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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풀이
1971.08.15. 유영모 선생
진달내야(원문)
진달내야 진달내야 어늬 꽃이 진달내지 내 사랑의 진달네게 홀로너만 지인달 내랴
진달내 나는 진달내 임의 짐 집은 내 질내
진달내에 안진 나뷔 봄보기에 날다지니 안질 나뷔 갈데 업슴 지는 꽃도 웃는고야
안진꿈 다늦게 깨니 어제진달 내돋아
진달내서 핀 꽃인데 안 질냐고 피운다 맙 픠울 덴 않이울고 질 덴 봐우슴 한가디니
님때 맨 한갓 진달 낼 봄 압차질 하이셔
진달래야(동광원 성가)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야지 내 사랑의 진달래 너만 홀로 진달래야
진달래 나는 진달래, 임의 짐은 내질래
진달래에 앉은 나비 봄 보기에 날 다지니 앉은 나비 갈데없음 지는 꽃도 웃는 고야
안진 꿈 다 늦게 깨니 어제 진달래 도다
진달래서 핀 꽃인데 안 질랴고 피운다 마소 피울 때에 안 이울랴 웃음 한갖 진달래야
님 때 맨 한 갖 진달래 봄 앞잡이 하이셔
진달래 아주 이상하게 생긴 겁니다. 그런데 웃음 한 가지 그 진달래 그 소리도 웃음을 떡 하고 진다. 그러지만 꽃에 한 가지라. 이 말이야. 꽃은 웃는데 그 한 가지야. 꽃은 웃는데 한 가지 아니요? 겹겹이 두 가지 뜻이 있지요. 그 두 가지 뜻이 꼭 꼭 들어맞아. 그 이상 전체로 일동이 조화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 뜻은 겹겹이 붙은 게 그대로 뜻이 소상하게 거기 담겨있어요. 그걸 보면 이상합니다. 왜 그런 게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
언님 따라 가만히
1.전원산촌 언덕에 진달래가 피었네. 저도 언니 본받아 오래참고 지리니
진달래가 되어서 언을 얻게 합 소서. 진달래가 되어서 언을 얻게 합 소서.
말이 없이 죽어간 어린양을 본받아 저는 지금 집니다. 언니 짐을 집니다.
양과 같이 지면서 참말하게 합 소서. 참말하게 합 소서.
2.호수위에 피었네. 여기연꽃 피었네. 소리 없이 고요히 소복하니 피었네.
손을 대지 말고서 멀리 보게 합 소서. 손을 대지 말고서 멀리 보게 합 소서.
3.푸른 물결 거스려 오른 잉어 와같이 언을 이룬 님 앞에 순종하고 따라가
거센 파도 이기고 올라가게 합 소서 거센 파도 이기고 올라가게 합 소서.
4.좁은 길을 갑니다. 가만 가만 갑니다. 꽃과 나비 비웃고 별과달이 웃어도
언니 따라 가만히 따라가게 합 소서. 언니 따라 가만히 따라가게 합 소서.
이 밤은 마지막 밤이어서 우리를 위해서 유영모 선생님께서 기도를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도 인도를 하시겠습니다. 이리 나오셔서.
기도 인도라는 말씀은 이 사람에게는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새벽기도를 이 사람이 맡아서 같이 여러분과 기도하기로 하는데, 다른 때는 기도를 내가 나 혼자 하면 했지. 여러분하고 같이 안하고 지내 게 되었는데, 그런데 이 시각에 또 한 번 같이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기도 인도 하는걸 할 줄 몰라요. 정말 기도 인도를 할 수 있다면 그 인도한다는 그 이가 기도하는데 자꾸만 잡념도 안 들어와, 온전히 하나님과 자기만 기도를 하고 그러면 그이는 온전히 기도를 한 겁니다. 여러분이 다 같이 있더라도 같이 있는지 혼자 있는지 모르게 기도를 한다면 기도를 온전히 한 겁니다. 여러분이 같이 그 옆에 있어서 또 기도를 하는데 여러분이 죄다 조금도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이 온전히 혼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한 거와 같이 아무 잡념이 없이 기도를 했으면 그 분들은 다 모두 기도 인도 한 거야. 그럼 사실은 여러 사람이 기도를 함께 했는데 기도 인도 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도자 하나 나고 여러분이 다 한 가지 기도를 한다는 것이 될 겁니다. 나는 그게 아직 안 된다는 사람이에요. 공중 기도하는데 기도 인도자가 있어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서 다 같이 하나님께 한 마음을 죄다 바친다는 그게 기도인도 하는 기도의 의미가 있는데 나는 아직 그거 안 된다는 거야. 천번 만번 해도 안 된다는 거야. 안 되는걸 왜 해요? 그래 여럿이 모였을 때는 기도문을 읽어요. 대표로 해서, 읽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야. 그러면 임의 말씀과 같이 기도를 정말 온전히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네기도 네가 혼자 해라. 죄다가 하기는 하는데 죄다가 골방에 들어가서 자기기도 자기가 하는 거야. 내가 믿는 예수의 뜻은 그거에요.
