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16-2. 일본 축구 전문 잡지 [주간 사커다이제스트] 250호(95년 2월 1일 발행)에 실렸던 연재물(いつか 来る 夜明け: 언젠가 올 새벽)번역.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던 김병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축구를 떠났다. 볼은 찰 수 없었고, 일상 생활에서 조차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본인과의 만남이 그 운명을 바꿔 놓았다. 추락할 때까지 추락한 사나이에게......한 줄기 빛이 내비친 것이다.] - 카네코 타츠히토-
- 언젠가 올 새벽 -(下)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난 후, 김병수는 23세가 됐다. 올림픽 기간 중 그는 동료들이 세계의 강호를 상대로 분투(奮鬪)하는 모습을 한 번도 T.V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곳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선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건지 김병수는 뼈 아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은 것이다. 동료라는 것은 말하자면 라이벌 아닌가. 부상이 원인이 되어 그라운드를 떠난 사나이에게 있어서 라이벌의 ‘석세스 스토리’ 는 고통일 수 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완전히 축구를 그만두었다. 몇 차례 메스를 댄 다리는 본인의 요구를 60% 밖에 들어 주지 않았다. 큰 요구가 아니었다. 앞으로 걸어 봐! 뒤로 걸어 봐! 그러나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다.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재능을 아는 사람들은 크게 탄식했고, 김병수는 한국 축구계에서 사라지려고 했다.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A대표팀에 뽑혔을 때가 19세 때였어요. 당시로서는 최연소로 대표팀에 선발된 거였는데 주위에서 “한국 축구의 미래는 너에게 달려있다!” 고들 말했거든요. 그 당시와 비교하면 제 자신이 너무나 크게 추락했지요. 다시 한 번 뛰어보겠다는 의지가 생기질 않더라구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잊은 건 아니었다. 팀의 기둥인 김주성을 분데스리가 2부 리그인 VfL보쿰에 막 진출 시킨 대우 로얄즈는 새로운 에이스 후보로 김병수를 점찍어 두었다. 그러나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 다리 상태를 알고 그에게의 열의는 급속도로 차가와졌다.
고교에서, 대학에서, 클럽에서 그리고 해외 유학에서 등...... 여러 루트를 통해 프로 입단이 가능한 일본 축구계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대학→프로” 라는 길 이외에 다른 루트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대학과 프로 사이가 항상 연계되어 있는 게 아니다. 양자(兩者)가 연계되는 시점은 1년에 한 번 있는 드레프트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우가 김병수의 영입을 단념하자 대학과 한국 축구계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나이는 완전히 낙오자가 되고 만 것이다.
「당시 큰 쇼크를 받았어야 정상인데, 솔직히 말해서 대우는 그다지 가고 싶은 팀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최순호(80년 한국 대표팀의 수퍼스타)선배님에게 축구를 배웠기 때문에 프로팀에 간다면 그 분이 소속해 있던 포항제철 외에는 생각하질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우에서 저를 단념 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그렇다면 할 수 없지뭐~~” 이런 느낌 밖에는 안 들었습니다. 」
다리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마음 속엔 허무감이 넓게 퍼져 있었다. ‘축구가 모든 것이었다’고 말하는 사나이를 언제 밝아올지 모르는 어둠이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JFL에 소속되어 있는 코스모석유 축구팀은 요카이치시(市)의 린카이부(部), 굴뚝이 줄지어 서 있는 공장 지대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요카이치 중앙공고 축구부OB 쿠키 신지가 이 팀 감독에 취임한 것은 지금부터 2년 전, 일본 축구계가 화려한 황금시대에 돌입 하려고 할 무렵이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코스모석유는 J-리그 승격에 대한 의사(意思)를 타진해 본 적이 없다. 다만, J-리그 인기는 틀림없이 코스모석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J-리그 승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은 89년부터 많은 JFL팀들이 그러하 듯, 프로 계약 선수의 영입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은 현장 사람들(코칭스탭)이지만 필시, 회사 측도 J-리그 승격으로의 자격이기도 한 JFL에서의 지위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극히 절묘한 판단이었다고 생각 되어진다.
