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희망, 소망 이런 단어는 우리 일상에서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대화에서 그리고 뉴스에서도 희망이라는 용어를 잘 듣기 힘듭니다. 희망이 사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삶 자체에 희망이 아닌 현실에 치중해서 산다는 방증일까요?
과거엔 사람들에게 당신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들 나름대로 소박하고 때론 대담한 희망을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희망 조사서를 작성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뭐냐고 묻지도 않지만 물어도 그 희망이라는 게 뭐냐고 되물을 지경입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실종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잃어버린 희망을 찾기 위해 어디에 신고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희망이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젊은이들이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의 희망을 꿈꾸며, 그 감동적인 순간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의 과정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요?
성경 로마서 5장 3~5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롬 5:3)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롬 5:5) 이 희망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과정도 완전히 다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고통이 인생의 계단처럼 여겨진다면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고통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집니다. 한 사람은 고통 앞에서 신음하고 한 사람은 콧노래를 부릅니다. 희망이 바꾸어 놓은 같은 처지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나 봅니다.
일본 기독교단 의장을 역임했던 스즈키 마사하시 목가는 췌장암으로 1969년 7월 14일에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잠들기 전에 그가 남긴 편지는 희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그는 죽기 닷새 전 일본 기독신문 독자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입원 당시에는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삶이 이렇게 장기 전체가 암에 걸려서 끝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온전한 섭리며 ‘하나님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신다’(전3:11)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는 나의 삶의 정점에서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이렇게 깊고도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심히 마르고 날로 쇠약해져 가는 육신 때문에 이미 혼자서는 스스로 몸을 뒤척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날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죽음도 희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성경은 자주 예수님은 우리 시대의 소망으로 나타냅니다. (골 1:27)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딛 2:13)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고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고통마저 콧노래를 부르게 할 그 희망이 당신에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