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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성과 환상 가로지르기의 새로운 지평
ㅡ시집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 2016년 최규리, 『시와세계』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 교수)
序
현대시작법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독자들이 시를 읽을 때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장해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흔히 말하는 설명형식의 표현과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보안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현대시작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애매성과 모호성으로 시작(詩作)을 해야 한다. 이런 명제에 잘 따르는 시인 중에 한 사람이 최규리 시인이다.
이처럼 최규리 시인은 전통시의 기법을 현란하게 거부하는 시적 태도를 보인다. 낡고 진부한 기법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정답으로 생각하는 전통시에 대해 일말의 수용불가라는 의견을 보내는 메시지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독자들은 최규리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많은 불편함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독자들이 시를 읽을 때 낯선 표현에 대한 불편함은 곧 확장된 상상력을 자아내게 하고, 그 상상력을 통해 시가 지니고 있는 주제나 시의식을 알아낼 때 비로소 시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독자들에게도 ‘일반 독자’, ‘해박한 독자’, ‘만능독자’로 분류할 수 있으므로, 그들의 개인차가 필연적으로 인정된 상태에서 애매·모호성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문제점은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최규리 시인의 시집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에 대한 시해설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다. 하나 더 주문한다면 최규리 시인의 시집 시해설은 시인의 시작품에 한하여 분석을 하고, 그것을 통해 여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서,류,가 기,계,안,에,서 분,쇄,되,고
창,틈,사,이,로 빠,져,나,가,는 활,자,들,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자,투,리 원,단,들,이
공,기 정,화,기 필,터,에 있,는 우,리,들,로
쌓,였,다 죽,었,다,가 살,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모,서,리,가 되,도,록 자,르,고
맞,춰,지,기,를 떠,도,는 먼,지,이,기,를
어,느,곳,에 닿,아,도 일,부,가 되,어,지,길
[+]+[+]+[+] 방,향,키,는 설,정,상,태,로
포,토,라,인,에 선,다 순,간,은 컷,으,로
화,면,분,할,한,다
흘,러,가,지 않,게 말,을 맞,춰,야,한,다
거,울,은 확,장,한,다 세,포,하,나,까,지
거,인,들,이 깨,어,지,고 쪼,개,져,서
목,젖,이 이,끼,로 덮,혀
-「pixel」 전문
시의 시어로, 또는 시의 오브제로 나타난 ‘pixel’은 무엇을 의미할까.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원소이다. 모니터 등에 나타난 디지털 이미지의 경우 수많은 타일의 모자이크 그림과 같은 사각형 픽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필름이 화소의 집합으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듯이 디지털 이미지는 이 픽셀의 집합으로 이미지를 형성한다. 부연하면 픽셀(pixel)은 픽처(picture)와 엘리먼트(element)의 합성조어이다. 디지털 카메라나 스캐너 등에는 기종에 따라 픽셀 수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수치가 높을수록 화상을 조밀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화질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디지털기기에서 사각형의 픽셀은 하나의 파편이며, 이 파편은 오직 파편일 뿐이다. 그러나 최규리 시인의 시의식에서의 픽셀도 하나의 파편이며,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개인을 지칭하는 것과 같다. 픽셀화 되어 있는 우리들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가령 ‘서,류,가 기,계,안,에,서 분,쇄,되’는 휴지조각이고, ‘창,틈,사,이,로 빠,져,나,가,는 활,자,들’이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자,투,리 원,단’에 불과하다.
최규리 시인은 「pixel」을 통해 우주 속에 갇혀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아침을 맞이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저녁을 보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는 시이다. 더욱 눈여겨 볼 사안은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우리들에게 주문하는 시작(詩作)의 형식이 파편적 글쓰기의 양상이라는 점이다. 이 파편적 글쓰기는 제목과 제목들이 상호 연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시의 연과 연이 상호 연관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즉 연과 연이 각각 독립해 있으며, 행과 행의 독립성이 더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최규리 시인은 행과 행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와 연과 연의 상호 연관관계의 파괴에 의한 시의 무의미성을 파편화시대의 반영이라는 ‘낯설게 하기’에 주력하고 있다. 인용시에서 ‘서,류,가 기,계,안,에,서 분,쇄,되,고’에서 확인하듯이 언어는 파편화되어 언어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상실된 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이 파편적 글쓰기를 ‘만능독자’, ‘아포리아’, ‘쓸 수는 있지만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집약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최규리 시인의 시 쓰기는 감성으로서의 언어에서 인식으로서의 언어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한다’라는 명제가 시단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후기현대에서 통용되고 있는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시의 경우처럼 언어를 매개로 하면서도 의사소통 중심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의미의 암시나 상황의 제시를 위한 매트릭스(모체)로 활용하는 형식을 최규리 시인은 차용하고 있다.
