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쇼팽이라는 천재가 유럽의 변방 폴란드에서 나타났을 때 폴란드인들은 어린 천재를 경외하며 아꼈다. 그리고 학업을 마친 그가 더 큰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들은 그가 유럽의 더 큰 무대에서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러한 바램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쇼팽은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주위의 바램을 자기 생각인 양 품었다.
쇼팽, 고트프리트 엥겔만(Gottfried Engelmann). 1833년. 석판화. 바르샤바 쇼팽 기념관 소장. 쇼팽은 파리 정착 후 그려진 이 초상화를 좋아해 복사본을 바르샤바의 엘스너에게 보냈다.
결정의 시기가 다가오자 쇼팽은 두려워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상류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으며 마치 그렇게 타고난 사람처럼 세련되고 유연한 매너로 그 리그의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환영과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천성은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쪽이었다.
몇몇 소수의 친구는 끝까지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하지만 소심함, 새로운 사람이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신 등이 그를 둘러싼 장벽을 만들었고, 좀처럼 새로운 사람이 그의 부드러운 매너가 작용하는 경계를 넘어 다가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늘 그러한 것처럼 쇼팽도 집, 가족, 친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만 했을 때 몹시 주저했다.
1829년 음악원 졸업시험을 마치고 쇼팽은 친구들과 함께 빈을 여행했다. 빈에서 그는 출판사와 중요한 음악계 인사를 만났고 그곳의 가장 유명한 극장에서 두 번의 연주회를 열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도시 빈은 그의 피아노 연주와 곡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해 주었고 비평가들은 찬가를 늘어놓았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자신감을 가지고 집을 떠나도 될 듯했다. 자신감을 얻고서 바르샤바로 돌아온 그는 그해 겨울이 오면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음악 공연시즌은 날씨가 선선해지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겨울까지는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출발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려 작곡에 몰두하여 이듬해 초 피아노 협주곡 f 단조를 완성했다. (이 곡은 본 시리즈 7편에 소개된 e 단조 협주곡보다 먼저 작곡되었으나 출판이 늦어져 2번 협주곡이 되었다) 몇몇 가까운 친지를 초대하여 집에서 선보인 이 곡에 대한 소문은 금방 퍼져 신문에 평론까지 실렸다.
음악계 인사들은 공개 연주회를 가지라고 빗발치듯 요청하였다. 이 때문에 열린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의 연주회는 사실상 쇼팽의 첫 상업적인 연주회였다. 2번의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다시 떠나야 하는 결정의 문제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베를린으로 가길 원했다. 하지만 엘스너는 빈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궁극적으로는 파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으로 갈 것인가 빈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은 듯했다.
오늘날의 폴란드 국립극장.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초연된 곳.
어렵게 출발 시기를 다시 1830년 여름으로 잡았다. 하지만 5월이 되자 그는 또 주저했다. 성공을 경험했던 빈으로 방향은 정했지만 동급생 미녀 가수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에게 빠져 출발을 미루었다. (본 시리즈 7편 참조) 그러나 실상은 그의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한 복잡한 생각과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이 더 큰 원인일 수도 있었다. 빈의 오페라 시즌은 9월에 시작한다는 것을 핑계로 출발을 다시 미루고 여름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그가 절친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속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는 여전히 출발 일자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앉아있어. 바르샤바를 한 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떠나질 않아. 나의 집에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거야. 자기가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은 얼마나 슬플까?”
생각의 복잡함이 최고조에 있을 때 첫사랑에 대한 사랑의 열정도 최고조에 올랐다. 현안의 골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 e 단조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곡은 곧 완성되었고 초연은 공개 연주회를 통해 갖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이 또 한 번의 국립극장에서의 연주회는 바르샤바에 대한 고별 연주회가 될 것이었다.
10월 초에 계획된 연주회가 끝나면 곧 떠날 거라고 굳게 결심했고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것을 주위에 알렸다. 사랑의 감정을 숨긴 채 용기를 내서 콘스탄챠를 고별 연주회에 솔리스트로 초빙했다. 그의 고별 연주회는 대 성공적이었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를 보려고 많은 관객이 몰렸고 박수갈채는 컸다. 복잡한 심경의 쇼팽에게 고별 무대에 선 콘스탄챠는 더 매력적이었다.
