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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툇마루
이홍사
무량사로 들어서면서 무량에 대해 더듬었다. 차를 절 입구 주차장에 세우고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온 뒤라 이마에는 땀이 진득하게 배어났고 쥐고 있던 캔 커피 알루미늄 재질이 손바닥 안에서 매끄럽다. 절기가 바뀌니 금세 여름이 다가선 듯, 이제 봄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지구 온난화로 봄과 가을이 턱없이 짧아진다는 생각, 겨울도 예전 같지 않다. 어린 날은 바로 둑 너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이 되어도 강은 얼지 않는다. 겨울이 따뜻하면 난방비가 적게 들고 좋지, 뭐.
지극히 현실적인 구석을 더듬는 자신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그건 그렇고, 무량함 속에 과연 길이 있을까?
무량無量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 풀이하자면 그렇게 되는데. 왜 무량사라 이름하였을까? 무량수전, 무량사, 무량으로 향한다.
무량사 절로 들어서는 걸음에는 질문이 가득하다.
무량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무량에 대해 더듬느라 다시 잠시 주춤거렸다. 무량이란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그 무량은 혹시 우리가 지닌 근심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은 아닌지, 짚어보니 지그시 가슴을 누르는 말. 무량, 감개무량!
감개무량하면 좋으련만, 근심이 무량하니. 입 안이 쓰네.
걸음을 멈추고,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두 번이나 중얼거렸다. 무량사 경내는 조용했다. 염불 소리는 쥐가 물어가고, 목탁 소리는 아마도 새가 물어간 모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 정말 절간처럼 조용했다.
절 마당에는 사월의 봄볕이 내려앉아 까칠하게 여윈 제 몸을 말리고 있었다. 고즈넉한 산사, 대찰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규모, 신라의 절이니 고찰이라 해도 어긋남이 없을 절 마당, 좋은 계절이었지만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
차분하게 절 마당으로 들어선다고 생각했지만, 차분하게 접은 마음이 언제 펼쳐졌는지 펄럭였다. 가라앉히려 찾은 걸음인데, 어딘가 모르게 펄럭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내면의 정서라고 했든가? 그래, 그것이 펄럭거림을 나는 감지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 펄럭임으로 인해 꿈이 가지런하지 못하다.
지난밤에도 꿈도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꿈이 논리적이면 곤란하다. 어쩌면 잠을 잔 게 아니라 현실을 헤치고 나갈 구멍, 그 탈출구를 밤새 찾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잠이 아니었다. 꿈에는 절대 논리가 존재해선 안 된다.
요즘은 내내 밤이 안녕하지 못했다. 논리의 뼈대를 가진 꿈은 언제나 잠을 갉아 먹는 법.
내일이 또 재판이라 했다.
규철이 녀석의 재판.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고부터 식구들 사이에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집 군데군데 각이 날카로운 기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이 날카로운 기둥은 늘 삐걱거렸다. 기둥이 무너질까 봐 숨도 크게 쉴 수가 없는 집. 서먹서먹한 대화, 눈치가 부딪혀 일으키는 불꽃.
집이란 구체적으로 뭔가?
그런 질문과 더불어 아늑한 분위기가 사라진 집에서, 침대에 누웠지만, 시린 등뼈를 날마다 선명하게 의식해야만 했다.
규철이,
조카 녀석이 사고를 친 것 지난봄이었다.
그 나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였다.
녀석은 친구와 둘이서 어느 대학 부근에 알고 지내던 여학생의 원룸엘 갔던 모양.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방의 그런 대학 부근에는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다니던 대학도 부근에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다고 들었다고, 그 여학생의 원룸도, 대학도 그 부근이라 했다.
여학생 혼자 생활하는 원룸에 두 놈이 갔으니 필시 그 여학생의 동의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거기서 술을 마신 모양. 그렇게 찾아간 원룸에서 술을 마시고 일어난 사건이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사건인지 짐작이 될 터. 뒤에 듣기로는 그 여학생과 사고를 친 두 녀석은 학교는 다르지만, 동아리로 알게 되어 꽤 친하게 지낸 사이라 했다.
친하게 지냈다는데 어떻게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날부터 집안에 낯선 기둥, 각이 예리한 기둥이 거실 바닥에서 솟아올라 버티고 섰다. 녀석의 일이 사건으로 성립되고 어머니가 알아버리자, 여든이 넘은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았다는 점. 아내에게 가장 불편한 점 바로 어머니의 숟가락. 어머니가 식음을 전폐했으니 아내는 안달, 이렇게 되면 아내의 편에 서서, 어머니에게 숟가락을 쥐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아내가 냉혈 인간임을 나는 확인하고 정나미가 떨어졌다.
