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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날에 새 세대에게 주는 말
信天함석헌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
해방이 된지 33년이니 이제는 그 후에 난 세대가 완전히 사회의 중견이 됐습니다. 앞으로의 나라의 운명은 그들의 생각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과연 씩씩하고 올바른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1948년 간디가 어리석은 완고파에게 암살을 당한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하여 쓴 스탠리 존스 목사의 책에서 읽었던 한 귀절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디를 끝까지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인도를 건설하려고 노력을 하다가 희생이 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로 세워 진 나라의 국회의원을 한 사람 만나 당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이라고 했고, 둘째 사람을 만나서 물었더니 그도 같은 대답으로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이라고 했고, 세째 사람을 만나 또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도 또 마찬가지로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존스는 그러기 때문에 인도는 문제가 많지만 장래가 유망하다고 판단을 덧붙였습니다. 인디라 간디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정치를 시작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쫓겨나고 새 정부가 그 뒤처리를 시작할 때 나는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 않아, 조마조마한 생각으로 지켜보았는데, 데자이의 정부가 아주 침착하게 하면서 어느 나라같이 잡아라, 가두어라, 해치워라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마운 심정에서 위에 말한 존스목사의 말을 또 한 번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에서도 성격을 다듬어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하여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국민 성격은 어떻게 닦이어 지느냐 하면 마치 금강산의 찢어진 화강암들이 긴 세월, 비바람 속에 버티고 섰는 동안 만물상을 아로새겨 내듯이, 나고 죽고 죽고는 또 나는 허다한 씨알이 사적, 공적, 또 내적, 외적 허다한 사건들을 겪으며 삶을 펴나가는 동안에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치러나가느냐 하는 데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절의 의미는 큽니다. 이것은 단순히 잘했다 못했다, 얻었다 잃었다, 기쁘다 슬프다, 자랑스럽다 부끄럽다의 차원이 아니라 아주 나라로서 죽었다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늘 말을 하는 사건입니다. 얼굴 위의 조그만 상처는 며칠 몇 달에 나으면 그만이지만 치명적인 상처나 죽을병을 앓고 난 자국은 일생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고, 건강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해방절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기억할 뿐 아니라 늘 되씹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인격 수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반성입니다. 증자(曾子)의 “오일삼성오신(吾曰三省吾身), 내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 본다”이란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어찌 세 가지뿐이겠습니까? 천 가지 만 가지로 한 일을 되씹으며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는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다시 읽고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며,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음미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내 정신이 자랄 뿐 아니라 나라가 자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서 자라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정신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형식으로 서로 작용하여서 국민성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유를스스로 알고서 하는 뚜렷한 방향이 잡힌 원리가 될 때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국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기억에는 있어도 그것이 내 생각, 내 믿음, 내 인생철학, 내 국가관, 사회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일찍이 내가 남의 종살이를 했다는 기억은 아무리 있어도 그것을 부끄럼으로 알지도 않고 잘못으로 알지도 않으며, 어째서 그런 일이 있게 됐던지도 모른다면 그것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잊어버린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민족은 놀라운 민족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역사는 잊어버림의 역사라고 하고 싶습니다. 재주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을 되살릴 줄을 모릅니다. 파고드는 정신, 한번 생각한 것을 기어이 관철하고야 만다는 끈질긴 의지가 모자라지 않는가 합니다. 조상이 피땀으로 개척한 남북만주의 그 살진 옛터를 한번 뺏기면 그만이었지 도로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윤관의 원정, 김종서의 개척이 있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압록강, 두만강 언저리에서 어리대다 말았지, 그 이상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일제시대에 한 만주이민과 만주제국 건설을 말하는 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남의 강제에 못이겨 쫓겨 간 것이요, 남이 하는 강도질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지 결코 나라 땅 찾자는 생각, 무너진 역사 바로잡자는 뜻에서 한 역사적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아니했던 것만도 못한 비겁한 죄악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적 원한을 잊어버린 바보의 짓입니다. 