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잡은 자들이(2)
마 26:57-68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마 26:57-68 / [의회 앞에 서시다;막14:53-65,눅22:54 이하,요한18:13-24] 그들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58) 한편 멀찍이 뒤를 따라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가 예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군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었다. 59) 대제사장들과 모든 의회원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60) 많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제각각이어서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61) `이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예수께 물었다. `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하였는가? 아니면 하지 않았는가?'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침묵만 지키셨다. 그때 대제사장이 예수께 다시 물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6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장차 너희는 ㄱ)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ㄱ. 시 110:1,단 7:13) 65) 이 말을 듣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자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모두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소? 66)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사람들은 `사형이오! 사형이오! 사형이오!' 하고 아우성을 쳤다. 67)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렸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서 68) `알아맞혀 보시지, 그리스도 양반. 당신을 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조롱하였다.
베드로의 통곡
마 26:69-75 / 최종천목사(분당중앙교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의 심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에이는 듯한 안타까움과 회한과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나라와 그 교회와 그 백성을 생각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는 기쁨도 있겠지만 혹은 삶에 있어서 베드로처럼 후회하며 눈물 흘리고 그러지 말아야하는데 하는 가슴의 아픔을 느낀 적이 계십니까?
내가 주님을 위한 수고와 헌신에 빠졌었는데 나는 비겁하게도 참여하지 않았어 하고 자신을 비하한 적은 없습니까?
그냥 숨죽이고 있으면 되는데 괜히 내 감정에 빠져서 주님께 대한 헌신이니 기여니 공헌이니 해서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하고 고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서 주님의 원하심과 부르심에 외면했고 그저 돌아서 있다가 뒤 늦게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하고 후회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오늘 빌라도의 뜰까지 따라갔던 베드로가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한 작은 계집아이 여종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고 베드로를 사람들에게 고발할 때 베드로가 황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여 맹세하여 부인한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삶의 추락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목숨하나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나 처절하게 추락하는 삶의 모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새벽닭이 울 때 눈물 흘리며 그 자신의 아펐던 모습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가슴아파 통곡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베드로의 통곡을 통해서 우리 삶에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하는 것은 왜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하여 부인하고 저주하여 맹세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는가하는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어쨌던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지 내가 결정하고 행동한 것에 대하여 감격과 감사가 있든지 혹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있든지 책임과 대가가 결과로 주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대가로 그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가책을 느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의 모습을 돌아보니 그는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슴 아파하며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책 섞인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회한에 빠지게 됩니다. 왜 이렇게 가슴아파하는 베드로인데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순식간에 사람들 가운데 몰려서 두려움에 휩싸여졌던 것입니다. 담대하고 용기있고 혈기조차 방장했던 베드로도 영적으로 나약해지니 두려움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웅입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암흑의 아합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쳐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곧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암살 위협 한 마디에 그 기개는 다 사라져 버리고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쫓기는 짐승처럼 도망의 삶을 진행합니다. 그것도 지치고 지치니 로뎀 나무 밑을 찾아 하나님 앞에 차라리 피곤하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나약한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어느 날 예기치 못했던 두려운 감정이 그의 가슴을 휩싸게 될 때 이런 나약한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가 이와 같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의 영적인 충만 상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그는 영적으로 저하되었던 상태에서 두려움의 감정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충만은 우리를 자신 있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자신있게 나아가게 됩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담대하게 나갔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았을 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쇠락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충만과 쇠락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성과 본성이 드러나 죄악의 탐욕과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모세는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했을 때 바로 앞에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영적으로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실 때 바로 앞에 나아가 내 백성을 보내라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면 어떤 상태의 여건 속에서도 내게 주신 능력과 은혜로 담대히 해결하리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두려움이 우리를 휩싸게 될 때 베드로처럼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서 상황을 실제 이상으로 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사단은 철창 안에 갇힌 맹수일 뿐입니다. 그의 허상은 위협적인 모습일 뿐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를 결정할 권한, 우리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실 뿐입니다. 사단은 위협할 뿐이지 우리를 가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를 위협하므로 말미암아 협박하여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추락시킬 전략을 가질지언정 사단은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이럴 때 있지요. 어떤 사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 말이 참 크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목소리가 큰 것이 아니라 표현을 크게 한다거나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서 이야기 하는 거죠. 말이 세다. 말을 크게 한다. 아이들 같으면 뻥이 세다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이 큰 사람을 별로 믿지 않아요. 보통 말이 큰 사람은 상황을 부풀려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실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에 빠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있는 상대, 내 앞에 있는 장벽이 커 보이면 다시 한 번 살펴봐야합니다. 진짜인가, 허상인가.
대부분의 경우는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체를 다시 한 번 파악하는 실제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두려운 마음을 주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은혜로 주의 역사를 기대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 했을까요?
