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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춘』 2024년 봄호 게재
피천득 수필 : 동양의 문(文)과 서양의 에세이의 결합
-수필 〈엄마〉를 중심으로
김정빈
jeongbin22@hanmail.net
1. 문학과 철학
많은 독자들이 수필과 에세이를 분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든 또는 학자 ·․ 수필가 ·․ 에세이 작가들이 뭐라고 하든과는 별개로 필자는 에세이를 철학적인 짧은 산문으로, 수필을 문학적인 산문으로 본다.
이 정의는 철학과 문학의 분별을 요청한다. 인간의 문화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철학과 문학은 언어를 소재로 이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른 점은 전자는 언어를 1차적인 용법로 사용하지만 후자는 언어를 2차적인 용법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1차적 사용은 무엇이고, 2차적 사용은 무엇인가. 1차적 용법은 언어를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2차적 용법은 언어를 이용하여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형상을 창조하는 것을 형상화라 한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형상화는 곧 예술화이다.
음악은 소리로써, 미술은 색깔과 형태로써, 무용은 동작으로써 심형상(心形象)을 창조함으로써 예술의 일원이 된다. 심형상은 마음 안에서 대상을 감각하게 한다. 비록 마음 안이긴 하지만 우리는 음악을 듣고 그림과 무용을 보면서 내적 감각을 하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시에 창조되어 있는 형상(이미지)과 소설 ·․ 희곡에 창조되어 있는 형상(서사)를 접하게 되고, 이 또한 감각적으로 수용된다.
그 수용은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마음은 감탄하고 감흥하며 감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거나 정화한다는 것은 이천사백여 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로써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떠한가. 예술의 한 장르로서 문학 또한 당연하게 형상을 창조하고 그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감흥 ·․ 감동을 일으킨다.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은 음악 ·․ 미술 ·․ 무용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소재, 즉 무엇을 재료로 삼아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는가이다.
음악의 소재는 소리이고, 미술의 소재는 색깔과 형태이며, 무용이 소재는 몸이고, 문학의 소재는 언어이다. 전자는 모두 물질태이고 후자는 정신태이다. 전자는 인간이 없는 시점에도 있다. 소리는 인간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있으며, 색깔과 모양 또한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있는 것이다.
무용이 사용하는 몸은 어떠한가. 그것은 인간이 있음으로써 있다는 점에서는 음악 ·․ 미술보다 후차적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또한 물질태이다. 달리 말해서 무용이 사용하는 인간의 몸은 인간의 정신이 개입하기 이전의 사태이다.
그에 비해 언어는 인간의 정신이 있음으로써만 성립하는 후차적인 것이다. 바로 이런 다름으로부터 문학의 철학성이 시작된다. 음악, 미술, 무용에 철학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학에 비해서는 철학성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 예술 장르가 소재 면에서 물질태를 이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특성이다. 그에 비해 문학은 정신태로서의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정신의 한 특성으로서의 철학성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이 분별이 음악 ·․ 미술 ·․ 무용이 문학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 예술 장르는 철학성 면에서의 부족분을 예술성 부분에서 보충한다. 달리 말하면 음악 ·․ 미술 ·․ 무용은 보다 예술 때 철학의 비율이 9:1, 또는 8:2 정도인데 비해 문학은 그 비율이 운문문학은 7:3, 산문문학은 6:4 정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수필과 에세이를 이 분별에 기초하여 정의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필 또는 에세이라 불리는 짧은 산문은 예술 쪽으로 기울어진 글과 철학 쪽으로 기울어진 글로 나뉘는데 전자를 수필, 후자를 에세이라 부르자는 의미이다.
2 수필은 정격 문학
앞 절에서의 분별을 전제로, 동북아시아 전통은 수필에, 서양 전통은 후자에 입각하여 많은 짧은 산문들을 창작해 왔다. 동양(동북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문예 작품을 시(詩)와 문(文)1) 으로 분별해 왔는데, 오늘날 우리가 수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문의 전통에 서양의 에세이를 결합한 것이다.