저렇게 차가울 수가.
규철이의 사건이 있고부터 아내를 볼 적마다 어딘지 모르게 다가서는 싸늘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싸늘하게 여겨지는 아내의 등에서 떨어지는 정나미. 아내의 다른 모습을 보아버린 현재, 규철이 사고는 녀석의 앞날뿐이 아니라, 집안에 엄청난 파장을 초래할 게 틀림이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내가 정작 급한 건 아내를 보는 다른 시각을 찾는 일이다. 지금 와서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매일 마주할 사람에게 그런 불편한 감정을 가지면, 손해는 누구에게 가는가.
아내는 너무 차갑다.
차가워서 인간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주하기가 껄끄럽다.
심리적으로 이 생각을 깔고 가니 아내와 자는 안방조차 들어서기 부담스럽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아내의 뒷모습에서 자꾸 숭숭한 서릿발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이건 아내의 차가움보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질서가 뒤집힌 내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이거나, 거부감인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규철이 사건과 아내의 싸늘함과 뒤죽박죽되어 꼭 찍어 어느 게 원인이라고 분류하기는 어려운 상황,
어쨌거나, 아내에게 말도 없이 훌쩍 차를 몰고 나서서 이 무량사로 왔는데 마음이 펄럭이는 거.
아내의 시댁 조카가 되는 규철이는 원룸에서 여대생 윤간의 주범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촌 형인 규성이는 변호사로서 수임료도 없이 제 사촌 동생을 변호하는 재판, 이 재판의 변호를 맡은 규성이가 아내의 아들이라는 점. 아내는 죄인이 되는 규철이는 얼마나 죗값을 치를지 안중에도 없고, 제 아들 변호사인 규성이, 수임료도 없는 변호에서 몸 상할까 봐 안달하는 모습에서 더 차가움을 느끼고.
뭐 상황을 되짚으니 더 차갑게 여겨진다.
정확하게 따지면, 어머니는 다를 게 없는 손자. 사고를 친 규철이는 어머니의 손자지만, 아내의 아들이 아니다.
시댁 조카, 시동생의 아들.
어쩌면 피가 한 방울 썩이지 않아 저렇게 냉혈을 표출하는 걸까. 아내는 규철이가 이 사건으로 인해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어머니의 밥상과 제 아들 규성이 입장만 두둔하고 걱정하는 눈치.
냉정하게 판단해서 규철이는 시동생의 아들이고, 규성이는 제 아들이다. 다시 정리하면 규철이는 성범죄자가 되었고 규성이는 제 사촌 동생을 변호하는 변호사. 그러나 둘 다 어머니의 손자. 이 점에서 아내가 인간적인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는지. 좀 따스하게 다가설 수는 없었는지. 이 상황이 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지? 무엇이 아내에게 그리 혼선을 주는지?
아내가 치를 떤 건, 그 여학생의 원룸에서 두 녀석이 여학생을 윤간했다는 점.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했지만, 아내는 그 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날부터, 규쳘이는 아내에게서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
벌레가 되어버린 규철이야, 제가 지은 죄니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어머니가 못 할 짓이다.
규철이, 그 녀석! 그래도 맘은 여린 놈이야.
일이 터지고 규철이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어머니의 입에 발린 말인데, 옆에서 듣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
맘이 여린 놈!
밥을 먹다가도 생각이 나셨는지 불쑥 그 말을 하면 기어이 숟가락을 놓는다.
그런 어머니의 밥상을 지켜보는 아내의, 시한폭탄을 안은 듯, 조마조마한 심정을 읽었고, 빨리 그 밥상머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표정은 이미 여러 번 보았다.
아내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표정에 융통성을 부릴 줄 모른다. 그 정도의 나이가 되도록 살았으면 그런 건 누가 깨우쳐 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법인데 아내는 그걸 모른다.
가슴에 품은 감정이나 기분이 단박에 얼굴색이나 표정으로 표출되는 이상한 피부를 가진 여자,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다.