비굴한 삶이라도 목숨 부지하고 살아 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생관이 분명하지 못하면 순간순간 이와 같은 굴절을 겪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단지 우리 영혼이 이 세상에 거하다가 하나님나라로 이적하는 단순한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우리를 부르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 일 하다 주님 부르시면 감사함으로 그 나라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비굴한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분명한 명분과 확신 그리고 삶에 자신감이 있을 때 우리는 비굴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려운 순간을 활용하여 오히려 인간을 용서하시는 십자가 대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가장 처참한 상태에서 최고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하나님의 가장 큰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따라서 어려움을 통하여 주의 능력과 영광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악하고 죄 된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비굴한 삶에 대한 미련과 주님께 대한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 왕이 주는 신상의 제물을 먹지 않습니다. 그는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의연히 살되 그에게 어려움이 오면 순연히 어려움을 받으리라 각오했을 뿐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져도 그의 세 친구가 풀무에 던져져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라는 사람 알죠. 예루살렘 성곽을 수축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이제 예루살렘 성곽이 수축될 때 그 수문 앞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를 청빙해서 율법을 낭독하게 되죠. 백성들이 모두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을 회복하고 그들은 절기를 회복하고 은혜를 회복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과정 가운데 보통 어려움이 있지 않았죠. 이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아주 끈질겨요. 이 사단의 역사는 너무너무 끈질기고 아주 저주스러울 만큼 지겨운 거죠.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이 뭐냐 하면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통한 계책입니다. 이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돈으로 매수합니다. 이 느헤미야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잖아요. 스마야가 두문불출하니까 그 집을 찾아갑니다.
“선지자여, 어찌하여 외곽 출입을 하지 않습니까, 몸이 불편하십니까, 아니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계십니까?”하고 찾아갔죠.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 하냐면 “느헤미야야 네가 만약 성전 외소로 들어가서 거기 숨어있지 않으면 너는 사람들에게 암살당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성전 외소로 들어가 네 몸을 피하고 생명을 부지하라.”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에게는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어요.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레위족속도 아니었고 성전 외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이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총독이라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율법을 어기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성정 외소에 들어가면 하나님께 죽을 것이고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면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의 손에 암살된다고 하니 고민에 빠지게 되겠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는 마음에 결심합니다.
“스마야 선지자여 저는 결정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하나님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가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손에 구조를 받되 사람의 손에 암살되어 죽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하나님 앞에 죽느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차라리 사람 손에 죽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님의 손에 범죄하여 죽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사람 손에 죽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떳떳한 길이라고 그는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이 계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악하고 죄 된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비굴한 삶에 대한 미련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 때 죽음을 선택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비굴한 삶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를 살리고 오히려 승리하는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훈련되지 않은 죄의 요소들이 자기도 모르게 순식간에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들었던 거예요.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어린 계집아이 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너 예수님 따라 다녔지. 너 예수님의 제자지.”할 때 고민하다가 내가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럴까 저럴까 고민 끝에 대답한 것이 아니었어요. 너 예수님 따라 다녔지. 이 한마디에 그는 즉각적으로 나는 예수님 몰라요. 내가 맹세하건데 예수님 몰라요. 거기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반사적으로 거짓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냥두면 우리의 죄성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기상황에 대한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끊임없는 반복적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변화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착각해요. 그런데 변화는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변화의 방향전환일 뿐입니다.
늘 말씀드리죠.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정서적 설득과 반복적 훈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균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을 들었어요. 마음에 감동을 받았어요. 맞아. 내가 정말 죄인이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내가 주께 헌신해야지. 마음에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나 오늘 은혜 받았어. 오늘 말씀 듣고 은혜가 돼요 하면서 마음에 감동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정서적 설득입니다. 내 정서가 설득됐다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죠. 이웃을 사랑하라.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정말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옆에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란 말이죠. 이 정서적 설득과 우리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삶의 행동을 이어주는 다리가 뭡니까? 바로 반복적인 훈련이에요. 안 되는 것을 한 번 해보고 또 한 번 해보고 제가 늘 말씀드리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억지로 숨기고 가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늘 하다 보니까 의식이 안 될 정도로 당연한 거예요.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구별이 안될 만큼 나는 이미 선한 일을 늘 행하고 있어요.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대폭적으로 진보하라는 뜻이죠. 그래요. 우리는 한 번, 한 번 또 한 번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하다보면 그것이 내 습관으로 당연시 되는 거죠. 그 구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첫째는 사고의 승복이에요. 그 다음은 말의 훈련입니다. 그 다음은 실제 상황의 시범이에요. 실수 속에 진보하며 복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전적 경험의 체험들이 축적되어서 그 행동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거죠. 이것이 변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툭하고 찌르면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죄악의 요소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툭하고 찌르면 늘 하던 선한일이 튀어나와야 돼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해요. 내가 실수로 말했다. 그런데 실수가 진실이에요. 여러분 실수가 실력이에요. ‘나 말 잘 못해서...’ 말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심중에 있는 말이 튀어나온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도록 우리가 내부적으로 훈련이 돼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와 같이 베드로처럼 한순간에 몰리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가 없어지는 거죠.