이 결합은 일본에 서양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던 메이지 유신 기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이 흐름은 일본을 거쳐 청나라와 조선에게도 전해졌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수필이라는 장르라 한국문학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초기 수필의 문학예술적인 성취는 시와 소설에 비해 한 등급 아래의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사람들은 수필을 ‘여기(餘技)의 문학’으로, 즉 시와 소설을 쓰다가 시간이 남으면 쓰는 짧은 글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수필을 정의하는 ‘여가(餘暇)의 문학’이라든가 ‘붓가는 대로 쓰는 글’라는 등의 정의는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현대 수필가에서 수필은 여가의 문학도 아니고 붓가는 대로 쓰는 글도 아니다. 여가에 쓸 수도 있고 붓 가는 대로 써야 하는 것도 맞지만 그 말의 본뜻은 그 편보다는 전문적인 작가로서 쓴 글이 아니라는 뜻인데, 현대 수필가에게 이 정의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 수필가에게 수필은 전문 작가의 글이며, 시와 소설에 비해 부족할 것이 없는 완전한 정격 문학 장르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 말이 사실이 되려면 작품이 예시되어야 한다. 수필로서 시와 소설 옆에 놓아 당당한 긍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작품이 있는가?
있다. 피천득 수필이 바로 그것이다!
3 피천득 수필의 문학적 성취
1970년대, 윤오영(尹五榮)의 등장은 한국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윤오영은 한편으로는 수필 창작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필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의 수필론인 《수필문학 입문》(1975년, 관동출판사)은 기존의 수많은 수필론에서 진일보한 수필론으로서 후학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그 논의에서 윤오영은 수필을 동양의 문의 관점과 서구의 문학 이론의 관점을 겸하여 바라보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그가 “수필은 시의 이미지, 소설 희곡의 서사에 대응할 만한 무엇을 창조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윤오영은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는 알베레스(R. M. Alberess)의 “에세이는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는 정의를 소개했을 뿐, 논의를 더 이상 발전시키거나, 이 정의를 우리의 수필에(에세이가 아니라) 적용하여 토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치열한 논구의 정신은 자연 그의 작품에 스며들었고, 그 결과 그의 작품에는 서구적인 의미의 문학적 형상화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의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웃마을 김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 편 집 사랑 뒷마루에 웬 노인 한 분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고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하며 걸터 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 마을에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음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 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은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 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윤오영, 〈달밤〉
이 작품은 중국 당대(唐代) 소식의 〈기-승천사야유〉2) 와 청대(淸代) 장대(張岱)의 〈호심정의 눈〉3) 을 이어받은, 동양의 예술가들이(문인은 물론 화가들까지) 즐겨 소재로 삼았던 달(달밤)을 소재로 삼고 있다. 바꿔 말하여 이 작품은 소재 면에서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그 소재가 우수한 작품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 진부한 소재를 뛰어넘는 ‘무언가’의 ‘부가’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성공은 주로 달과 겹쳐져 오는 두 가지 이미지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있다. 즉, 이 수필에서 달의 둥근 모양은 농주 사발의 둥근 모양과 겹쳐오고, 그 둘은 다시 달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는 달→ 둥근 사발→ 노인이라는 동종의 궤가 그려지면서, 그 궤를 그리고 난 마지막에 이르러 그것의 심형상은 뚜렷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이같은 심형상의 창조와 전이는 이 작품이 서구(현대) 문학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없다. 이 작품의 형상화는 독자의 마음에 뚜렷하고 강렬한, 또는 안개 같고 신기루 같은 ‘기(氣)’, 또는 N. 하르트만의 미학이 말하는 ‘관조의 후층’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철학적으로 의미를 분석하는 독자에게는 호소되지만 문학예술적인 감흥 ·․ 감동을 느끼려는 독자에게는 강하게 호소되지 못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수필가 피천득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작가에 의해 윤오영이 추구한 바 동양의 문과 서구의 에세이가 결합한, 또는 동양의 인격 중시의 전통과 서양의 문예(예술) 창작 이론이 잘 조화된 우리만의(동양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수필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간절한 소원이 꿈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려서 꿈에, 모터사이클에 속력을 놓고 마냥 달린다. 브레이크를 걸어도 스톱이 되지 않아 애를 쓰다가 잠이 깬다.