요약하면 최규리 시인이 「pixel」에서 보여준 시의 의미는 감성의 언어에서 인식의 언어로의 전환이며, 이것은 시가 언어를 매개체로 하지만 그 언어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시의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비유 중심’의 시 쓰기보다는 ‘언어 중심’의 시 쓰기로 나아가고 있다. 시는 느낌으로 쓴다는 사실에서 시는 지성으로 쓴다는 사실의 증명과 같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시 쓰기의 행위를 최규리 시인의 시적태도가 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전환된다는 근거로 받아 들여야 한다.
위의 「pixel」에서 찾아낸 또 다른 특징은 ‘구심력 지향’의 시 쓰기에서 ‘원심력 지향의 글쓰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가 리리시즘 중심의 시 쓰기라면 후자는 모더니즘 중심의 시 쓰기에 해당된다. 이런 명제를 내세울 때 최규리 시인은 모더니티(modernity)의 얼굴을 가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최규리 시인의 「pixel」에서 행과 행의 무관계, 연과 연의 무관계로 시의 무의미성을 나타내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분업화시대의 반영이며, 동시에 이웃할 수 없는 것들의 동시적 나열을 그로테스크 미학의 반영이다. 세계는 파편화시대로서, 혹은 분업화시대로서 그로테스크하다. 이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다. 이 흐름에 최규리 시인이 무리 없이 스스로 승차하고 있다.
너의 집을 지나 너의 집을 가는 길엔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뱉지 않아/헛발질을 하겠지. 사과를 깎으며 과도에 걸려든 손가락은 너에게 가는 길을 묻지.
대답이 없으면 10월. 싱크홀에 빠져 날다람쥐는 달력을 훔치고, 훔친다는 건 그립다는 말. 꽃은 키워드를 기억하지.
분실물쎈터에서 기다리는 너의 집을 찾을 수 있을까. 대문을 뜯어내고 온도에 대해 거리에 대해 숫자를 세지. 복수를 생각하지.
물대포를 쏘고 천장에 매달려 태양광을 쬐고 마음을 동그랗게 오려내는 건 너의 지붕위에 심장을 널어놓는 일. 책상에 엎드려 바이킹을 타는, 정지되지 않은 것처럼.
-「공회전」 전문
인간은 일상의 반복에서 차이를 발견한다. 동시에 생의 회유와 허무의식을 때론 가지기도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허무임을 최규리 시인은 「공회전」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시어를 통해 드러낸다. 1연의 담배연기를 입안으로 흠뻑 들어 마시고 난 뒤 입을 오므리고 내뱉으면 도넛츠같은 모양의 동그란 모양의 연기가 튕겨 나온다. 또 사과는 그 모양이 둥글다. 2연의 싱크홀도 둥근 모양의 형체를 지닌 물건이다. 4연에서는 ‘동그란 마음’이라고 진술을 한다. 이런 둥근 것들은 반복적으로 순환성을 가지고 있다. ‘둥글다’는 의미의 시어를 불러와 그 허무의 순환성을 독자들에게 기억하게 만들며, 허무와 조응을 유도한다.
이러한 초규리 시인이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니체가 주장했던 긍정적 허무주의이다. 따라서 최규리 시인의 허무주의 주제 또한 ‘기존 가치의 탈가치’의 설정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인식과 형이상학, 미학 등을 비롯하여, 도덕,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의 진리상실과 신의 상실의 결과로서 허무주의다. ‘분실물쎈터에서 기다리는 너의 집을 찾을 수 있을까’에 내포된 뜻은 회귀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회귀에 대한 부정이다.
