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에 내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
아직도 아버지의 임종 전후에 대한 모든 과정과 절차들이 눈에 선하다.
나에겐 '외삼촌'이 네 분 계셨다.
그런데 큰 외삼촌 내외가 빈소에 오시지 않았다.
그 분의 여섯 자녀들 중 큰 딸만 잠간 다녀갔고 다섯 명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장례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위로 속에서 순조롭게 잘 끝났다.
특히 아버지는 장로의 직분으로 많은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셨다.
언제나 믿음의 귀감이 되셨는데 그 교회 성도님들의 전폭적인 기도와 따뜻한 손길에 큰 위로를 받았다.
한국인들에게 '관혼상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양한 생각과 느낌들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이었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관혼상제' 중에서 특히 '喪'이 더욱 그랬다.
'상'의 정서와 느낌은 '관,혼,제'와는 판이했다.
나와 우리 가족들도 사람인지라 큰 외삼촌 일가에 일견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순 없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에 큰 외삼촌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부고를 듣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군산으로 달려갔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님도, 형과 누님, 남동생과 여동생도 경향각지에서 득달같이 달려왔다.
거의 자동반사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문상하면서 큰 외삼촌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외숙모님'과 '외종사촌들' 모두를 만났고 살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들이 우리의 애사 때 왔든, 오지 않았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도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역할과 소임에 충실하고 싶었다.
'외종사촌들'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했다.
밤이 깊었다.
우리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자 본가로 자리를 옮겼다.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들끼리 맥주잔을 기울이며 진솔한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들이 소싯적에 양가에 '돈 문제'가 있었노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큰 외삼촌이 아버지께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위로 대학생부터 아래로 초등학생까지 주렁주렁 5남매를 열심히 양육하고 있던 때라 아버지는 '그런 거금은 어렵다'고 하셨단다.
우리에게 구체적인 액수까지는 밝히지 안으셨지만 그 당시엔 매우 큰 거금이었다고 했다.
그 뒤로 양가는 조금씩 소원해 졌단다.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 소천 시에도 그 집안 식구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였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그런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아닌게 아니라 가문의 온갖 행사 때에도, 친익척들의 모임 때에도 그 집안 사람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큰 외삼촌은 가문 내 이집저집과도 크고 작은 감정적 '사건'들로 인해 왕래를 거의 하지 않고 사셨다.
우리 집안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었으니까.
나도 내년이면 '지천명'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하여 가슴에 담아둔 채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내가 먼저 희생하고 손해를 적극 감수하며 먼저 손을 내밀면서 살자"
나도 지금까지 이런 생각으로 살았고, 내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내 자신을, 정서적으로 작은 우물 안에 가둬놓고 싶지 않았다.
밤 늦게 까지 이런저런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고향 본가의 정원은 매우 넓은 편이었다.
여러개의 정원등 불빛에 반짝이는 각종 정원수들과 화초들이 예쁘고 고왔다.
새순이 돋아나는 4월 하순의 정원은 그야말로 신록예찬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형제자매들의 정담과 이따금씩 터지는 웃음소리들이 넓은 잔디밭 위로 낮게 스며들고 있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의 도리'와 '인간적인 역할'에 대해 우리는 서로 토의했다.
좀 너그럽게 웃으며 살자했다.
과거에 상대방이 어떻게 처신했든 우리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다 하면서 가난하고 투명한 영혼으로 살자 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첩경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실천하자고 얘기했다.
오래 전에 '불혹'을 넘겼고 이제는 '지천명'을 코 앞에 두고 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도와 세상의 이치를 알 만한 나이다.
'권리와 혜택'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
'역할과 도리'에 더 민감한 인생길을 가고 싶다.
그런 여로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올곧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축복 같은 5월의 첫날 아침이다.
그런 생각으로 큐티를 마쳤고 큐티노트에 짧게 기록했다.
싱그런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5월의 창문을 힘차게 열어보자.
파이팅이다.
2012년 5월 1일.
새벽에 큐티를 마치고 사유의 작은 편린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