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그 슬픈 역사의 그늘에서 핀 찬란한 순교의 꽃 빈센트 권!
임진왜란(조일전쟁)은 조선 역사의 분수령이 되어야 하는 동북아 삼국이 한반도에서 벌인 대 전쟁이었다. 전쟁 후 명나라는 사십여 년 만에 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이 들어섰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군 세력이 승리하여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지지하던 서군의 다이묘들은 뿌리째 뽑고 에도막부를 열었다. 그러나 조선은 휘청거렸지만 사대부의 나라, 주자학의 나라, 공맹의 나라로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은 실로 대륙과 섬의 운명을 갈랐을 뿐 만 아니라 수만 여 명으로 아직도 정확한 수를 알지 못하는 조선인 포로, 고요한 나라의 순박한 백성들의 운명을 하루아침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의 포로쇄환으로 돌아간 6,373명을1) 제외한 나머지 포로로 잡힌 자들은 고스란히 일본 열도에 남게 되었다.
아! 우리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간 조선 상놈들의 운명과 비애, 마카오, 필리핀, 고아, 시암 등지로 팔려가거나 추방당한 상놈들의 원한(怨恨)과 좌절, 일본에서 노비로 산 상놈들의 원통과 울화의 깊이, 아픔과 슬픔을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추모하며 기린 적이 없다. 순왜로 싸잡아 매장해 버린 그들의 우울과 자포자기, 참담함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고통으로 품은 적이 없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백년의 역사 속에서 누가 그들을 기억하며 누가 그들을 변호하며 누가 그들의 운명을 애도하며 누가 그들의 억울한 넋을 기렸을까? 누가 그들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며 위로하며 보듬어 주었을까?
금번 나가사키 순교지와 도쿄 야스쿠니 신사와 교토 코무덤과 풍국신사의 방문으로 아득한 옛날 일로 공부하며 기억하였던 임진왜란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전개되었다. 한(恨) 맺힌 죽음과 생이별, 파괴와 약탈을 당한 포로들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못난 왕조, 못난 양반들에 의해서 절벽에서 떨어지고 버림받은 포로들의 참상을 묵상하는 중에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 언덕에서 다른 색깔의 포로들을 만났다. 기리시탄이 된 포로, 순교자가 된 포로들을 만난 것이다. 임진왜란! 그 슬픈 역사의 그늘에서 주자학, 유교 충효의 가치관으로 살아온 그들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기막힌 사건을 목도한 것이다. 충효의 도에서 십자가의 도로 전향한 조선인들의 이야기는 실로 전쟁이 가져온 희극이요, 풍자라 아니할 수 없다.
니시자카 순교자 언덕(아래)과 26순교자 기념관(위)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언덕에 있는 순교기념관에서 조일전쟁 때문에 순교자가 된 조선인 빈센트를 만났을 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먼저는 일본인 순교 기념관에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다음은 말로만 듣던 예수회가 포로로 잡힌 12살 소년을 통하여 우리 역사와 조우를 하였다는 사실때문이었다. 1593년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소년이 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후전도사가 되었으며 예수회에 입회하였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머리에 검정 갓 같은 것을 쓰고 남빛 조선식 두루마기에 폭이 넓은 허리띠를 두르고 왼손에 십자고상 긴 막대기를 들고 오른팔에 도르르 말려있는 십자가 성화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래서일까? 의연하면서도 서글퍼보여서 가슴이 저렸다.