주기도문 풀이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그 이름만 이라는 건 뭔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그건데, 여간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쓸데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를 가고, 가고, 가고 해서 거기가 이루는 거, 거기 도달 하는 거, 그걸 말하는 거야. 주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가지고 나는 참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거기에 다다라 이루어야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이 되는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헛이름만 자꾸 들추어 그게 하나님께 가는 도리가 아니라는 거야. 그저 가, 가고, 가고, 가고서 아주 거기가, 일러 거기가 이름,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가는 것도 이름으로 가는 건지 몰라요. 이름을 불러가지고는 나는 안 가는 거로 알아. 난 심지어 이런 소리해요. 예수가 사시는 예수가 아버지를 섬기는 그 뜻과 똑 같은 뜻으로 삶을 우리가 살면, 예수가 안 부르는데도 갈 데가 없이, 그것이 아버지 앞에 가는 거지. 또 석가모니가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과 같이 살 거 같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그의 석가모니가 간 데와 같은 데를 갈 거예요. 난 그렇게 믿는 사람이야.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 뜻이 중요한 거예요. 그 뜻을 가지고 산다고, 누구 뜻과 같은 뜻을 가지고 사느냐? 석가의 뜻과 같은 뜻을 가지고 사느냐? 예수의 뜻과 같은 뜻을 가지고 사느냐? 사는 그거에 따라서 가, 가신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예수와 뜻과 같이 말씀을 이렇게 해서 글을 적어 편지같이 적었는데, 그것을 부치려고 할 때에 봉투에 넣어서 바쁠 때는 봉투도 잘못 써요. 거기다 석가모니 이름을 써서 떡 적어서 세상에서 그렇게 썼다가는 아주 틀렸지만, 영원한 정신의 말씀으로 이렇게 편지를 쓰는데, 예수의 뜻과 같은 뜻으로 꼭 살았어요. 그렇게 쓴 기도에요. 그거를 봉투에 넣어서 봉투에 이름을 예수라고 안 쓰고, 석가모니라고 잘못 썼어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편지를 쓰면 안 되어요. 그러나 이름은 석가모니라고 썼어도 그 내용의 편지가 예수의 뜻과 같은 뜻이 베껴 쓴 그 편지면 예수께로 도달을 하는 거예요. 암만 거기 석가모니라고 썼더라도 내용편지가 같이 도달한다고 나는 믿어요. 내 영이 석가모니가 가르친 그 정신으로 살았는데 거죽에다 이름을 예수라고 썼어요. 그래도 그 것은 그 봉투 속에 있는 정신과 같이 석가모니한테 배달이 되지. 결코 거죽에 예수이름 썼다고 예수께로 배달이 안 되어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고쳐 말하면 거죽으로 부처님, 부처님 천만번 해도 사는 방법이 예수 믿게 살았으면 별 수 없이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하고 가서 아버지 안에서 사는 거지, 결코 석가모니가 가있는 법계에 가서 참여하는 게 아니에요.
고쳐 말하면 이름이 아니에요. 이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데 이름만이 아니에요. 뜻이지,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니 이 세상은 이름만 팔아먹어요. 다른 것도 이름만 쳐들어요. 이 세상은 그렇지, 영원한 생명의 하늘나라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뜻이야. 오직 뜻입니다. 오직 뜻이 반듯해야 합니다. 뜻 하나입니다. 성경에요. 베드로사도가 오순절 성신 지낸 뒤에 복음을 전해서, 어떤 날은 하루 삼천 명도 회개를 하고 돌아오고, 그렇게 되어가지고 전도를 했는데, 그 양반이 설교하는 연설에 ‘찬하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못 받는다. 오직 예수의 이름뿐이지, 천하 인간의 그 외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라는 게 없다.’ 그 소리친 거, 그때 백성이 놀라지 않고 성경에 그렇게 적힌 그 글을 보는 그 만대의 백성들이 거기에 놀라요. 이름 하나가 제일이라, 그렇게 되고 말아요. 아무리 사도가 한 말이라도 그게 절대 진리가 아니에요. 사도들이 의논해서 가룟 유다 대신 제비를 뽑아서 이 빠진 사도를 채워 놓았다고, 그것이 열두 사도를 온전히 열두 사도로 해서 무슨 이 백성들을 구원받는 일에 중요한 것이 된 것은 아니에요.
