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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16
6월4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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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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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H2G_4YEcVU&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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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를 독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내내 언제나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과 부딪히며 어떻게 하면 올가미에 옭아맬까 고민하던 적대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율법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치명적인 악습 몇 가지는 예수님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게 했었는데...그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신앙 행위요 결핍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라고 해서 다 수준 떨어지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율법의 본질적인 정신에 충실하고, 신앙과 삶이 일치하던 율법학자들도 가끔씩 만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자문을 구하러 찾아온 율법학자가 그러했습니다. 율법학자가 던지는 질문부터가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스럽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코 복음 12장 28절)
예수님의 대답은 다른 스승들처럼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쾌하면서도 단순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그, 율법과 계명의 핵심과 본질을 어느 정도 꽤뚫고 있던 그, 그래서 예수님 마음에 딱 드는 발언을 한 그를 향해 극도의 칭찬을 던지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코 복음 12장 34절)
저는 예수님 말씀 가운데,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표현 앞에 마음이 크게 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냥 적당히 설렁설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목숨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주먹구구식, 뜬구름 잡는 형태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로서가 아니라 매일의 성체성사나 아침저녁 기도 기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다면 지극정성으로 성체성사에 몰입해야 되겠습니다. 매일의 전례나 기도생활에 대한 충실성, 이웃사랑의 강도는 우리가 지닌 하느님 사랑을 잘 확인해볼수 있는 가장 좋은 장(場)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질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뜨겁게, 그리고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형태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못견뎌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정신, 생각, 힘이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독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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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ecplSlsyY
EBS 다큐 프라임 ‘엄마가 달라졌어요’에 한 엄마가 아들만 그렇게 미워하는 사례가 나왔습니다. 딸은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아들만 보면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잘 안 되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엄마는 자신의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다음에 태어난 남동생만을 사랑한 그 엄마도 미웠고 남동생도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아들이 남동생처럼 느껴지고 딸은 불쌍한 자신의 모습처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흐르지 못하는 그 엄마에게 부모를 용서하는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습니다.
남동생은 미워하고 자신만 사랑해주는 엄마를 보면서 딸은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는 것이기에 자신을 사랑해줬던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프러포즈를 해 온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자신은 진심이라 믿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기에 위로부터의 흐름이 막힌 상태로는 사랑을 흐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사랑은 호르몬의 결과일 뿐, 참으로 사랑은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요? 이는 구약 없이 신약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은 하느님 사랑의 회복을 말하고 신약은 이웃사랑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사랑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사랑을 바로 믿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십시오.
오리건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의 여학생들은 립스틱을 화장실 거울에다 묻히곤 했습니다. 키스 연습을 하는 것인지 청소하는 분만 곤혹스러웠습니다. 그 자국이 점점 많아져 골칫거리가 되자, 마침내 이 학교의 교장은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장은 모든 여학생을 화장실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청소 담당자는 거울 청소가 얼마나 어려운지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대 자루를 먼저 화장실 변기에 넣어 빤 다음 그것으로 거울을 닦았습니다. 여러 학생이 갑자기 헛구역질했습니다. 그 이후로 거울에 키스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입 맞춘 거울이 무엇으로 닦이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물이 달콤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쥐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나에게 누군가 주는 선물이 그 사람의 부모나 하느님에게 향해야 할 것이 아닌지 먼저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하와의 선악과를 덥석 받아먹으면 자신도 죽습니다.