임진왜란에 일본 측 군인으로 제 1군으로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크리스천이었던 관계로 1군에 소속된 대부분의 장군들이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 나가사키 지역의 작은 다이묘들인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가 다 영세를 받은 자들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에서 철수할 때 전쟁고아, 포로, 순왜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수들이 포로와 순왜들을 본국으로 데리고 갔다. 그 중 오무라 요시아키는 1592년에 건너가 1598년에 도공을 데리고 그의 영지로 돌아왔다. 그가 데리고 온 도공들은 하사미 등에서 도업에 종사하고 일부는 나가사키에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7천여 명이 영세를 받았다.2) 그들은 자력으로 조선인 교회(로렌소)를 세웠으며 에도막부의 일본기독교 탄압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수도사가 되기도 하고 전도자로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잠복• 순회하는 선교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안내자가 되어 복음전파에 앞장 서 협력하였다. 개중에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귀국하려는 자들도 있고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다가 순교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래는 일본 기독교 박해사에 기록된 조선의 순교자들이다.
1619년 스즈타 감옥에 잡혀있는 수도사들에게 부식을 차입해준 건으로 베드로 아리조(도미니코회 제 3회원)과 토마스 코사쿠가 니시자카 언덕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1626년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목 베임으로 순교한 조선인들이 10명이었다.
코스메 타케야 쵸베에 (도미니코 로자리오 회원), 안토니오(도미니코회 로자리오 조원), 도밍가 안토니오(도미니코 로자리오 회원, 안토니오 아내), 환 안토니오(도미니코회 로자리오 회원, 안토니오 아들, 12세), 베드로 안토니오(안토니오 아들,3세), 이네스 타케야(도미니코회 로자리오 회원), 프란치스코 이네스 타케야(이네스 타케야의 아들,12세), 카요(전도자), 빈센트 카운 (예수회 수도사), 카요 지우에몬(도미니코회 제 3회원)으로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1629년 도쿠가와막부는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기리시탄 64명을 운젠(온천)으로 연행하여 지옥고문을 가하였다. 온천의 물을 국자로 떠서 머리에 붓는 고문이었다. 그중에 27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그 중에 1명인 이사벨라가 조선인이었다. 그는 13일에 걸친 지옥 고문에 굴하지 않았고 나가사키로 돌아왔으나 바로 추방을 당하였다.
1641년 쿠치노즈 대 박해 때 조선인 베드로와 미겔 두 사람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들은 임진왜란으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는데 나가사키 기리시탄에 의해 해방되자 영세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고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신앙을 위하여 일본에 남았고 끝내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이들 외에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로 유배를 당한 성녀 오타 줄리아, 조선인 최초로 일본여자수도회에서 활약한 마리아 박이 있다.
그러나 당시 영세를 받은 자가 7천여 명이 넘었다니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 우리의 관심과 발굴을 기다리는 무명의 순교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쳤다.
서양 선교사로서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선교사로 알려진 세스페데스신부는 1592년 4월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개시하였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서 종군하였는데 그가 탄 배는 풍랑으로 상륙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음 해, 1593년 두 번째 출항하여 12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축성한 웅천성에서 1년간 거주하였다. 그가 1년간 웅천성에 머물면서 부대 내에서 미사를 드렸으나 조선인들을 접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체류 사실이 1년 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도움을 받아 황급히 돌아오게 되었다. 박철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에 의하면 “그가 귀국하는 와중에 쓰시마 섬에서 조선 귀족의 자손으로 보이는 어린 포로를 데려가 비센테(Vicente, 빈첸시오)라고 세례를 주고 보살폈다”고 한다.3)
그 후 빈센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의 도움으로 소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 조선 소년으로서는 감히 상상해볼 수 없었던 복음 전도자로서 삶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 권 빈센트이다.
그가 일본에서 전도자로 되는 것을 꿈꾸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나가사키 순교자박물관에서 임진왜란으로 인생이 뒤바뀐 조선인을 만날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의 초상화는 충격이었다. 임진왜란, 그 슬픈 역사의 그늘에서 그는 전쟁의 피해자,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개종자, 귀의자, 순례자가 되었고 마침내는 순교자, 성자의 여정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한 전쟁고아가 겪은 비애와 고통과 고독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피부를 찔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물이 주르륵 주룩 쏟아졌다.
