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이 오랜 세월 검증과 고증을 거쳐오면서 발전시켜온 전통지리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인 이 땅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고 표현해 낼 수 있다. 산줄기가 강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산맥의 혼돈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대안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일제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산맥개념은 하루속히 우리의 전통지리관인 백두대간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도만 가지고도 우리의 산줄기와 강줄기의 근본을 알 수 있고, 우리 민족사의 굴곡들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백두대간, 살아 꿈틀거리는 불가항력의 힘이 느껴지는 거대한 산줄기는 바로 이 땅의 역사 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체계를 정착 시켜 나간다면 머지않아 백두대간이라는 가슴 벅찬 이름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올 것이다.
..........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 루는 백두대간은 동과 서를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임과 동시에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역할을 한다. 태초에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은 저마다 대간의 저력 을 닮은 모습으로 한반도 구석구석으로 가지를 쳤다. 그렇게 해서 대간(大幹),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을 일구어 냈다. 기둥 줄기인 대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10대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인 정맥들이 국토의 뼈대가 되고 있다. 백두대간은 1625여km에 이 른다. 우리가 아직 가볼 수 없는 북녘 땅에는 2000m급의 고봉들이 줄이어 있다.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약 670km에 이르는 거리에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을 품 고 있다. 한반도를 일군 백두대간은 대륙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하여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기운으로, 이 땅의 근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 한다.
백두대간의 개념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의 지리관으로 자리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러나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료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조선 초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었을 것이 란 사실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지 사료가 없어 고증이 안될 뿐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산경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산경표>는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19세기에 고산자 김정호는 심혈을 기울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 지도는 정밀함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도로 인정받고 있 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우리 지리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산경표>는 전국의 산줄기를 1대간(大幹), 1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 했고 여기서 다시 가지친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산줄기의 순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로 하고 여기서 가지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우선하고, 백두대간 의 북쪽으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그 순서를 정했다.
백두대간과 정백정간은 산이름을, 해서나 호남은 지역 이름을, 나머지 11개는 강이름에서 따 와 산줄기의 이름을 정했다. 때문에 이름만으로도 강의 위치와 지역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강이름을 따다 이름을 지은 것은 정맥의 정의를 강유역의 경계능선, 즉 분수령으로 해석했 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을 알아보기 쉽게 하여 강과 그 유역을 파 악하여 지형지세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산이 곧 그 강을 이 루는 물의 산지라는 인식를 비롯하여 산경표는 활용도를 중요시 하여 제작된 지도였다.
1913년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출판한 적이 있었다. 하 지만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그 가치는 묻혀버렸고 영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1980년 겨울,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는 우연히 인사동 고서점에서 "산경표"를 발견했다. 당 시 대동여지도 복간을 준비하던 중 몇가지 의문에 고심했던 이씨에게 "산경표"는 문제를 푸 는 열쇠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우형씨는 백두대간을 알리기 위해 많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실을 거두어 백두대간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산맥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가 재 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자원 찬탈을 시도하기 앞서 고토분치로로 하여금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우리나라 지질을 탐사토록 한 결과 산맥이 등장하였다. 산맥은 백두산을 매개로 일체가 되는 우리의 민족의 구심점을 없애고 백두대간을 훼절시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도입되었다.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나누었고, 그렇게 나눈 산맥에 잔 가지를 붙여 백두대간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하게 했다. 또한 낭림산맥을 강조 태배산맥-낭 림산맥의 선을 나라지형의 중심축으로 부각시켰다. 태백, 소백 등 다른 산맥은 모두 산이름 이 들었갔으나 백두산이 있는 마천령 산맥은 고개이름인 마천령을 따서 마천령산맥이라고 지명하였다. 또한 가장 짧은 산맥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백두산 최고봉을 일왕의 이름인 대정으로 정하여 대정봉이라고 바꿔 놓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고토가 우리나라 땅을 조사한 기간은 1900년 및 1902년 두 차례에 걸친 14개월 동안이었다. 어떻게 기술수준도 미약했던 100전에 한 나라의 지질구조를 단지 14개월이라는 기간동안 완전하게 조사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에 발표된 고토의 지질학 적연구성과는 우리나라 지리학의 기초로 자리잡아 지리교과서에 들어앉게 되었다. 고토는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하였다.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 (形),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하였다. 그러다보니 땅위의 산줄기들의 흐름은 무시되고 땅속의 모양새만 따지다보니 산맥줄기가 강이나 내를 건너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현실임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손으로 이 땅을 조사해 볼 생각조 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야욕이 만들어낸 지리개념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해방 후 50년이 넘도록 우리 지형에 맞지도 않는 산맥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장백정간(長白正幹) 북쪽으로 두만강, 남쪽으로 어랑천·수성천의 분수령. 백두대간의 원산 설령봉에서 시작된 다. 만탑봉(2,205m), 괘상봉(2,136m), 궤상봉(2,541m), 등을 지나 함경북도 내륙을 서북향으 로 관통하는 산줄기. 두만강 하구 서수라곶에서 끝을 맺는다.