1829년 겨울→1830년 여름→1830년 가을, 자꾸만 출발은 미뤄졌는데 언제까지 이룰 수만은 없었다. 연주회를 마치고, 떠나려는 결심이 실행되도록 하기 위해 미리 여행용 가방을 샀고 새 옷에 코트도 장만했고 출판에 대비해서 그가 쓴 곡의 악보도 점검하고 챙겼다. 콘스탄챠와 만나 반지와 리본을 주고받았다.
(위) 바르샤바 웨셀 궁의 옛 모습. 쇼팽 시절 우체국이 있었고 그 앞은 장거리 마차역이었다. (아래) 바르샤바 웨셀 궁의 현재 모습. 자동차가 서 있는 곳이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는 마차에 오른 곳이다.
1830년 11월 2일 마침내 출발의 날이 왔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우체국 앞에 장거리 마차가 떠나는 역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환송하러 나왔다. 음악 선생 엘스너와 친구들은 쇼팽의 생가가 있는 젤라조바 볼라까지 그를 따라왔다. 지금이야 차로 한 시간 내에 주파가 가능하지만 당시의 도로와 이동 수단의 사정을 고려하면 바르샤바에서 젤라조바 볼라까지는 3시간 이상 걸렸을 것인데 이것은 대단한 정성이었다.
젤라조바 볼라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바르샤바 음악원 후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스너는 떠나는 쇼팽을 위해 특별한 칸타타를 작곡했는데 그 곡이 후배 학생들에 의해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친구들이 어딜 가나 조국을 잊지 말라며 폴란드의 흙이 가득 담긴 은잔을 쇼팽에게 전달했다.
작은 마을에 주민과 바르샤바에서 온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쇼팽이 탄 마차가 떠날 때 모두 손을 흔들었다. 보내는 사람들보다 창밖으로 그들을 내다보는 쇼팽의 마음이 더 무거웠다.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를 이처럼 거창하고 비장하게 보내는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별 방식도 그 사람의 성격에 따르는 모양이다. 사람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과의 이별도 쉽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바르샤바로 왔고 한번 온 다음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반대 행로를 밟았다. 그의 불길한 예감대로 그는 다시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의 남은 삶이 폴란드에서 산 기간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젤라조바 볼라의 쇼팽 생가. 허름한 농가를 단장하여 지금은 쇼팽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몰려나와서 먼 길을 동행하는 것, 음악원 학생들이 먼 곳까지 미리 이동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 스승이 그만을 위해 곡을 만든 것, 태어난 곳에서 그 곡을 합창하는 것, 조국의 흙을 채운 은잔을 선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특별했다. 결사대의 일원으로 목숨을 건 임무 수행이라도 떠나는가? 성격상 쇼팽은 그렇다고 쳐도 그의 친구들은 왜 그렇게 유난스러운 이별의 의식을 치렀을까?
보통 유럽에서 국경을 통과해서 이동하는 것은 자유롭다. 물론 당시 유럽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어수선하여 외국인의 왕래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러시아의 압제 아래 있던 폴란드인들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외에는 왕래할 수 없었는데 그것도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도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쇼팽이 느꼈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그 불길한 예감을 그를 떠나보는 친구들이 초월적 통로를 통해 공감하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운명처럼 그가 떠나자마자 바르샤바에는 전쟁과 살육의 소용돌이가 밀려왔고 국경의 벽은 더 높아졌다.
쇼팽의 연습곡 작품번호 10-3은 ‘이별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곡 중에 가장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인 이 곡에는 바르샤바를 떠나는 그의 무거운 마음, 첫사랑을 남기고 가야 하는 심정이 담겨있다. 그 곡에 대하여 쇼팽은 “이처럼 아름다운 곡은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곡은 느리게 착잡한 마음을 열며 시작한다. 얼마 동안 헤어짐의 슬픔을 이어가던 중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복잡하고 어두운 생각도 불현듯 든다. 하지만 마음을 잡고 조용히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긴다.
첫댓글 문화의 향기
예술의 넉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