우리 대부분 후회하는 경우 어떻게 후회하죠? 깊이 생각해보면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서 그 결과에 후회하는 경우보다는 우리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순간적으로 결정하는데 내가 너무 빨리 결정해서 내가 실수한 거야. 이건 말이 아니에요. 너무 빨리 결정한 것이 그의 평상적인 생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은 은혜의 훈련들을 이루어야합니다.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입력된 대로 출력이 돼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생각한대로 움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생각한대로 말하게 돼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늘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새로운 죄악의 심성의 공격을 대비하여 우리는 순간순간 대처할 방법을 찾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움을 간구해야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 그리고 당시의 승리자를 역사의 승자로만 판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었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을 결국은 승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고 술수를 써서 권력을 잡고 승리를 이루었다고해서 역사는 그를 승자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 승리한 것 같아도 권모술수의 강한 지략가로 권모술수에 강한 모략가로 쓰여질지는 몰라도 역사의 승자로 쓰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의 부족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내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갈고 닦여져 어느 순간이든지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주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영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금 더 이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왜 통곡을 했을까요? 닭이 울 때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베드로는 네가 닭 울 때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죠. 그래,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주님 앞에 뭐라고 얘기했지. 다른 사람은 다 그럴지 몰라도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나는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 말이 맞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이 맞지 않았는가. 그는 이 단 한 마디 때문에 그는 통곡한 것만은 아니에요.
‘내가 주님의 뜻과 다른 생각을 했고 내가 주님의 뜻과 다르게 움직여졌어. 주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주님이 이전부터 했던 모든 말씀도 다 맞을 것이 아닌가!’
그는 이 마음으로 그는 슬펐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순간의 현실이 마치 꿈처럼 여겨졌을 거예요. 마치 꿈꾸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내가 정말 이렇게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내가 왜 꿈꾸듯이 그 순간에 내가 그렇게 했을까라고 생각하며 뭔가 씌운 것 같은 마음의 혼돈함이 있었을 거예요. 퍼뜩 정신 들면 ‘이게 아닌데’ 다시 몽롱해지면 죄악의 상태에 빠져서 죄악의 향기 속에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믿음 가진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 가지고 주님 앞에 범죄할 수 있겠습니까? 뭔가 몽롱한 상태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죄악의 향기에 빠져 그 가운데 빠져 가고 있는 거죠.
전에 제가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목사님이 늘 그런 얘기하셨어요. 성도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그 사람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성도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우리는 더 이상 성도가 아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어떤 악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겸비하게 주께서 우리에게 함께하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한시도 놓지 마시고 지켜주시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과신했던 베드로, 다른 사람은 어찌할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예요. 차라리 베드로가 주님, 주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내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주님 앞에 간구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봤다면 베드로는 오히려 이와 같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할 때가 있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속에 방치해 두시는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계획대로 이루어지니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베드로는 마음속에 혼돈스러웠을 것입니다. 나의 부정직, 나의 비굴함, 나의 이와 같은 미욱한 삶의 연장에 대한 회의와 부끄러움에 그는 진저리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너무 부끄러웠던 거예요. 베드로는 로마병장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그는 칼을 휘둘렀던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뜻을 몰라서 경거망동했지만 대단한 용기를 가졌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군병들 앞에서도 대단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막상 붙잡혀서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도 죽을까봐 이와 같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슬펐던 게지요. 사람의 자존감은 생사여부를 능가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자존감이 상실되었을 때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져요. 사람의 정신세계에 자존감이 붕괴되면 그 사람은 이미 폐인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혀끝에 느껴지고 감각적인 쾌락이 우리 표피에 느껴져도 그것만 가지고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영적인 자존감이 있어야 그는 호흡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에게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어요. 아직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해의 계산만 가지고는 살지 못해요. 때로는 의를 위해서 손해도 보고 악을 분쇄하기 위하여 상처도 받고 그것을 위해서 애썼다는 그의 마음에 자긍심이 그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적으로 따지면 베드로는 손익계산에서 유익을 얻었을 수 있어요. 살기 위해서 거짓말 했는데 베드로는 거기서 살아났어요.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잠깐 지난 후에 그것은 그에게 유익이 아니라 평생 그의 가슴을 후벼 패는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당장 승리한 사람을 승자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를 위해서 애쓰고 바동댔던 사람, 주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우리는 늘 말씀드리지만 베드로가 무슨 옷 입고 살았는지, 바울이 어떤 음식 먹고 살았는지, 아니면 요한이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우리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이룬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우리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거짓으로 주장하고 사람을 교활히 조종하고 이용했던 사람이나 사람을 속이는 간교한 사람은 한 순간은 승리하는 것 같으나 결코 그렇게 모든 역사는 미련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역사의 주관자인 주님의 정확한 손길에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새로운 은혜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며 아픔을 통해 성숙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선한 의지가 남아 있어 그는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넘어졌을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위한 통곡을 통해서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한 가지만 더 살펴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내 스스로의 잘못으로 왜곡된 상황에 처하게 됐을 때 도대체 어떻게 헤어나와야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는 실패하여 가슴 아팠던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통곡만 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 성경은 우리 보고 네 인생은 이렇게 통곡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삶이야 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통곡하는 베드로의 아픔을 통하여 너희는 이렇게 되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지. 또 일어나서 그렇게 되지 말아야죠. 어찌 보면 우리의 삶에는 구조적으로 많은 주님을 부인할 만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때때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위대한 영적인 전투의 장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싸우고 승리해야 될 때가 있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자꾸 마음 상하면서 싸우는 장면을 너무 많이 만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하고 싸우고 저 사람하고 싸우고 모든 사람하고 싸움으로 끝내려고 하지 않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과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가급적 싸우지 말고 싸울 바에는 확실히 이깁시다.” 다시 한 번.
“가급적 싸우지 말고 싸울 바에는 확실히 이깁시다.”