낙남정맥(洛南正脈) 북 낙동강이 흐르는 낙남정맥은 남부해안지방의 분계선으로 생활문화와 식생, 특이한 기후 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낙동강 하구 분산(盆山)에서 끝난다. 옥산(614m), 무량산(575m), 여항상(744m), 무학산(763m) 등이 속한다.
청북정맥(淸北正脈) 평안북도 내륙을 관통하며 압록강의 남쪽을0 이룬다.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신의주 남쪽 압록강 하구의 미곶산에서 끝난다. 대암산(1,566m), 삼봉산(1,585m), 등이 속한다.
청남정맥(淸南正脈)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청천강의 남쪽 유역과 대동강의 북쪽 유역을 경계하는 분수령. 묘향 산(1,365m), 용문산(1,180m), 서래봉(451m), 강룡산(446m), 광동산(396m)을 지나 용강의 남 포에서 대동강 하구 광량진에서 끝난다.
해서정맥(海西正脈)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서해 장산곶에서 끝난다. 우리나라 북부와 중부지방의 문화 를 경계하는 분수령이다. 화개산(1,041m), 대각산(1,277m), 설봉산(600m)등이 해서정맥에 속한다.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북으로 임진강, 남으로 예성강의 분수령. 황해도의 오른쪽 울타리를 이룬다. 해서정맥의 화 개산에서 시작하여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 즉 개성의 남산인 진봉산(310m)이다. 학봉산 (664m), 수룡산(717m), 천마산(762m) 등이 속한다.
한북정맥(漢北正脈) 한북정맥은 북으로 임진강 남으로 한강의 분수령. 백봉에서 시작한 백암산(1,110m), 법수령 을 지나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끝난다. 동해 안 지방의 담장 역할을 한다. 백병산(1,259m), 통고산(1,067m), 백암산(1,004m), 주왕산 (720m), 단석산(829m),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 등이 속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속리산에서 시작하여 칠현산에서 끝난다. 도산(547m), 상 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등이 한남금북정맥을 이룬다.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분계령.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 북쪽 2킬로미터 지점에 위 치한 칠장산(492m)에서 시작 강화도 앞 문수산성에서 끝맺는다. 백운산, 성륜산, 광교산 등 이 속한다.
금북정맥(錦北正脈) 남으로 금강이 흐른다.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 (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난다. 태안반도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장수 영취산(1,076m)에서 시작하여 진안부귀산(806m)까지 이 어진다. 장안산(1,237m) 수분현(530m) 팔공산(1,151m), 임실 성수산(1,059m), 진안 마이산 (667m), 등이 속한다.
금남정맥(錦南正脈) 금강의 남쪽 울타리. 그러나 온전한 울타리를 이루지는 못한다. 애매한 지점(565m)에서 출 발하여 부소산 조룡대에서 끝난다. 대둔산(878m), 계룡산(828m), 운장산(1,126m), 등이 속한 다.
호남정맥(湖南正脈) 정맥의 동쪽은 섬진강, 서쪽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다.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 라 남부해안문화권을 구획하는 경계선.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래친 후 백운산에서 끝난다. 남 도의 큰 산을 모두 끌어앉는다. 만덕산(762m), 내장산(763m), 추월산(729m), 무등산(1,187m), 제암산(779m), 조계산(884m) 등이 속한다.