또 불교에는 천상천하 무여 불이라는 걸 하루도 이렇게 모였을 때, 한데 부르는데 열 번 스무 번 거푸 부릅니다. ‘천상천하 무여 불’ 이런 조로 부릅니다. 그렇게 한 번하면 여 나무 번 죄다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거지. 하늘위로가나 아래로 가나 부처만한 이가 없다. 그걸 한번만 하지, 열 번 스무 번 해요. 다 같이 그렇게 해요. 그거 나 듣고는 나는 빙긋이 웃어만 져요. 우리 집에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얻는다. 그 소리도 나는 아니라는 거야. 나는 아니야. 다른 뜻으로는 생명이 자라지 못한다. 그거야. 꼭 한 뜻이라야 해. 예수의 뜻, 생명의 뜻, 오직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뜻, 그 뜻을 가져야해. 영생하는 나라, 우리 아버지의 나라, 거기를 가는 거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야. 억 만 번 예수를 불러보시오. 그 신조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생명의 온전한 속 알이 되는 그 뜻으로 살아줘야, 그 사람은 갈데없이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들어가서 모시고 사는 것 모양으로 우리 양자된 이 동생들 된 이 사람들도 종당 도달하는데, 예수가 도달한 것 같이 하나님 품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모시고 사는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 하늘에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 예수님하고 그 이름, 그것만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지 뜻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살아야해.
하느님 계 계셔서 날 내셨으니 내 날 가져 계 받들어 섬기시도록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나위 힘과 얼 되 받들어 들어 하느님 뜻 맞고 하느님 말 숨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라 외 이 내 더욱 되기만 가장 비나이다. 하느님 우리 주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지 무거워 모아 드리나 못되오나 되 불쌍히 바라며 제 섬기 울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되게 비나이다. 아멘.
이것을 우리 모두 같이 익힌 이들 이렇게만 해도 같이 그 소리를 따라서 그 정신을 쓰고 하지만, 이거 처음 이번에 이 모임에 오신이로서는 처음 듣는 이가 계실지 몰라. 그럼 뜻을 한번 우리 기도하는 뜻을 한번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늘 계신 아바께, 하늘 계신 아바께, 또 ‘계’ 계신, 제가 이거는 내 철학인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저기 계십니다. 하나님 계신 데를 뭐라고 하냐? ‘계’라고 해. ‘계’라고,(끊김)
우리가 늘 우리가 정의를 추구해야 해요. 계라는 데는 정의를 가지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해요. 정의로 늘 추구해야 할 데가 ‘계’에요. 그건 왜 그래요? 거기 아버님 계신 데에요. 우리가 반드시 공경스러운 마음을 가지고야 그쪽을 향해서 ‘계’ 그래요. 그러니 ‘계’ 계신 계라고 존경 사 씨가 붙어요. 임의 존재를 갖다가 공경스럽게 일컫는 말이 되요. ‘계신’, 계는 존경을 받을 이가 계신 데인데, 거기 존경 사 씨가 붙으면 계신이라는 말씀, 거기 이상한 말씀 아닙니까? 존경을 받으시면 반드시 우리가 ‘계’에다 모셔야 되요. ‘계’에 모셔야겠다. 그럼 우리는 어디 있느냐? ‘예’에 있습니다. 우린 ‘예’에 있습니다. 동그라미 하고 ‘예’한데 우린 ‘예’에 있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든지 ‘예’에요. 그 우리말에 ‘예’라는 말과 ‘계’라는 말이 비슷한 말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정말 우리 사는데 거기 ‘예’입니다.
이 사람이 접대 열흘날 전에는 열흘날 많은 시간을 내가 ‘예’라는 데가 어딘가 하니 나 탄 기차에 걸상이 되요. 거기 내가 있었어. 나 있는 데는 ‘예’인데, 그 날은 ‘예’가 찻간 한 의자에가 ‘예’가 있었어. 요새는 열흘 전에는 ‘예’라고 살기를, 소위 우리 집이라는 나 있는 방이라는 거기가 ‘예’인데, 인제는 아니에요. 요새는 꼭 나는 어디서 사나? ‘예’ 산다. ‘예’ 살아. 그럼 여러분도 나 사는데 가까이 살아. 그다음에는 우리가 사는 ‘예’, 여러분이 이렇게 사는 ‘예’에요. 그럼 ‘예’라는 게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살기를 ‘예’ 삽니다. 나는 살기를 ‘예’ 삽니다. 그럼 나라는 사는 곳도 ‘예’이고, 우리라는 식구가 함께 사는 곳도 ‘예’입니다. 우리 동포 삼천만이 사는 데는 어디냐? 거기 ‘예’라는 건 삼천리 우리나라에요. 나라를 갖다 ‘예’라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전 인류가 사는 곳은 지구 덩어리, 그거 그대로 ‘예’에요. 사는 곳은 ‘예’입니다.
