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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 좋은 곳들이 많지요. 사실 꼭 가봐야할 명소만 따져도 그런 곳이 우리나라 전역에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에 날이 갈수록 빠져드는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얼마 전 모 잡지사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잡지 해외기사 비중이 너무 큰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분 말씀이 글을 기고하는 필진들이 해외여행만 기고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이 제게는 좀 충격적이었어요. 또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고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에 아직 눈 뜨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발도행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경관과 문화를 제대로 만끽해보실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답니다. |
강진에 처음 도착해서 먹은 일명 갯펄탕이예요.
나름 강진 맛집에서 먹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으셔서 냉동으로 사가신 분들도 계셨어요.
남도명품길 1코스 '인연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강진의 길을 걷습니다.
올해는 봄비가 꽤 많이 내리네요.
해마다 봄 가뭄으로 마음고생하셨던 농부님들에게 좋은 소식이길 바랍니다.
비에 젖은 길은 더욱 그 색이 그윽합니다.
비에 코팅된 동백잎들이 유난히 더 반짝이던 길입니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1500그루의 동백이 환상적인 경관을 자랑하지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남부럽지 않은 길입니다.
부드러운 육산인 만덕산에 자리잡은 백련사는 다산 정약용과 교분을 나눈 혜장선사가 계시던 곳이지요.
다산과 혜장스님이 오가며 교류했던 사연으로 이 길 이름이 '인연의 길'이 되었나 봅니다.
백련사는 본래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신라 문성왕 1년인 839년에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지요.
그후 절이 없어지고, 터마 남았다가 불교가 크게 일어났던 고려 후기 무신정권 당시
세속화된 불교의 개혁을 위한 천태종 수행결사인 백련결사가 여기서 일어납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백련사라고 하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이 해안가를 자주 노략질할 때 바닷가와 가까운 백련사도
큰 피해를 입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종 때 이르러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불이 나서 지금의 모습은 영조 때 갖춘 것이라고 하네요.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백련사 출신의 8분 대사 중에
마지막 여덟번째가 다산과 교류하던 혜장선사 아암이라고 합니다.
혜장선사는 다산과 교류하며 불경을 읽거나 염불하는 것보다
주역에 심취하여 다른 수님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게 성취하여 대흥사가 인정하는 12대 강사 중에 한 분으로 꼽힙니다.
이런 것을 보면 스님이라고 하여 불경만 읽기 보다는 다양한 종교에 대해
통섭하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다녀온 봉화 청량사에서 법회를 하시던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25세까지 자기는 성경을 늘 끼고 다니는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예수님 말씀과 부처님 말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시더라고요.
다만 본인에게는 부처님 말씀에 더 수긍되는 부분이 있으셔서 법복을 입게 되셨다고 하네요.
네 귀퉁이에 활주를 받쳐서 안정감 있게 들어선 대웅보전은 영조 때 건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36호입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편액 글씨는 우리나라의 서체라고 일컬어지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 선생(1705~1777)의 글씨라고 합니다.
원교 이광사 선생이 여기서 가까운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로 말년을 보내면서 쓰신 글씨로 추정됩니다.
5월 중순임에도 아직 동백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음이 감사하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지난 겨울의 때 늦은 혹한기 추위로 올해는 동백꽃이 크게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백련사 동백숲-
촉촉하게 내리는 비는 일행들의 감수성을 한껏 흔들어 놓았습니다.
혜장선사와 다산이 교류하던 그 길을 따라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건너갑니다.
다산초당의 동암입니다.
왼쪽의 보정산방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을 존경했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다산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쓴 편액이고,
오른쪽은 다산 정약용의 글씨 중 좋은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편액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편액 앞에 자리를 잡으신 듯 두 분 기분이 참 좋아보이세요.
근년에 다시 재현한 다산초당에서 해설사 선생님께 해설을 15분 정도 부탁드리고,
저 혼자 주변을 돌며 사진을 찍었답니다. ^^
다산 정약용은 정조가 죽고 난 후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때 강진으로 귀양을 옵니다.