그래요. 성경을 보면 전쟁 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어요. 전쟁할 때는 반드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합니다. 전쟁할 때 그 전쟁을 피하면 더 처참한 지경으로 몰리게 돼요. 전쟁해야할 때는 반드시 전쟁해야합니다. 그러나 평화해야할 때는 평화해야 돼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선을 좁히는 거예요. 정말 돌파해야 될 전쟁은 전선을 좁혀서 집중해서 그 전선을 돌파해 나가는 거예요. 그러나 너무나 전선을 넓혀버리면요 힘이 분산돼서 절대 이길 수가 없어요. 가급적 적게 싸우셔야 돼요. 가급적 적게 싸우셔야 돼요. 그리고 싸우는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집에서는 식구들하고 싸우고, 직장 나가면 직장에 있는 사람들하고 싸우고, 성가대에서는 성가대원하고 싸우고, 식당에 가선 식당 봉사위원하고 싸우고, 동네에서는 동네사람하고 싸우고 하다못해 수위 아저씨하고도 싸워요. 이거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요. 수위 아저씨하고 싸우지 말고 수위 아저씨한데 화나는 일이 있으면 맛있는 것 드세요 하고 뭘 좀 드리세요. 가급적 싸우지 마세요. 그러나 반드시 싸워야 될 때는 싸움을 피하지 마세요. 반드시 그때는 이겨야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여 확실히 승리해야 됩니다. 우리는 더욱이 중요한 것은 승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돼요. 죄송합니다. 저는 이 구조주의자라서 그런지 어떤 일이 한 가지 일어나면 어떻게 이것을 승리할까라고 생각해서는 언제든지 안된다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이것을 승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까를 생각해서 구조를 만들어 놔야 다음에 똑같은 일이 있을 때 생각하지 않고 적용해서 그대로 실행해 버려요. 제가 저희 교역자들에게 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를 생각하면 안된다라고요. 이것을 해결하려면 어떤 원칙을 세워야 될까를 생각하자. 그러면 처음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나중에는 그 원칙 적용하면 아주 간결하게 해결되는 거니까요. 첫 번째 수고를 하더라도 원칙을 만들어 놓고 구조를 만들어 놓고 구조에 넣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루, 이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한 번 닥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술집에 가서 술을 먹느냐, 마느냐 고민하지 마세요. 술집에 가지 마세요. 화투하는데 가서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 화투해도 되느냐 마느냐 고민하지 말구요. 화투치는 사람 만나지 마세요.
우리는 구조적으로 거기 가서 어울릴 수 없는 삶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의 구조를 한번 개선해서 바꿔보는 노력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돼요. 이 사회가 너무 힘이 커서 우리의 작은 구조적 노력가지고는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노력 가지고 안 된다고 실망해 버리면 우리의 믿음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우리가 힘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능력 없고 성실하지 않으며 사람은 거짓말하고 살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살 만큼은 영악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린 능력이 없으면 그 능력이 있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며 지혜를 구하며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성실과 끈기로 하나님 앞에 달려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은 주세요. 그리고 그것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 최소한의 힘이 최대한의 힘이 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 손익계산을 따져 믿음으로 결단하고 그 손실에 대해서 가슴아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야 믿고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상태가 아주 좋고 여건도 아주 좋아요. 그때 우리가 큰 헌신을 했어요. 그런데 큰 헌신을 했으면 축복을 받아야 되는데 우리의 삶에는 큰 헌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음에 망할 때가 있어요. 그때 우리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어요.
첫째, 야 내가 이렇게 망하기 전에 정말 상태 좋았을 때 큰 헌신해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너무너무 감사하다. 내가 지금 다 망한 다음에 이전에 헌신도 안했으면 헌신도 못하고 망했을 뿐인데 정말 내가 망하기 전에 헌신해서 감사하다.
두 번째, 내가 그 상태 좋았을 때 그거 헌신한 것 안했으면 그것 남아 있었을 텐데...
여러분 1번이에요, 2번이에요? 1번이고 싶은데 2번 같아요?
여러분, 우리는요 모든 것 망해도 그래도 내가 헌신한 것이 남아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 헌신 안하고 그것 있으면 그것 남아있지 않아요. 우리 헌신도 안하고 망하면요, 그냥 그 자리에서 망하는 게 아니라 땅 속까지 파서 더 깊이 묻혀져 있을 겁니다.
여러분, 자 따라서 합시다.
“현직에 있을 때 잘합시다. 가진 것 있을 때 잘합시다. 힘 있을 때 잘 합시다. 시간 없을 때 잘 합시다.”
그래요. 바쁘고 시간 없고 일이 바쁘고 뭐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모든 것 있을 때 그때 잘 하셔야 돼요. 뭐 물론 그렇지 않은 때도 잘하셔야 되지만요.
‘내가 이것 다 끝나고 내가 시간도 나고 내가 여건도 되고 내가 여러 가지 되면 그 때 봉사하리라.’
그때는요 하나님도 싫어해요. 그래도 성가대 좀 하시죠. 교사도 좀 하시죠. 식당에서 봉사도 좀 하시죠. 그 때가 좋은 겁니다. 그 때 거절하면요 나중에 내가 좀 하고 싶은데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거절할 수가 있어요.
그래요. 우리 삶이라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도 있어요. 내가 뭔가 주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시지 나는 잃어버린 것도 없는데 뭐 주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실 거나 있겠어요? 심은 것이 있어야 거두죠.