어떤 분은 신자들의 돈을 사용하는 본당의 사제나 사목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성당엔 조금만 내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선악과를 이웃에게 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혜에 십 분의 일이나마 봉헌하며 감사를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성당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놀러 가려고 하는 아버지를 좋게 보아야 할까요?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지 않으면 그 사랑이 하와가 내어주는 선악과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거짓임을 알아내는 법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준 이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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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 첫째가는 계명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너무 많고 분명해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가지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1코린 1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살아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 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주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러한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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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맹자』에 알묘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돕는다.’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하여 송나라의 어느 어리석은 농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심은 곡식의 싹이 더디게 자라자 이것이 걱정되어 싹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오늘 내가 큰일을 했지. 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밭에 나가 보니 뿌리 뽑힌 싹들이 햇볕에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나무와 꽃을 하루아침에 다 자라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농부는 몰랐던 것입니다. 생명이 담겨 있지 않은 공산품이야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품을 만들 수 있지만,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세월과 함께 자라도록 인내해야 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기계로 뚝딱 만들어지는 완제품처럼 금세 완성될 수 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가 자라는 동안 산모가 고통을 겪듯이, 논밭에 뿌린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수고가 필요하듯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이웃을 향한 사랑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인내와 좌절, 땀과 눈물이 녹아 들어간 세월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나’의 사랑이 작고 미약하다고 쉽게 좌절하지 맙시다. 부족한 사랑을 일부러 키운다고 무리하여 알묘조장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맙시다. 그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열매 맺기를 희망하며 세월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잘 가꾸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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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장 큰 계명>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백퍼센트 바치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사랑하니까 하는 생활이고, 사랑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즉 사랑 없이 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겨 놓은 것은 하나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재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이 말씀은, “하나만 확실하게 선택해서 섬겨라.”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만 섬겨야 하고, 다른 것을 함께 섬기면 안 된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모범이 되는 분은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은(루카 1,38) 어쩌다가 그렇게 된 일은 결코 아니고,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모두 하느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과 순종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서 한 일도 아니고, 어떤 조건을 걸고 한 일도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데,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셨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좋은 예는 동전 두 닢을 바친 어떤 과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실 때, 그들이 바치는 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보셨습니다. 큰돈을 바친 부자들 가운데에도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헌금을 바친 뒤에도 여전히 부자였습니다. 큰돈을 바쳤지만, 그들의 재산은 줄어들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경우에는 동전 두 닢을 바친 뒤에는 남아 있는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구분하셨지만, 이것은 두 사랑의 중요도나 순서를 구분하신 것은 아니고, 편의상 구분하신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하고 동시에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첫 번째 모범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나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 전부가 우리를(나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창세 18,1-5) 그 나그네들이 하느님과 천사들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아보고 그렇게 극진히 대접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나그네들을 대접했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황금률이 연상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아브라함의 나그네 대접은, 나그네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고,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금률을 실천한 일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브라함이 한 일이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처럼’이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다지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알고 있는 것으로 그쳐도 되는 계명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해야 하는 계명입니다. 만일에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루카 10,37) 사랑이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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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5월 8일이 ‘어버이 날’입니다. 반면에 미국은 5월 둘째 주일이 ‘어머니 날’입니다. 주일 미사를 마치면서 텅 빈 성당에서 ‘어머니 은혜’를 불렀습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도 났고,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한 신부님들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에 숙연해졌습니다. 미국에서 ‘어머니 날’에 부른 ‘어머니 은혜’가 마음 아팠던 것은 코로나19로 제대로 어머니 은혜를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하느님 나라로 가신 어머니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신병이 내무반으로 오면 신고식을 하였습니다. 군인정신으로 무장했던 신병도 ‘어머니 은혜’를 불러보라고 하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가 영원히 그리워하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여론(輿論)과 민심(民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날씨와 기후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합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춥기도 합니다. 뉴욕의 날씨도 그렇습니다. 5월에도 두꺼운 패딩을 입을 정도로 춥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3월에도 더울 때가 있습니다. 기후는 일정한 패턴과 특색이 있습니다. 온대기후, 열대기후, 몬순기후, 아열대기후, 사막기후, 한대기후가 있습니다. 기후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날씨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다면 기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같습니다. 여론은 작은 사건과 사고로 출렁거리곤 합니다. 여론은 주도하는 언론과 방송에 따라서 변하곤 합니다. 그러나 민심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물처럼 민심은 더 깊고 넓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여론을 따라서 춤을 추기보다는 민심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날씨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 여론처럼 쉽게 출렁거리는 것이 아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두 가지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온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기호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여건에 따라서 바뀌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겉절이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익은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기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체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공포, 액션 영화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가족, 사랑 영화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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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을 아는 그대, 사랑하십시오>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사랑을 아는 그대,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아는 그대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아는 그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으니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아직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멈추지 마십시오