총 18년의 귀양살이 동안 4년은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라고 후에 이름을 지은 주막에서
늙은 주모의 도움으로 살고, 4년은 외가와 먼 친척뻘 되는 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보은산 보은산방에서 주로 주역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거쳐를 옮긴 것이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유배생활 마지막 10년을 보냅니다.
어머니가 해남 윤씨 윤두서의 손녀였기에 윤씨 집안의 별채로 이용되는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된것이죠.
이무렵 남도의 거부였던 외가 쪽에서도 도움을 주기 시작하여 외가에 있던 책 수천권을
빌려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저서와 사상이 쓰여지거나
그 바탕을 마련하게 됩니다. 18년의 유배생활은 다산에게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민족의 거대한 유산을 만들어낸 시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다산 초당 아래의 작은 한옥입니다.
예전에 하룻밤 묵었던 적이 있던 곳이지요.
마점마을에서 석문 가는 숲길 진입로인데, 여기서 조금 헷갈려서 200m 정도
잘못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석문공원 전망대입니다.
길은 저 아래 구름다리를 건너가는데,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조금 더 위로 올라왔습니다.
금강산을 가보진 못했지만 왠지 이런 느낌일 것 같죠?
노오란 꽃이 인연의 길을 마치고 버스로 가는 우리들을 배웅하는군요. ^^
저녁 먹기 전에 구강포(강진만)의 명물이 된 가우도 다리를 건너보기로 합니다.
가우도에서 뭔가 지갑을 열었어야 했는데, 저녁시간 때문에 그러질 못한게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인위적인 시설로 둘러놔서 쉬 다시 찾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본 분들은 모두 입을 모아 추천했던 강진 제일식당 석식입니다.
기본 1인 1만5천원 석식에 바지락무침을 단품요리로 추가했습니다.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반찬 하나하나 담긴 내공이 보통 아닙니다.
하룻밤을 보낼 푸른모텔입니다. 게스트하우스 방식인데,
다음에는 바로 옆 일출펜션을 빌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봤네요.
다행히 비는 새벽에 그친다고 하네요,.
숙소 근처 땅끝바다횟집에서 아침으로 먹은 전복죽입니다.
음식은 참 맛있었는데요. 다음에는 다른 집 갈 것 같아요. ^^;;
새벽까지 내린 비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상쾌하게 기분 좋은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미황사 달마산다원에서 미리 예약해둔 연잎밥 도시락을 배낭에 넣어갑니다.
공양주의 손맛이 여간 아니어서 깜놀하면서 먹었답니다.
미황사 대웅보전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달마고도 17.5km를 출발합니다.
이 길을 다 걷고 돌아와서 다시 부처님을 뵈었을 때,
왠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대웅전 부처님이 갑갑한 방을 나오셔서 후불탱화의
권속들에게 2500년 전 못다한 불법을 설하며 달마고도를 걸으실 것 같았어요.
부처님도 걸으실 만큼 달마고도가 좋았다는 뜻입니다. ^^
산 안개에 능선을 살짝 가린 미황사.
퇴색해버린 단청 덕분에 더욱 고색창연한 미황사 대웅보전.
향 연기같은 산안개 덕분에 대웅전 건물이 거대한 향불이 되어 부처님께 공양되는 느낌이네요.
미황사는 우리나라 땅끝 최남단의 전통사찰이라고 합니다.
남도의 금강산이라는 달마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대웅전도 서쪽을 향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창건 설화가 참 흥미로운데요. 신라 경덕왕 8년인 749년에 돌로 된 배 한척이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앞바다에 나타났답니다.
이에 의조화상이 100여명의 제자와 함께 기도를 했더니 이 배가 육지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금인이 노를 잡고 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답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경전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53선지식, 16나한 상화 탱화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검은바위를 깨뜨리닌
검은 소가 나와 금새 큰 소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날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기는 인도 우전국의 왕으로 금강산이
일만불을 모실만하다하여 불상을 싣고 갔으나 이미 금강산에 절이 많아
되돌아 가던 중 금강산과 비슷한 이 곳을 보고 찾아온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할 것이라고 했다네요.