그의 눈동자는 파안의 세계를 향하면서도 상처 받은내면을 깊이 응시하고 있다. 남빛 두루마기는 포로에서 놓임 받은 자유인 전도자로, 순례자로 산 그의 고독, 고난, 가난 그리고 본향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좌측 배경의 짙은 쪽빛은 그가 건너온 전쟁이라는 바다, 파도 남실거리는 대한해협이라는 바다, 기독교 금교령 밑에서 살아야 하는 크리스천의 어둡고 두렵고 슬프고 아픈 고난의 바다를 상기시켰다. 우측의 검붉은 빛과 노을처럼 번지는 황금빛은 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깊은 상처, 사람의 힘으로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왼손으로 붙잡고 있는 나무 십자가와 오른팔 안에 끼고 있는 십자가 두루마리 그림은 순교의 고난을 통과한 그의 삶의 승리! 어둠을 이긴 자, 운명을 이긴 자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다.
나는 그림 앞에서 한동안 서있다. 한 영혼을 정금으로 만든 임진왜란의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역사의 그림자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였다.
기념품가게에서 순교자와 순교 역사에 대한 책과 엽서를 구입하였다. 특별히 복자 권 빈센트(1580~1626)의 엽서를 여러 장 구하였다. 놀랍게도 엽서 뒷면에 그의 생애 연보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복자 권 빈센트 1580~1626
일본 205위 순교복자의 1명
예수회 수사, 조선 출생
1580년 조선의 양반가문에서 출생.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서행장 군대에 의해 일본에 연행.
12월 시키(아마쿠사)에서 세례 받음.
1593년경 소신학교 입학, 일본어와 중국어 습득 후 전도사 생활 시작.
1612년 북경에 대사로 파견. 모국 선교(조선)를 위해 갔으나 실패 후 일본 귀국.
1622년 전국금교령 시대에 나가사키에서 중국인선교.
죠라신부와 함께 아리마지방에서 선교.
1625년 12월 22일 구치노쓰에서 체포. 옥중에서 예수회 입회.
1626년 6월 20일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화형.
향년 46세.
나는 그의 간략한 연보의 행간을 거듭 읽으면서 임진왜란과 일본의 전국시대 그리고 에도막부 시대의 혼란과 핍박을 몸소 겪으며 34년 동안 떠돌이로 살아 온 그의 삶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목 마르고 고독한 삶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버린 신산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전개 되었다.
조선인으로서 정체성 혼란과 영적 갈등, 일본인과 서구인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피해의식과 분노, 전쟁의 트라우마, 분노와 증오를 극복한 화해와 용서, 박해와 어둠 속에서 도피와 잠복 그리고 복음 전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고문을 견딘 영적인 승리와 용기와 환희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넘실거렸다.
아! 아!
슬픔이 낳은 기쁨의 아들이여!
고난이 낳은 은혜의 아들이여!
비극이 낳은 평화의 아들이여!
조선이 낳은 하늘의 아들이여!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니시자카 언덕을 맴돌았다. 그의 신명에 집히길 열망하면서.
미 주
1) 정두화, 이경순 엮음,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96쪽, 휴머니스트, 2010
2) 나가사키 가톨릭 대주교구 감수 ⌜나가사키의 순례지와 교회 안내서⌟ 64쪽, 장기문헌사, 2013
3)나무위키(namu.wiki) 고니시 유키나가
참고 서적
1) 나가사키 가톨릭 대주교구 감수 ⌜나가사키의 순례지와 교회 안내서⌟ 장기문헌사, 2013
2) 엔도 슈사쿠 저, ⌜총과 십자가⌟, 불휘미디어, 2015
3) 디에고 유키 신부 저,⌜나가사키 순교자 언덕⌟, 26인 성인 기념관, 2023(한글판)
4) 김화영 엮음, ⌜궁금해서 밤새 읽는 일본사⌟, 청아출판사, 2018
5) 정두화, 이경순 엮음,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