산이름
높이
산이름
높이
산이름
높이
산이름
높이
지리천왕봉
1,915.5m
용문산
710m
황장산
1,077.3m
상월산
970.3m
노고단
1,507m
국수봉
790m
도솔봉
1,312.2m
석병산
1,055.3m
만복대
1,433m
백학산
615m
제2연화봉
1,357m
석두봉
991m
수정봉
804.7m
장자봉
380m
비로봉
1,439.5m
화란봉
1,069.1m
고남산
846.4m
봉황산
740.8m
국망봉
1,420.8m
고루포기산
1,238.3m
봉화산
919.8m
형제봉
803.3m
선달산
1,236m
선자령
1,157m
백운산
1,278.6m
속리천황봉
1,057.7m
옥돌봉
1,241.2m
소황병산
1,338m
영취산
1,075.6m
문장대
1,015m
구룡산
1,344m
노인봉
1,328.1m
장수덕유산
1,500m
청화산
984m
태백산
1,566.7m
동대산
1,433.5m
무룡산
1,491.9m
조항산
951.2m
함백산
1,572.9m
응복산
1,359.6m
백암봉
1,480m
대야산
930.7m
금대봉
1,418.1m
갈전곡봉
1,204m
삼봉산
1,254m
장성봉
915.3m
매봉산
1,303.1m
점봉산
1,224.4m
대덕산
1,290m
백화산
1,063m
덕항산
1,070.7m
대청봉
1,707.9m
삼도봉
1,176m
조항산
1,025m
두타산
1,352.7m
마등령
1,326.8m
황학산
1,111.4m
마역봉
927m
청옥산
1,403m
신선봉
1,204m
눌의산
743.3m
포암산
961.7m
고적대
1,353.9m
마산
1,051.9m
회
산 행 코 스
km
도상
1:5만
1
중산리-천왕봉-장터목산장--덕평봉(선비샘)-벽소령
29
15.5
운봉,산청
2
마천(삼정리)-벽소령-연하천산장-화개재-노고단-성삼재
31
15.5
운봉
3
성삼재-만복대-정령치-고리봉-주촌마을
15.5
10.8
운봉,남원
4
주촌(가재마을)-수정봉-여원재-고남산-매요리
20
15.5
운봉, 남원
5
매요리-사치재-시리봉-봉화산-임도-구상리
17.5
12.8
운봉,함양
6
구상리(송리)-월경산-중재-백운산-무령고개
17
13.8
함양
7
주촌(궐촌)-무령고개-영취산-깃대봉-육십령
14
11
함양,무주
8
육십령-남덕유산-삿갓재-무룡산-동엽령
24
15.8
무주
9
통안-동엽령-백암봉-대봉-신풍령
17
12.4
무주
10
신풍령-삼봉산-소사재-대덕산-덕산령
18
13
무주,무풍
11
덕산령-부항령-삼도봉-석교산-질매재
30
22.5
무풍,영동
12
질매재-황악산-여시골산-궤방령-가성-눌의-추풍령
30
20.8
영동, 김천
13
추풍령-묘함산-작점고개-용문산-국수봉-큰재
20
17.8
관기,상주,영동,김천
14
큰재-회룡재-개텃재-윗왕실-백학산-소정재-지기재
22
17.6
관기,상주
15
지기재-금은봉-신의터-장자봉-화령재
19
15.2
관기,상주
16
화령재-봉황산-비재-형제봉-피앗재
18
12.8
속리,관기
17
피앗재-천황봉-비로봉-문장대-작은눌재-눌재
24
13.6
속리,관기
18
눌재-청화산-조항산-고모치-대하산-불란치재
28
12.8
속리
19
불란치재-장성봉-은치재
18
10
속리,점촌
20
은치재-희양산-이만봉-백화산-이화령
20
18.3
점촌,충주,속리,덕산
21
이화령-조령산-조령3관문-마폐봉-부봉-하늘재
22
16
점촌,덕산
22
하늘재-포암산-대미산-차갓재
20
17
덕산,단양
23
차갓재-황장봉산-벌재재-저수재
21
13
덕산,단양
24
저수재-싸리재-묘적봉-도솔봉-죽령
23
18
단양
25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연화동갈림길-고치령
30
22.3
영주,영월,예미,단양
26
고치령-마구령-늦은목이-선달산-박달령
26
18.5
예미,태백,영주,춘양
27
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구룡산-실두재
20
14
태백,예미
28
실두재-문수봉 갈림길-태백산-화방재
22
15.3
태백
29
화방재-만향재-함백산-싸리재-금대봉-매봉산-피재
24
19.5
태백
30
피재-한의령-부시령-덕항산-광동이주단지-큰재-댓재
30
23.5
임계,삼척,태백,장성
31
댓재-두타산-청옥산-고적대-이기령
22
17.3
임계,삼척
32
이기령-상월산-백복령-자병산-군대
18
12.5
구정,묵호,임계,삼척
33
군대-생계령-석병산-두리봉-삽달령
20
15.5
구정
34
삽달령-화란봉-닭목재-맹덕-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31
25.5
구정,도암
35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
24
22
구정,도암,연곡,강릉
36
진고개-동대산-두루봉-만월봉-응복산-약수산-구룡령
28
20.8
연곡
37
구룡령-갈전곡봉-연내봉-조침령
24
18.5
연곡,현리,설악,속초
38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
25
21
설악,속초
39
한계령-대청봉-소청봉-희운각-무너미고개
24
9
설악,속초
40
무너미고개-공룡능선-마등령
24
5
설악,속초
41
마등령-저항령-황철봉-미시령
22
7.5
설악,속초
42
미시령-신선상봉-신선봉-대간령-마산-스키장-진부령
17
설악,간성,속초
상기의 표는 최고 11시간 최저 6시간의 거리임.