그럼 사는 시간은 언제냐? ‘이제’이지. 똑딱 ‘이제’는 그것인데 거기 산다. 그때 살아요. 아까 똑딱할 때 그 때 산거, 그럼 그건 지금 ‘아까’인데 그런데 정말 그것이 살 때 ‘예’에요. 그럼 ‘아까’라는 건 뭐야? 그건 거짓말이야. 실제가 아니야. 실제 시간은 ‘이제’ 이게 실제 시간이에요. 또 이따 산다는 거 ‘이따’라는 게 산다는 게 아니에요. ‘이따’도 가서 산다하면 ‘이따’는 없어졌고 그것이 ‘이제’, 이제 일이면서 사는 거야. ‘이제’라는 건 뭐냐? 자기의 가장 가까운 타임을 이, 그럼 무엇인데 그것이 있냐? 제 가 있는 거야. 제가 있는데 이니까 그래. 지가 한건 존대에요. ‘이제’니까 이거, 이것에 있는 저, 이가 그중 가까운 건데 그중 가깝다고 저에게 가까운 거야. 저에게 가까운 게 그게 이제, 그런데 이제 라는 건 구경을 못해. 실상은 이제 할 적에 저 할 적에 이는 어디로 달아나는지 몰라. 원 이제라는 거, 이제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어요. 첫 자가 나올 때 어디로 달아났는지 몰라요. 세상이 아니 시간이 빠르다는 게 말만하지. 뭐 어떻게 빠른 건지 모르는 겁니다. 이제 번쩍번쩍 하거든. 과거 억만 년이라도 이제 이대로 다 없어. 미래 천 년대가 또 온다 해도, 그것이 정말 올 때에는 이제, 이제, 이제 이걸로 다 다지는 거예요.
그럼 시간은 꼭 이제로 지나가는데 이제라는 게 정말 뭔지 단단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넘어가는 거야. 그럼 생명은 어디 있냐? 예 있습니다. 시간 있어야 하는데 시간은 언제 시간이냐? ‘이제’, 시간은 그것뿐이에요. 그럼 ‘이제, 예’사는 것뿐이에요. 참 사는 거 이제 예사는 것뿐이에요. 아까 라는 건 지난 밤 꿈꾸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꿈꾸는 이야기는 모르는 거예요. 이따가 라는 건 있다가 다시 생각하자는 겁니다. 이따가 라는 사실이 있는 게 아니야. 이따가 시간이 있는데 이제야. 이제는 퍽 화산이 터지는 거와 같이 이제, 이제 폭발해요. 과거 억만대도, 억만대도 이제 이제로 폭발해서 다 지나가고, 인제 오는 수만 대도 정말 어느 때는 이제, 이제 이렇게 폭발하고 마는 거예요. 돈 모양으로 둬두면 이다음에라도 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원 시간과 예라는 장소가 이렇게 되었는데 그게 정말 그렇다면 졸음 오겠습니까? 안될 말이야. 졸음이란 올수 없지요. 그러게 이제를 잘 느끼는 사람은 졸고 지나갈 수 없는 그 사람에게는 깬 겁니다. 꼭 깨어있는 거야. 깨어있는 겁니다. 그럼 그게 귀한 줄 정말 깨달으면 예수를 부르거나 석가를 부르거나 간에 깨달음을 깨는 거야.