그 여자가 바로 아내라는 점을 인지하고부터 집안에는 각이 잡힌 기둥이 세워졌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각. 아내와 나 사이의 각. 각은 둥글지 않다. 모서리가 있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각이 내 잠을 짓눌렀고, 각을 세운 집안의 기둥뿐만이 아니라 아내의 말투나 표정마저도 내 잠을 짓눌렀다. 잠을 누르는 요소는 많다. 잠이 버거웠다.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가위가 눌리는 집.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무량? 무량이 해탈로 연결될 수는 없을까? 아침 밥상머리에서 무량을 떠올렸고, 숟가락을 놓고 슬그머니, 아내에게도 어머니에게도, 한마디 없이 이 무량사로 왔다. 구미에서 부여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내처 달렸는데 그랬다. 그렇게 달려온 길 끝, 무량함에서 무량함을 얻고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아득한 바람이 기도처럼 다가왔다.
불쑥 오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지만, 그럴 기회를 가지 못했던 절.
백제 속에 들어앉은 신라의 절.
무량사는 백제의 땅이라고 여겨지는 이 고을, 부여군 외산면이니 처음 듣는 이로서는 당연히 백제의 절이라고 여길 터이지만 신라의 땅이었다.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몸을 숨기고 살다 간 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절에서 김시습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지만,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경주의 남산 용장사, 지금은 절터만 남아 용장사지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만, 그 절에서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금오신화를 집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눈을 피해 이 절로 들어왔다는 거, 그 정도만 알고 왔다. 금오신화를 쓴 금오산은 구미의 금오산이 아니다. 경주 남산을 다른 이름으로 금오산이라 불렀다.
김시습에 대해 나는 약간, 조금 알고 있다.
김시습을 존경한다기보다는 일을 통해서 조금 아는 정도. 문화, 체육을 담당하는 과장으로 있던 시절, 시청 문화 담당 부서에서 발간하는 지역 문화지에 김시습을 특집으로 다룬 바가 있다. 그러니 업무라고 해야 마땅하다.
김시습을 다룬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기 전에 훑어보는 게 문화 담당 과장의 업무이기도 했겠지만, 훑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빠져들었다.
눈을 사로잡은 건, 구미의 한 향토 사학자가 쓴 글에서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옴니버스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분석, 그게 눈길을 끌었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있을 적에 머리를 깎은, 중이었다. 생육신으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데, 세조의 왕위찬탈까지 있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 매월당이라는 호로 전국을 떠돌다 이 무량사에 와서 기거하다 생을 마쳤는데,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에서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묻어달라고 해서 매장을 했는데, 삼사 년 후, 장마에 산사태가 나서 그의 무덤이 파묘가 되었는데, 드러난 건, 육탈하지 않은 그의 시신이더라는 거, 조금도 썩지 않고,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는 거. 당시의 사람들은 김시습이 바로 부처다, 그래서, 다시 화장했으며, 나온 사리는 부도를 만들어 봉안했는데, 그게 부여 박물관으로 갔다가, 이 무량사에서 계속 항의하자 다시 부도를 이 무량사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 부도가 절 어느 모퉁이에 있는지?
일주문에서 올라와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눈길을 잡은 구도가 있었다. 오층 석탑과 이 층 구조로 보이는 대웅전, 그사이에 커다란 소나무 하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예사로 넘길 구도가 아니었다. 이건 사라밍 만드는 구도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던지는 구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싶어,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사진을 보니, 구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진을 건지기 쉽지 않은데,
구도도, 크기도, 선명하게, 무게감 없이 적절한 사진이었다.
그래, 세상살이, 모든 게 한 번 찍었을 때 이렇게 맘에 들게 나오면 얼마나 좋아?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흘렸던가?
아무튼, 굉장히 맘에 드는 사진을 한 장 얻었다. 절 마당에 들어서서 처마 그림자 귀퉁이에 몸을 묻고 사진을 저장했다.
발치에는 흙으로 된 마당은 정갈하게 빗질이 되어 있는데 그냥 밟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누가 날마다 쓸겠지. 이 절에도 행자가 있는가? 둘러보니 마당 전체가 깨끗하게 빗자루 자국이 선명했다. 깨끗한 흙이어서 더 정갈하게 보였다.
어디든 가서, 절을 찾았는데 입장료가 있으면 바로 발길을 돌리는 인간이 바로 나다.
아, 중생이 부처를 찾는데 왜 입장료를 내야 하나?
정부에서 걷어가는 세금이 붙은 것도 아니고, 내막을 들추어보면 문화라는 명목으로 뭘 설립하는데 들어가는 기금, 거기다가 괴상한 명목의 유지비가 붙는다. 어떤 절은 그렇게 받은 입장료가 입장권을 파는 사람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 절도 더러 있다. 입장료는 절에서 받는 게 아니고 그 지방자치에서 받는데, 마이너스가 나는 경우도 더러 있으므로 시청 문화계에 재임하던 시절에는 관내 입장료를 정하는데 나는 거의 부정의 견해를 보였다. 절에 들어가서 불전함에, 마음에 닿는 대로 시주를 하면 되는 거지, 그걸 왜 입장료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 징수를 해?