실제거리 총 936km
1.종주양식 대학산악부-일반산악회-단독-구간-안내종주의 형식으로 변화했다. 1988년 7월 2일부터 9일 까지 한국대학산악연맹은 백두대간을 15개 구간으로 나누고 49명이 동시다발로 종주에 나서 대간의 개념을 전국의 대학산악부로 확산했다. 이에 따라 대학산악부별로 지원대를 둔 종주 형식을 적극화하면서 백두대간종주에 불이 붙었다. 91년부터는 일반산악회로 종주운동이 옮아갔다. 하지만 생업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이 종 주에 필요한 시간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휴직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고 대간길 을 타는 경우도 생겨났다. 1994년부터는 구간종주방식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생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말시간을 이용하면 비록 기간은 길어지지만 완주의 기쁨을 맛볼수 있었기 때 문이다. 1995년부터는 안내산악회의 가이드종주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안내종주의 성행으로 개인 적으로 종주가 어려운 산행인들에게까지 백두대간길을 밟아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됐음 은 물론이다.
2.종주의 목적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산줄기 개념을 바로 세우고자 종주에 나섰다고 말하는 종주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또 북쪽의 대간길을 답사할수 있기를 바란다며 통일의 염원을 밝히기도 했 다. 이밖에 장기등반을 통한 등반능력 향상과 해외원정을 위한 훈련의 목적으로 대간종주에 나 선 산악인도 있었고 모험심의 발로나 개인적인 고민을 정리하기 위해 종주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3.종주기간 일반적으로 종주중 여섯차례의 지원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40일∼55일 정도 걸린 것으로 나 타났다. 동계종주는 60일∼70일로 나타났는데 적설량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다. 구간종주의 경우 산행 횟수는 40∼60회, 종주에 걸린 기간은 1년∼3년정도다. 종주인의 사정과 방식에 따라 30일만에 마칠수도 있고 10년에 걸쳐 조금씩 해나갈수도 있는 것이 대간종주의 특징이다.
4.종주와 계절 뜨거운 태양이 등반의욕을 잃게 하고, 우거진 숲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만들며, 해충 과 뱀의 공격까지 감수해야하는 여름종주가 가장 힘들다. 봄과 가을이 종주하기 가장 편한 계절로 꼽혔다. 다만 이들 계절에는 물준비를 특히 신경써 야 한다. 겨울은 폭설과 추운날씨가 등반을 어렵게 하지만 여름보다는 종주하기 수월하다. 설산을 오 르면서 등반의 성취감을 느낄수 있고 숲이 우거지지 않아 넓고 먼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이 다. 이같은 분석과는 다르게 실제 종주팀은 여름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여름 21팀, 겨울 13팀, 봄 10팀, 가을 2팀) 긴 방학기간을 이용한 대학생종주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5.지원장소 대표적인 지원장소는 육십령, 추풍령, 이화령, 죽령, 화방재, 피재, 백봉령, 삽당령, 대관령, 진고개, 구룡령, 한계령 등이다.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이들 고개가 주요한 지원장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6.위험구간 육십령에서 장수덕유 사이, 추풍령휴게소 지나 384봉, 속리산 문장대에서 눌재, 대야산에서 불란치재, 은티재에서 희양산, 이화령에서 조령3관문, 차갓재에서 황정산 정상, 망대암산에서 한계령, 마등령에서 황철봉사이를 종주자들은 위험한 구간으로 꼽았다.