「공회전」도 허무주의에 입각한 부정적인 허무, 혹은 공회전이 아니다. 부정적인 허무 또는 무의미의 뜻을 가진 공회전은 ‘기존가치의 탈가치’를 주장하는 긍정의 허무주의이다. 어떻게 보면 ‘공회전’이 지닌 일반적인 의미 - 염세주의(Pessimismus)와 니르바나(Nirvana), 무(Nichts), 비존재(Nichtsein) - 를 반대로 전하려는 역설과도 관련지을 수 있다. 우리들 모두는 일상의 반복으로써 공회전을 하고 있다. 외연적 분석방법으로 바라보는 「공회전」은 허무의 뜻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일상은 공회전으로 정의되며, 삶은 모두가 허무로 귀결된다. 이러한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달력을 훔치는 일’이고, ‘그립다는 말. 꽃은 키워드를 기억’하는 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규합하는 긍정의 허무이다.
산페드로데아타카마 서쪽 5km
사막을 건너는 일행들이 증발했다
······ 〈중략〉 ······
계속되는 운석의 시간
궤도를 벗어난 사람들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어
우린 달의 뒷면에 서있지
-「달의 계곡」 일부
인용된 시의 소재인 ‘달의 계곡(Valle de Luna)’은 시인이 주석에서 밝혔듯이 현재 실존하는 지역의 이름이다. 칠레 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계곡으로 마치 달의 표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고 하여 ‘달의 계곡’으로 명명된 곳이다. 「달의 계곡」은 허무주의를 내비친 앞의 시작품 「공회전」과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달의 계곡’은 상상의 세계 내지 환상의 세계이다. 환상이나 환상적 해석은 인간의 욕망 형성에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영향을 남긴다. 그 인간의 욕망은 타자(他者)의 욕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주체의 응답’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최규리 시인은 「달의 계곡」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죽음을 의미하는 ‘달의 계곡’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사후(死後)의 세계이며, 죽음의 욕망이다. 사후의 세계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러도 더 이상의 진전된 삶이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무너지거나 사라지거나/아무도 탈 사람 없는 정거장’이고 ‘태우러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욕망뿐이다. 계곡에서 ‘그림자를 만드는 동안’에 ‘궤도를 벗어난 사람들은/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고, 그리고 ‘우린 달의 뒷면에 서 있’었다. 이처럼 환상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타자의 욕망과 향유 앞에서 이 타자의 욕망과 향유의 의미를 파악하고 규정하고자 하는 주체의 반응 혹은 대상이다. 즉 최규리 시인의 환상은 무의식적 사고활동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주는 ‘조직자’이다.
공중에 떠있는 게 싫었어
바닥을 빨고 바닥을 들고 바닥에 머리를 쑤셔박고
바닥이 좋아
·······〈중략〉······
우린 대체로 버려져야 했지
떠다녀야 하지
-「뒷모습에 땡기는 이유」 일부
최규리 시인은 「뒷모습에 땡기는 이유」에 와서도 여전히 환상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타자’가 자신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나의 무의식 속에 ‘각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환상의 가로지르기로써 ‘공중에 떠있는 게 싫었어’는 타자의 욕망인 동시에 최규리 시인의 욕망이다. 환상이란 ‘바닥을 빨고 바닥을 들고 바닥에 머리를 쑤셔박고’처럼 ‘불가능한 시선’이다. 이러한 불가능한 시선이 가능하다고 믿는 주체의 믿음이다 이와 유사하게 환상은 주체의 상실, 즉 사라짐(Aphanisis)을 막기 위해 주체를 대상에 고정시킴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최규리 시인은 ‘바닥이 좋아’서 뒷모습이 땡기고, ‘끝없이 떨어지고 끝없이 내려가’서 뒷모습이 땡기고, ‘끝없이 발버둥 쳐도 잡을 수 없’어 뒷모습이 땡기고, ‘하늘과 바다는 대체로 하나였’기에 뒷모습이 땡기고, ‘대체로 얼어붙지 않’아서 뒷모습이 땡기고, ‘대체로 가진 거 없어’서 뒷모습에 땡긴다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종종 나무에 기대’어도 뒷모습에 땡기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뒷모습에 땡기고, ‘태양이 뜨겁지 않아도’ 뒷모습에 땡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악과 선,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대립하는 것처럼 자아와 대상이 끝없이 대립한다고 해도 ‘우리는 종종 나무에 기대지/바람이 불지 않아도/태양이 뜨겁지 않아도/대체로 좋았’도, ‘끝없이 비틀고 가지를 의심하고 잎사귀를 씹어대고/대체로 등을 숨켜야 했어’와 같은 시적표현도 최규리 시인이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화해를 추구하려는 시적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친구들은 이마에 물을 준다 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내가 했던 말들을 아가미에 쑤셔놓고
이빨들이 새가 되어 날아갔다
소녀는 베란다에 앉아
흙속에 묻힌 말을 되풀이한다
화분이 될거야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내가 화분이 되고 있을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물위를 떠가는 식탁에서