그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생각을 내세워 같이 토의하던 공무원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던 품목이니 더 껄끄럽게 여겨지는 입장료였다.
이렇게 인적이 뜸한 절에 들어오면 그 입장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무량사, 이 절도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찾는 사람이 적은데 입장료를 받아서 과연 매표소 직원들 월급이나 될는지? 그런 생각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전직이 사찰 입장료와 관계있는 업무여서 그런가?
산사 마당은 비질이 되어 정갈했는데 비질을 한 행자도 다른 스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 재판은 어떻게 되려나?
또 그쪽 영역으로 생각이 기운다. 틈만 나면 밀려드는 생각, 그걸 떨쳐버리고자 찾은 절인데 또 생각은 나도 모르게 그쪽 영역으로 텀벙 들어섰다. 지난번 재판에서 검사 구형이 징역 삼 년이었다.
삼 년!
변호사가 유능해서 줄여봐야 얼마나 줄이겠는가?
삼 년이면 녀석은 군대 다녀올 시간이다. 물론 이제는 군에 입대할 자격마저 박탈당한 거겠지. 학생 신분으로 그 나이에 군이 아니라 교도소에서 삼 년을 썩으면 나와서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삼 년! 그 금쪽같은 시간, 자신의 생에 초석을 다져야 하는 시간, 삼 년! 삼 년 후면 어머니가 그때까지 사실 수 있을까? 규철이의 아비가 되는 내 동생, 진호는 삼 년간 얼마나 술독에 젖어서 살까? 집안에 왜 이렇게 먹구름이 끼일까?
내 정년과 맞물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집안, 각이 선 기둥이 버티고 선 집안. 집안에 이는 찬바람.
지금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기울어버린 생각에 약간 짜증이 인다.
제 사촌 동생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는가만, 어머니나 나는 규성이에게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고, 규철이 변호를 맡은 놈이 어머니에겐 손자고 내겐 아들이다. 그러나 어머니도 나도 규성이에게 그 문제에 대해 대놓고 물을 만큼 녀석은 가슴을 열지 않았다. 자식이지만, 손자지만, 그런 벽을 지니고 사는 게 우리 가족이다. 남들은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식이 차갑다는 느낌, 내게만 국한된 말인가, 자식이 차갑다?
변호사로 자라기까지 녀석은 늘 모범생이었고, 한 번도 잔소리할 구석이 없었다. 아내는 그걸 자랑으로 여기지만 인간적인 면이 없다는 거, 이건 사람으로서 낙제점인데 아내는 개의치 않는다.
제 사촌 동생이 친 사고에 변호를 맡은 규성이는 차갑다. 뱉어내는 언어가 차갑다. 냉혈 인간, 냉혈 인간이라고 대놓고 얘기했다간, 아내가 들으면, 아내와 또 사이가 더 벌어지겠지만, 규성이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
아비가 제 자식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
말이 되는 소림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아들이지만, 분석하면 녀석의 뼈대는 튼실하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피가 뜨겁지 못하다. 감성이란 게 차가운 녀석이다.
서른둘에 성품이 깔끔한 변호사!
아내가 자랑으로 여기고 중매쟁이가 좋아하는 수식어나 구호겠지만, 그 배면에 지닌 차가움에 치를 떨 정도. 오죽했으면 사고를 친 제 아들 변호를 맡은 놈이 제 조카인데도 동생은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을 규성이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술이 거나하면 어머니에게 와서 푸념만 늘어놓다가 돌아가는 삼촌이 있겠는가?
생각하니 동생, 진호도 못 할 짓이다.
쉰넷의 홀아비!
사십 대에 상처하고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키우는 홀아비, 아들 녀석이 겨우 들어간 지방 따라지 대학에서 강간에 윤간이라는 이름의 사고를 쳤으니, 거기다가 변호를 맡은 놈이 제 조카인데 너무 차갑고 조심스러워 법적인 걸 물어보지도 못하는 형편. 변호사 조카가 없었다면 있는 돈 왕창 들여 유능하다는 변호사를 사도 무방할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카 눈치만 보는 진호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저릿해진다. 동생이 아니라 남이라 해도 동정이 가지 않겠는가.