8.사고사례 동계 종주중 오대산 두루봉에서 텐트 안에 버너를 켜놓은 채 자다가 질식사한 사고를 비롯 해 안내종주에 나섰다가 탈진해 혼수상태에 빠진 경우(인공호흡으로 소생)가 있었다. 암릉에 서 추락하거나 독사에 물린 사고 등도 보고됐다.
9.식량준비 종주자들은 입맛에 맛고 가벼우며 영양가가 높은 것, 변질되지 않으며 포장이 쉬운 음식물 을 식량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추천한다. 간식으로 사탕, 땅콩, 초코파이, 건바나나, 건포도가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매 끼니 식사를 개별포장해 더 먹고싶은 충동을 억제한 경우도 있었고, 빵만으로 연명하다 구역질이 나 한 끼를 떡라면으로 바꾼 경우도 보고됐다. 반찬으로 대부분 젖갈류를 준비했다. 김치는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이다. 산에서 캔 더덕 으로 간식을 해결하거나 나무아래에 사각플라이를 쳐놓고 이슬을 털어서 식수로 사용한 현 지조달형도 있었다. 설탕과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시면 갈증해소에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비법소개도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는 처음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종주자들이 많아 어느정도 등산로도 생겨나고 자료도 있는 상태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빈약한 자료로 개척지를 찾아다니듯 산행을 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짐작이 간다. 한반도의 등줄기를 밟아가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친 듯이 산을 타는 그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대간 종주는 산악인들에게로, 일반인들에게로 점점 확산되어 갔다.
산을 타는 이들에게 물으면 백두대간 종주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남한의 백두대간 길이는 지도상으로는 6백40여㎞의 거리지만 실제거리는 1천2백여㎞에 이른다. 그것도 험한 산길로만 다녀야 하는 대간 종주는 산행에만 꼬박 50일이 걸린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챙겨야 할 장비도 많아 배낭 무게는 20㎏이 넘는다. 한여름에는 뜨거운 태양과 싸워야 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를 견뎌야 한 다. 며칠을 가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할 때도 있는 백두대간 종주은 그야말로 자기자신과 의 싸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험난한 시간들을 뚫고 진부령에 내려섰을 때의 감격은 또다시 대간을 향해 오르는 원동력이 된다. 백두대간 종주는 일주일에 하루씩 쉰다면 대략 50일은 잡아야 한다. 해가 ?은 겨울철은 적어도 70일은 잡아야 한다. 동계장비까지 무겁고 눈 때문에 산행 속도도 느리기 때문이다.주말에만 종주를 할 경우는 구간으로 나누어서 해야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거르지않고 한다해도 40회 이상은 산행에 나서야 해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걸린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했어도 끝을 맺기가 어려운 것이 백두대간 종주다.
참고자료 : 태백산맥은 없다(도서출판 사람과 산, 조석필 저) 산경표를 위하여(도서출판 산악문화, 조석필 저)
백두대간
우리 땅의 물줄기 가른 산줄기, 족보기술식으로 정리한 전통 지리개념
우리나라의 옛 지도들은 산줄기 지도라 할 수 있다. 살펴보면 연결되지 않는 산줄기는 없다. 함경북도의 두만강 끝에서 목포의 유달산까지도, 평안북도 신의주 앞산에서 부산의 금정산을 지나 바다 끝의 다대포 몰운대까지도 줄줄히 이어져 있다. 그저 모든 산줄기를 연결해 놓고 보자는 식의 지도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산줄기라고는 없을 듯한 평야지대에도 뚜렷한 산줄기를 그려 놓았다. 예를 들면 백두산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속리산에서 서쪽으로 가지쳐 수원의 광교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김포평야를 남북으로 가르며 강화를 마주보는 문수산성까지 연결되었다.
이 산줄기를 찾아 1:25,000 지형도를 가지고 답사해 보면, 수원 북쪽 광교산(582m)에서 안양 의왕 군포를 북으로 두고 해발 100여 m의 낮은 고개에서 안산의 수리산(475m)으로 건너뛰고, 다시 북쪽으로 광명시와 인천을 가르는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다가 경인고속국고를 가로질러 철마산으로 가서는 계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부터의 산줄기는 지형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산줄기이다. 100m도 채 되지 않는 해안선의 낮은 구릉을 용하게 연결시켜 북으로 가현산 학운산 수안산 오봉산으로 이어져 것고개에서 문수산(376m)으로 연결되어 있다.