내가 주님 때문에 어떤 손해를 봐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주를 위해서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 내가 잘못돼서 손해 본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손해 본 것이 얼마나 감사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은혜예요.
여러분! 오해하고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문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기사를 하나 봤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남녀양성평등이라고 하는데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는 여자 분들에게 그렇게 기회가 똑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똑같은 직책에 있으려면-과장이다 부장이다 이사다 이런 똑같은 직책이 있으면-그 직책에 있는 사람을 비교하면 뭐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대10 정도 된다고 그래요 예를 들면. 그렇게 여자 분들이 고위직으로 갈수록 점점 어렵나봐요. 그러면서 무슨 얘기가 있었냐하면 같은 직책에 있는 사람의 능력을 비교하면 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있다면 남자보다 여자가 열배 능력 있어야 그 자리에 갈 수 있데요.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구조적으로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데요. 제가 그것을 보니 ‘나는 딸만 셋인데 어떻게 하지?’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 똑같이 노력해서는 남자 여자가 사회구조 속에서 똑같이 위치에 못 가는 것 같아요. 고위직에도 보면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더 많잖아요. 일반적으로. 시험 보는 것 말고. 다른 능력이 평가되는 데서는 다른 면도 있겠지만. 저희 교회는 남자, 여자 똑같습니다. 저희 교회는 남자, 여자 똑같습니다. 또 여자 분들은 얼굴이 좀 밝아지는 것 같은데 남자 분들은 안 밝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요. 여자분들, 열배 능력이 있어야 사회에서 때로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생각하면 좀 답답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한탄만해야 소용없어요. 이 세상에는 한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실제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한탄이나 핑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 믿음의 사람이 이런 얘기 합니다. 믿음 가지고 세상사는 것, 믿음대로 하나님 은혜의 말씀 지키고 세상사는 것, 믿음대로 어떤 일을 하는 것 열배 힘들다고 그래요. 열배 힘들다는 말만 하는 것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열배를 노력해도, 결국 그 열배의 노력을 해서 결국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위치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힘이에요. 우리는 열배 힘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열배 백배의 능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늘 실패하고 낙심해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새로운 능력과 영광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합니다. 그래요. 정말 우리가 주님을 부인해야 될 그와 같은 때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정말 평상시에 우리가 작은 애씀이라도 주님 앞에 수고하고 애써서 어떤 순간이라도 나에게 탁 튀어 나오는 것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하는 영적인 승리의 요건들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있어요. 이것은 우리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사단도 우리를 향해 총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악물고 의연히 버텨낼 때 이제는 우리를 공격하던 사단이 힘이 떨어져서 이제 그대로 주저 물러앉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큰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큰 시험을 이긴 자는 강한 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여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영적 자존감을 잃은 사람은 붕괴해요. 영적 자존심을 잃은 사람은 추락합니다. 내 어떤 경우에도 내가 약간의 손해를 보고 내가 어떤 화급한 경우를 당할지라도 영적인 자신감과 자존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주님 앞에 바로 서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통곡하는 베드로를 보며 그것이 내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하나님 앞에 그런 순간이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주의 긍휼하심을 입어 주님 앞에 그 순간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겠다하고 주님 앞에 각오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울고싶을 때 울어야 합니다
마 26:69-75 / 연제원목사
인격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학적용어로 싸이코 패스(Psychopath)라고 말합니다. 이런 싸이코 패스들의 대표적 증상이라면 ① 상대방의 감정에 무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감정변화가 적습니다. 다시말하면 타인의 감정에 무디기 때문에 다른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 어떻게 반응을 하든 자기생각대로 자기 하고 싶은데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② 이런 사람은 기뻐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을 상황에도 항상기뻐해야합니다. 눈물 마찬가지입니다. 눈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눈물은 원래 뇌에 자극을 받게되면 신경이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그러면 눈물샘에서 눈물을 내보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루에 1.5ml의 작은 물한방울 정도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눈물이 정화작용을 하고 눈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어떤 감정에 격하되면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뇌가 정상적으로 활동한다는 증거입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눈물샘이 고장낫거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경 혹은 뇌가 고장낫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는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게 마음에 질병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거나 아픔이 있든지 아니면 치료가 안된 사람입니다. 감정이 억압되다보니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늘 우리에게 무뚝뚝하고 터프할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진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라고 본문 75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일인지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큰소리로 울부 짖었다’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는 지금 통곡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30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슴아픈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아주 자신있게 소리칩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전에(새벽 동트기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호언 장담합니다.
35절을 봅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말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예수님이 서운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세 번이나 부인한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무슨말씀이십니까? "남들은 다 주님을 부인해도 나는 안 합니다"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럴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끌려가시자 그 뒤를 쫒아가 바깥뜰에서 앉아있던 베드로를 보고 한 여종이 와서 너도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하자 무슨일이냐고 펄쩍펄쩍 뜁니다. 그런데 70절을 보면 처음에는 그냥 부인만 했습니다. 72절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74절 나중에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 부인하고 나니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참 죽을 노릇입니다. 그리고 나서 75절에 베드로의 반응이 나와있습니다.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왜 통곡했습니까? 자신의 초라한 모습 때문입니까? 수치심 때문입니까? 억울해서 입니까? 서러워서 입니까? 물론 자신의 변변치 못하고 못난 모습 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75절을 다시 보면 그는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던 것입니다.