나 자신이 제국주의의 강도질로 망국노의 신세가 된 것을 알고 분히 여길진대, 이제 또 나와 같은 운명에 떨어지는 만주민족을 착취해먹겠다고 그 일제의 손톱 발톱이 됩니까? 이 수치스러운 죄악이 다 역사 망각의 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찍이 동북아시아의 만주 시베리아 평원에 드나들었던 민족이 하나 둘만 아닙니다. 아마 자세히 세어본다면 열 손가락에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최근까지 3백 년이 넘도록 중국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했던 만주족조차도 이제 남아 있는 종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힘으로는 중국을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도리어 그들에게 정복당하여 끓는 솥에 뛰어들었던 눈덩어리의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거기다 비한다면 우리 민족은 우리 스스로의 일이지만 실로 놀라운 무엇을 가진 민족입니다. 그 무엇을 무엇이라 이름할지는 가벼이 말할 수 없으나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기고 남은 그 무엇이 우리게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중국민족은 역사의 먼동트기부터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엄청나게 큰 민족입니다. 땅이 그렇듯이 국민성격도 대륙적입니다. 체통 있고 고상하고 덕도 있지만 또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횡포하기도 합니다. 최근으로는 6.25 때 그 인해전술로 우리가 체험해본 것입니다. 위에서 끓는 솥이라 했습니다만 역사시대 이래 그 끓는 솥 속에 사라진 민족의 수가 얼마일까? 일일이 세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선 악 양면으로, 거의 절대적으로 강압적인 세력 밑에서 주체성을 잃음이 없이 오늘까지 온 우리 운명을 생각하면 스스로 놀라움에 자리를 고쳐 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한번 뒤집어 생각해볼 때 그러 한 경탄할 만한 바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부인할 수 없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 끓는 엄청난 솥의 솟구쳐 오르는 끓는 거품이 우리 머리 위를 덮어씌우기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이기고 났노라고 자랑의 머리를 흔들기에는 그 고난은 너무도 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그때그때 모면은 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태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장점이 약점이 됐습니다. 한번 이기고 난 것이 다음 재난을 부르는 원인이 된 셈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격의 근본적 결함 아닐까? 내가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모양을 곤륜산 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와 그 앞에 놓인 알로 표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해방의 감격 어디갔나
대체를 보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보기만 하면 절대 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해방의 날은 위에서 말한 그러한 배경 앞에 놓고 보아야 합니다.
굴러가는 알처럼 몇 번을 아슬아슬한 지경에 가면서도 번번이 빠져나가곤 했던 그 역사가 아주 미끄러져 한때 물속에 빠져버린 것이 1910년에 일어났던 망국이라는 사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사리에 어긋나고 비통한 일인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서로 겨루고 서로 다투는 5천 년 역사극에서 그 의미를 한 등에 짊어지고 홀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이 대사를 외기도 전에 무대에서 떨어졌으니 그것을 어느 가슴이 아니 통분해 하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되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을 어느 입이 아니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해방의 복음이 어떻게 하여서 오게 됐느냐, 또 앞으로의 나갈 길이 어디로 놓였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문맥입니다.
해방이 왔을 때 전 민족이 어떻게 감격했느냐 하는 것을 후에 난 세대는 모르는가봅니다. 그것을 그렇게 만든 죄는 기성세대에 있습니다. 성공이거나 실패거나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그것을 길이 기억하는데, 그리하여 그것을 다음에 하는 창조활동의 원천으로 삼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기억이 사람입니다. 기억 못하는 것은 짐승입니다. 조상 제사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 예술은 조상 제사에서 나왔습니다. 기억이 오래 못 간다는 것은 마음의 열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이 해방 당시의 민족적 감격이 사라져 버린 일입니다. 새 역사 창조는 그것만으로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장마 에 하루아침 돋아났던 버섯처럼 맥없이 사라졌습니다. 자람의 한 매듭을 짓는 역사적 창조는 냉랭한 이론이나 숫자의 벌려놓음만으로 되는 것 아니라, 권모술수로 되는 것 아니라, 반드시 국민적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래야, 그러한 가운데서야 국민이 하나 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 됨 없이 서로 경쟁하는 이기심, 기업심, 타산심 가지고는 그러한 역사 창조는 아니 됩니다. 오늘 같은 이러한 심리, 이렇게 메마르고 이렇게 믿을 수 없고, 이렇게 퇴폐적인 심리에서는 절대로 역사의 향상, 진보는 없습니다. 돈, 돈, 돈, 멋지게, 멋지게, 멋지게, 그러다가 로마는 망한 줄을 모르십니까?