비단 김포평야의 산줄기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산줄기는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산줄기 표현의 옛지도는 공공도서관에만도 수백 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1557년경에 제작되어 전도류(全圖類)로서 가장 오래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사편찬위원회 소장·국보 제284호)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제작된 정상기(鄭尙驥)유형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인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 또는 군현도(郡縣圖)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맥락을 이루어 똑같은 산줄기를 한결같이 그려 놓았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이와 같은 지형 표현의 전통기법을 계승하여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東與圖),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산줄기 물줄기 지도로서 거대한 지형지세도(축척 1:216,000·남~북 660cm)로 정립시킨 것이다. 그러면 이 산줄기들은 지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산줄기인다. 또 산줄기라 할 수 없는 산맥들은 왜 지도상에 그려 놓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옛지도는 지형의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나라 땅의 미약한 하나의 능선일 망정 그 줄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연결되어 어디로 이어졌는지 뚜렷하고 명쾌하게 일러 주고 있다. 아울러 산줄기와 어루른 물줄기도 그 시작부터 지나치는 고을과 고을을 일러 주고, 어디고 흘러 가는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도는 옛것이나 지금의 것이나 다양한 선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같다. 이 선들은 특별히 선택된 선으로서 그 의미 부여가 당연하고 명확한 것들이다. 상식의 범주에 있는 것으로 사실에 입각한 것이며,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 의식을 담은 것이어서 생활 편의에 이용도가 가장 높은 것이며 정보적 차원의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옛지도에 그려진 산줄기는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아무리 미약한 김포평야의 산줄기라 하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편의와 직결된 의미있는 선이라는 것이다. 자연히 지도는 그 땅에 대한 그 땅 사람들의 공통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지도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우리 옛지도에 나타난 산맥을 글로 정리한 것이 1800년경 찬표된 산경표(山經表)다. 산경표는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이 동국지도류의 산줄기 흐름을 토대로 <문헌비고>의 ‘산수고’(山水考)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찬표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본(本)은 세 가지가 있다.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의 <여지편람>(輿地便覽)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崔南善)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 등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그 내용은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대간),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다시 가지쳐 뻗은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모든 산맥의 연결은 자연지명인 산이름, 고개이름 등으로 하고, 족보기술식으로 하였다.
그 산맥 이름과 순서는 ①백두대간(白頭大幹) ②장백정간(長白正幹) ③낙남정맥(洛南正脈) ④청북정맥(淸北正脈) ⑤청남정맥(淸南正脈) ⑥해서정맥(海西正脈) ⑦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⑧한북정맥(漢北正脈) ⑨낙동정맥(洛東正脈) ⑩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⑪한남정맥(漢南正脈) ⑫금북정맥(錦北正脈) ⑬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⑭금남정맥(錦南正脈) ⑮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서 모두가 15개다.
여기에 나타난 백두대간이라는 산맥 이름은 신라말 도선(道詵)의 <옥룡기>(玉龍記)를 비롯하여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그리고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등에서 자주 보였던 산맥 이름으로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내린 우리 땅의 중심산맥이라는 것이다. 모든 산맥은 중심산맥인 백두대간에서 다시 가지치고 있는데, 북쪽과 남쪽의 연결 산맥인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그 순서에서 우선하고 나머지는 북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정하고 있다.
이들 산맥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2개(白頭, 長白), 그 지방이름으로 된 것이 2개(海西, 湖南), 강이름과 관계된 것이 11개로서 전체적으로 산맥이름을 강이름에서 따와 그 강의 방위로 위치를 표시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산맥의 순서를 정하고 이름을 강이름과 관계한 까닭은 모든 정맥은 관계한 강의 경계능선인 분수령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그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 그리고 그 세력을 쉽게 읽어 국토의 전체적 경영과 활용에 있어 정보적 입장에 있게 한 것이다.
특히 산맥의 이름을 강이름과 연관하여 부여한 것은 산이 곧 물과 관계된 자연의 섭리로서, 그 강을 이룬 물의 산지(産地)라는 지극한 상식을 포함하였다. 미루어 산맥의 원리 인식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랜세월 그 땅과 함께 하며 살아오며 얻어진 축척된 지리인식이며 이에 동화된 생활상식이었다.