우리는 서로 지워져가고 있었다
잘 닦여진 거울인지 모른다
-「베란다」 일부
‘베란다’는 육체적 생육을 도모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며,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태생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이러한 ‘베란다’는 시인에겐 우주에 해당된다. ‘베란다’라는 우주 속에서 ‘화분이 되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자는 ‘ 화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마에 물을’ 주고, ‘나를 데리고/여행을 떠나기도 한다’는 것은 우주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즉 세상에 아무리 잘난 사람도 이 세상을 혼자 살아 갈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편의 시로 최규리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문제, 인간과 인간의 상생의 문제의 필요성을 독자들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베란다가 따뜻하고 외부의 세력이 침입하지 않는 평화의 구역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화분이 되고 있을 때/소나기가 쏟아’지지 않는다면 생존의 불가능성을 없다는 것의 강조이다. 그러나 그 화분 속으로 소나기가 쏟아진다고 해도 생명의 영원성은 담보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자연에 순응하며 ‘물위를 떠가는 식탁에서/우리는 서로 지워져 가고 있었다’는 진술에서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지 않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규리 시인의 환상적 가로지르기는 타자의 욕망과 향유에 의해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과 향유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는 또한 ‘타자’ 속에서 ‘결여’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최규리 시인은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신의 욕망을 각인시키고 있다. 또한 타자의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며, 환상 속에서 나를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며, 여러 가지 소외된 욕망을 갖으려는 체험을 시도하는 중이다.
초인종은 신경질적으로 다급했어요. 블라우스를 입고 목걸이를 할 때 벨은 반짝이는 큐빅을 부수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으르렁거려요, 창문이 깨지고 커튼이 펄럭여도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요. 이 방엔 아무도 없거나
-「벨」 전반부
이 「벨」 역시 환상의 가로지르기를 보여주는 시이다. 최규리 시인은 무의식의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에 응답했으므로, 화자는 ‘병리적’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석’을 통해 이러한 ‘소외’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며 또 ‘해방’ 되고자 노력한다. 「벨」의 환상이란 ‘불가능한 시선’이다. 이러한 ‘불가능한 시선’이 가능하다고 믿는 주체의 믿음이다. 이와 유사하게 환상은 주체의 상실, 즉 사라짐(Aphanisis)을 막기 위해 주체를 대상에 고정시킴으로써 시인 자신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벨은 몸을 휘감고 시계를 토해요. 벨이 입을 벌리고 날름거려요. 벽에 걸린 캔버스에서 뮤즈가 벽을 타고 흘러내려요. 눈이 지워진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아요. 이 방엔 내가 없거나 훔친 벨소리만이 가글거려요’와 같은 시적표현을 그 예로 삼을 수 있다. 이처럼 최규리 시인은 이질적인 것의 소통은 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어떤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많이 하는 것도 아니며, 여기저기 왔다갔다 방황하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최규리 시인의 환상 가로지르기 정신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자기대상화 한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최규리 시인은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사유가 출발하며, 그런 격자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詩作)이 출발한다.
최규리 시인은 환상의 가로지르기를 시도하면서 중심에서 탈피하려는 의무를 본연의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환상 가로지르기를 하는 최규리 시인의 시적사유는 고정을 거부하며 늘 이동한다. 시인은 가로지르고 횡단하지만 그 횡단의 의미, 혹은 가로지르기의 의미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벨」과 같은 시를 통해 노마드(nomad)적 사유에 근접해 있으며, 차이와 결과를 지속적으로 유보하는 시적태도임을 알 수 있다.
테라스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봐요. 언제부턴지 비는 내리고 비가 내려요. 나무 뒤에 숨어 담배 피던 소년은 기타를 메고 맨홀 속으로 들어가요. 비는 내리고 빗속을 뚫고 허공에 떠다니는 보도블록 조각들이 건조해요. 언제부턴지 비가 내려요. 맨홀 뚜껑을 열고 사람A가 들어가요. 비는 내리고 맨홀 뚜껑을 열고 사람B가 들어가요. 비는 내리고 맘에 갇히고 상어떼들은 부레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어요.
