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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 나 이런 사람이야! (아1:1-5)
예전엔 화장은 여자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요즘엔 남자들도 화장을 꽤나 공들여 한다고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형수술 그러면 여자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남자들도 꽤 많이들 한다고 합니다.
예뻐지고 잘 보이고 싶어 그러는 걸 누가 말리겠습니까마는 예뻐지는 거야 좋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중해야 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갔는데 원판과 다른 얼굴을 보신 하나님이 “넌 누구냐?”라고 하신다면 그땐 좀 심각해집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무릇 성도라면 얼굴이나 외모가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아가서를 통해 성도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배워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복된 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아가서는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남녀의 에로스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한때는 ‘과연 성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과 함께 ‘정경으로 인정한다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포함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게 하기위해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가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징을 기억하고 읽어야만 아가서가 주는 교훈과 그로 인한 믿음을 나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은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였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포도원 농사를 짓다 보니 얼굴과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당당한 삶을 살다가 끝내는 그 당당함에 반한 솔로몬 왕의 신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술람미 여인의 이런 ‘당당한 자존감!’
여기서 우린 성도에게 있어야 할 ‘당당한 믿음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되도 않는 허세도 경계해야 하지만 툭 하면 주눅부터 드는 것도 올바른 믿음의 자세는 아닙니다.
교회 오래 다닌 것이 허세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 생활이 서툴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소위 출세하고 성공한 것이 허세 부릴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지금 하는 일들이 어렵고 잘 안 풀린다는 이유로 주눅 들어서도 안 됩니다. 잘 믿으려 한다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서 ‘믿음만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라면 매사에 ‘믿음의 자부심’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5절을 보시면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시의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도시 아가씨들답게 살결이 하얗고 피부가 고왔습니다. 그런 여인들에 비해 농사일로 햇볕에 그을리고 흙먼지에 피부가 터버린 술람미 여인의 외모는 보통의 경우라면 스스로가 먼저 주눅 들고 움츠러들었을 수도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고. 또한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도다.”라고 하며 도시 여인들보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뭐든지 엇비슷해야 우열을 가려 볼 텐데, 게달의 장막이란 염소 털로 짜서 만든 초라하고 시꺼먼 천막인 반면에 솔로몬의 휘장은 청색, 홍색, 자색, 금색, 은색 실로 수놓은 화려한 커튼이었기에 이 둘은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의 고백을 보면 겉으로 보기엔 초라한 장막 같을지라도 실상은 내가 솔로몬의 휘장 같은 존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대단한 자존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성소 구조를 살펴보자면 성소의 덮개들은 여러 층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중 밖에서 보이는 외부 덮개는 볼품없이 거무죽죽한 수달의 가죽입니다. 그리고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화려해지다가 성소와 지성소 안에서만 보이는 가장 안쪽 휘장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전의 진정한 가치를 밖에서 볼 때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겉에서만 보고 성전을 무시했다가는 그 안에 가득한 축복은 구경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외모나 세상적인 조건 또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세속적으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었음에도 술람미 여인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것!’ 여기서 믿음의 자존감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밖으로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다 보면 결국엔 둘 중 하나이게 됩니다. 허세를 부리거나 주눅 들게 됩니다.
성도는 범사에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답다는 것은 지금, 현재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그것을 자랑하는 당당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믿으려고 하신다면 믿음 이외의 그 어떤 ‘내 생각’에도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생각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심장내과 전문의 레빈 박사가 한 여인을 진찰하던 중에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자 학생들에게 “집중해. 이 환자는 T.S.야.”라고 했고 이에 학생들이 저마다 청진기를 대어 보며 “T.S.래.” “T.S. 환자야.”라며 수군거렸습니다.
얼마 후에 레빈 박사가 돌아와 진료를 마무리하고는 여인을 돌려보냈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이 여인이 심장이 극도로 쇠약해져 박동이 멎기 직전인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왔답니다.
급박한 응급 처치 후에 사연을 듣고 보니 낮에 학생들이 “T.S래! T.S.”라며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여인은 T.S.가 뭘까를 고민하다가 ‘Terminal Situation’ 즉 ‘마지막 상태’의 약자일 거로 추측하게 되었고 자기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심장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T.S.란 과연 어떤 병일까요?
T.S.는 ‘Tricuspid Stenosis’의 약자로 ‘우심실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의학 용어였던 것입니다.
심장은 좌심실과 우심실로 나뉘어 있는데 피를 뿜어내는 일은 좌심실이 담당했기에 일반적으로 심장에 이상 증상이 생겼다고 하면 대부분 좌심실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심실 이상 증상은 생명을 위협하는 병도 아닐뿐더러 극히 드물게 보여지는 증상인지라 교수로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주의 깊게 살펴보라 했던 것을 여인은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정상적인 심장 박동은 ‘쿵 탁 쿵 탁’하고 소리가 나는데, ‘쿵’을 ‘제 1심음’이라 하고 ‘탁’ 소리를 ‘제 2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추기 직전이 되면 ‘쿵 탁’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이를 제 3심음이라고 한답니다.