이로서 조선시대의 산맥 즉 산경(山經)을 정리하면,
1) 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으로서 이 땅의 중심 산맥이 되며, 모든 물줄기를 크게 동서로 양분한다. 2)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쳐 나온 이차적인 산줄기로서 큰 강의 유역능선, 즉 원수분(原水分)능선이다. 따라서 정맥은 산줄기의 높이, 규모, 또는 명산, 진산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낮고 미약한 산줄기라 하더라도 정맥의 산맥이기 때문에 그 끝까지 표현한 것이다. 즉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이 바로 한강 유역을 가름하는 한남정맥의 줄기이므로 다른 산줄기에 우선하여 뚜렷이 표시된 것이다.
정맥들로 형성된 강은 우리나라 10대 강의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同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섬진강(蟾津江), 낙동강(洛東江) 등이다. 3) 기맥은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대간·정간과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맥으로서 내(川)을 이룬 능선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산맥개념은 현대의 산맥개념과는 달리 ①모든 산맥은 큰 강과 내(川), 그리고 골의 분수령으로서 그 하나하나의 경계선인 분수령이다. ②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하다. 따라서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그 끝남은 대체로 강 하구의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③물줄기를 경계한 산맥이므로 지도상에서 전국토의 지형지세를 보다 쉽게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수계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형성과 그 생활권역을 그 유역과 함께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골짜기까지의 수계 파악도 용이하게 하여 생활과 직결되게 하였으며, 가장 중요했던 내륙 산골까지의 조운(漕運)영역도 쉽게 파악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산맥개념은 인간주의(人間主義)를 기본으로 한 자연지리(自然地理)를 바탕에 둔 것으로 그 땅과 더불어 살아온 그 땅 사람들의 지리관인 지리심성(地理心性·Geomentality)에 기본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워온 산맥의 이름들은 장백, 마천령, 함령,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산맥 등이다. 이 산맥들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郎)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失洋昌永)가 재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들 산맥은 일반 상식의 산맥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形),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한 것으로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광주산맥이 금강산 북쪽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상류를 서쪽으로 건너 북한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관악산 광교산으로 이어지고, 차령산맥은 설악산과 오대산 근처에서 시작되어 남한강을 건너 금강 하류를 끼고 돌아 대천 뒤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산맥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이나 내를 건너 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으나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땅 위의 어떤 선상(線上)을 기준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하고 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100년 전의 한 학설이 아직도 우리라는 ‘채’에 한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우리 땅 산줄기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우리 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이, 그리고 자연지리의 활용에도 아무 관계없이, 그저 학교에서만 그러려니 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애석한 일이다.
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모든 나라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땅의 산을 바라보는 산관(山觀)은 각기 다르다. 그 땅의 산들은 생활의 대상이 될 수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도, 정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뒷산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활화산이라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뫼’ 즉 ‘산’은 이웃나라 일본의 ‘야마(山)’와 먼 나라들의 ‘마운틴(mountain)’과 그 개념이 다르다.
우리에게 산은 옛부터 낳는(始와 開) 산이었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구지봉에서 나오고, 신라 육촌의 촌주들이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으며, 단군이 내려온 신단수도 산이었다. 모든 어머니들의 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식의 점지를 산에서 얻어왔다. 우리 모두는 결국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예들인 셈이다. 곧 우리의 산은 모두를 잉태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여는(開) 곳이다.
우리의 산은 삶과 정신(生과 精)의 산이다. 의식주 모두를 산에 묶어 두고 살아온 우리였다. 세 칸짜리 집을 지어도 들 한 가운데가 아닌 한 뼘 산에 의지하듯 등대고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안식을 느끼는 우리네였다. 어릴 때 처음 그린 그림이 산이었듯, 이 땅의 멋이라는 것과 가락이라는 것 모두가 산과 더불어 되지 아니한 것은 이 땅에 없다. 산과 물이 어우른 곳에 독특한 문화를 잉태하게 하였다. 지식을 쌓으러, 도를 닦으러도 산으로 가고, 머리 아픈 사람들도 산으로만 간다. 해서 상상과 여유를 얻어 온다. 우리의 교육은 산의 정기부터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교가의 가사가 그 지방 유명산의 정기부터 받아 놓고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산은 쉬는(死와 輪) 곳이다. 요즘 산에 갔다 왔다고 하면 등산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에 있는 얕은 산의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고도 “산에 갔다 왔다”고 했다. 산은 부모님의 집이다.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의 처소이다. 우리의 산은 저만치 홀로 있는 산이 아니었다. 늘 사람과 같이 더불어 살고 살아오고 있다. 눈을 뜨면 산이 보여야 안심하고 안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는 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귀결이다.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속에서, 들(野)은 땅(地)이 아닌 산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우리 고래의 인식이다.