진호가 취기에 어머니를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마음이 조급하다는 말일 터. 진호는 어머니가 변호사 손자인 규성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치지만, 그런 말을 꺼내기조차 차가운 녀석이다.
피의 뜨거움이 사라진 집?
집안이 뭐가 이러나?
절간 마당은 빗자루 자국이 선명했다. 정갈한 마당을 거닐고 있지만, 마음은 깔끔하지 못했다. 집에는 피의 뜨거움이나 가족 간의 대화에서 오는 온기가 사라졌다. 모든 게 차갑다. 아내의 표정이 차갑고, 부자간의 대화가 차갑다.
누차 이야기했다. 법의 잣대로 세상을 측정하지 말라고. 공무원이 되면 언어가 달라지고 법조인이 되면 정신이 달라진다는 말, 영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마디로 변호사인 아들이 불편하다.
좀 잊으려고 떠나온 길인데, 맘을 달래려고 찾은 절인데 영 혼란스럽고 불편했다. 대웅전을 들러 요사채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가을이 오려는지 하늘은 더 높았다. 마음은 조금도 정화되거나 편하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와 공기업이나 도서관의 경비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건 살아오면서 여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몰랐다.
내일은 주택관리회사에 대표를 만나기로 되었다.
경비원!
경비원이 되기 위해서 주택관리회사 사장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 회사는 내가 사회복지과장으로 재임할 적에 4년간 직접 관리했던 회사다. 그 회사 사장이란 작자가 정년을 한 걸 어떻게 알고 한 달 전쯤 찾아왔다. 그가 처음 찾아왔을 때는, 아직은 전관예우가 먹일 기간이니 무슨 부탁을 할 게 있어 찾아왔나?
그것부터 헤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무원이 되어 40년을 공직에 있었으니 누가 찾아오면 무슨 부탁을 하러 왔나? 그것부터 생각하는 게 몸과 정신, 태도에 배었다. 지금 생각하니 인간으로서 참 몹쓸 방어막이고 몸사림인데 나는 그 버릇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너 번 만나서 간단하게 소주를 한 잔 기울이며 파악한 그의 뜻은 제 회사에 경비 자리를 주겠다는 것, 거기서 올라가면 경비대장 자리를 넘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오면서 경비대장 자리를 차고앉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처음에는 시답잖게 생각했으니 출근할 곳이 없는 실정으로 서너 달이 지나니 생각이 살짝 달라졌다.
시청, 감사담당관실에 책임만 가득한 책상을 물려주고 출근을 하지 않으니 처음에는 좋았다. 이렇게 편한 세상이 있다니, 편함을 탐미했다. 돌아올 책임도 눈치도 없는 이런 세상이 다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까,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날 책상을 물려준 최 국장, 최 국장은 입사 동기지만 건설 국장 자리에서 퇴임했다. 감사담당관이지만 나는 과장의 직급으로 정년을 맞았고, 국장으로 정년 퇴임하면 국장으로 정년 퇴임한 인간들과만 어울린다고 했는데, 최 국장은 아니었다. 최 국장과는 동기라 만만했고 재임 시절에도 유독 살갑게 지낸 사이다. 특별히 정이 가는 인간, 그가 불러내서 강변 둔덕에 새로 조성한 파크골프를 권해서 새벽 운동을 몇 번 다녔는데, 골프는 운동이 아니었다. 최 국장은 재미를 붙인 모양이지만, 내겐 운동도 아니고 재미도 없고 관심에서 영 시들했다.
최 국장이 불러내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으니 이젠 전화도 오지 않는다. 파크골프 대신, 매일 산을 탔다. 아침을 먹고 물 한 병과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집 뒤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체육공원을 조성해 둔 곳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솔길로 이어지는 산을 서너 개 타고 오면 한나절이 쉽게 간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무원 시절에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자주 지나치며 인사를 하니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생겼고,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좋았다. 그들과 나누는 얘기도 즐거웠지만,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기분, 뭘 유기하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한다.
나보다 육 개월 전에 공로 연수에 들어간, 읍장에서 정년을 맞은 박은 요즘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다고 했다. 태생이 뼈가 실한 박은 읍장이라는 지위나 체면은 있을 자리에 지키는 물건이고 퇴임하면 0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막노동이라도 일이 있으면 0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매일 나가는데 이젠, 어느 정도 숙달이 되어 어지간한 건 다른 사람에게 시킬 줄도 안다고 했다. 박 읍장은 돈이 절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일이 좋다고 했다. 슬하에 딸 하나가 있는데 시집을 잘 가서 서울의 큰 부잣집이라 알고 있는데 궁하면 거기서 가만히 있을 형편이 아니다. 그리고 매달 연금이 나오는데 그걸 다 못 쓸 형편인데 막노동을 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몸 생각하면 일하라고 초를 쳤더니 화를 벌컥 내며, 씹던 장어구이가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큰소리의 일갈에 깜짝 놀랐다,
일이 사람을 만든다.