나는 와이키키 비치에서 한 노인 교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1904년에 하와이로 이민 온 후, 50년이 되어도 꿈의 배경은 언제나 자기 고향인 통영이라고 하였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라고 노래한 노산(鷺山)4) 의 노래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유행되던 〈푸르고 푸른 고향의 풀〉이라는 노래가 있다. 감옥에 갇힌 사형수가 꿈에 고향을 꿈꾸는 것이다. 눈을 떠보면 회색빛 네 벽만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벽돌담도 철창도 다 스러지는 것이다.
또 이런 사연의 노래가 있다. 아기가 자기 전에 기도 드리는 것을 엄마가 몰래 보았다. 엄마는 빨간 리본을 사러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밤이 깊어 상점은 모두 닫혀 있었다. 엄마는 돌아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아기가 방문을 열어보니 아기의 머리맡에는 한 다발의 리본이 놓여 있었다. 기적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진 꿈일 것이다.
서양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녀가 성(聖) 아그네스제(―祭) 전야에 단식을 하고 아무와도 말을 아니하고 성 아그네스에게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면, 그날 밤 꿈에 미래의 남편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서 나는 꿈에 엄마를 찾으러 길을 가고 있었다. 달밤에 산길을 가다가 작은 외딴집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는 젊은 여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달빛에 우아하게 보였다. 나는 허락을 얻어 하룻밤을 잤다. 그 이튿날 아침 주인 아주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거기에 엄마가 자고 있었다. 몸을 흔들어보니 차디차다. 엄마는 죽은 것이다. 그 집 울타리에는 이름모를 찬란한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엄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얼른 그 꽃을 꺾어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하얀 꽃을 엄마 얼굴에 갖다 대고 “뼈야 살아라!”하고, 빨간 꽃을 가슴에 갇다놓고 “피야 살아라!” 그랬더니 엄마는 자다가 깨듯 눈을 떴다. 나는 엄마를 얼싸안았다. 엄마는 금시 학이 되어 날아갔다.5)
이 작품에서 예술적 효과가 극대치로 나타나는 곳은 마지막 부분이다. 그 마지막 부분을 위해 작가는 점층적인 기법을 통하여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또는 ‘벽돌을 쌓아올리듯이’ 분위기, 또는 이미지를 더해간다. 그런 다음 클라이맥스를 맞고, 또한 대단원에 이른다.
이제 그것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자.
가. 먼저 작가는 ‘꿈’을 소재로 삼는다. 꿈은 자의식이 휴식하는 상태, 또는 표면의식이 잠들어 잠재의식이 활동하는 ‘잠’에서도 더 나아간 상태이다. 그리고 자의식의 휴식과 잠재의식의 활동은 아폴론이 아니라 디오니소스, 즉 몰아와 도취를 특징으로 하는 예술경과 통한다.
나. 작가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전에 여러 가지 예를 듦으로써 사전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 예들은 하나하나마다 제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의 통영 출신인 노인 이야기와 사형수 이야기는 꿈이 ‘그리움’을 반영한다는 것을, 그 다음의 아기 이야기는 꿈은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세 번째의 성 아그네스제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를 합쳐서 꿈에서는 “그리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사전 인시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 다음에 오는 이야기의 서론들에 불과하다. 이처럼 분위기를 조성하여 독자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한 다음, 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꿈에’ ‘그리운 엄마를’ ‘만나는’ 것이다.