순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분명히 베드로를 통곡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때문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 말씀이 떠올라서 통곡했습니다. 말씀이 그를 통곡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밖에 나가서 통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통곡하지 않았다면? 베드로의 빠른 영적 회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① 이 일 때문에 적어도 베드로는 많은 시간을 영적 침체와 고통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 아마 어쩌면 세상으로 돌아가 후회와 죄책감으로 일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통곡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빨리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통곡의 시간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눅24:9-12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나서 안식후 첫날 새벽에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가에 갔을 때 베드로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제자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제일먼저 베드로에게 달려와 말했습니다. 아직도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후에도 여전히 베드로를 자기들의 리더로 수제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빈 무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무덤에 직접 들어가 본 제자도 역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영적으로 치유되지 않았다면
① 제자들 공동체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②예수님의 무덤에 가보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 영적으로 침체해 있을 때 사람들 만나기 싫습니다.
- 교회 모임에 가기도 싫습니다.
- 주의일 하고 헌신 하는 것이 부담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것을 극복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곡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영혼을 만져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하고 슬퍼하는 베드로에게 어떤 모양으로든 다가오셨습니다. 다가와서 베드로의 굳은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통곡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통곡의 과정을 통해 베드로 안에 감정적인 회복,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감정적으로 메말라 있으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나옵니다. 감정적으로 말라있으면 영적으로도 마르게 됩니다. 영혼육이 유기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혼육이 서로 연결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유하실 때는 영적인 부분만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도 꼭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을까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워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안 떠올랐으면 베드로도 회복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다릅니다. 그는 똑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눅26:23절)
그렇지만 유다는
-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 자신의 죄를 보면서 통곡하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가책과 후회와 죄책감만 가득 찼습니다. 정죄의식을 견디지 못해 자살해버렸습니다.
죄는 비슷합니다. 스승을 판 사람이나
여러 사람 앞에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한 사람이나 도토리 키재기 같습니다.
그러나 회복의 과정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사람은 다시 회복되었는데, 통곡의 과정을 겪지 않았던 가룟 유다는 자살로 끝나버렸습니다.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떠오르게 하셨다면 왜 가룟 유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유다도 말씀이 떠올라서 회개했다면 회복될 수 있었지 않을까?라는 이것 하나님이 차별하신 것 아닌가? 혹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비교하면서 한 가지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판후 예수님 주변에 얼씬도 안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회복시키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룟유다 스스로 그런 기회를 접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지만 주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심문 받으실 때에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세 번 부인하고 나서 정신없을 때 가룟유다에게는 없는 한 가지 사건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눅 22:60-6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하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부인하고 닭이 울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아무일 없이 갑자기 베드로에게 말씀이 떠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베드로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씀이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베드로에게 말씀이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마주침이 없었다면 말씀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의 가시 거리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눈을 들어 바라보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문 받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사랑하는 베드로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이 한번의 눈길에 베드로의 영혼에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가룟유다도 이렇게 가깝게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 어디론가 깊이 숨어버렸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바라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모든 통로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깊은 영적 절망과 침체를 겪는다해도 주님 옆에 있어야합니다.
영적으로 힘들다고 너무 멀리 도망가지 마십시오.
기도할 수 없고, 영적모임에 오기도 싫고, 죽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을 주님께 아뢰기만 한다면 주님은 일하십니다. 말씀이 떠오르게 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회복시켜주시면서 치유를 시작하실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덕소가족 여러분!
마음껏 울고싶을 때 우십시다. 그리고 울음으로 가슴 깊숙한 곳의 치유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누구나 실수하면 살아가는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통해서 성숙해집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눈물이 메말라 우리는 지금 눈물이 메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에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늘 말씀 때문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음으로 늘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 받으시는 주님
마 26:69-7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잡혀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며 말하기를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희롱했습니다(마26:67-68).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지만 곧 뒤따른 사건, 곧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은 바로 그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며 장담할 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언하신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마26:33-3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때에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도 저 예수와 같이 있던 사람 아니요? 당신 말투도 그렇고"라는 한 마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아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무슨 관원도 군인도 아닌 대제사장 저택의 뜰에서 문 지키던 여종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무슨 신성모독을 했다고 비난하거나 폭동을 사주한 사람이라고 붙들어 고발이라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저씨, 아저씨도 저 사람과 같이 다니시던 분 아니셔요?" 하는 투로 지나가며 한 마디 던졌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냥 아니라는 듯 못들은 체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강한 어조로 부인했습니다. 부인하는 강도는 갈수록 단호해졌고 심지어는 저주와 맹세까지 덧붙이며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모든 제자들 앞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 35) 하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본문 뒤에서는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당하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최고권력자들 앞에서 온갖 폭행과 폭언과 비아냥과 거짓 증언과 협박을 당하시면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아들 되심(마26:63-64)과 유대인의 왕 되심(마27:11)과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선포(요18:36-38)하시는 사이에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여종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며 거짓을 힘주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과잉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는 극도의 두려움에 싸여있었을지 모릅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부족에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비겁함을 낳는 법입니다. 