어쨌든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쿠키 씨는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영입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물론 외국인 선수 영입이 가능하게 됐더라도 J-리그 팀들 처럼 풍부한 자금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타겟이 되는 국가는 정해져 있었다. 코스모석유가 처음에 데리고 온 외국인 선수는 태국 선수 두 명이었는데 태국 선수들은 너무나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92년부터 그 대상이 한국으로 바뀌었다. 코스모석유는 한국의 고려대학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대 축구부가 일본에 전지훈련을 오면 저희 측에서 그라운드를 제공해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서정원과 노정윤 등이 대학생이었을 때부터 볼 차는 걸 봤지요. 김병수는 뭐라 그럴까, 혼자 다른 세계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어요.‘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쿠키 씨는 우선 김병수의 플레이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연인’ 은 완전히 축구계를 떠나, 은행에 근무하면서 동네 축구를 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아닌가. 정말 다리를 못 쓸 정도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치료를 해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쿠키 씨는 즉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만났을 때 김병수는 다리를 질질 끌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걸 보고 진짜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명을 물어 보니까 슬개골이분증(膝蓋骨二分症)이라더군요. “슬개골이분증이라면 이 분야의 치료 기술이 발달된 일본에 오면 나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낫는다면 우리는 대단한 재능의 선수를 영입 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쿠키 씨는 ‘너의 무릎은 반드시 낫는다. 그러니까 일본에 와라!‘ 라고 김병수를 설득했다. 만일 낫지 않는다면 코스모석유는 사용하지 않아도 될 돈을 날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쿠키 씨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감독직을 건 설득이었다. 그 열의가 얼어붙은 사나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한국에서 저는 거의 잊혀진 존재였고, 제 자신도 축구에 대한 열정이 식었 습니다. 그러한 때 쿠키 감독께서 다리를 낫게 해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다리만 나을 수 있다면 뛸 자신은 있었고, 일본이라면.... 실례될 말이긴 하지만 베스트 상태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 거든요. 그래서.......」
쿠키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김병수는 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일본에 오고 나서 2년간 쭉 쉬지 않고 트레이닝을 한 덕분에 몸 상태는 거의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동료들도 친절하게 대해줬구요. 일본에 온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스모석유팀 연습장을 방문한 우리를 김병수는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맞아주었다. 왼 손 약지 손가락에는 새로운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취재 수일 전, 그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막 올린 것이다. 2년 전, 일본에 온 그는 즉시 무릎에 메스를 댔다. 「나을 지, 안 나을지 반신반의였다.」고 본인은 말을 했지만 수술 결과는 쿠키 감독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다리는 나았다. 김병수는 다시 볼을 찰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참고 참은 울분을 토하는 것 뿐이다.
93년 5월에 개막한 JFL 2부에서 코스모석유는 관계자들을 놀라케 했다. 개막전부터 4연승을 한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부상자가 속출해 우승은 놓쳤지만 11승 중에는 J-리그에 뛰어들려고 아르헨의 우고 마라도나와 바티스타를 영입한 PJM에게 올린 2승 등 가치있는 승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즌 코스모석유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황배에서의 활약이었다. 1회전에서 J-리그 승격을 결정지은 벨마레와 맞붙은 코스모석유는 1대0으로 이 강호를 누르며 금쪽 같은 승리를 올린 것이다. 고마에다 감독과 니카놀 코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든 것은 김병수의 한 방이었다.
「일본에 와서 우선 느낀 것은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레벨이 높다는 것이었 습니다. 물론 한국보다는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요. 그 중에서도 J-리그를 목표로 하고 있는 팀에는 집념이 강한 선수가 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J-리그 승격이 결정된 벨마레를 무너뜨린 것은 일본에서 가장 큰 추억입니다.」
생각한 것 보다 레벨이 낮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JFL 전반에 관해서의 얘기다. 아마추어 선수가 대부분인 코스모석유는 그렇게 강한 팀이 아니다. 당연히 김병수의 부담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축구를 한 번 단념했었던 사나이에게 있어서는 부담이라고 하는 이름의 기대가 그저 기쁠 뿐이었다. 2년 째 접어들어 쿠키 감독으로부터 ‘스트라이커를 맡아 주지 않겠나?‘ 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김병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의 진가를 발휘시키려면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것이 최고예요. 그 걸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팀의 경우 항상 밀리는 시합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김병수에게 있어서 2년 째 시즌. JFL은 1부와 2부의 울타리가 철폐되고 16팀에 의한 단일 리그제가 됐다. 말하자면 그것은 J2의 4위였던 코스모석유가 격상(格上)됐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밀리는 시합이 예상되는 이상, 결정력이 있는 선수를 가장 득점을 올릴 가능성이 높은 포지션에 두고 싶어하는 것은 감독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이리하여 “득점력이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 였던 김병수는 득점 만이 기대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코스모석유의 스트라이커는 확실하게 골을 양산해 냈다. 팀이 기록한 33골 중에 14골은 김병수가 떠뜨린 골이다. 그러나 팀 자체 성적은 16팀 중에 15위라고 하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수비 라인은 견고하지 못했고 미드필드에서의 좋은 패스가 좀처럼 그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서도 김병수는 세레소 오사카의 모리시마와 2골, 카시와 레이솔의 카레카와 5골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득점수를 기록한 것이다.
‘스피드가 있으면서도 골 문 앞에 왔을 때는 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슛을 때립니다. 게다가 그 슛이 정확해요. 적(敵)으로서는 최악의 선수지요. 만일 그가 일본인이었다면......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밖에 기용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선수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쓴 웃음을 지은 것은 작년 시즌 김병수에게 두 시합에서 2골, 2어시스트를 당한 교토 퍼플상가의 요나시로 전감독대행이다. 요나시로 뿐이 아니다. 상대팀 감독들은 한결 같이 김병수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JFL 16팀 감독들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JFL 올스타 사커’ 에 김병수는 코스모석유에서 유일하게 선발됐다.