마지막 남은
결정적인 한 걸음
힘껏 내딛으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대의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대 자신처럼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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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좋아하는 시 중에,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이 시를 조용히 읽고 있으면 우리가 흔히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감이 비단 나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족이 있음에도 친구와 이웃이 있음에도 문득문득 인간적인 고독감 혹은 외로움에 잠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이겨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자기만을 생각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행동을 기피하는 사회에서 외로움은 감당하기 힘든 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40년 이상 장기 복역을 한 죄수가 가석방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 세상에 나온 그는 해방감을 느끼기는커녕 교도소 밖의 낯선 환경에, 심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 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자신을 믿고 인정해 주던 동료 죄수들과의 만남이 단절됨으로써, 세상에 홀로 내 버려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숙소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이처럼 고독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고독이라는 것이 항상 이렇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성인들이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고독을 이기지 못했던 죄수와 성인들의 차이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죄수의 행복은 동료들과의 우정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알고 인정해 주는 이웃 사랑만이 삶의 활력소였던 것입니다.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러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모두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을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정은 십자가 여정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제 곧 제자들은 당신을 모른 척 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조롱거리가 되어야 할 상황에서 예수님은 극심한 고독과 외로움에 피땀까지 흘리며 몸서리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이 극복될 수 있는 이유는 오늘 복음의 “사랑의 이중계명” 때문 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를 신뢰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당신의 희생이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두 가지가 충족됨으로써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의 여정을 걸어가시게 되고 결국 죽음을 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외롭고 고독한 여정에 있을 때, 혹은 그 밖의 힘들고 지치는 길 위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홀로 됨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주변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모두가 함께 할 때 우리의 삶은 활력을 되찾게 되고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그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허울뿐인 사랑 혹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에 그칠 뿐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다시금 오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우리가 성실히 이행한다면 주님께서는 삶의 끝에서, 오늘 복음의 따뜻하고 인자한 음성을 마침내 들려주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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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찾아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려는 그의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찾고자 했던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시하시면서도 레위기에 나오는 이웃 사랑을 함께 언급하십니다.율법 학자는 두 가지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 수긍하며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안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이 두 가지 사랑의 신비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강생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상태로 객관화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인은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사는 위선자입니다.(1요한 2,10-11 참조)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이웃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부자와 차별 대우하지 않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야고 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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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 이봉하 디모테오 수사님]
<사랑은 입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본 정신은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절대자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냉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들은 각자 여러 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하느님과 싸워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동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든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성직자 수도자를 너무 사랑하고 따르다가 어느 순간 그들 안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여 실망하고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존재 여부까지 파고드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의 주인을 죽는 순간까지 믿고 따르며 사랑을 하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랑할 때도 단순히 며칠 몇 달만 하는 것도 아니요, 편하고 기쁠 때만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렵거나 병들었을 때나 한 결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성녀들이 100퍼센트 예수님만 믿고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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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첫째가는 계명>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가는 계명인가? 도대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즉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요, 숭배하고 우러르는 것이요, 봉사하는 것이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왜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를 창조하실 때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하시고 나를 만드셨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나의 존재는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라고 하실만큼 사랑스런 존재이다.
하느님은 이토록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목숨까지 바치신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이다.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 6)고 노래하였듯이 숨 쉬는 모든 것들이 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우러르는 것이다. 왜 하느님을 숭배하고 우러러야 하는가? 하느님이 하신 일이 놀라워서이다. 그분이 하신 업적이 너무나 놀라워서이다.
