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여섯 번의 무고한 옥중투쟁
아무리 문 선생이 메시아가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어땠겠습니까? 16세 때, 그때가 지금은 중학교 3학년 정도입니다. 그때는 성숙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상대권에 서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다고 체휼한 것이 대단합니다.
세상의 귀한 모든 것을 내팽개치더라도 그 이름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모든 보물을 내버리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메시아는 그런 존재입니다.
메시아의 관념을 가지고 생애를 넘어갈 수 있는 출발을 언제까지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3세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몇 년입니까? 16세부터 몇 년입니까? 7년, 8년 이내에 해야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이 23세 때가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고문이 대단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희생할 수 있습니까? 나라도 못 찾은 사람이 세계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일본을 밟고 넘어가지 않으면 세계로 못 넘어갑니다.
방대한 천지를 밟고 넘어가는 오야다마(親玉 ; 우두머리)가 메시아입니다. 그 이름을 중심 삼고 어디에 가든지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는 자각을 갖지 않으면 메시아의 이름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77-88, 2002.4.30)
한국이 일본 치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도쿄에 와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습니다.
그 경찰서가 다카다노바바(高田の馬場) 거리에서 와세다대학의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에 연락이 갔습니다. “아무개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연락이 갔다는 것입니다. 학생이었지만, 그만큼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15-181, 1965.10.8)
일본은 내 원수입니다. 왜정 때 일본의 고등계 형사들한테 무참히 고문을 받았던 장본인입니다. 그때 내가 한마디를 하면 수백 명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독하디 독한 싸움을 했습니다.
‘일본놈!’ 하게 되면 어금니를 악물고 배때기를 째는 데 선두에 서려고 했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망해서 피난을 갈 때 그 원수를 불러 보따리 싸서 도망가게 해 준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것을 가지고 그들을 수습한 것입니다. (50-158, 1971.11.6)
왜정 때 고문을 받으면서도 “쳐라, 이 자식아!” 했습니다. 이런 책상 다리 네 개가 전부 다 부러져도 “쳐라, 이 자식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매를 맞는 법도 연구했습니다.
매를 맞을 때 “아이쿠, 잘못했습니다.” 하면 죽습니다. “쳐라, 이 자식아!” 하면서 몽둥이가 들어오면 ‘음!’ 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안 진다는 것입니다.
‘이 개똥 같은 자식들아, 네 뼈다구까지 가루를 내서 내가 마시겠다! 쳐라, 이 자식아!’ 하던 이상의 강한 정신력으로 나를 쳐댔던 겁니다. 그런 놀음을 했습니다. (61-316, 1972.9.3)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 지금까지 하늘나라의 보좌, 영광된 왕좌에 앉아 가지고 영어살이를 했는데 거기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땅 위에서 승리하게 되면 사탄세계가 아니고, 지옥과 낙원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에 옮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탄식의 보좌가 아닌 영광의 보좌에 앉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서 주랑당을 맞아 핏줄이 터져 나가더라도 “나 죽습니다. 도와주소!” 하는 기도를 못 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대동보안서에서 매를 때려 가지고 죽으라고 던져 놓았는데, 3일 만에 살아났습니다.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위로했습니다.
내가 피가 나오던 것을 보면서 “이건 예수의 피와 다릅니다.”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내 뜻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의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천국에 들어가서 불효할 수 있는 소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389-301~302, 2002.8.7)
내가 공산당에게 고문을 받으면서 ‘이놈의 자식! 내 이 시퍼런 눈을 뜨고 네 일족을 굴복시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것, 네 입으로 증거할 그 날을 갖고야 말 것이다. 내가 죽지 않고 그 날을 볼 것이다.’ 하고 다짐하고 결의했던 사실을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선생님에게 사무친 심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승공’을 들고 나와 천대를 받으며 지금까지 이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명실공히 이제는 국가에서도 우리 단체가 아니면 승공할 길이 없다는 결정적인 기준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51-260~261, 1971.11.28)
이북에 있을 때 공산당한테 고문을 받고 쓰러지면서 맹세하던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 운명의 기백과 기개를 다 바쳐 사나이답게 싸울 수 있는 땅은 이곳이다.”하며 그 땅을 붙들고 기도하던 것을 선생님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더라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뼈가 없는 무골충 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를 표방하고 나선 사나이지, 무능력자의 입장에서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57-355, 1972.6.5)
내가 삼팔선을 넘어올 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다시 넘어올 것이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남한 땅을 위해서 내려가는 비참한 사나이의 모습이지만,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라고 결의했습니다.