다. 이렇게 되어 꿈, 즉 몰아와 도취의 장이 본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다. 이것으로 작가는 매우 넓은 창작 공간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는 꿈이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몰아와 도취성이 그것이고, 둘째는 꿈 속에서는 어떤 특이한 사건도 다 용인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둘은 모두 예술의 창조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다.
그리고 그 꿈에서 화자(여기서부터는 ‘작가’가 아니라 ‘화자’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부터의 진술이 정말로 있었던 ‘실제 사실’인지의 여부를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는 엄마를 찾으러 길을 가고 있다. 화자는 ‘혼자’ ‘산길’을 가고 있다. 즉, 화자는 ‘외로운’ 상태이며, 그 외로움의 해소는 엄마를 ‘만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라. 꿈 속의 풍경은 ‘달밤’이다. 달밤은, 더군다나 산길에서 맞는 달밤이라는 풍경은 독자를 다시 한번 몰아와 도취경으로 이끈다. 그것은 말하자면 ‘꿈 속의 꿈’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마. ‘다’를 이어받아 장면은 다시 ‘외딴집’으로 연결된다. 혼자라서 외로운 존재가 다시 외로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 그 집에서 화자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러나 나중에 엄마로 변용될 이 여인이 처음에는 엄마가 아닌 낯모르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여인 또한 ‘혼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외로운 존재일 가능성이 짙게 암시된다. 또한, 그녀는 ‘달빛’에‘우아하게 보였다.’ 이 ‘우아함’은 나중에 그녀가 변용되었을 때의 엄마의 우아함을 위한 예비적 성격을 갖는다.
사. 외딴집에서 화자는 ‘잠’을 잔다. 꿈 속에서 꿈의 출입문을 향해 들어가는 것, 즉 화자는 잠→ 꿈→ 잠의 순으로 더욱더 깊은 어떤 곳으로 들어간다. 잠을 잔 다음 화자는 깨어난다.
아. 그런데 이튿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아주머니가 일어나지 않는다.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이 ‘대답 없음’은 독자를 숨막히는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지금까지 몰아와 도취, 즉 부드러움으로만 이어지던 풍경에 ‘삼엄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삼엄함은 다음 장면을 더욱 극적인 것이 되도록 돕는다. 즉, 이 대답 없음은 작품 안에서 ‘폭풍이 불기 전의 고요’와 같은 예술적인 효과를 낸다.
자. 그 ‘고요’의 끝에 아주머니는 엄마로 ‘변신’되어 누워 있다(엄마의 ‘누워 있음’은 또하나의 고요이므로 이 또한 ‘한 고요로부터 다른 고요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의 ‘죽음의 고요’는 ‘잠의 고요’와는 다르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는’ ‘꿈 없는 잠’이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폭풍’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그리운 엄마, 꿈에서도 보고 싶은 엄마!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래서 독자(화자)는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그녀가 엄마라는 것이 확인됨과 동시에 ‘죽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때 독자는 두 배의 충격― 뜻밖에 만나는 엄마라는 충격과 함께 엄마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된다.
차. 작가(이것은 ‘화자’가 아닌 ‘작가’의 문제이다)는 그 장면에서 머뭇대지 않는다. “엄마는 죽은 것이다.”를 이어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장면을 위한 예비로 나아간다. “그 집 울타리에는 이름모를 찬란한 꽃이 피어 있었다”가 그것이다.