아무튼 그는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너무나 맥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측은함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셔야 했던 예수님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온 몸이 전율할 정도로 실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단지 로마 병사들로부터 당하신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정신적, 심적 고통을 함께 당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지만,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을 앞뒤에서 따르며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던 환영의 소리(마21:8-10)가 불과 몇 일만에 같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소리 지르는 배척의 고함으로 돌변하는 배신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안겨준 백성들의 배신은 인간적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육간의 풍성한 양식을 베푸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신 예수님께 세상은 십자가로 되갚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함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을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을 십자가에서 조용히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고난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당할 모든 배신과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열두 명의 최측근 제자들 가운데 가장 똑똑해서 돈궤를 맡기기까지 했던 가룟 유다에 의해 은 30량에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지는 배신을 당하시는 고통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저녁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침 그 때는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의미와 곧 있을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절묘하게 연결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습니다(마26:26-28). 제자들과의 이 마지막 식사에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며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목적과 의미를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삶은 바로 제자들과 모든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찢어 나누어주시고 자신의 피를 흘려 나누어주신 삶이었습니다. 그 삶을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요약하여 재연하심으로써 마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삶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간 삶이었고,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은 곧 그의 삶 전체를 그 안에 담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역사적인 구속의 사역, 대속의 죽음, 위대한 사랑의 희생의 과업을 실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나가 곧바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30량에 팔아넘기기로 약조했던 것입니다. 배신의 극치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배신의 역사의 절정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베드로의 배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항상 앞장서 다짐하던 그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신과 불충은 예수님께 단지 고통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엄청난 허탈감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3년간의 삶의 나눔과 가르침이 다 헛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아야 하는 허탈감인 것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주를 버리고 흩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흐트러진 육신 위에 덧입힘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고 이 종려주일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때 주님 때문에 열광하며 환호하다가 곧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돌변한 우리는 아닌가? 넘치는 은혜 아래 있으며 온갖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버리고 흩어진 우리는 아닌가? 하찮은 이 세상의 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갈 준비만 하고 있는 우리는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부인하지는 않고 주님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매다는 배신과 불충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배신당하고 부인당하는 고통을 주님께 드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고통을 주님께 넘치도록 안겨드린 우리일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배신의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충성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마 26:69-75 / 백장흠목사
어떤 사람이라도 실패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실패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실패는 비극입니다. 사람들이 왜 실패합니까? 강철 왕이며 자선사업가인 카네기 는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 10가지를 말하였습니다.
1)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이들입니다. 핑계전문가들은 실패합니다.
2) 열등 의식과 자기비하에 젖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합니다. 이건 겸손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등의식은 의욕을 저하시키는 독약과 같습니다.
3) 삶의 목표가 없더랍니다.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아무리 고생을 해도 보람이 없습니다.
4)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합니다. “나는 못해. 힘이 없어.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서.” 그러면서 포기하는 사람은 실패자가 되더랍니다. 이런 이들은 남에게 피해만 줍니다.
5)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합니다. “과거에도 안되었는데 되겠어?” 그럽니다. 이런 이들은 앞길에 암울해집니다.
6) 독창력이 없더랍니다. 남의 흉내를 내기에 전전긍긍합니다.
7)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맨손으로 대적을 물리치겠다는 무모함이나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들어가겠다는 이들과 같습니다.
8) 인생의 지름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왕도를 찾습니다. 지름길을 없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목적지가 가까이 옵니다.
9)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더랍니다. 자기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10) 실패해도 분석도 하지 않더랍니다. 이런 이들은 또 다시 실패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실패하였습니까?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1-34
31절. ‘너희가 오늘 밤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십니다. 34절에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경고하신 이후에 일하십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이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교통 사고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호등을 무시하면 크게 납니다.
성경을 보아도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나 가정은 비극이 왔습니다. 제사장이며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삼상3:10-4:1).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정에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비극이 왔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목회 잡지인 리더쉽(Leadership)이라는 곳에 일곱 가지 싸이랜(Seven Siren) 이라는 글에 1) Pride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열심히 교회를 섬기려는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내가 제일이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아니한다’ 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2) Envy 질투심입니다. 나도 못하고 남이 하는 것도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3) Anger 분노입니다. 내가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나타납니다. 4) Sloth 나태입니다. 신앙인은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열정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5) Greed 욕심입니다. 큰 일만 하여야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6) Gluttony 무절제입니다. 지나친 게 문제입니다. 절제하라고 하십니다. 7) Lust 정욕입니다.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이런 싸이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말세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인자가 올 때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깊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여야 합니다.
2.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40절
세계는 힘에 의하여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1) 육체적인 힘이 있습니다. 근력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2) 돈이 힘일 수 있습니다. 장사도 무일푼이면 안색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3) 지식의 힘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모르면 무능할 수 밖에 없습니다. 4) 경험이 힘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경험있는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아니합니다. 5) 더 강한 힘은 도덕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불의할 때에 약하여집니다. 양심에 가책 받을 일이 있으면 약해집니다. 6)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이 힘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도 계속 사랑하여 주면 사람을 따릅니다.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의 자원이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영적인 힘입니다. 영적인 힘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나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놓고 주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수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답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세 가지 답을 정해놓고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1) 나 혼자서 해결하겠다. 2) 친구에게 전화하고 의논하면서 도움을 받겠다. 3)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겠다.
35명중에 두 사람만이 ‘기도하겠다’였고 가장 많은 부분은 1번으로 ‘나 혼자 해결하겠다’ 였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구하는 자에게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2)’ 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기도하여야 합니다.