"야훼님 기리리라, 이 마음 다하여, 의인들 모임에서 큰 모임에서. 야훼님 하신 일들 하도 크시어, 그 좋아하는 이들 익혀야 하리로다. 두렵고 눈부셔라 당신의 일들, 그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시편 110,1-3)
"주님을 찬미하라, 그의 성소 안에서 우람한 그의 하늘에서 주님을 찬미하라. 그 하신 일 놀라워라 주님을 찬미하라,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 1-3)
즉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위해 이루워 놓으신 위대하신 업적을 우러르며 경배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꺾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 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와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라고 찬미하였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은 그리고 놀라우신 일은 나를 구원하시는 일이다. 하느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 모든 일은 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 이것보다 더 놀라우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창조주께서 하찮은 피조물인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친히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이야말로 엎드려 경배드리고 우러러 뵈올 일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너무나 잘 알고 감탄하여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알게 되면 하느님을 경배드리지 않을 수 없고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22-2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봉사하다"라는 말은 비위를 맞힌다는 것이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종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요, 하느님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즉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봉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봉사는 섬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요,하느님의 종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즉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은 항상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를 행복에로 인도해주신다. 따라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만 가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내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위해서 희생하시는 분, 그분이 내가 믿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섬기지 않고 누구를 섬기겠는가? 그분의 뜻을 따라 가지 않고 누구를 따라 가겠는가?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내가 해야하는 것은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요, 그분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즉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결국 산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죽는 것, 그것이 인생이요, 행복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이요, 삶의 목적이다.
이렇게 내가 나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도 결국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며 그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이다.
내 이웃이 곧 나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잘 돌보아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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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사는 상황과 연관해서, 다양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두 가지 태도를 인용합니다.
하나는 인간을 배척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을 흡수하는 태도입니다. 이 둘 다 좋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인간 혐오와 배척을 의미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보다도 사람을 더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배척합니다.
두 번째 태도는 인간을 식민지하며 획일화하려는 의지를 뜻합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무조건 자신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며 강제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태도로 인해 배척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은 주님을 흡수하려 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배척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분명히 ‘사랑’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 가득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 없이 행한다면 제아무리 애써 본들 주님께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마음을 다하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조금만큼의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또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은 우리가 얼마나 지적으로 뛰어난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토대로 심판받을 것이고, 좋은 사랑을 했느냐 나쁜 사랑을 했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이제 많은 사람이 보이는 배척과 흡수의 모습을 반복하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또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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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
홍세화 선생님의 책 《결》에 나오는 이야기를 요약해 적어봅니다.
옛날 서당 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다. 어느 날 선생은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가 “정승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하며 흡족해했다.
이어서 둘째가 “장군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라면 큰 뜻을 품어야지.”라며 좋아하셨다.
형들의 이 모습을 본 막내는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지금 여기에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선생이 물었다.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하니 그 입에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하니 그 입에도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일그러진 표징을 짓는 선생은 “그럼 마지막 한 개는?”이라고 묻는다. 과연 누굴까요? 당연히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쳐 준 서당 선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홍세화 선생님은 외할아버지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당 선생이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못할 땐, 그땐 네가 세 번째 똥을 먹어야 한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남 눈치를 얼마나 보고 있습니까? 맞는 말인데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그때는 남이 먹어야 할 개똥을 내가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맞는 말인데도 하지 못하는 셋째가 되어서도 안 되고, 헛된 말을 해대는 첫째, 둘째 같은 사람도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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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큰 계명>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람은 꽃이다
늘 피는 꽃이다”
꽃 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람은 사랑이다
늘 피는 사랑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늘 피는 꽃으로, 사랑으로 살아갈 때 아름다운 삶입니다. 요즘 참 행복한 날의 연속입니다. 멀리 밖에서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 안에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소소하나 확실한 행복을, 소확행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게 행복이란 선물입니다. 요즘은 사랑을 줍듯이 시詩들도 줍는 느낌입니다.
