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어려움이 전혀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때로는 태풍같은 어려움이나 가뭄이 찾아올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믿음이 좋다’라는 것은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엄습해 왔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기는 신앙의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8:1-3에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1절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핍박의 정도가 얼마나 가혹했던지 사도들만 남고는 그 많던 모든 신자들이 다 흩어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박해의 괴수 사울이라고 하는 자는 교회를 잔멸하는데 얼마나 집요한지 각 집에 들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이쯤되면 예루살렘교회는 완전히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듯이 보였다.
2. 어떤 고난도 복음전파의 열정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결코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마치 봄철 꽃가루를 잔뜩 머금은 송화가루 덩어리를 터트리면 온통 하얀 꽃가루가 퍼져나가 번식하듯이,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두루 다니면서 가는 곳 마다 복음의 씨를 뿌렸다(4절 :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과거나 지금이나 어떤 고난이나 환경도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전파를 막을 수 없다.
이처럼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복음의 불길이 이처럼 번져갈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일까? 많은 선교학자들은 그 당시 로마제국의 도로발달(‘모든 길은 로마도 통한다’), 통일된 언어사용(헬라어, 헬라어성경), 기독교의 높은 도덕성 등을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이러한 외형적인 요소들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함께 나누기 원한다. 그것은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Passion)과 소그룹(Small Group)이라는 교회구조이다.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이 있기 이전에서부터 이미 성전에서 모이는 모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모이는 소그룹 체제(셀교회)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성령충만의 결과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핍박으로 모이는 교회당 예배가 불가능해졌을 때, 소그룹 가정교회는 지하교회로서 더욱더 놀랍게 새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복음을 가진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흩어져 간 곳마다 그 생명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8:5절 이후의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복음전파의 열정과 과정들에 대한 실례로서 빌립의 사마리아 지역 전도를 기록하고 있다.
3. 지금도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소그룹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전도의 열정과 소그룹이라는 교회형태의 구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당연히 유효하다. 유효할 정도가 아니가 더 나아가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이 소그룹 구조(셀교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성전과 각 집에서 모이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 실례를 보자. 1949년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중국대륙은 완전 공산화가 되었고 모택동의 공산정권은 교회를 핍박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철수하고 중국인 교회지도자들은 다 투옥되고 말았다. 이 때 중국교회 교인수는 공식적인 통계가 불과 80만명, 그리고 50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이 박해 중의 50년 동안에 다 멸절되었을 줄 알았던 교회가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다. 80만명이 못되던 교인수가 5천만에서 1억을 헤아리는 성도들로 늘어나 있었다. 이 비밀은 지하 가정교회 즉 소그룹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세게 도처의 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소그룹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청년회를 비롯해서 서울제일교회도 이미 3년 전부터 셀교회로 전환하여 나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여러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데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사역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그 방법으로서의 소그룹 활동을 회복하는 것이다.
4. 초대교회 회복사역은 곧 영적싸움이다
우리들이 초대교회를 회복하고, 셀사역들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현시점에서 각 교사들과 리더들 그리고 온 청년 지체들이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 항상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 회복하는 사역은 곧 영적싸움이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러한 영적싸움에 지면 안된다.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사단은 큰 미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미끼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단의 거짓 메시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친 표현의 폭력적인 언어들 보다는 달콤하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다가온다. 어떤 때는 자신이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속는다. 습관적인 분주함과 조급함, 무관심, 충격적인 무책임, 실천은 없으면서 막연한 기대감에만 빠져있게 만드는 것, 영적인 매너리즘, 갖가지 참소와 정죄, 거짓말 그리고 안일함과 태만한 마음 등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려고 덤벼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쓰나미같은 핍박보다 더 무서운 쓰나미가 바로 안일함과 태만이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과 안일함과 태만이라는 불을 지펴서 서서히 썩게 만든다. 사단은 우리들 자신을 보잘것없는 ‘메뚜기’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게 만들고,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지게 만든다. 누가 건들지 않아도 혼자 넘어지게 만든다. 사단은 “한 번만”이라는 무기를 매우 잘 이용한다.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게 하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게 만들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사단은 모든 것을 잃고, 망가지고, 관계가 엉망이 되었을 때 비로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사단은 어찌해서든지 우리들의 마음에 거라지를 뿌리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축복의 도구를 저주의 도구로 착각하게 만들고, 나만 있고 공동체는 없게 만든다. 특히 이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사단의 도구는 생각이다. 영적싸움의 대부분은 생각싸움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곧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싸움에서 밀리면 안된다.
“예배에 참석하지 말고 봉사만 해라. 그것으로 족하다”
“청년 공동체에 참석하지 말고, 네가 편한 시간에 다른 모임으로 대신해라”
“피곤하지? 귀찮지? 튀어버려”
“딱 한 번만 빠져. 한 번인데 뭘 어때”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창피하지도 않나? 너 아니면 사람이 없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하는데, 넌 시간이 남아돌아서 참석하고 있니?”
“모임에 갈 시간 있으면, 차라리 단어나 하나 더 외워라”
“너의 리더, 너의 모임은 문제가 많지? 그런 모임은 나가지마”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정신차리자. 깨어서 근신하자.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공동체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동체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 교회 공동체는 무력화된다. 우리는 히브리서 10:25의 말씀처럼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자. 자기 모임에 부족한 점이 눈에 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감당하라고 보여주신 것으로 믿고, 적극성을 갖으라. 셀리더의 모습이 부족해 보이는? 그러면 그것을 채워주라. 우리 모두 함께 건강한 셀, 초대교회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사역에 다시 일어서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