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조차 나지 않은 나의 생활졸문을, 이 꼭두새벽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아 읽어보았다. 어느 아주머니의 블로그에 담겨 있었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런 고마울 데가. 이렇게 세상에 흩뿌려진 글을 찾을 수가 있구나. 그러니 ‘글’이란 얼마나 엄중(嚴重)한 것인가. 많이 생각하고, 잘 써야 할 일이다. 200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내 나이 막 쉰 줄에 들어선 때이고, 두 아들과 아마도 첫 가족여행인 듯하다. 큰아들이 22살, 둘째가 19살 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글쓰는 스타일은 비슷한 듯하다. 눈이 번쩍 띄게 반가워 새삼 읽어보니,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여전히 못쓰는 글, 부끄럽다. 허나, 이것도 나의 ‘생각의 새끼’이거늘. 마치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같다. 분실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전재한다. 참, 세상은 재밌다.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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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휴가록]하파 데이(HAFA ADAI)! 아디오스(ADIOS)!!
과거는 잊어지는 거라 하지만, 또한 기억되고 반복되는 게 과거일 터. 사이판은 아픈 과거와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화두처럼 던져 주는 섬나라이다. 그저 남태평양 지상의 낙원쯤으로 여기고 맘판 놀자판이라면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래도 사회의 중견으로서 어딜 가든 발걸음마다 ‘쓸만한’ 한두어 가지 생각은 하여야 하리라.
그랬다. 일본군들이 전승국 미군에 몰려 ‘덴노히데끼 반자이’(천황폐하 만세)하며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그 바다는 말없이 에머랄드빛만을 내뿜고 있었다. 대체 몇 십만명이 그렇게 헛되어 죽어갔을까. 그것을 언제까지 옥쇄(玉碎)라고 떠벌릴 것인가. 지난해 일왕부부가 다녀갔다던가. 급하게 만든 신사(神祠)에서 일왕이 눈물을 찔끔거렸다던가. 그거야, 자기 나라 일이니까 좋다고 치자. 왜 죄없는 식민지 백성들을 끌고 가 정신대를 시키고 활주로를 닦고 하루 20시간 가까이 중노동을 시키다 자기들 죽는데 순장(殉葬)처럼 죽게 하는가 말이다. 징병(徵兵) 징용(徵庸) 정신대(挺身隊), 치가 떨려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그 숫자가 자그만치 200만명이고 사이판에만 5만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정부차원에서 위령평화탑 하나 세우지 못하는 나라다. 민간기업과 개인들이 세운 초라한 탑 하나 있을 뿐이다. 작가 조정래가 ‘아리랑’에서 말했다. “일본놈들의 죄는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고.
우리는 겨우 마지막 사령부가 있었던 동굴에 안내인 몰래 껌을 붙이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서글픈 낙서나 할 뿐이지만(조금 더 열받고 통이 큰 사람은 오줌도 갈겼다던가), 그들은 ‘돈’으로 뼁끼칠을 한다. 몇 백만 평이고 사서 떡버러지게 기념물을 짓고 공공연히 추모를 한다. 섬 전체를 사버린 후 텃세를 부린다. 무섭다. 역시! 자본주의는. 양심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CNMI. 미국 자치령, 나라이름의 이니셜이 낯설다. NMI(North Mariana Island)는 알겠는데, C는 무엇인가? Common Wealth라고 한다. 공통재산? 사회주의국가도 아니면서 특이한 이름이다. 차모로 원주민들 입장에서 주인이 누가 되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되는지, 몇 백년동안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으면서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듯 하다. 주인이 누가 됐든 뱃속만 편하게 해주면 그만인가. 스페인 통치 200여년, 독일통치 150여년, 일본 통치 30년, 이후 미국 자치연방시대가 열린다. 불세출의 탐험가 마젤란이 1512년에 첫발을 내디뎠다. 스페인 통치 당시 마리아나여왕의 이름을 따 北마리아나라 했다. 모계사회의 전통과 농업과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한다.