그래서 그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나섰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가다가 다시
크게 울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가 처음 넘어진 곳에 통교사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답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도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워 아름다울 미를 쓰고,
금인의 빛깔인 누를 황자를 써서 미황사라고 했다네요.
이 창건설화는 인도를 통해 직접적인 남방불교가 전래됐다는 것을 상징하는데요.
그래선지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게와 거북이 같은 바다생물들이 새겨져있답니다.
지금의 건물은 헌종 1년인 1660년에 세번째 중창을 하고, 몇 차례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0년 전에 사세가 꽤 크고 스님도 40명이나 있었는데,
절을 크게 지어보려고 스님들이 공연을 하여 시주를 받는 궁고 공연을 하러
청산도로 향하던 중 배가 뒤집혀 스님이 한 분만 제외하고 모두 죽는 비극을 겪고
사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합니다.
출발 전 기념촬영 찰칵! ^^
지금의 대웅보전은 영조 27년인 1751년에 응진전과 함께 중수되었다고 하네요.
미황사 동백꽃도 인사를 나눠주시는군요.
달마고도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손으로 직접 길을 닦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굴삭기와 같은 장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삽과 곡괭이, 호미를 이용해
매일 40-50명이 10개월 간 작업하여 닦은 길입니다.
미황사 금강스님이 친환경적으로 길을 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셨고,
설계와 시공감리를 맡은 권경익 대표가 지리산둘레길 당시부터 갈고 닦았던
인력시공의 기술이 절묘하게 맞은 덕분입니다.
굴삭기와 철재기둥을 박는 나무데크 시공이 일반화된 우리나라에서
인력시공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 덕분에 달마고도는 우리나라 걷기여행길 조성의 모범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말 귀하디 귀한 나도수정초를 만났습니다.
꽃말이 숲속의 요정이라는데요. 광합성을 하는 엽록소가 없어서 반투명하게 하얀 모습으로 돋아난답니다.
죽은 생물에서 영양을 공급받는 부생식물이니 저 땅 어딘가 죽어 영양을 주는 생물이 있나봅니다.
돌산의 특징상 너덜지대가 여러 곳 있는데, 전부 걷기 좋도록 돌을 잘 정비해 두셨네요.
시야가 트이는 곳은 다도해 풍광이 열려 그냥가기 가까웠어요.
마음 얹어 편하게 걸을 수 있었던 길.
돌 하나하나에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생각을 하면
한걸음 한걸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정말 연잎밥이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을 보여주었던 미황사 달마산다원의 연잎밥도시락입니다.
섬 가득한 다도해 풍광이 길벗을 해주는 달마고도입니다.
파란 화살표 정방향을 따라 걷는 것이 좋습니다.
미황사 내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려주는 승탑입니다.
5올 중순의 동백을 만나 감사한 시선을 던져봅니다.
미황사 대웅전의 거북이 조각이예요. 남방불교 전래설에 무게감을 실어주지요.
아침 안개가 싹 가진 미황사 대웅보전.
여러 번 왔지만 언제고 참 마음 편안한 사찰입니다.
주변의 자연을 그대로 차용하여 배경으로 혹은 마당으로 활용하는
우리의 전통 조경방식에 비추어보면 대단한 앉음새입니다.
미황사 다원의 오미자차와 팥빙수도 그 맛이 대단했습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뿌듯했어요. ^^
수니꺼님 총무 보시느라 수고 정말 많으셨어요.
함께 해주신 회원님들께 큰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도 문화와 함께 하는 좋은 길에서 뵙겠습니다.
아래 칸은 기고한 달마고도 원고 초교입니다. ^^
이만 총총...
