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628. [역경의 열매] 이철휘 (14~16)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 [역경의 열매] 이철휘 (14)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 [역경의 열매] 이철휘 (15) ‘폭약 버터’ 사건… 그건 시련 아닌 예비된 연단
⊙ [역경의 열매] 이철휘 (16) 원치 않던 중대장 또 맡게 되자 ‘재구상’ 영예가…
~~~~~~~~~~
***[역경의 열매] 이철휘 (14)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나는 고민 끝에 전방 위주로 전투경험을 쌓는 야전형 군인이 되기보다는 다시 교관을 하거나 위탁교육을 받아 학문을 하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이라는 석사과정이 있었다. 군이 전산화를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전망이 밝은 코스였다.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마음먹고 육군본부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야전군의 소대장들이 너무 많이 지원해 공석이 많이 생기자 모두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서울로 가는 꿈이 더 이상 나의 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의 소망을 방해하셨을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논 베르크 수녀원의 한 기둥에 씌어 있다는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두신다”는 사실을 그때 체험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서 친척집에 놀러왔던 아내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 후로 함께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갔고 지금의 가정을 이뤘다. 결혼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경계초소(GOP)에서 중대장을 시작했다. GOP 중대장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24시간 내내 부대에 있어야 한다. 민간인은 구경도 못하고 한 달에 고작 2박3일 동안 외박을 나갈 뿐이다. 그래서 딸아이는 낯선 나를 보기만 하면 울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 자체가 안 됐다. 계속해서 산 속에만 있다 보니 다시 후방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제까지 육군에 전례가 없던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중대가 사단장님을 모시고 야간 각개전투 시범을 보이는 임무를 받았다. 예행연습 과정에서 ‘크레모아’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자칫하다간 대항군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중대 간부들이 모여 토의한 결과 폭약의 양을 적게 하기로 하고 폭약을 조금씩 잘라내어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런데 잘라낸 폭약을 처음 본 병사 두 명이 버터로 착각해 야외훈련 중 밥에 비벼 먹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처음 두 명의 병사가 똑같은 증상으로 내 앞에서 쓰러지자 나는 식중독일 것이라 생각했다. “둘이 같이 밥을 먹었는가?” 물었더니 선임하사가 “둘이 밥에 버터를 비벼 같이 먹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식중독이라 확신한 나는 대대 상황실에 앰뷸런스를 요청한 후 대대장님에게도 지휘보고를 했다.
대대 군의관이 훈련장에 와서 환자들을 태우고 떠나자마자 이번엔 대대장님 지프차가 나타났다. “한겨울에 식중독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먹다 남은 버터를 가져와 봐라.” 그런데 선임하사가 들고 온 것은 버터가 아니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져 있는 것은 지난 시범 때 잘라내어 감춰뒀던 폭약이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대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보니 병사들이 먹은 건 버터가 아니라 폭약 덩어리입니다.” 내 얘기를 듣는 대대장님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대대장님은 신속히 무전으로 헬기지원을 요청하셨다. 나는 그 길로 연대장님에게 불려갔다. “자네는 육군 역사에 없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새 길을 찾기 바라네.” 그러더니 중대장 보직해임 명령서에 내가 보라는 듯이 아주 천천히 서명을 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5) ‘폭약 버터’ 사건… 그건 시련 아닌 예비된 연단
나는 중대장실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헬기로 수도통합 병원까지 후송됐던 병사들이 위세척을 빨리 하는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왔다. 아까운 젊은이 둘을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을 뻔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보직해임은 없던 일로 용서가 됐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간 분망한 군 생활을 핑계로 잠시 소홀했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 일로 뼈저린 교훈을 몇 가지 얻었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약 덩어리를 버터로 생각하고 밥에 비벼 먹을 거란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발단이 된 편법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원형의 탄약에서 폭약을 잘라낸 것이 잘못이었고 시범 후에는 그것을 즉시 반납해야 했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보고에만 의존하지 말고 현장이나 현품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대대장님이 먹다 남은 버터 덩어리를 가져와 보라고 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선임하사의 보고만 믿고 현품을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내가 버터의 실체를 빨리 확인해 헬기 요청시간을 앞당겼더라면 병사들의 생명은 더 안전했을 것이다.
나는 군 생활 동안 이 교훈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결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느 방안이 원칙에 가까운가에 기준을 두었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반드시 결과보고를 받았다. 현장에 자주 가보고 지휘관들이 보고하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현장방문 시간은 항상 계획보다 오래 걸렸다. 어떤 때는 부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현장이 확인되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풍토가 조성되는 거라 믿었다.
드디어 1980년 2월 기다리던 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났다. 첫 부임지인 7사단에서 60여 개월을 보낸 후 처음으로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이 보장되는 보병학교에서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도 매주 빠짐없이 나갔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육을 받으며 여기저기 어떻게 하면 보병학교 교관으로 남을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첫째는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조건은 충족됐다. 둘째는 교육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매일 밤샘을 하며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과정의 3분의 2 가량을 지나면서는 상위 10% 안에 들게 됐다. 나는 교관으로 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마음 편히 교육수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기 군인력운영계획이 변경되면서 우리 기수에서는 교관을 한 사람만 뽑게 됐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전방으로 가는 신세가 됐다. 이처럼 나의 군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나의 희망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그것은 나를 위한 또 다른 축복의 시작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6) 원치 않던 중대장 또 맡게 되자 ‘재구상’ 영예가…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수료한 뒤 서부전선의 분대장을 양성하는 제3하사관학교의 중대장 요원으로 분류됐다. 나는 이미 전방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기 때문에 학교장 신고를 할 때 중대장을 하는 것보다 교관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지휘관보다는 교관을 하는 것이 부담이 적고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병학교에서 하지 못한 교관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미련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면서 이미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과 중등학교 2급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교사 자격증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군인은 드물었기 때문에 멋진 교관이 되어 보겠다는 개인적 욕심과 자신감도 있었다.
그랬더니 학교장님께서는 “잘 알았다. 네 바람대로 교관을 시켜주겠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지금 중대장 중 한 사람이 보안사령부로 가기 위해 면담을 하고 왔는데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 지휘관 보직인 중대장을 공석으로 놔둘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안사령부로 가면 너는 중대장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관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직도 없이 1주일을 대기하던 중 결국 그 중대장이 보안사령부에 선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차 중대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달갑지 않게 여기며 억지로 맡게 된 중대장을 하면서 ‘재구상’을 받게 됐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는 오묘한 것이었다. 재구상은 훈련 도중 부하가 실수로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자신은 산화하면서 부하 장병들의 목숨을 구해낸 고(故)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당시에는 사단 내에서 가장 탁월한 중대장 한 명에게만 주는 상이었다. 나는 3군사령부 직할 부대 중대장 가운데 선발되어 받게 된 것이다. 내가 재구상을 받은 것은 그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재구상은 통상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받는 게 관례였는데 나는 학군(ROTC) 출신으로서 그 상을 받음으로써 더 빛이 났을 뿐 아니라 그 덕분에 우수한 장교로 인정 받아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보병 소령 기록장교로 뽑혀 갔다. 나는 거기에서 ROTC 13기 동기회인 ‘녹성회’도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이른바 동기생들 중에서 선두그룹의 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재구상을 수상한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후방에서 근무하거나 교관 같은 편한 직책에서 근무하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길을 막으셨다. 그리고 전방에서 중대장 생활을 하도록 하고 그 결과로 재구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길을 막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다시 길을 열어서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3) 재구상 수상을 계기로 나의 군 생활은 더 높은 정상을 향하여 비상하는 나래를 펼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