일본행을 결정했을 때 김병수는 그 일을 몇 몇 사람에게만 알렸다. ‘아주 조용히’ 출발했다고 한다. 일본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나라로 간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프라이드가 용서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들은 한국 프로팀에 입단해 월드컵을 목표로 뛰고 있다. 한국 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나라의 그것도 톱 리그가 아닌 리그 팀으로 간다.......?'
올림픽에서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절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사나이는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팠던 다리가 완쾌되면서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부상만 낫는다면 그에게는 다시 한 번 톱의 위치로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서울에서 결혼식 사회를 그는 대학 시절의 친우(親友)에게 맡겼다.
「어린 아이들이 떠들어대서 시끌시끌했어요. 주인공은 저였는데.....」
사회를 맡은 건 홍명보였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이 우즈베키스탄에게 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 듯, 반드시 강한 팀이 이기는 게 아닌 것이 축구라는 스포츠다. 개인 단위도 마찬가지다. 만일 재능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인생에서 승리 한다고 하면 귄터 네쳐, 엔조 프란체스콜리는 펠레는 몰라도 플라티니 정도의 명성은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귄터 네쳐는 볼프강 오베라트의 견실함에 포지션을 빼앗겼고, 프란체스콜리는 엘케어 라르센과 살바토레 스킬라치의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재능은 반드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재능이 없는 자가 언제나 승리하는 걸까? 당연한 얘기지만 아니다. 귄터 네쳐에게는 보르시아MG와 유럽 선수권에서의 전설이 있고 프란체스콜리는 리버플레이트에서 얼마나 멋지게 꽃을 피웠는가.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반드시 새벽은 찾아온다.
92년 1월, 일본 축구는 김병수의 골에 의해서 절망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 당시 곧 거기에 다가오고 있던 새벽을 믿는 자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다. 새벽 전(前)이 가장 어둡다는 것을.
그러면 김병수에게 새벽은 올 것인가. 생각해 보면 꽤 밝아진 건 사실이지만 그의 미래는 반드시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본인이 아무리「부상이 완쾌되면 대표팀에 복귀할 자신은 있다.」고 하더라도 JFL에서 뛴다는 것은 큰 핸디캡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서는 해외에서 뛰고 있는 선수는 대표팀에서 제외 시켜야 된다는 목소리가 크다.
김병수가 소속하고 있는 팀은 일본의 그것도 J-리그 아래에 위치해 있는 리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표 복귀를 반대할 것이고 김병수 자신이 수준 높은 DF와 대결할 수 없다는 것도 큰 고민거리다. 미래는 반드시 낙관할 수 만은 없다.
「한 번은 축구를 떠났었기 때문에 지금은 플레이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 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표팀의 긴장감이 그리워지는 게 사실이예요. 그 때문이라도 수준 높은 곳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년 말 김병수는 코스모석유와 계약 1년을 연장했다.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뛰고 싶은 욕구 보다 다리를 낫게 해준 사람에 대한 은혜를 우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병수를 일본에 데리고 온 쿠키 감독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작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 됐다. 필시 금년에 김병수 마음은 욕구(欲求)와 은혜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직전, 김병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상대방은 그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비쇼베치가 자네에게 흥미를 갖고 있네. 대표팀 훈련에 참가하지 않겠나?.........‘
終
김병수. 나이: 1970년생 포지션: 미드필더 신장: 175cm 출신교: 경신고-고려대 소속팀: 제일은행-코스모석유(일본)
참고: 위의 글은 일본 축구 전문 잡지 [주간 사커다이제스트] 250호(95년 2월 1일 발행)에 실렸던 연재물(제목: いつか 来る 夜明け(언젠가 올 새벽). 작가: 카네코 타츠히토)을 필자인 제가 우리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미 1년여 전에 제가 활동하고 있는 스포츠 웹사이트 ‘후추’에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린 적이 있는데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토탈사커 독자 여러분들께도 이 연재를 소개 시켜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스타 클래식]에서 다루게 됐습니다.
'언젠가 올 새벽'을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 작가인 카네코 타츠히토(金子達仁) 씨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카네코 씨는 1966년생으로 호세이(法政)대학교 사회학부 출신입니다. 대학 졸업 후, 축구 전문지 편집기자를 거쳐 95년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96년에는 MIZUNO 스포츠 라이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대단히 유명하고 실력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스포츠 관련 책을 많이 집필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ヨハンクライフ-美しく勝利せよ.(요한 크루이프-아름답게 승리하자!)', '決戦前夜(결전 전날 밤)', '蹴球中毒(축구 중독)', '28年目のハーフタイム(28년 째 하프타임)', 泣き虫(울보: 격투기 PRIDE 총괄본부장 타카다 노부히코(高田伸彦)자서전)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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