얼마전 아침 산책중 미사 마치고 급히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수녀님을 만나 수도원 십자로 예수님 부활상 앞에서 함께 셀프카 사진을 찍어 전송한 후 받은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신부님! 일상의 행복을 포착하는 센스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일상의 행복, 참 좋고 귀한 말마디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하여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말이 있습니다. 큰 사랑 욕심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제도 세 분과 셀프카를 찍어 전송했습니다.
“저랑 한 번 사진 찍어요!”
수도회 장상회의에 참석한 신부님과 하나 찍고 기도하고 가던 자매와 하나 찍고 일하려 온 자매와 하나 찍었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착하고 열심한 분들이었습니다. 마침 일하러 온 분은 아침 산책길에 만났는데 기도문을 보며 기도하며 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어 전송하며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오늘 자매님 만나고 반갑고 기뻤습니다. 갈수록 예뻐지네요. 30대같아요. 주님 사랑 안에서 늘 새롭고 행복하세요!”
“신부님, 항상 건강하시고 감사합니다. 사진 너무 예뻐요!”
함께 찍다 보면 저절로 웃게 되니 저절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 같아 참 행복감을 갖게 합니다. 이 또한 사랑의 성령에 따른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선물같은 사건들입니다. 앞으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실천하고픈 함께 찍는 사진입니다. 어제 낮기도 시편 성무일도중 새롭게 와닿은 구절도 생각납니다.
“하고 많은 부귀富貴를 누리기보다, 당신이 명하신 도를 더욱 즐기나이다.”
“당신의 규정이 내 낙樂이오니, 당신 말씀이 잊음이 없으오리다.”
“내 걸음은 꿋꿋이 당신 길만 따르옵기, 두 다리는 비틀 거림이 없나이다.”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주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이몸을 숨겨주소서.”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 말씀이 행복의 열쇠임을 말해 줍니다. 참 행복은 하느님께, 하느님 말씀 실행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숙명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마음도 시야도 사랑도 커지고 깊어지고 넓어져야 하는 데, 작아지고 얕아지고 좁아지지는 않는지 부단히 성찰할 일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영적성장과 성숙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른 새벽마다 쓰는 은총의 선물, 강론에 놀라 써놓은 어제의 고백글이 생각납니다.
-매일 강론 쓰고 났을 때 마다 어머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어찌 이런 아들을 두었지!”
언젠가 어머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도 강론을 쓰고 났을 때마다 “내가 어찌 이런 강론을 쓸 수 있었지!” 감탄한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순전히 당신 ‘은총의 선물’ 강론이옵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세상 것들에, 술에, 자기에 취醉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사랑에 취醉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째가는 계명이 뭐냐는 질문에 하느님 사랑에 이웃 사랑 하나 더 추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십니다. 아, 이 사랑이 우리 인생의 모두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라 주어진 한 번뿐의 목숨입니다. 인생 후회는 사랑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눈들면 어디서나 하늘이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눈뜨면 어디나 이웃입니다. 인생 무지와 무의미와 허무의 참 고질적 병의 치유약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부족할 때 파생하는 내외적 분열입니다. 분열의 병이요 일치의 치유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중심의 견고해지는 내외적 일치입니다. 마음을, 목숨을, 정신을, 힘을 다한 갈림없는 하느님 사랑이 날로 우리를 순수와 열정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런 순수한 사랑, 열정의 사랑에서 샘솟는 행복과 기쁨, 삶의 활력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로 실현 시킨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사랑의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매진할 때, 정진할 때 예수님을, 결국엔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자 절로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아 정통한 분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티모데오에게 보낸 서간은 동시에 우리 하나하나에 주시는 사랑의 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최고의 모범이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집중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예닮 여정의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부질없는 설전으로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 아리나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함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라는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하느님 사랑의 진위는 이웃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의 바로 그 지점에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하느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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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온 몸으로 사랑하라>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 씨(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아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말씀을 하는 존재 그 이상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행동을 통해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과 천국은 별개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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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을 짚어 주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3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지상 과제입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고 목적이며 주인이신 분께 받은 가장 귀한 것이 사랑이니, 되돌려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역시 사랑입니다. 거대한 성전 건물이나 값진 제물도 사랑에서 우러난 봉헌이 아니면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이미 예언자를 통해 "역겹다"(이사 1,13 참조)고까지 하셨지요.