마나가하섬(사이판의 진주라던가. 그 섬을 가지 않으면 ‘가나마나’라니)의 스노클링도 신나는 일이기는 하다. 바닷속을 제 집 들여다보듯이 쳐다보는 재미는 쏠쏠하다못해 신기하기까지 하다. 총천연색의 산호, 알록달록한 물고기떼, 이건 완전 동화속 그림이다. 어른들은 확실히 아이들보다 겁도 많고 배우기도 쉽지 않다. 물속 호흡이 안돼 계속 물을 먹는 통에 코가, 목구멍이 매콤하고 머리가 멍멍하다. 그 좋은 구경거리도 한두 번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미국 군함을 보라. 1년내내 정박을 하며 자기네 땅이라고 지키고 있다. 며칠 안보이면 틀림없이 태풍이 오므로 날씨정보를 듣지 않고도 준비를 한다나. 참으로 대단하다.
타포차우(TAPHOCHAU)산을 올랐다. 해발 473미터. 섬의 딱 중앙이므로 사이판섬 전체가 내다보이고 일망무제, 사방팔방 태평양이 다 보인다. 섬주위를 둘러싼 자연방파제, 저 산호띠를 보라. 도대체 자연의 신비는 어디까지인가. 물감을 막 풀어놓은 듯한 환장하게 새뜩한 에멀럴드빛 바다. 커다란 나무십자가와 조잡한 듯 세워져 있는 성모 마리아상. 마치 골고다언덕같다. 주민들이 대부분 카톨릭신자라 부활절 즈음하여 실제 ‘골고다 행진’을 벌인다고 한다.
정글투어. 제트스키. 펀 다이빙. 바나나요트. 패러세일링. 그래 너희들은 다 해보라. 비싸면 그까짓거 얼마나 되겠냐. 아빠도 한번쯤 해본 것이다. 우습게 생각하고 간 휴가, 그러다보니 비용이 만만찮다. 에라, 모르겠다. 이만한 호사쯤 몇 년에 한번 해도 되지 않을까. 신나는 것은 이놈들이다. 바다와 동심은 맞닿아 있는 걸까. 너무 좋아한다. 하루종일 물속에 있어도 지치지 않을 놈들이다. 지긋이 그걸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도 한갓지고 참 좋다.
상하(常夏)의 나라. 원주민의 집을 들여다본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야자수(椰子樹)나무. 사실은 수자가 나무 수이므로 야자수로 해야 한다. 처갓집, 초가집, 역전앞, 다 중첩되는 말들이다. 가로수도 되고 그들의 주식도 되었다. 야자수 열매가 코코넛이다. 코코는 원숭이를 의미하고 넛은 nut 호도열매같이 단단한 것이다. 윗부분을 날카로운 긴칼로 자르고 빨대로 물을 마신다. 약간 맛이 간 김빠진 포카리스웨트맛이다. 그래도 먹을만 하다. 숙취 해장에 좋다는데. 코코넛 열매가 희한하다. 표면에 검은 점이 세 개 박혀 있는 데, 고게 원숭이 얼굴을 닮았다. 그 열매를 두 쪽 다 자르면 우리처럼 표주박으로 이용할 수 있다. 끈으로 두 짝을 이어놓고 보니 영락없는 브라자이다. 여성들은 한번씩 속옷 속에 차보라. ‘자연 뽕’이다. 치근거리는 치한에게 슬며시 갖다대보라. 질겁을 하고 줄행랑을 칠 것이다. 철(鐵)의 유방! 껍질 속의 흰 막에 초고추장을 찍어먹으니 이것은 또 웬일인가. 갑오징어 맛이다. 크으! 쐬주 한 잔만 걸치면 원이 없겠는데. 흰 막은 잠시 놓아두면 물이 되고 만다. 물되기 직전의 맛은 한치다. 잎은 지붕이을 때 쓰이거나 사람들 ! 아랫도리 가릴 때 쓰는 치마이자 바지다. 버리거나 쓰이지 않는 게 없단다. 우리 홍어가 생각난다. 홍어는 뼈든 창자든 먹지 않는 게 없다. 사람도 어디 내놓아도 요모조모 쓸모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이것은 관광(sightseeing)이 아니고 휴가, 휴양(resort)이다. 그냥 하루종일 아무 생각하지 않고 쉬는 게 휴가(休暇) 아닌가. 그저 쉬고 싶었다. 업무 스트레스, 매일 과음 폭음등 술과의 전쟁, 사회생활속 관계의 어려움, 가족간 의사소통의 애로 등, 이런 모든 것을 한번쯤 완전히 잊고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선크림 바르고 선그래스나 끼고 빈둥빈둥 졸리면 자고, 일어나 심심하면 풀장에 들어갔다 나오고, 책이나 할랑할랑 보며 죽이는 시간들 말이다. 그랬다. 그렇게 한번 해보니 너무 좋다.
