀어낸 아이디어가 좋았다. 이 글이 주는 강점은 정보적 가치다. ‘피설’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는 삽화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낭만적으로만 보지 않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은 ‘피서’와 대비되는 참신한 제재를 선택해서 눈에 대한 고정 관념 깨게 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지나친 말줄임표, 문장의 종결어미를 명사화해서 문장의 서술어를 생략하는 문장 아닌 어구가 곳곳에 너무 많은 점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서술어가 없는 문장은 원칙적으로 비문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 수필은 제재인 ‘피설’에 문명이 주는 혜택의 소중함이란 주제를 담아 잘 나타내고 있지만, 주제가 너무 외면화되어 있는 게 흠이다. 주제 파악의 용이라는 소통성에는 성공했지만, 주제를 상상화해서 문학적인 맛과 멋을 내는 전달 차단성이라는 문학성을 우려내는 데는 아쉽게도 실패하였다.
이경구의 <수요 시위>, 김두은의 <페어플레이와 심판>, 주진호의 <敬老와 經老>는 가슴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다. 개인의식보다는 사회의식을 내세워 참여적인 작가인식을 작품에 강하게 노출시킨 글이다. 주제에 대한 작가 나름의 논리가 서있어서,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오며 문장의 활기가 남성적인 박진감을 준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강한 이와 같은 글을 문학 수필로 볼 수 있을까에 평자는 의문을 가진다. 사실 개념으로 보면 교술 장르로서 수필로 인정되지만 가치 개념으로 보면 비문학적 에세이에 속한다 하겠다. 문학수필과 작문의 차이는 주제를 외면화하느냐 내면화하느냐의 차이에 달려 있다. 위의 글들은 직설적인 어법으로 주제를 글의 표면에 그대로 노출시켜 메시지를 상상이나 연상의 작용을 통하게 하지 않고 바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설명의 방식으로 기술되어 수필이 주는 고유한 맛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주제를 간접화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수필 문장에서 설명은 금물이다.
한경선의 <아름다운 추억을 딛고 일어서는 아침>은 홀로 서기의 외로움을 딛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추억이 그려져 있다. 생의 동반자를 멀리 하늘 나라로 보내고 지상에 혼자 남아서 겪는 홀로의 서러움이 물씬 풍겨나는 글이다. 홀로된 자신의 모습과 앙상한 나무들의 우뚝 서 있는 모습의 비유가 좋았다. 최정숙의 <산에 오르며>는 산행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을 ‘진한 흙 냄새와 상큼한 풀 향취에 노래가 절로 나온다’는 표현에 잘 담아내었다. 위의 두 글은 작가의 자연친화적 의식은 돋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주제가 약하다는 게 아쉽다. 전자의 수필은 제목이 너무 장황하다. 수필의 제목은 내용의 단적인 표현이되, 주제가 제목에 함축적으로 상징되어 나타나야 성공할 수 있다. 후자의 글은 남편과 산행을 가서 남편과 농담을 즐기며 천진스럽게 놀다가 내려오는 내용이 전부다. 글의 중간쯤에 주제와 관련된 ‘자연 보호에 앞장서야만 할 것 같다’는 진술이 나오지만, 좋은 작품이 되려면 글의 다른 부분들이 이런 주제를 구체적으로 일관되고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져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인 방식인가 아닌가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처럼 추상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다.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그러하려면 수필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져 배우지 않고 어찌 고도로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보다 한 차원 높은 수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