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착한 환자 / 허숙희
어머니가 아침밥을 다 드셨다. 우거지된장국과 멸치 넣은 무조림이 입에 맞으셨는지 그릇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반찬은 조금씩 남아 있었다. 퇴원하고 처음에는 식사하실 때 옆에서 일일이 떠서 먹여 드려야 했고 화장실 출입이 어려워 기저귀로 다 받아 냈었다. 말씀도 어눌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화도 할 수 있고 당신 일은 무어 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 해결하신다. 정말 다행이다. 출근 준비가 바빠 얼른 상을 들고나오려고 하자 “어미야!”,“어미야!” 큰 소리로 연거푸 부르시며, 드시는 약이 다 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상을 다시 내려놓으며 텔레비전 옆에 세워 놓은 탁상용 달력을 쳐다보니 내일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두 달 전에 내가 표시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어머니 약 받아 오는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 바로 앞에는 영락없이 오늘 드실 약 봉투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오늘 다 먹으면 한 봉지 남는다”, “내일 점심에는 먹을 약이 없으니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오라고 해라!”, “단단히 일러라!” 이어서 한 번 더 강조하신다. “네! 알았어요, 아비가 잊지 않고 있을 거예요. 제가 다시 말할게요.”라고 말하고 상을 들고 방을 나왔다. 나는 몸이 불편해 병원에 다녀와도 처방해 준 약을 제대로 다 먹은 적이 거의 없다. 출근할 때 집에 놓고 가거나 가지고 가더라도 먹을 시간을 놓쳐서 제때 먹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대단하시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침, 점심, 저녁 식후 하루에 세 번 드실 약을 약상자에서 꺼내 눈길이 제일 많이 가는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늘어놓는 일이다. 온종일 티브이를 보시니 늘 눈에 띄어 때를 놓치지 않고 꼬박 챙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약 봉투가 세 개 정도 남으면 다음 날은 반드시 약 타는 날이다. 참 슬기로우시다. 그 덕인지 17년 동안 재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약만이 아니다. “베지밀은 하루에 꼭 두 통씩 드세요.”, “사탕은 오전 오후 다섯 개씩 드세요.”. “사과는 하루에 한 개만 드세요.” 이런 내 말을 그대로 지키신다. 또 “오후에는 꼭 공원에 나가서 운동하셔야 해요.” 휠체어에 타야 하고 요양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모자 쓰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나갔다 온다. 집안일은 못하더라도 어머니 공원 산책은 빠뜨리지 말고 시켜드리라고 요양사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의사의 처방대로 하루에 세 번 약을 잊지 않고 먹듯이 며느리 말을 어긴 적이 없다.
요양사가 집에 와 시중을 다 들어 드리더라도 가만히 누워만 계시면 안 될 것 같아 어머니께도 일을 드렸다. 출근할 때 목욕탕에 남편의 양말과 속옷을 갖다 놓는다. 어머니의 첫 번째 일거리다. 한 손으로 정성껏 빨아서 널어 말린 다음 보기 좋게 접어 안방에 갖다 놓는다. 아들의 속옷이어서 더 신나게 하셨다. 아침과 저녁에 집안의 모든 커튼을 치고 닫는 일은 어머니가 해야 할 두 번째 일이다. 빨래 중 수건을 비롯하여 네모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접는 일은 어머니의 세 번째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다 즐겁게 하신다. 그중 아들의 속옷을 빨 때 표정은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였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는 착한 환자였다.
집안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또 없을까 생각하다 집에서 콩나물 키우는 일을 생각해 냈다. 시루를 사서 준비해 드렸다. 그리고 시루에서 콩나물 키우는 일을 일년 내내 하도록 했다. 일부러 녹두와 콩을 섞어 놓으면 열심히 골라 가려서 한번은 콩나물을 다음엔 녹두를 물을 주며 잘 키웠다. 덕분에 이웃집에 콩나물과 숙주나물 인심을 실컷 썼다. 초등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뒷 베란다에 마루를 깔고 아이들의 함성과 뛰노는 모습을 맘껏 보도록 해 드렸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중증 1급 장애로 판정된 어머니의 투병 생활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시며 17년간 이어졌다. 그동안 우리 집에는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큰아이가 결혼했다. 그때도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손자가 전담 보호자가 되어 온종일 모시고 다녔다. 또 나는 장학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장학관,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손자도 철도청에 취업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세 명의 증손까지 보셨다. 남편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어머니 때문에 119 출동이 몇 번 있었고,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넘어져서 깜짝 놀랐던 일은 있었지만 재발되어 쓰러진 일은 없었다. 아마도 슬기롭게 약을 챙기시는 어머니의 지혜와 집에서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전혀 밥을 넘기지 못하신다. 죽을 쑤어 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맛있는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드려도 소용이 없다. 간호사를 불러 영양주사도 맞고 병원에 가도 의사 선생님도 뾰족한 처방을 내리지 않았다. 편히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2016년 8월 21일 마지막 여든네 번째 생신날(음력 7월 19일) 평소에 좋아하시던 굴을 넣고 끓인 미역국 몇 숟가락을 간신히 넘기시고 집으로 찾아온 가족들을 만나 환한 웃음으로 하루를 보내셨다. 남편의 하나뿐인 혈육 시누이도 엄마가 아무리 집 떠나길 싫어하셔도 이제 집에서는 더 이상 힘들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집을 나서면서 ‘약 잘 챙겼냐?’라며 내게 물어보시고, 병원에 도착하자 집에서 가지고 온 약 의사 선생님께 얼른 보여 드리라고 눈짓하셨다. 그러나 그 이후 어머니가 17년간 한 번도 잊지 않고 드셨던 약은 소용이 없는지 복용하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다. 크고 작은 주사약만을 주렁주렁 매달고 지내셨다. 집을 떠나시고 딱 6일 만에 돌아가셨다. 사인은 “전 장기 부전(각 장기가 정상적인 기능을 멈추는 것.)”이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는 착한 우리 어머니 평생 누구에게도 해로운 짓을 안 하셨고 자기 자신보다 가족을 더 생각하시며 병든 몸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누가 될까 봐 아픈 내색도 제대로 안 하시던 어머니! 며느리인 내게는 당신 살점도 떼어 주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며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우리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시죠?
어머니를 생각하니 텔레비전 앞에 세 개의 하얀 약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첫댓글 시어머니와 잘 지내셨군요. 고부간에 갈등없이 지내는 게
어렵다는데..., 선생님의 역량이 돋보입니다.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십니다.
대단하시네요.
현명하게 잘 모신 것 같네요.
멋진 어머니에 그 며느리 셨네요.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며느리이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따듯한 어머니와 현명한 며느리입니다. 좋은 추억이 많으실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