마음을 헹구는 길 해남 달마고도
윤문기 <걷기여행작가, (사)한국의 길과 문화 사무처장, y02599@daum.net>
거대한 바위들이 산봉우리를 이어가며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는 해남 달마산.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 지난 가을 달마고도가 개통됐다. 이 길은 바다를 통해 인도불교가 전해졌다는 천년고찰 미황사를 출발해 산 중턱을 빙 돌아 미황사로 다시 돌아오는 17.5km의 둘레길이다. 오가는 사람이 교행하려면 슬쩍 옆으로 비껴서야할 정도로 조붓한 길이지만 걷기여행의 감칠맛은 그 어느 길 보다 좋다는 찬사를 받는다. 일행들과 미황사 달마산다원에 예약해둔 연잎밥 도시락을 찾아 걷기를 시작했다. 천천히 걸으면 7시간 넘게 걸리는 길이지만 중간에 식당이 없으므로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 양 손에 쥔 등산스틱으로 길을 찌르며 짙푸른 숲길로 시작되는 달마고도를 걷는다. 등산스틱이나 노르딩워킹용 스틱은 두 발에 집중되는 노고를 두 팔로 나눠 몸을 고르게 쓰도록 돕는다. 달마고도 같은 장거리 숲길에서 하체의 피로를 덜어내는데 특히 유용하다.
걷기여행길 조성의 모범이 되다
길 초입부터 사스레피나무와 삼나무, 편백나무, 동백나무 등이 녹음의 터널을 만든다. 아침이슬에 젖은 숲길은 땅에 떨어진 동백꽃을 더욱 싱그럽게 채색하고, 어둑한 곳에는 엽록소가 없어 반투명한 자태로 돋아나는 나도수정초의 고결한 자태가 하얗게 빛난다. 숲이 헐거워져서 바다 쪽으로 시야가 터질 때면 섬들이 수북이 쌓인 다도해 경관이 두 눈 가득 차오른다. 달마고도는 산과 바다가 펼쳐내는 장쾌한 경관을 뛰어넘는 길 자체가 주는 감흥이 크다. 길 주변에서 채취한 돌을 쌓아 석축을 깔고, 또 다시 돌을 주워 땅에 묻어 경사면에서 흘러내리는 흙을 잡았다. 굴삭기 같은 중장비는 일절 사용 않고 곡괭이, 삽, 호미만으로 길을 닦아낸 것이다. 사람 길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야 좋다는 간단한 원칙을 달마고도는 지켜냈다. 굴삭기가 길을 넓히고 쇠기둥을 박아 나무데크를 놓는 기계시공이 횡횡하는 우리나라 길 조성 현실에서는 사람 손으로 길을 낸다는 원칙을 감당하기 어렵다. 간단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이 간단한 원칙이 달마고도에서 철저하게 적용된 까닭은 이렇다. 이 길을 처음 제안한 미황사 금강스님은 달마산 순례길이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지길 원했다. 그리고 이 길의 노선설계와 시공감리를 맡은 ㈜하늘그린의 권경익 대표는 걷는 길은 사람 손으로 닦아야 걷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인력시공 철학을 갖고 있었다. 금강스님과 권 대표의 만남으로 인력시공 원칙이 끈질기게 고수될 수 있었고, 결국 우리나라 걷기여행길의 모범이 될만한 달마고도가 세상에 태어났다. 권 대표가 달마산을 헤집고 다니며 찾아낸 노선을 설계도면으로 옮긴 후, 매일 40~50명의 인부들이 10개월 이상 달마산에 머물며 구슬땀을 흘렸다. 이곳에 굴삭기 기름 냄새가 아닌 사람향기가 나는 까닭은 이 모든 사람의 노력과 집념의 결과다. 그래서 걷기여행길 조성과 관계된 행정기관 담당자나 시공회사 책임자들이 직접 걸어봐야 할 모범사례로 달마고도를 첫 손에 꼽을 만하다.