해방이 되던 날 온 민족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죽일 놈, 살릴 놈, 어진이, 바보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그저 살아 있는 것은 하늘뿐이요, '우리 민족’뿐이었습니다. 마치 푸른 하늘의 구름 산처럼 주인도 없이, 시키는 이도 없이, 그저 한 덩어리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고, 두드러지고, 오므라진 허다한 봉우리들이 다 그저 하나, 전체의 영광에 빛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시요, 찬미요, 기도요, 철학이었습니다.
민족전통의 정신을 찾자
그런데 그것이 열흘이 못 가고 산산 부서져버렸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제까지 하던 고생, 그 받던 업신여김, 그 당하던 억울, 그 호소할 데 없던 심정, 그 답답했던 가슴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새로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눈? 현실주의, 이기주의, 나, 내 것에 눈이 다시 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소소하고 어지러운 욕심의 눈이 다시 뜨이니, 일제 밑에서 공동으로 같이 당했던 억울한 고난과 슬픔은 다 잊어버리고 소소하고 어지러운 사사감정만 다시 살아나게 됐고, 그러니 저녁노을같이 찬란했던 평화와 장엄의 빛, 하늘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해방을 기념한다 할 때마다 젊은 세대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은 것은 이 감격이요, 이 감격을 올 수 있게 했던 그 해방 전야의 고통과 슬픔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말하지만 우리 기성세대는 릴레이 경주에서 바통을 넘겨주지 못하고 엎어진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이 슬픔과 부끄럼과 이 기쁨을, 생활을 통해 전해드렸어야지요. 그래야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했으니 그 미안함을 말로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가차 없습니다. 넘어진 사람은 아무리 넘어졌어도 뒤에 이어 뛰는 사람은 반드시 그 바통을 찾아들고 뛰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통 없이는 새 창조 있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아무리 실패하였다하더라도 새 세대는 제 손으로 그 전통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죽었으면 그 빚 알아내서 깨끗이 무는 것이 아들 노릇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거꾸러졌던 아버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살려내잔 것입니다. 죽은 아버지를 피하면 저도 사람 되기를 잃어버립니다. 역사는 가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혹 속에 살려내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잃어진 바통은 반드시 그 주변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 그 주변이 어디입니까? 정치 주변입니다. 당초에 역사를 살려내는 그 감격을 소멸시켜 국민을 더러운 이기심, 현실주의에 빠쳐놓은 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하면 정치인들이 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회의 중견이 되는 새 세대를 불행히 생활로는 못 배웠더라도 해방 이후의 정치과정을 잘 살피면 그 떨어져 있는 바통, 곧 민족전통의 정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리해야 할 정부와 민중
며칠 전『조선일보』에 동경에 특파원으로 가 있다는 이도형(李度珩)라는 기자의「일(日)의 한국관이 달라졌다」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나는 5.16정권의 첫날부터 오늘까지 민주투쟁을 해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한국관(韓國觀)‘이라 ‘반한(反韓’)이라 하는 말을 썼는데 그 '한(韓)‘이란 어떤 뜻으로 쓴 것일까? 그것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정부를 가리키는 것인가? 정부 없는 나라는 없지만 정부가 곧 나라를 참으로 대표한 일은 세계 어디서도 한번도 없습니다. 그 둘은 분명히 구별해서 말하여야 합니다. 나는 일본을 말할 때는 두 개의 일본을 생각합니다. 하나는 메이지유신으로, 일청전쟁, 일러전쟁, 태평양 전쟁으로,일본 정부로 대표되는 일본이고, 또 하나는 일본 민중으로 대표되는 일본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이 참이냐 하면 민중의 일본이 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먹었던 것은 일러전쟁을 했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일본이지 일본 민중이 아닙니다. 물론 군국주의자들이 한국 땅에 와서 일청, 일러 전쟁을 하도록 가만두었고, 태평양 전쟁에 한국 사람을 강제로 징용하게 가만 보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일본 민중도 참여했다고 할 것이지만, 그 책임을 묻는 자리에 가면 결코 일본 민중이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양편이 다 평화적인 민중으로 있을 때 거기는 아무런 침략도 배척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민중을 속이고 강제하여 전쟁을 하게하고 침략하게 한 것은 군국주의의 정치가와 거기 붙어먹는 재벌들입니다. 