-「부레를 찾는 사람들」 전반부
‘그 뒤를 무작정 따라 걸어요. 빗속에서 빛으로 감싼 어깨를 따라 걸어요’에서처럼 화자가 말했듯이 환상의 속에서 전개되는 상상은 한 없이 확장되고 있다. ‘환상’은 주체의 ‘상실감’과 ‘결핍’를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최규리 시인은 「부레를 찾는 사람들」에서의 주체도 상실감과 결핍을 알아차리고 그 상실감과 결핍을 채우려고 ‘나무 뒤에 숨어 담배 피던 소년은 기타를 메고 맨홀 속으로 들어가’고, ‘비는 내리고 맘에 갇히고 상어 떼들은 부레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는 진술을 한다. 결론은 높은 성벽을 허물고 성(城)안으로 막상 들어가 보니까 성 안에 별 것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심사회에 대한 거부이며,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최규리 시인의 시의식은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후기모더니즘의 국경을 넘어가고 있다. 특히 「벨」과 「부레를 찾는 사람들」에서 유독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늘 열린 사유를 가지고 있듯이 최규리 시인의 사유 역시 열려 있다. 고정된 사유는 창작을 근본적으로 방해한다. 심리학의 소비자 의사결정론에서 액자효과 (틀짓기 효과, raming effect)는 똑같은 사물을 두고 어떤 곳에 초점을 놓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각의 다른 모양을 보게 된다. 즉 처음에 만들어진 지각이 나중에 바꾸려고 하는 의지보다 더 강해 바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이 흘러가는 것을 처음에 구렁이가 기어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가 나중에 강물이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하려면 처음의 인식이 강해서 나중의 인식으로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최규리 시인은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사물을 대하는 사유가 남다르게 인식의 폭이 넓고 깊으며, 더 나아가 종교적이거나 이념적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 「벨」이나 「부레를 찾는 사람들」과 같은 환상 가로지르기의 시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닥은 길 위에서 문을 표절해. 울퉁불퉁 갈라지고 질식해.
엎드려 곡선을 끌어안고 커브에 대하여 나를 모방한다.
휘어짐은 내게 질문한다. 창 너머 속도로 속도를 덮치고 풍경은 저항한다. 사선이 되려고 내 머리카락은 유쾌해. 불편한 진실이 떠도는 정거장을 경유한다.
지붕위에서 휴식을 접고 내려온다. 골목은 낯선 그들을 맞이해. 기억은 울창했던 숲을 표백하고 사라지는 왼발에서 계단이 절뚝인다.
너는 부풀어 오른다. 불타는 집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길은 반복한다. 나를 반복한다. 희미해지는 골목으로부터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 서로 다른 종류의 카드를 뽑아 숫자하나를 지운다. 검색창에서 질문들이 사라진다.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 전문
시집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한 편의 시작품의 제목인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는 최규리 시인의 시의식이 환상 가로지르기(traverseedu fantasme)이며, 해체적이며, 열린 사유의 시인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주는 시이다. 이드가 있는 곳에 최규리 시인이 도달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적인 보헤미안의 시정신이 작품 속에 깊고, 넓게 작용하고 있다. 어떤 대상에도 소속되거나 구속이란 없다. 오직 중심으로부터 이탈과 탈주의 정신만이 고집한다. 중심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허탈감이 찾아올지라도 환상 가로지르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최규리 시인의 시적 사유가 거침없이 자유롭다는 의미의 그 이상의 위치임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어떤 질문도 그 질문 자체가 그에겐 구속이다. 즉 질문으로써 자신의 구속하는 것, 그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위반의 인식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의 지평을 열어가는 생존전략이다.
최규리 시인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환상의 가로지르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 - ‘휘어짐은 내게 질문한다. 창 너머 속도로 속도를 덮치고 풍경은 저항한다. 사선이 되려고 내 머리카락은 유쾌해. 불편한 진실이 떠도는 정거장을 경유한다’ - 와 같은 것이다. 사유의 유연성은 앞의 표현들을 잘 일구어내지만 고정된 사유는 상상의 힘을 빼앗아 가며, 상상이 없는 시는 시의 완성도를 현저히 떨어지는 시작품으로 전락한다.