"훌륭하십니다, 스승님"(마르12,32)
율법 학자는 예수님 말씀에 탄복합니다. 혹 그가 예수님을 떠보려는 속셈으로 질문했거나, 저 자신이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을 등한시하는 자였다면 예수님 말씀에 그처럼 사심없이 동의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 스스로가 깨달은 율법의 본질을 정통으로 건드리시는 분 앞에서 그의 지성과 영혼이 무척 흡족해 보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예수님은 당신 말씀에 경탄하는 율법 학자에게 이처럼 큰 격려를 보내십니다. 이날은 아마도 그 율법 학자에게 잊혀지지 않을 행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면, 그 계명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의 자리는 어디쯤인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어떤 것도 율법, 곧 하느님 말씀의 본질인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힘 주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티모 2,9)
바오로는 죄수처럼 감옥에 갇혀 있지만 신실한 협력자들을 통해, 또 서간을 통해 곳곳의 신자들을 지도하며 주님의 길을 안내합니다. 죽으셨지만 되살아나신 예수님처럼 그에게도 물리적 제약이 한계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2티모 2,10)
예수님 뒤를 이어 바오로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잠시의 고통을 견디어내면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을 얻으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 줍니다. 그 무엇도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더 열렬히 더 진실되게 더 뜨겁게 더 충실하게 사랑하고 싶지만 번번이 현실적 올무에 발길이 채이는지요? 사람을 더 사심없이 더 따뜻하게 더 관대하게 더 큰 연민으로 사랑하고는 싶은데 당장 제 앞가림이 더 급하다고 느끼시는지요?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사랑하려는 의지 앞에 왜 이리 걸리는 게 많은 걸까요?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아가 2,7)
그래서 아가의 저자는 사랑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세상을 향해, 율법주의와 선민의식을 향해, 자신 안의 어둠과 상처를 향해, 제 안에 또아리를 튼 이기적 탐욕과 열등감을 향해 애원하는 겁니다. 사랑은 방해받아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인듯 귀하게 보아주고 보듬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이미 가까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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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신앙은 빛과 의미와 계획을 우리 삶에 가져다 준다.
우리는 우리 생명에 대해 누구에게 감사드려야 하는가? 오로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단 한 번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생각하신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처럼 소중하다. 우리가 이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매우 값진 보화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마치 성실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신앙이다. 신앙은 빛과 따스함, 의미와 계획을 우리 삶에 가져다 준다. 우리가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 손길 안에 있음을 의식하고 깨달을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큰 빛과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이런 신앙을 바탕으로 회프너 추기경은 “저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손길은 선하신 손길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손길을 선한 손길로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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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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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밝히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존재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관점”과 “그 변화”를 요구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이라고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곧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 한 자매”라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에페 1,10;1고린 1,30)일 뿐, “남”이란 애시 당초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이웃”이 곧 “나”요, “나”가 곧 “이웃”이 됩니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느님”이 곧 “이웃”이요,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이 “새로운 관점”, 곧 “새로운 탄생”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자기”를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나”가 중심인 “이웃 사랑”이 아닌 “내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남”인 이웃이 아닌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내 이웃을 내 몸같이’, 내 ‘이웃을 하느님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탄생, 새로운 자기”에로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이것이 곧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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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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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TIj3K9SPZ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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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아, 들어라."(마르 12, 29)
경청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제대로 듣는
경청에서
자라납니다.
나의 생각을
먼저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의 각도를
바꾸어 줍니다.
사랑의 각도는
마음의 각도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을 먼저
향(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이와같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굳어져버린
우리 마음에
사랑의 계명을
주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경청입니다.
경청에서
사랑을 구하는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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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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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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