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애사(哀史)
청계천은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편안함과 애착이 남아있는 곳이다. 생애 처음 시작한 제약회사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처음 약국을 개설한 곳이 청계천4가이다. 이민을 가려던 계획을 접고 약국의 둥지를 마련한 곳이다. 아침 여섯시부터 밤12시까지 발악하듯이 약국을 지킨다. 잠은 약국 천정 위에 마련한 다락방이다. 방이라야 2평 정도의 공간으로 아내와 둘이 누우면 그만인 곳이다. 밤이면 까맣게 달라붙은 빈대 등살에 뜬 눈으로 밤잠을 헤매야만 하는 요지경의 연속이다. 두살 네살의 어린 남매는 할머니의 몫이다. 토요일 밤 늦게 애기들이 있는 동생집으로 향한다. 자그마한 개인 주택은 동생에게 넘겨주고 미국 이민의 길을 계획했다. " 너 정말 이민갈거가 ? " 오마니의 한 마디가 모든 계획을 접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미움과 불평 불만이 오죽했을까. 어리디 어린 애기들은 약국으로 향하려는 부모를 붙들고 울며 불며 자지러지기 일쑤이다. 내 집을 마련할 때까지의 마음고생과 어머님에 대한 죄송스러움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리오. 저 멀리 떠나가신지도 40여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지금도 드릴 말씀이 없을뿐이다. 두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위한 가장(家長)으로서 몸부림의 씨앗을 뿌린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옛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청계천이 탄생한지도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오늘에야 지기들 넷이서 청계천에 한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처음 내려와서 걷게 되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예전 모습이 아닌 낯설은 청계천에 대한 실망감에 대한 실망을 피하기 위함인가. 구태여 설명할 이유도 구차할 뿐이다. 청계천은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남산 북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울 도심을 통과하여 동(東)으로 흘러 나간다. 청계천은 의정부 윗쪽 경기도 양주 불곡산에서 시작하는 중랑천과 살곶이다리에서 합류하여 한강 본류로 유입되고 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자연하천으로 홍수에는 범람으로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19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개천 정비를 수시로 하던 곳이다. 1971년 8월에는 약 6Km 정도에 달하는 청계고가도로가 완공이 된다. 청계천변에는 여전히 판자촌이 형성되어 슬럼지역이기도 하다. 열악한 환경에 재봉틀 한 두대로 의류를 제조하는 빈민촌이기도 하다. 6.25 한국동란으로 북(北)에서 피난온 피난민이 60% 정도가 넘는 곳이다. 1962년도에 근대화된 건물로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난다. 평화시장이라는 이름도 피난민들이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주위 환경이나 근로조건은 조국근대화라는 구호와는 다르게 최악의 상황으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합당한 임금과 근무시간등 근로자들의 인권은 허상일뿐이다. 쥐꼬리만한 근무수당에 노예아닌 노예에 불과한 처지가 아닌가. 감독관청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 하나 그들의 절망어린 목소리는 외면으로 마이동풍이다. 극에 달한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아까운 청년 한 명이 희생의 제물이 된다. 의류제조회사의 시다로 재단사로 일하던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휘발유로 자신의 몸을 적시고 불을 붙인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분신(焚身)으로 항거(抗拒)한 스물 두살의 앳된 청년 바로 전태일이다. 노조운동과 군사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에 불을 붙인 셈이다. 오늘 청계천 의 모습은 한 인간의 판단과 아집으로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권력욕에 집착한 결과물은 아닐까.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어거지로 조성한 청계천이 예전의 역사문화를 재현한 개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인가. 잘잘못의 평가는 후세 역사학자와 국민들의 몫으로 남긴다. 30년 넘게 사용되어온 청계고가도로는 하루 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금 현재의 모습 청계천은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총길이 5.84km로 하루 물 소비량은 12만t이다. 한강변에 있는 자양정수장에서 한강물을 끌어올려 뚝섬유원지에서 정화하여 지하관으로 청계천에 유입되고 있다. 청계천 개천 위에는 22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열일곱번째 다리인 영도교(永渡橋)가 있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17살에 숙부인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폐주가 된다. 창덕궁을 나서는 폐주 단종의 마음은 오죽했으리오. 머나먼 유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아내인 폐비 정순왕후 송씨와도 이별이다. 두 사람이 이별한 다리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로 불렸지만,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영원히 건너간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부터 근대사와 한국의 현대사가 어우러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계천 평화시장은 이 노객의 사사(私史)에도 얼룩진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1964년 대학교 1학년 2학기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라는 아버지의 애절함이 가슴을 파고들고 있다. 울며불며 떼를 써서 아버지 손에 끌려 등록금을 구걸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의류를 판매하는 이북이 고향인 지인을 찾은 것이다.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애원하던 아버지이다. 철없는 아들의 성화에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 순간 이 노객의 인생은 극과 극으로 갈릴뻔한 숨막히는 찰나가 아닌가. 어엿한 지아비로 자식들의 아버지이며 손주녀석들의 할아버지이다. 약사로서 아들이 개원한 연세한강병원의 약제실에 근무하고 있는 종업원의 한 사람이다. " 여보 ! 죽을 때까지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이니 어떻게든 학비를 마련해 줍시다 " 어머니의 말씀이 오늘따라 새롭게 가슴에 젖어오고 있다. 그 날이 오는 순간까지 약사라는 명찰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니 말이다.
2018년 9월 28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