꿈 속에서의 풍경은 흔히 흑백으로 나타나고, 그조차도 희미하고 불투명한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런 꿈 속에서의 총천연색 ‘찬란한 꽃’은 기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물며 장소까지 ‘산 속 외딴집’에다, 엄마의 ‘차디찬 주검’ 앞에 선 화자일 바에야 그 기이한 느낌은 더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앞에서 지적한 ‘죽음’과 더불어 평명하기만 하던 지금까지의 서술에 기특(奇特)한 느낌을 돌연히 솟아오르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단조로 흐르던 음악이 갑자기 장조로 바뀌는 것 같은, 또는 안단테로 흐르던 음악이 문득 속도를 바꿔 비바체로 바뀌는 것 같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카. 앞의 장면에서부터 글은 ‘수필’을 넘어서 ‘연극(희곡)’으로 변한다(이처럼 문학의 다른 장르의 특장을 두루 원용하는 것은 수필의 본래적인 성격으로서, 이 때문에 수필이 다른 장르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다). 엄마의 죽음, 이름모를 찬란한 꽃. 그리고 화자는 그 꽃을 ‘얼른’ 꺾어 가지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런 다음 죽음의 이미지를 돕는 ‘하얀’ 꽃을 엄마 얼굴에 갖다 놓고 “뼈야 살아라!”하고, 앞에서 말한 ‘기특’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더 돕는 ‘빨간’ 꽃을 가슴에 갖다 놓고 “피야 살아라!”하고 외친다. 이때 ‘뼈’와 ‘살’ 또한, 그것이 주검과 살아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특한 이미지를 돕는다.
타.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난다. 엄마가 ‘자다가 깨듯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화자는 꿈 속에 있다. 그 꿈 속에서 엄마는 나를 얼싸안는다. 기적은 일어났고, 엄마의 화자에 대한 사랑은 확인되었다. 연극으로 치면 클라이맥스를 지나 마침내 대단원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일 그것이 연극이라면, 이 장면에서 극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작가라면 이 장면에서 글을 끝내었을 개연성이 열에 아홉일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엄마는 금시에 학이 되어 날아갔다.
어쩌면 이 한 줄이야말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 기법을 총동원하여 예술적인 효과를 일으킨 것을 수렴하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이 한 줄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제 엄마는 학이 되었다. 그것도 시간이 걸리지 않고 ‘금시에’ 학이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여인’이었다가, 다음에는 ‘죽은 엄마’였다가, 그 다음에는 ‘살아난 엄마’였다가, 이제는 ‘학이 된 엄마.’ 그리고 그 엄마는 ‘날아’가 버린다.
어디로?
작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엄마가 날아간 곳은 ‘공중’, 또는 ‘허공’일 것이다. 그리고 이 공중 · 허공은 산수화에서 산수→ 여백을 거쳐 그림이 그림 밖으로 넘쳐 기에 이르는, 문자가 문자 밖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이상 살펴 본 것과 같은 놀라운 문학적 성취경에 도달한 피천득의 수필은 양(陽)적이기보다는 음(陰)적이며 이(理)적이기보다는 정(情)적이고 강하기보다는 유(柔)하다. 또한 피천득의 수필은 사람살이의 더부살이의 사회적 성격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개인적이거나 사사로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피천득 문학이 동양의 전통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같은 피천득 수필의 성격은 1970년대 이후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다. 우리의 1970-80년대는 음유(陰柔)를 사랑(향유)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군사 독재의 시대였고, 군사적으로는 남북 민족 간의 대치가 삼엄하던 시대였으며,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대다수가 절대적, 또는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는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이든 내적인 성찰보다는 외적인 행동을 장려하게 마련이다. 즉, 그런 시대는 지식인에게 현실의 모순과 불의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당시의 우리 지식인들 또한 독재 권력, 또는 불의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였다.
