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소작농인 아버지 ‘그라치오 마리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페 데 눈시오 포르지오네’ 사이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다음 날 유아세례를 받고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하였으며, 16세에 ‘모르코네’에 있는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1907년 1월 27일에는 종신서원을 하고,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나흘 후에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후 1911년 9월 7일부터 그의 두 손에 십자가의 상흔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15년에는 손과 발은 물론 옆구리까지 상흔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징집되어 이탈리아군 의무대에 배치받아 복무하게 되는데, 건강 악화로 입대한 지 182일 만에 병역 면제를 받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그는 사제가 된 후 나타나기 시작한 손과 발의 상흔과 밤마다 들려오는 환청·환시에 큰 고통을 느꼈으나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달게 받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길이라고 믿으며 사목활동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탈장과 종양 흉막염 등 많은 질병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1918년 9월 20일에는 다시 두 손과 발 옆구리에 상흔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상흔은 이후 50년 동안 그에게 고통을 주며 몸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사랑과 존경은 물론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자 급기야 1923년 6월 17일부터는 외부인 참례 없이 홀로 미사를 봉헌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외부에서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재는 이후에도 몇 차례 되풀이되었으며,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기꺼이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격리 기간 동안 그는 미사 집전과 기도로 시간 대부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는데, 1934년 3월 25일부터는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이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한 끝에 1956년 5월 5일 준공 축복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8월 10일에는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열렸으며, 1968년 9월 20일에는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그는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 날 새벽 2시 30분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했던 그는 평생 신자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며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신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던 그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거룩함과 명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는데,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의 절차가 시작되어 1982년 11월 29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후 1999년 5월 2일 그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같은 교황에 의해 마침내 성인품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도 신자들의 영적 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일치하도록 보살핀 그의 성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작년 자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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