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창조 갈라디아서 6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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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습없이 삶을 맞이합니다. 부모도 처음으로 늙어보는 것이고 아이도 첫걸음마를 처음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처음 하는 일들이고 처음 겪는 일들이라 지켜봐주고 격려하고 잘 해낼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거죠. 그런데 요즘은 점점더 이런 응원에 인색해지는 느낌입니다. 처음 유치원에 간 아이가 글씨 모른다고 집에서 그것도 안배워가지고 왔냐고 핀잔을 받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구구단을 못외워서 선생님 눈치를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취업생들이 눈치껏 알아서 하지 못한다고 구박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정규직으로 고속버스터미널 택배관리인으로 취직을 했는데 첫날부터 제대로 못한다고 엄청나게 구박을 받습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인데 잘 할 수 없는게 당연하죠. 그러면 매뉴얼이라도 보여주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설명해 줘야하는데 그냥 현장에 투입시키면서 잘 못한다고 핀잔을 줍니다. 처음 출근하는 회사에서 조차도 알아서 눈치껏 잘해야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이 드신 분들도 처음 늙어보는 것이고 건강이 무너져도 처음 무너져 보는 것이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험도 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고 치매가 일어나고 알츠하이머가 일어나도 처음 헤쳐나가야하는 일들이기에 서툴고 잘 못하고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연습없이 매우 낯선 삶을 맞이합니다. 이번 명절에는 집에 가지 않고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명절이나 생신 때 집에 가면 정치예기만 빼면 아버님은 무척이나 자상하십니다. 저희 아버님이 그림을 좋아하시고 화초 키우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한때 단독주택에 사셨을때는 정원을 얼마나 반듯하게 가꾸셨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집에 내려가면 아버님 옆에서 풀메고 전지하는게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여쭤보면 나무 가꾸는 법에 대해서 잔디 깎는 법에 대해서, 그리고 그림에 대해 여쭤보면 서랍에 넣어두신 그림까지 꺼내 보여주시면서 자상하게 설명해주십니다. 저희 아버님이 처음부터 이렇게 자상하고 친절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는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매일 소리 지르시고 화내시고 술드시고 늦게 들어오시고 버럭 욱박지르시고 그러셨던 분이십니다. 어릴 때는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충분히 소통하시고 설명해주시면 되시는데 왜 화부터 내실까... 나중에 커서보니 아버님이 어머니(그러니까 할머니)를 일찍여의셨어요. 6살로 기억하신데요. 그래서 일찍부터 밖으로 나 도셨어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게 따뜻한 사랑이나 뭔가 자상한 설명이나 어떻게 사람과 사람사이에 대화하고 관계하는지를 배워보신 것이 없으신 거예요. 직장생활하시면서는 주로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문화 안에서 사셨기 때문에 일방적이고 지시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의 삶을 더 많이 배우셨고 그런 것이 오히려 남성다운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아마도 자상하신 부모님 만나서 충분한 사랑받으시며 비폭력 대화법도 배우시고 사랑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들도 친절하게 소통하는 방식들도 경험하며 사셨다면 그러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런 아버님이 연세 드시면서 자녀들이 크고 그리고 며느리들이 들어오고 사위가 들어오면서 아버님은 훨씬 더 부드러워지셨고 훨씬 더 자상해 지셨고 훨씬 더 웃음이 많아지셨습니다. 나이 드신다고 모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는 교회나 티브이나 어머님이나 시대의 변화나 많은 것들이 작용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아버님 스스로도 가족들을 보다 잘 사랑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던 거고 누군가는 기다려주고 누군가는 친절하게 설명하고 안내해주시고 관대하게 바라봐주는 애정 어린 노력들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얼마전부터 목공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목공소에 가서 톱질하는 것 대패질 하는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중에 주문하세요. 제가 다 만들어 드릴께요. 저도 어깨너머로 목공하는 것들은 많이 봐왔지만 제대로 배워보는 건 처음입니다. 저는 톱질이 쉬운 줄 알았어요. 그냥 평소에서 대충 해도 됐거든요. 근데 5미리 간격으로 3센치 깊이만큼 쭉 톱질해보라고 하는데 완전히 한석봉 어머니 컨셉이예요. 불을 끄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떡을 자르시는 어머님의 경지를 요구하는 거예요. 위 그리고 양옆으로 전부 선을 긋고 심혈을 기울여 자른다고 자르는데 맘처럼 안되요. 나중에 다 자르고 나면 간격이 5미리씩 위 좌우가 정확하게 맞아야하는데 안되요. 그렇게 자르고 싶은데 안되요. 저희와 함께 하시는 용두동 교회 장로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이 나이 먹도록 못하나 박을 줄 모르시는게 챙피했데요. 그래서 집에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직접 고치고 수리하고 싶어서 목공을 배우러 오셨데요. 저는 50대, 그분은 60대인데도 목공은 처음이예요. 새로운 일은 나이에 상관없이 낯설고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에 상관이 없이 처음 하는 일은 누구나 쉽지 않아요. 인생의 연륜과 상관이 없습니다.
일만 그런 게 아니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사람을 보고 웃음을 짓는 것도 누군가는 무척이나 편하고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해본적인 없는 낯선 거예요. 환갑이 지나서도 어떤 사람은 못질을 못하는 분들도 있는 거예요. 너무 좋아하는데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사과를 하고 싶은데 한 번도 사과를 해보지 못한 사람은 때로 그 가슴이 몸으로 가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아이가 넘어지는 실수를 반복하면서 걸어가는 것처럼 삶의 어느 때든지 낯선 새로움 앞에서는 용기와 인내, 지지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오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신앙은 날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어떤 눈으로 보이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넘어지면 일어서고 부족하면 노력하고 불완전한 낯섬을 극복하면서 점점 더 온전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기 창조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길을 떠난 낯선이들의 불안과 서툼이 불편하거나 힘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어느때든지 우리는 늘 시작하는 존재들이고 되어가는 존재들이라면 그 매우 낯선 투박함 불편함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와 인내,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시선들이 더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연휴 때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한 밴드 보컬과 챌로리스트가 하루밤 사랑에 빠집니다. 철없는 애들의 장난이라 생각한 여자 아버지는 임신한 딸의 아이가 죽었다고 속여 보육원으로 넘겨버립니다. 그렇게 자신의 아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던 이 두 젊은이와 아들이 음악을 통해 연결되고 서로 만나가는 이야깁니다. 극중의 아이는 음악신동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으며 그 소리들을 연주하고 악보에 담고 표현하는 천제적인 음악가입니다. 그는 보육원을 나와 광장에서 거리에서 소리를 들으며 곡을 만들고 지휘를 하고 음악을 합니다. 광장에 서있으면 자동차 경적소리, 바람에 비닐이 날아가는 소리,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 신호등이 켜지는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섬세하게 들려오고 심지어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부모님의 사랑의 에너지까지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 아이가 거리에서 음악을 하면서 하는 대사중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절 원하고 계십니다. 단지 길을 잃으셨을 뿐이예요> 어딘가에 있을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제 처음 시작한 미숙한 사랑에 길을 잃으셨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음악하기를 멈추지 않고 부모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고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신뢰가 미숙한 사랑을 온전한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시켜 나가갑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늘 낯선 경계선에 서있는 저마다의 불안과 서툼과 그 불편함을 따뜻함으로 온전히 품어가는 그래서 되어가는 존재로써의 삶을 온전히 완성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