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고난과 함께한 실록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에 닥친 첫번째 시련은 1538년(중종33) 성주사고 전소였다.
11월 13일 조정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발칵 뒤집어진다. 경상도 관찰사 강현(姜顯)이 서장을 올려 '11월 6일 화재로 인해 성주사고가 전부 불타버렸다'고 보고한 것이다. 당시 중종의 발언을 보면 왕과 조정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수 있다.
중종 89권, 33년(1538 무술/명가정(嘉靖) 17년) 11월 13일(계미) 3번째기사
불이 난 성주 사고의 일을 살펴보고자 해조에 문의하여 아뢰게 하다
성주사고(星州史庫)에 화재가 났는데, 전교하였다.
“지금 서장을 보니, 사고가 불에 탔다고 하였는데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고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사초(史草)를 큰 고을에 나누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이런 변고는 보지 못하였다.
직숙(直宿)한 사람은 감사가 수금(囚禁)하고 추고한다고 하나, 본읍(本邑)의 수령은 평상시에 아랫사람을 잘 단속하지못하여 이런 변고가 있게 하였으니 그도 아울러 전지를 받들고 추문하게 하라. 또 비록 다 탔다고 하나 어찌 불타다 남은 것이 없겠는가? 사관(史官)을 보내 살펴보고자 하니 해조(該曹)에 문의하여 아뢰라.”
【경상감사 강현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11월 6일 술시(戌時)에 사고에 불이 났습니다. 그 날 숙직한 기관(記官) 여환(呂還)과 감고(監考) 배귀손(裴貴孫)이 말하기를, 이날 바람이 사납고 추위가 심하여 동사(凍死)할 우려가 있으므로 불을 때고 취침했는데 소초(巢草)18772)안에 불이 나서 미처 끄지 못하고 죄다 불태웠습니다…….”】
일단 조정에서는 11월 16일 삼정승등이 모여 춘추관 사고에 있는 실록을 등사해 성주사고가 새롭게 완성되는 대로 다시 보내도록 한 후 정확한 사고원인 규명을 위해 현지에 경차관을 보낸다.
경차관은 일종의 특별조사관이다. 경상도관찰사는 실화(失火)라고 보고했지만 방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내린 조치였다....285쪽
왕의 하루, 이 한우, 2012년,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