컨테이너가 쌓이지 문이 열려지고 문은 없지 모서리들은 나열되고 모서리들은 없어졌지 주소가 쌓이고 길은 없지 크레인에 걸려 우리들은 끌려가고 큐브 속으로 들어가지 당신에게 보낼 물건이 없어요 나는 매일 밤 주소 위에 상자를 만들지 당신에게 보낼 주소를 찾고있어요 모서리가 닳도록 주소를 찾지 소매 끝이 닳도록 당신을 찾지 컨테이너가 모서리를 맞추고 주소는 다시 사라지지 내가 만든 상자에는 당신이 없지 나를 결박하고 출항하는 배는 돌아오지 않지 정박할 줄 모르는 바다가 채워졌지.
-「컨테이너」 전문
사각의 컨테이너박스는 최규리 시인에 의해 그 컨테이너 박스가 지니고 있던 고유의 의미를 잃었다. 왜냐하면 시적화자가 컨테이너 박스에 ‘편지’라는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매일 밤 주소 위에 상자를 만들’며, ‘당신에게 보낼 주소를 찾고 있’다. 최규리 시인의 의식의 폭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모서리가 닳도록 주소를 찾지 소매 끝이 닳도록 당신을 찾지 컨테이너가 모서리를 맞추고 주소는 다시 사라지지 내가 만든 상자에는 당신이 없’다는 무한한 환상 가로지르기의 극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최규리 시인의 「컨테이너」를 읽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위적인 예술적 감각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위적인 화가들이 ‘무의식 세계’와 ‘꿈의 해석’을 내세우며, 조용히 살지 않은 것처럼 최규리 시인 역시 조용히 살지 않는 전위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전위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느냐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질 수 있다. 타인의 모방은 예술성에서 멀어지려는 행동이다. 태양아래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규리 시인의 문학적 의식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성이다.
무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환상의 가로지르기는 시인의 난폭하고 전진적인 사유만이 예술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최규리 시인의 앞에 놓인 장애물은 무한 도전의 시의식으로 저절로 사라진다. 더 나아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결합까지 가져온다.
무참히 쓸고 갔지, 바람은 일정하게 등을 떠밀며, 팔꿈치가 뭉개고 있어, 볼트를 조일수가 없어, 집요하게 따라오는 사슬과, K,
언제부터 있었니, 검은 연기로 휩싸인 레일위에 멈췄지, 박차고 가슴을 쓸어, 벙커 안에 있는 나에게 손을 뻗지,
열한 번째 말발굽이 달려가고, 로그인은 깃발을 흔들지, 처음은 없고, 한쪽 눈이 흘러내려,
이유만 나부끼는 코너를 돌지, 그의 뺨을 후려쳤어, 깡통들이 굴러와 저녁을 긁어대지,
언제부터 달렸니, 동전을 하늘 높이 던져, 앞뒤의 경계가 흘러내려, 메스껍고 흥분되는, 페달을 밟지,
-「트랙」 전문
여전히 최규리 시인은 애매성과 모호성으로 독자들을 혼란하게 만든다. 고의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독자들의 공감과 이해를 애써 편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성실성의 부족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니다. 대상들의 지상적 정황을 우그러뜨리고 대상과 대상들의 새로운 낯선 관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최규리 시인 역시 일상적 논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소위 현대시라 일컫는 이러한 「트랙」은 처음부터 이해되기를 철저하게 거부한 시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일상적 의미도 없다. 따라서 비구상화를 감상하듯이 독자들은 그러한 작품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서 제시한 예문을 통해 모호성과 애매성에 대한 이해를 좁혀갈 수 있다. ‘열한 번째 말발굽이 달려가고, 로그인은 깃발을 흔들지, 처음은 없고, 한쪽 눈이 흘러내려’(「트랙」)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트랙」의 시작품에서 최규리 시인이 보여주는 그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릇 「트랙」은 은폐지향성으로 상징과 관련되어 있다. 직설적 표현보다는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감추어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다.
스커트가 펄럭인다 끓고 있는 그녀의 세면대는 그에게서 온 편지들로 고여 있다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은 기억을 녹인다 어깨로 흘러드는 촛농은 하얗게 부서지고 커피포트에 말려든 낮은 웃었다 백열등이 깨지며 발등에 꽂힌 이빨들, 소금사막으로 뒤덮인 방들이 눈썹을 붙잡고 플러그를 꽂았다 혈관을 태우는 눈동자, 별이 지지 않는 주소를 적고 텅 빈 심장으로 봉인한다
푸른 쓸개즙이 흐르는 밤을 걸어 춤추는 스커트
-「폭염」 전문
폭염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 폭염은 최규리 시인에게는 또 다른 환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첨언하면 시인이 생각하는 세면대에는 물이 고이는 공간이 아니라 ‘편지’들이 고이는 공간으로 탈바꿈 한다. 이것이 시다. 이것을 보고 시인의 역할을 충분하게 다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시인만이 사유하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보면 ‘그녀의 세면대는 그에게서 온 편지들로 고여 있다.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은 기억을 녹인다. 어깨로 흘러드는 촛농은 하얗게 부서지고 커피포트에 말려든 낮은 웃었다’라는 시구는 최규리 시인이 전위적인 사유가 없으면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아방가르드다.