깨는 건 우리말로 깨는 거지, 인도 말로는 부타야. 그 부타 라는 건 부처야. 깨고 가면 부처야. 그런데 우리 기도문으로 부르는 그 중간에 하나님, 이래 불러가지고 하나님, 우리, 이, 구할게 있으니까 하나님, 우리, 이, 이렇게 해가지고 조임 살에 조임이 커요. 그게 말 아닙니다. 그런 말 어디 있어요? 조임 살이 뭐고 조임이 뭐고 그 말은 아닌데 그래도 말 같기도 해요. 토인 말도 아니거든. 이거 큰일 났습니다. 우리는 몸둥이를 가지고 사니까 몸둥이는 살, 살로 휩싼 흙덩어리에요. 살의 성질은 기온이 낮아지면 아주 추운새벽에는 나와 잔뜩 오그라져요. 오그라져요. 겨울에 춥다고 하면 너무 오그라져서 볼록볼록 나오지 않아요? 땀구멍이 콕 막히는데 몹시 졸라매니까 졸라맨 것이 아주 눈에 환히 보여요. 동글동글한 속을 아주 잠가 놨어. 그렇게 되게 이 살이 조여들어요. 이제 그 몸둥이가 그렇게 조여들면 마음도 조여요. 그럼 정 그렇게 조이면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마음이 몹시 조이면 잠이 오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 몸둥이 속에 들어가 살려니까 조인 살에 조여. 걱정이 있으면 자꾸 걱정만 하고 있어. 그러니까 잠도 못자. 그거 아버님께 기도해 빌어야 할 거 아닙니까?
하나님 우리 이 조임 살에 조임이 커요. 고쳐 말하면 요새 신경과민이라는 거는 조임 살에 조임이 큰 증세에요. 그럼 잠도 못자요. 잠이 오지를 않아요. 세상 걱정만 자꾸 해 져요. 그게 신경이 과민해서 그래요. 요새는 죄다 신경이 과민해서라고 알아들으니까 그런데 과히 따지고 보면 그거 무슨 소리냐? 신경이 과민한 거 무슨 소리냐? 따지면 알기가 어려워요. 조임 살에 조임이 큰 거 도무지 말 모르는 말이야.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모르는 말이 아니에요? 살 이라는 건 조이는데, 자꾸 조이게 되면 아주 몹시 조여. 그런 게 심하면 살 몸둥이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 정신이 조여요. 신경이 과민하게 돼서, 그럼 마음 그 정신이 너무 과민하면 마음 조임이 너무 심하면 죽을까봐 걱정도 되고 여간 잠이라는 건 생각도 못해. 잘 생각도 못해. 그것이 살이라는 게 그런 조이는 성질이 있어서야. 그래서 그게 자꾸 조이면 그 조이는 그 증세가 너무도 커. 이제 불가불 전능하신 하나님께 빌 수밖에 없어. ‘하나님, 우리 이 조이는 살에 조임이 큽니다.’ 조이는 살에 조임이 커. 조이는 살에 조임이 크고 뭐인지 모르는 거. 이것도 말 같지 않아. ‘몬’이란 물건이라는 말이에요.
그 물건을 누가 ‘몬’이라 하느냐? 물건이라는 말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산 몬 세계가 너무 강해서, 물건 물 자 물자가 너무 세력이 세서, 한문자로는 물이라고 해야 물건이라고 해야 만물이라고 해야 확실하지. 우리말에 ‘몬’이라고 하면 몰라요. 그런데 말이 죽었는데 어디 가서 아직 산 말이 있습니다. 몬지, 몬지라는 건 몬이 물건인데, 몸에서 떨어진 것이 몬지. 지라는 건 떨어진 겁니다. 그럼 몬이 지면 몬지에요. 그래 우리 몸둥이는 물건을 짊어진 몸둥이는 뭘로 만들었는가? 살이라는 건 물건이야. 물건은 무엇으로 만들었냐? 물건은 흙이야. 그래 흙으로 빚어서 아담을 만들었다. 그러지요? 그러게 몬입니다. 몬이라는 말은 또 뭔고 하니 하나님 천지를 창조할 때 땅도 창조 하셨어. 그러나 우리가 땅에서 살면서 보니까 흙을 뭉쳐서 둥그렇게 한 덩어리 뭉쳐 놓으셨어. 그게 땅인데 땅이 그대로 물건이 그대로 땅덩어리, 몸덩어리, 하는 게 그것이 흙이라는 거 물건이라는 게 모두 모여서 한데 모아진 거 입니다. 한데 모으는 거야. 몸이라는 거 모아 놓은 거라는 말이야. 몸, 거기서 떨어지면 몬지, 그래 몬지 하면 지금까지 몬이라는 게 죽지 않고 몬지라는데 붙어서 살아있어요. 그래서 이왕 우리 몬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몬이라는 게 살아있을 뿐이 아니에요. 일본말이 몬 이에요. 일본 사람이 물건을 몬 이라고 그래. 느리게 말하면 모노, 급하게 말할 때 몬. 그렇게 넓게 쓰는 말이 어째 없어질 수가 있어요? 그래 우리 몸둥이도 물건이 돼서, 흙으로 됐어. 몬, 그럼 우리 몸둥이도 흙이 모여서 몸둥이가 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