그게 박 읍장의 지론.
일이 사람을 만든다?
그 말을 부정할 구실을 찾지 못하고 나도 지금은 일을 구하는 실정이 아닌가.
경비원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보니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난다.
경비원 자리는 아파트나 주거 공간보다 관공서나 공공기관을 선호한다는 어느 경비원의 충고, 그런 걸 생각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는데, 막상 다가서려니 드러나는 난처함. 아파트 경비원은 아니꼽고 더럽다고 했다. 온 동네 아줌마들이 경비원을 제 종으로 생각한다는 말,
그 말이 은근히 가슴을 찌른다.
젊은 새댁이 들고 오는 장바구니를 냉큼 받아주지 않으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눈총을 준다는 말. 요즘 젊은 새댁들이 지닌 싸가지에 대한 푸념. 안하무인의 싸늘한 눈빛, 과연 감당할 수 있을는지. 입주자 중에서, 특히나 젊은 새댁을 향한 내 허리 각도는 유연성을 지녔겠는가, 인사가 부실하면 그것도 트집을 잡는다고 들었는데.
경비원.
막상 일을 시작하면 아내나 어머니는 펄쩍 뛰겠지만, 냉혈 인간, 아들이라는 놈은 들어오는 현금의 수치와 노동의 질 그리고 환갑이 넘은 육체에 미치는 장단점까지 면밀하게 분석하겠지. 속셈이 철저한 놈.
또 규성이 생각이다.
규성이라는 놈, 각이 무딘 인간의 언어는 잊어버리고 모서리가 예리한 법률용어만 익힌 놈. 제 사촌 동생 변호를 무임으로 했다고 평생 규철이 발목을 잡을 테지. 규철이뿐이 아니라 제 삼촌, 진호까지 제 수하에 넣겠다는 싸늘한 함수의 공식을 구사할 수도 있고. 거기다가 한 수를 더해서 아내는 홀아비 시동생을 더 업신여길 것이고,
복잡해진 가계, 생각하니 복잡하다.
불편한 심기 벗어두고 싶어진다.
무량사는 툇마루가 편안했다. 법당에서 나와 툇마루에 한참을 걸터앉아 절 마당을 살피고 있었다. 봄은 제 그림자를 데리고 탑 안을 기웃거리고.
요즘 아파트에는 아줌마는 없고 전부가 사모님이라는데,
또 생각이 기운다.
견딜 수가 있을까?
수감 중인 규철이라는 놈,
인사성이 바르고 심성이 따뜻한 놈이었는데, 몇 년 형이 도사리고 있을까?
아내 모르게 지난달 얼마를 진호 계좌로 넣어주고 합의금에 보태라고 했는데,
합의는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혹 진호가 술값으로 탕진하진 않았는지.
아들이 그 지경인데 잠이 오겠는가, 진호가 잠을 설쳤다면 얼마나 설치는지.
무량함 속에서 무량함을 벗는다. 아니, 무량사 툇마루에서 나는 무량함 속으로 깃든다.
올라올 적에 일주문 앞, 마트에서 캔 커피를 건네준 마트 아줌마, 마트를 지키는 아줌마가 아니라 어느 대학의 저명한 노교수님 같은 자태. 흰머리가 정갈하며 곱게 보였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뒤로 벌렁 몸을 누인다.
툇마루가 정갈했다.
무량사 툇마루에서 무량함으로 빠져든다.
규철이 놈과 마트 아주머니 자태가 눈에 어른거린다.
딸이 당한 그런 일에 부모가 얼마를 받아야 합의가 되는지, 얼마를 건네줘야 심리적 보상이 되는지, 그걸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지.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정말 옴니버스였을까? 주제가 일관성이 없어 주인공을 이리저리 바꾼 게 아닐까.
무량함 속으로 깃들어 무량함을 더듬는다.
무량사 툇마루에 누워.
봄이 절 마당에 온전히 깃들고 몸이 툇마루, 나무의 목질 속으로 노곤하게 내려앉으며 깃든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선명해진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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