산은 정상을 뜻하지 않는다. 남산의 철책 속만이 남산이라는 생각은 현대가 낳은 지극히 짧은 소견이다. 청계천을 건너면 남산골로 접어 들었던 산이 산을 의지한다는 사람들로부터 그 소임을 박탈당한 것이다. 우리가 저 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저 산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옛산의 개념, 즉 산경 원리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개념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렀다. 결코 정복과 개인 소유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생(生)과 활(活), 그리고 정신과 문화에 직결된 다만 이 땅의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산줄기의 연결, 즉 백두대간과 그에서 뻗은 모든 정간은 물뿌리(水分岐)로서 모든 생명체의 시작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인식이었다.
하나의 대간과 하나의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친 기맥으로 이땅을 가름한 산경원리(山脈)는 세분화되어 발달한 지역의 문화지리적 권역을 자연스레 분계하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현재 우리는 크게 북부·중부·남부지방으로 나누고, 영남·호남·영동지방 등으로도 나누어 이야기한다. 다시 나누어 안동, 단양, 남원 등 지방으로도 이야기하며, 해안에서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지방으로도 구분하고 있다. 이들 지방들의 경계를 편의상 행정 경계를 기준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맥도에서는 북부지방은 해서정맥의 이북지역,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은 백두대간의 태백산 속리산 지역과 한남금북정백, 그리고 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그 경계가 선명하며 오히려 자연·인문·식생·기후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예사스럽다.
해안지방에서도 내륙 어디까지를 경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산맥개념의 산줄기로 볼 때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여타 지방의 경계도 확연히 가늠된다.
도시(聚落) 발달로 인한 영향 권역도 쉽게 파악되며, 식생활과 주거양식의 구분 분포도 이들 산맥 선과 일치하고 있다. 북부·중부·남부의 음식문화가 다른데 ‘황세기젓 문화권’·‘새우젓 문화권’·‘멸치젓문화권’으로 대별되어 재미스러우며, 다시 세분화되는 음식권도 이 산맥도로서 쉽게 읽어진다. 주거의 양식에 있어서도 남해안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반듯이 덧문이 있는데, 낙남정맥의 북쪽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말의 방언을 도별로 대별하지만 같은 도내에서도 크게 다른 말씨가 있다. 경상도 말은 강원도 속초지방에서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되며, 같은 전라남도이지만 호남정맥을 기준하여 서쪽의 광주 말과 동쪽 산간의 섬진강 유역인 곡성 구례 말은 전혀 다르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 말과 이웃한 용인 이천의 말이 다른데, 그 사이에는 한남정맥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일일이 지적의 여지가 없다. 산줄기의 가름으로 세분된 언어권은 곧 세분화되는 문화권과 직결된 선이 된다. 요즘은 비닐하우스로 강제 재배가 이루어지지만 농업의 절기와 식생의 분포, 꽃들의 개화일(온도의 차)도 정맥들의 선과 관계되고,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도 이들 산맥의 가름과 관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는 행정단위 구역 중심에서 점차 지형특성, 재해특성, 생활권 등을 고려한 53개 국지예보구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예보구역이 옛 지도에 나타난 백두대간과 14개의 정맥, 그리고 가지친 기맥들의 산줄기의 선과 일치하고 있다.
우리 땅 그 산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모태라는 옛 선인들의 인식,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맥 원리이다. 그 크고 작은 산과 길고 짧은 산줄기는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하는 곳으로서 그 원초적 알맹이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내재한 정의이다.
창조와 발전, 그리고 개혁은 문화의 원형을 정확히 파악하는 바탕에서 비롯되어야 무리가 없다. 미래를 창조하는 기본은 과거의 인식이 뿌리되어야 순리로서 지속성을 갖는 것이다.
산을 아끼고 그 산을 사랑하는 우리다. 모두가 우리 선조들이 정립한 산과 산맥의 원형을 되찾아 새롭게 인식한 바탕에서 우리 땅에 대한 내일을 기약하여야 한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