한번은 레빈 박사가 회진 중에 어느 노인의 심장에서 제 3 심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3심음을 듣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험이겠기에 역시나 교육을 위해 학생들을 불러 심장 소리를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청진기를 노인의 심장에 대어 본 학생들은 모두가 신기한 듯 ‘잘 들립니다. 아주 뚜렷하게 잘 들려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가족들은 전전긍긍하며 노인의 임종을 기다렸는데 제 3심음의 상태를 봐서는 시간상으론 벌써 하늘나라에 가셨어야 했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인은 눈이 말똥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지더니 일주일 만에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에 박사가 묻기를 “심장이 이렇게까지 좋아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의사 선생이 지난번 아침 회진 때 학생들까지 모두 놓고 내 심장 소리가 잘 들린다며 기뻐하지 않았소? 그러니 좋아지는 게 당연하지요.”라고 하더랍니다. 노인은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학생들이 “제 3심음이 잘 들립니다. 잘 들려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자기 심장 상태가 좋아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심장이 에너지를 얻어 힘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이상의 두 경우에서 보듯이 ‘생각이 믿음과 만나자’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이 중요한 거고, 그 생각을 믿는 게 중요한 겁니다.
생각에서의 근심과 걱정은 스스로에 대한 저주입니다.
절망과 포기를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무책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만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과 소망만이, 그리고 기도와 기대만이 스스로에 대한 축복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린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따라서 당장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간에 우리의 생각 속에 ‘세상적인 생각’ 내지는 ‘내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믿음의 싸움’입니다.
누구든 생각 속에서의 이런 믿음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현실적인 삶 속에서 소망도 있고 기회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우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섭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하신다고 하니 무슨 일이든 잘못될 일이 없고, 설사 잘 안 되는 일 같아도 결국엔 다 합력하여 선이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행여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실한 믿음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고난과 질병과 걱정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들의 현상만 보지 말고 그것들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보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엔 지금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심지어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이렇게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곧 축복받을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세상 것들이나 세상 조건과 환경들 때문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실패와 고난일지라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내게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필요할 때 내게서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당당하시길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주눅이 드는 이유로 콤플렉스를 들기도 합니다.
‘콤플렉스’라고 하면 ‘자기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뒤떨어졌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특히 경계해야 할 것 중엔 ‘메뚜기 콤플렉스’와 ‘난쟁이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메뚜기 콤플렉스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의 덩치와 외세만 보고 싸워보지도 않고 졌다고, 포기하자고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난쟁이 콤플렉스는 골리앗 앞에선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해야겠다고 했던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시지요? 메뚜기 콤플렉스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앞에서 사라졌고, 난쟁이 콤플렉스는 다윗의 믿음 앞에서 해결됐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뭡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주눅 드는 이유는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우리 생각 속에서 ‘나는 안 돼’ ‘나는 못 해’라는 콤플렉스가 작동하기 때문인데, 그때 이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해결할 유일한 열쇠는 오직 믿음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세요. 메뚜기 콤플렉스를 이긴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난쟁이 콤플렉스를 해결한 다윗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요?
“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곧 “나는 하나님과 함께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본문 5절의 말씀을 되짚어 보자면 술람미 여인은 스스로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선포에서 우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와 ‘나는 하나님과 함께한다.’라고 하는, 즉 메뚜기 콤플렉스와 난쟁이 콤플렉스를 모두 이긴 두 믿음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을 그렇게 세상을 향해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의 당당함’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술람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네 안에 내가 있다.”라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매사에 당당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는 나의 모든 행사가 다 결국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나요? 타자라는 영화에서 유명했던 대사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이 있었듯이 우린 세상을 향해 ‘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야.’라는 자존감을 선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유행가 가사를 보니 세상을 향해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게 있던데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즉 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 믿음을 본문의 술람미 여인에게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믿는다고 해도 살다 보면 때론 가난해질 때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으며, 심하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듯한 순간을 맞닥뜨리게도 되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자존감’ 하나만은 놓지 말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자존감을 높여야 세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세상에서 기뻐할 날이 빨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만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믿음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세상 것 다 잃어도 믿음만은 잃지 마셔야 합니다.
이 일을 우리 모두가 이젠 해내야 합니다. 범사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나도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끝내는 세상을 향해 나 이런 사람인 것을 보여 주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복음성가 가사처럼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며,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며, 사랑의 빛 잃어가면 주님 만날 수 없음을 알고.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단 것을 알아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는 생각으로 여러분 각자가 믿음의 당당함을 회복해서 그 믿음으로 사셔서 여러분 모두가 아직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나를 위해 예비 된 하나님이 주시는 금보다 더 귀한 은혜와 복의 주인공들이 되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