외국인 한 명이 원서를 읽고 있다. 말을 붙였다. 제목이 ‘The discontructive emotion'이다. 달라이라마와 누가 대담한 내용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있는 것같다. 하여 말했다. discontructive emotion는 한국말로 ’화‘ 또는 ’분노‘를 뜻한다고, 한번 따라해보라고. 그 친구 49년생인데 의외로 순진하다. 친구하자며 손을 내민다. 베트남전쟁에서 허리를 다쳐 은퇴를 했다 한다. 종교가 뭐냐고 물어 ’emotional Buddist'라고 하자 자기도 그렇다며 활짝 웃는다. 이름이 ‘젊은 바위’(YOUNG-ROCK)라고 하자 자기 미들네임이 ROCKY라며 더욱더 친근감을 나타내는데,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점점 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어 좀 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쬐그만 것들, 네댓 살 먹은 애들도 왜 그렇게 영어를 잘 하는지 모르겠다.
군데군데 전봇대에도, 집집 대문에도 노란 리본이 흔히 눈에 띈다. 무슨 축제를 알리는 걸까? 가이드 얘기가 솔찬히 재미있다. 섬의 젊은이들이 미국령이므로 이라크전쟁에 대거 차출된 모양이다. 이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데 환영하는 거란다. 노란손수건을 아시는가? 어느 재소자가 출감하는데 그의 아내가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온통 노란손수건을 달고 기다렸다는. 그 재소자는 그것도 모르고 스쳐지나갔다던가. 그의 부모들은 제대해 돌아오는 아들들을 저렇게 노란리본을 달고 반기는구나. 부모자식의 정은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다 똑같지 않겠는가. 몇 개월전 신문에서 봤다. 임진각 어느 나무에 어부로 납북된 아버지를 그리며 딸이 노란손수건을 가득 매달아놓은 가슴아픈 사진을. 노란 손수건이 노거수 은행나무여서 은행잎이 노란손수건을 대신하면 또 어떠리. 모두 다 마음마음인 것을.
아시아나 비행기가 매일 한 편씩 뜬다. 정원 300여명. 1년이면 한국인이 몇 명 다녀갈까. 비수기 감안해도 최소 6만명은 될 거라는 추산이다. 한국에서 4시간. 금요일저녁 인천공항에서 저녁 8시10분 발을 타고 월요일 새벽 2시30분 비행기를 타라. 월요일 휴가 내지 않고 출근할 수 있다. 시차 1시간. 주5일 근무제의 선물이다. 비수기때는 제주도 여행보다 훨 싸지 않을까 싶다. 그냥 조금 비싸게 이틀 쉬어보자는 생각이다. 그럴 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도박장(Pocker Room)은 얼씬도 하지 말라. 우리는 ‘부르튼 자지’(부르주아)가 아니다.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포커판에서 하우스장과 시비가 붙어 일가족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국인과 조선족, 그들은 ‘신이 축복을 내린 땅’에서 전대미문의 불상사를 만들어냈다. 세계 어디서든, 한국인의 이름을 음으로 양으로 빛내는 민족이다.
하파 데이(HAFA ADAI)! 안녕하세요. 원주민들의 인사말이다. 하와이언들이 ‘알로 하오에’ 하듯이, 중국인들이 ‘니 하오마’(你好嗎)하듯이. 이들은 자기네 인사말을 무척 사랑한다. 택시 번호판에도, 호텔이름에도, 낯선 사람을 만나도 하파 데이(HAFA ADAI)다! 얼마나 보기좋은 광경인가. 그렇게 자기네 전통과 역사를 아끼는 모양이다. 헤어질 때의 인사말은 아디오스(ADIOS). 스페인말로 ‘Farewell'을 뜻한다. 그러고보니 영화진 팝송인지 친구와 헤어질 때 ’아디오스 아미고‘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미고(amigo)는 ’나의 친구‘라는 뜻이다. ’친구여, 잘 가라‘ 한국인 가이드 38명중의 한 명인 이윤준씨의 공항 인사말이다.
<2006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