지금도 최규리 시인은 한 없이 미끄러지며, 횡단하고 있다. ‘스커트’에서 ‘세면대’로, ‘울음’에서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어깨로 흘러드는 촛농’에서 ‘백열등이 깨지며 발등에 꽂힌 이빨들’을 차연(差延, differance)하며 이동한다. 이러한 최규리 시인의 차연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의미맥락을 담지하지 못하고 그 뜻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현상을 일으킨다. 즉 미결정상태, 끊임없는 유예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시인은 그 결론이 언제 날지도 모르는 가로지르기를 한다. ‘방들이 눈썹을 붙잡고 플러그를 꽂’는 횡단과 ‘혈관을 태우는 눈동자, 별이 지지 않는 주소를 적고 텅 빈 심장으로 봉인’되는 「폭염」의 애매성과 모호성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3. 結
모든 예술의 기본은 새로움 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기를 “낯익은 것은 무관심을 불러오고, 낯선 것은 관심을 불러온다”고 했다. 이렇듯이 최규리 시인은 시의 행과 연에서 낯선 표현들을 구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관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그의 시적 사유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부유하며 확장되며, 그의 시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무한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했다.
최규리 시인은 작품에 대한 어떠한 구상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작품화 하는 듯 하지만 시인의 작품들은 어떠한 논리나 윤리의식의 제한도 받지 않으며, 시간적 공간적 질서의 구속으로부터도 더없이 자유롭게 터치한다. 따라서 어떤 시인보다도 최규리 시인은 많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는 한국시단의 전범으로 평가될 만하다. 특히 현실적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본래의 용도, 기능, 의미를 본래적 속성에서 이탈시켜 그것이 놓일 수 없는 낮선 장소에 재조합함으로서 초현실적인 환상을 창조해 내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기법을 구사한다. 시인은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보여 왔던 이성 중심, 이성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입장이 최규리 시인의 모든 시작(詩作)의 일상이다.
최규리 시인의 시의 모티브는 소박한 용도가 결정적으로 정해진 듯한 하나의 현실, 즉 「폭염」처럼 두 개의 사물이 제자리가 아닌 것을 느낄 만한 장소에 있으면, 그 사실자체로 하나의 기존 현실은 그것의 소박한 "용도나 신분"을 전환된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기능과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대상이 그것과는 별반 관련이 없는 또 하나의 대상과 어울려, 제 자리가 아닌 새로운 장소에서 만나게 되며, 그리고 새로운 창조물을 생산해 낸다. 그것이 바로 데페이즈망의 기법이다. 요약하면 ‘무관계가 관계’임을 알려주는 원리이다. 그 전략을 최규리 시인은 자신의 시작(詩作)에 적용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역설적으로 옮겨진 오브제는 주어진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이런 것은 시인의 자유로운 사유를 필요로 한다.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늘 이동하는 사고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끝으로 전통적인 문학의 형태, 문학적 이념의 전복을 시도한다. 기존의 모든 가치와 현실의 질서를 해체하고 거부하고, 저항한다. 시인의 모험정신은 현대시가 일차적으로 수용한다. 무감각한 상태의 인간을 뒤흔들어 그 영혼을 깨어나게 하여 주관성과 우주적 힘들 사이의 합일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다다의 선구자 차라가 단호하게 외쳤다. “나는 모든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가장 받아 들일만한 체제는 원칙적으로 말해서 아무 체계도 갖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최규리 시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최규리 시인의 차가운 이성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환상 가로지르기의 횡단을 기대해 본다.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20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 2008년 《시와 세계》 문학평론 당선. 시집으로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문학의전당, 2009)이 있음. 2006년 제1회 5.18 문학상 및 2009년 제7회강원문학 작가상」 수상. 현재 가톨릭관동대학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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