그러나 피천득 문학은 그런 외행의 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피흘리며 불의에 맞서 항거하던 당시의 지식인들이 피천득의 수필 문학을 비판하였던 저간의 사정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이란 정치 ·․ 군사 ·․ 경제와 거리를 유지하는 곳에서 탄생한다는 본래적인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피천득 문학의 음유적 성격을 양강(陽强)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나아가 작가 피천득에게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적어도 피천득은 일제와 독재 정부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팔지 않았다. 작가는 독립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지 못한 채 뒤에서 그들을 응원하고만 지내 온 자신의 경력을 겸손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였다.6) 이 수오지심(羞惡之心)7) 이 작가의 수필 곳곳에 잘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로는 직접 언어(일차적인 언어)로,8) 때로는 간접 언어(이차적인 언어)로9) 표현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필 〈종달새〉(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한 작품)는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일제, 또는 군사 독재로부터 벗어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시기를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양강의 압력을 느끼지 않거나 적게만 느끼는 지점에서 음유 문학을 온전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평온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피천득의 작품이 동북아시아의 문예 전통과 서양의 신문학적 기초를 조화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 동양 전래의 탁월한 시와 문장을 모아 놓은 《고문진보(古文眞寶)》는 문의 종류를 사(辭) ·․ 서(序) ·․ 표 ·․ (表) ·․ 명(銘) ·․ 잠(箴) 등 18가지로 분별하고 있다.
2) 원풍(元豊) 6년 시월 열이틀날 밤이었다. 막 옷을 풀고 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 달빛이 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혼자 걷기엔 무료하였다. 나온 김에 승천사까지 걸어 가 장회민을 만나기로 했다. 마침 회민도 잠들기 전이었다. 같이 중정(中庭)을 거닐었다. 뜰이 물에 잠긴 듯 하얗게 투명했다. 마름과 물풀이 둥둥 서로 엉켜 있었다. 달빛에 대와 측백 그림자가 엉켜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밤마다 어찌 달이 없으랴. 어찌 죽백(竹帛)이 없으랴. 그러나 우리처럼 청한(淸閑)한 친구가 함께 거니는 밤은 일찍이 흔치 않으리.
-소식(蘇軾), 〈기-승천사야유(記承天寺夜遊)〉
3) 숭정(崇禎) 5년 12월. 나는 서호(西湖)에 살았다. 사흘간 대설이 내려 호수에는 사람은 물론 새소리까지 모두 끊겼다. 마침내 눈이 멎자, 나는 작은 배를 타고, 털옷에 화로를 싣고 눈을 보기 위해 홀로 호심정으로 갔다. 안개가 나무 끝에 응결되어 아련했다. 하늘, 눈, 산, 물…. 위아래가 모두 하나로 희었다. 호수 위에 긴 방축의 그림자가 비취었다. 정자도 하나, 내 배도 한 척, 배 안에는 두세 개 알갱이가 있을 뿐.
정자에 올랐다. 두 사람이 자리를 깔고 마주앉았다. 동자가 술을 데우느라 풍로가 끓었다.
한 사람이 있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한다. “아니! 이런 곳에 웬 사람이!” 그는 나를 끌어당겨 술을 권했다. 석 잔을 억지로 마시게 하더니 손을 흔들고 떠난다. 금릉 사람으로 잠시 이곳의 나그네가 되었다고 하였다. 배에서 내릴 때 뱃사공이 중얼거렸다. “손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더니만 손님 같은 분이 또 한 분 있었군요!”
-장대(張岱), 〈호심정의 눈(湖心亭看雪)〉.
4) 시조 작가인 이은상(李殷相)의 호.
5) 피천득, 〈꿈〉.
6) 언젠가 KBS에서 피천득의 작품집 《인연》을 논의할 때 사회자는 그에게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 해주기를 청하였다. 그에 응하여 피천득은 오직 “일제와 독재 시절 제가 정의를 위한 투쟁에 나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라는 내용의 말만 하였을 뿐, 후학, 또는 사회를 향한 일체의 충고와 조언을 하지 않았다.
7) 맹자는 의(義)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수오지심)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했다.
8) 예를 들어 작품 〈도산〉에서 작가는 안창호 선생이 일경에 체포될 때 그 제자이기도 한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9) 아름다운 언어로 자유를 예찬한 작품 〈종달새〉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수필 가운데 이 작품을 가장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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