그때 그런 결의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 표준을 중심 삼고 아시아와 세계에 우리의 사상적인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천신만고의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공산당에게 몰리고 고문을 받던 억울한 자리에서 맹세한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다. (51-143, 1971.11.18)
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감옥살이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맛을 압니다. 흥남감옥에 있을 때, 비료공장에서 중노동을 할 때 하루종일 물을 한 사발밖에 안 줍니다. 그러니 살이 부풀어서 짜게 되면 물이 나옵니다. 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물입니다. (347-54, 2001.7.3)
아침에 밥상을 대하고 먹을 때에도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흥남감옥에서 보리밥도 아닌 메밀 밥, 3분의 1밖에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메밀밥을 먹으면서도 망해 가는 사람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굶어죽던 사람을 부활시켜 달라고 기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말만이 아닙니다. 기가 찬 것입니다. (379-215, 2002.5.30)
흥남형무소에서 내 몸무게가 92킬로그램이었습니다. 남들은 60킬로그램도 안 됐을 텐데 어떻게 돼서 그랬느냐? 밥덩이 절반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한 덩이를 먹었으면 당연히 살이 쪄야 했던 것입니다. 정신력이 무섭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갔습니다. 6개월도 못 가서 쓰러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도했습니다. 그래서 옥중의 성인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내가 성인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어려운 사람이 나한테 와서 뭐든 도와달라면, 내가 감옥에 있는 식구들의 차입을 뺏어서라도 도와줬습니다. 그것을 빌려 줘 가지고 장사를 자기들이 한다고 해 가지고 그것을 다 갚아 주면서 도와준 것입니다. (453-294, 2004.6.14)
선생님이 20대부터 40대까지는 눈물어린 투쟁기였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르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고문받던 것을 필생의 탕감노정으로 알고, 그것을 대가를 치러야 할 당연한 노정으로 알고 걸어온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의 반대를 받고, 교계의 반대를 받고, 삼천만 민중 어느 누가 반기를 들고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서글픈 자리에 몰렸던 역사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59-286, 1972.7.27)
선생님은 이북에 갈 때도 감옥을 표준하고 갔습니다. 감옥에 들어 갈 것을 각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서 통일교회를 시작할 때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고 시작했습니다. 형무소에 갔습니다. 미국에 갈 때는 미국의 형무소를 바라보고 갔습니다. “미국 정부와 해결 지어야지!” 하고 말입니다. (138-134, 1986.1.19)
선생님은 여섯 번이나 감방에 갔습니다. 많은 고문을 받고 피를 흘렸는데, 그 와중에서도 입을 열고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팔을 꺾어 봐라!” 한 것입니다.
책상다리, 4개의 각목이 부러져 나가도 아무런 말을 안 했습니다. 그렇게 고문당하고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피를 흘릴 때는 입이면 입 속에 구멍을 내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바로 죽습니다. 여러 가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모두 죽었다고 해 가지고 내버린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259-121, 1994.3.27)
선생님이 자기란 것을 생각했다면 여섯 번이나 감옥에 끌려가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이 휴양소가 아닙니다. 비참한 곳입니다.
선생님처럼 특별히 사상이나 종교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로서 박해를 받고 감옥에 끌려갈 경우에는 감방의 수인들에게조차 손가락질을 받고 2중 3중의 박해를 받습니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박해하는 사람은 하늘적으로 볼 때 탕감조건에 걸립니다. 거기에 만민해방이라는 하나님의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한 방을 맞으면 몇 백만 명을 해방한다는 계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때려라, 이놈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 헌병에게 맞을 경우는 테이블 4개의 기둥이 부러질 때까지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당당히 선생님이 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당당히 싸웠습니다. (247-37, 1993.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