한일 관계를 말할 때 더구나 오늘같이 민중의 생각이 다양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침략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체의 이름을 도둑질하지만 이제는 ‘무지막지한 백성’이라던 옛날과는 다르니 그 점은 분명히 구별해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일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김대중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문세광, 긴급조치, 한일유착 등 몇 가지 해묵은 규탄의 재료들로 그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스스로 증폭시키며 운운”
하는 말은 두 나라 사이를 크게 잘못 만드는 잘못 사용된 말들입니다. 김대중, 문세광, 긴급조치 등을 못 마땅히 생각하고 비판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나라를 위해 또 인도주의를 위해 하는 말일 것이지 무엇 때문에 한국 사람에 대해 반감, 혐오감까지를 일으키기까지 할까? 납득이 안가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한국 사람’은 ‘한국 정부’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동하면 실수건 고의로 건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입니다. “내가 국가다” 하는 루이14세 때람 몰라도 지금은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런 것이 다 역사, 특히 해방과 그 전야의 역사를 잊어버린 데서 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나는 친일주의자도 아니지만 배일주의자도 아닙니다. 나만 아니라 제대로 있는 씨알은 누구나 다 그럴 것입니다. 일본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지만 일본을 한때 지배했던 군국주의, 제국주의는 미워하고 거기에 대해 싸워야 합니다. 해방 직전 일제 말년에 우리 모양이 어떠했던지 젊은 세대들은 아십니까?
잊을 것, 잊지 않을 것
첫째, 식량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2홉 3작으로 제정해 배급하는 것으로 살아가려니 밥을 밥같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못 하나, 양철판 하나를 구하려 해도 어디가 살 곳이 없었습니다. 경제가 갈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소비경제랍시고 낭비하는 꼴을 보면 정신 있는 국민이라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슨 경로를 밟아 누구의 손으로 왔든간 돈이 생기고 물건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그것이 역사의식 있는 민족이겠습니까? 그러니 되기야 빚으로 됐거나 참 생산으로 됐거나 물량이 풍부한 듯하면 자유고 정의고 인심이고 다 팽개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하겠지만 사람은 역시 사람입니다. 늘 그렇지는 못합니다. 진리는 틀림없이 승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꼭 사슬을 져야 노예가 아니라 자유하는 정신을 잃어버리면 그때 벌써 노예입니다. 이것을 념념지간에 두는 것이 종살이의 비참을 보지는 못하고 해방된 하늘 아래 난 세대들의 할 일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잊지 않으려면 반드시 잊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글에 “성인은 그 잊을 것을 잊고, 그 잊지 않을 것을 아니 잊으며 소인은 그 잊지 않을 것을 잊고, 그 잊을 것을 아니 잊는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잊을 것은 무엇이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잊을 것은 나요, 잊지 않을 것은 전체입니다. 잊을 것 온몸이요, 잊지 않을 것은 정신입니다. 욕심은 될수록 잊어야 하는 것이고, 진리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나 생각하면 전체 잊어버리는 것이고, 전체에 살면 나는 자연 잊어지는 것입니다. 욕심은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한다니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나 자신을 억제할 줄 모르면서 자유를 위해 싸운다니 빈 말입니다. 참 나라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내 뜻대로 할 생각 마십시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下得已(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하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천하신기 불가위야)
爲者敗之 執者失之(위자패지 집자실지)
이제 나라를 잡아다려 한다 할진데, 내 그 되지 않음을 볼 뿐이다(혹, 내 그 마지못함을 볼 뿐이다).
나라는 성스러운 그릇이라 할 수 없느니라.
하는 이는 깨지고, 잡는 이는 놓친다.
노자의 말입니다. 아닙니다. 어느 개인의 말이 아니라 부국강병주의로 백성들을 어지럽게 하는 때에 역사가 입을 빌어 외친 경고입니다.
잊을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역사의 음성이 생생히 깨어나 명령을 해줄 것입니다.
씨알의소리 1978년 7월 75호
저작집30; 5- 47
전집20; 17-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