사람의 길, 사람 손으로 만들다
달마산은 능선에서 쏟아져 내린 바위들이 경사면을 뒤덮은 너덜지대 여러 곳을 지난다. 걷기 불편할 수 있지만 너덜지대 돌들을 요리조리 돌리고 작은 돌로 메워서 걷기에 편하도록 세심하게 정리했다. 이런 곳은 그늘 없는 대신 뻥 뚫린 시야가 보상되어 특별한 묘미를 준다. 새벽까지 비가 내렸던 날, 바다 건너 완도의 산봉우리가 산안개를 띠처럼 두른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완도 하늘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 보면 안개가 도넛처럼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을 풍광이 마음에 그려진다. 두 발은 달마고도를 딛고 있으나 마음은 완도 하늘 위를 자유로이 날고 있다. 생각이 자유로운 것은 안전이나 길찾기에 마음 씀 없이 편안하게 걷는다는 뜻이다. 바다풍광과 바위, 흙, 산안개, 온갖 나무, 새들이 곡괭이질과 삽질만으로 만들어진 달마고도 위에서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걷는 사람도 그 조화로움의 하나로 길 위에 스며든다. 달마산은 중국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의 불심(佛心)이 머무는 산이라고 한다. 선종은 내 마음 속 부처를 찾는 구도를 행하여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불교의 종파다. 달마고도를 걸으며 내 마음 속 부처를 찾진 못했지만 이 길은 걷는 이들을 저 아름다운 저 풍경 속에 넣고 흔들어 마음을 헹구어 낸다. 길을 다 걷고 미황사로 돌아온 겉모습은 조금 피곤해보였으나 마음 속 온갖 스트레스, 걱정, 불안을 깡그리 헹구어낸 덕분에 부처 곁에 한 발짝 다가간 듯 맑고 고요해졌다. 달마고도 7시간을 걸어내고 다시 본 미황사 대웅보전은 그 자체가 거대한 향불이 되어 부처님께 공양되는 듯 보였다. 활짝 열린 대웅보전 앞문으로 얼비치는 부처님이 인자하게 웃으며 ‘이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조금 알듯하냐?’며 묻는 듯 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믐밤, 대웅보전 부처님도 갑갑한 대웅보전 밖으로 나와 후불탱화 속 권속들과 달마고도를 걸으며 2500년 전 다 하지 못한 설법을 이어갈지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꽤 그럴듯해 보일만큼 달마고도는 아름다웠다. <이상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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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견이님의 해박한 여행기를
낯선 곳, 숙소에서 접하는
이 즐거움!~
연휴에
남편,딸 사위,손주와
전라도 멋과 맛 기행을
다니는 중입니다.
병영성지.하멜 기념관.다산기념관.다산초당.
진남관.오동도 해상공원등등
.....
해남 녹우당은
일정상 패쓰하고
내일 귀경해야할 듯 합니다.
발견이님의 전문적인
글, 사진
두고두고 아끼고 보렵니다.
사족; 다산 기념관 영상자료에
다산의 모습이
어찌나 서구적인지
낯설기 그지없었죠~
ㅎ
여기는 여수.
오바~~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답사기'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를
강진,해남으로 택하신 깊은 뜻을
우리 발견이님도 이미 알고계신듯하여
정말 기쁩니다.
ㅡㅡㅡ
"강진,해남은 단 한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나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ㅡㅡ
중략
"ㅡㅡ
유홍준 선생님의글.
이 좋은 조상의 체취를 뒤로하고
동남아로 몰려가며 혼잡한 곳에서
대접도 못받고 외화를 낭비하는
요즘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발견이님의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이 길을 따라
신선하고,정겹고,아름다운 우리강산을
재대로 느끼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가족과 함께 남도여행을 하고 오셨군요. ^^
세상에는 다 맞는 것도 없고, 또 그 반대도 없는 것 같아요.
해외여행 갈 때는 그때의 기쁨이 있고,
우리나라의 명소들은 또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주지요.
어찌보면 국내와 국외를 구분짓는 것도 무의미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멀리 가는 것 만큼 가까운 곳에도 사랑스런 눈길을 주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곳들이 여행자들 마음 속에 파고들지 못하는 것은
저를 비롯해 취미든 업이든 여행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무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자들은 어디든 자기 취향따라 가는 게 맞고요. 그게 어디든요... ^^
@발견이(윤문기) 어디 강진과 해남 뿐이겠어요.
얼마 전 저도 여행관련 일 20여 년 만에 처음 가봤던 함안의 가야고분군은 얼마나 좋았게요.
어느 분은 별로라고 했던 성주의 한개민속마을은 며칠 머물러야 할 정도로 마음을 빼앗아갔습니다.
같은 곳이라도 시기와 동행에 따라 그 느낌은 또 얼마나 천차만별인지요.
어차피 다 알지는 못하더라고 가급적 많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