삶에서 승리를 원하십니까? 기도하세요.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기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기도하기 싫다는 마음이 생기면 조심하여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적극 방해합니다. ‘피곤해서 못하겠다. 분주하여 기도생활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그럼으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패나 대적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비록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불편하게 생활하였으나 매일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에 제2차 대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은 아이젠하워 사령관 총 지휘하에 대규모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전개 했습니다. 프랑스의 노르만디 해안은 험한 절벽이었고 상륙작전 전날밤은 폭우와 안개 등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루즈벨트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집무실에서 무려 17시간이나 꼼짝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승리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보니, 베드로는 자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던 베드로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탓하고 환경에 대하여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기도하지 못하였기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습니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산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결하시는 전문가이십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해내십니다. 그 분의 약속을 믿고 깨어 기도합시다. 그럼으로 승리합시다.
3. 검은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51절
베드로는 제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의식에서 한 행동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졸다가 깨어보니 예수님에게 손을 대며 체포하려 합니다. 제자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게 예수님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52절을 보면)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충성된 마음으로 행한 일을 갖고 이렇게 심하게 ‘망하느니라’ 라는 표현까지 할 수 있을까? 이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검을 사용하지 말라는 경계성의 교훈입니다. 검이 무엇입니까? 명분 있는 혈기입니다. 분노입니다. ‘선생님의 안전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는 명분을 세워서 잘못된 방법이 동원될 수는 없습니다. 목표가 좋으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용기와 혈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기는 죄악에서 잘못된 일에 대하여 내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행동입니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왕은 기독교를 조롱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충신 본진랜드 장군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그때 장군이 일어나 말하기를 “폐하. 대왕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38번을 승전하였습니다. 이제 저도 늙어 대왕이 비웃는 저의 구주 그리스도를 만날 때가 가깝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나러 갑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왕보다 더욱 위대한 분인 것을 압니다. 이제 소신은 물러갑니다. 사람들은 장군이 즉시 처형될 줄 알았으나 왕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장군.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물론 장군 본진랜드가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프레드릭 왕이 더 용기가 있습니다. 자기의 과오를 알고 즉시 사과할 수 있는 게 용기입니다. 칼이나 뽑아서 휘두르는 것은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잘못한 줄 알면 즉시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과의 관계는 좋아지게 됩니다.
혈기는 없애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분노는 참아야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나서 혈기를 부릴 때 내쉬는 숨을 액체질소로 급냉시켜 보았더니 노란색 독소 액체가 나왔다고 합니다. 화를 내며 내쉬는 숨 1시간 분량의 독소는 무려 80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답니다.
혈기나 분노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내하여야 합니다.
4. 예수와 가까워져야 합니다.
마태 26:58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예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이게 웬일입니까? 멀찍이 따라옵니다. 왜 멀찍이 따라왔을까요?
1) 안전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신변에 위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일주의는 멀어지게 합니다. 타산해 볼 때에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관계의 문제입니다.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혼자 사는 것은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은혜 안에서 삽니다. 그러나 불신자들과도 관계를 잘 맺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 갈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 이는 잘못입니다. 그 중에 가정은 관계의 기본입니다. 모든 관계는 가정입니다. 부모와 자식관계, 형제간의 관계, 고부간의 관계가 가까워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간에 좋은 관계가 되어져야 합니다. ‘나만 잘 믿는다’ 라는 교만이 있으면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장점만 보려고 하십시요. ‘저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3)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멀어집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시지요?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십니까? 이제는 주님과 가까워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려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몸 된 교회와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 분이 사랑하는 사람들, 주의 종들을 사랑하세요. 그게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비결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 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가져야 할 4가지 감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 데 속해 있는가’를 본능처럼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한계성입니다. 나에게도 끝이 있음을 알고 사는 겁니다. 전에 그렇게 아름답고 예뻣던 얼굴이 세월이 흐르고 나니 왜 그렇게 쭈글쭈글하게 되었는지, 나도 저렇게 되어간다. 미모도 권세도 재능도 명예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유일성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독특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 주셨다라는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 존중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며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갖고 살아가면 값진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중한 것은 ‘지금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왜 멀찍이 따라옵니까? 주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5. 하속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성별 되어야 합니다.
마태 26:58 하반절을 보세요.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하였습니다. 영적인 성공자가 되려고 하면 성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결이라 거룩하게 산다는게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 죄 짓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죄악에 감염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미국에서 의사의 날은 3월 30일입니다.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미국 사람중에도 많지 아니합니다. 치과협회 회보에 ‘데이빗 스티븐슨’이라는 이가 의사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섰는데 수술이나 검사를 하기 전에 철저하게 손을 문질러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감염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죄에 대하여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살려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날짜를 구분하고 살아야 합니다. 물질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도 구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과 같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인본주의, 세속주의, 이기주의 입니다. 구별되게 살 수 있는 복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태26:70을 보세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까?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로마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였는데 이미 베드로는 구원을 포기한 거와 같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태26:72절에는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던 그가(마26:33) 아니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던 그가(마26:35)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변질되는 것은 죄가 아닙니까?
마26:74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였습니다.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진실함이 없어졌습니다. 이게 타락입니다. 교회의 타락, 신자의 타락은 진실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거짓말은 패망이라고 하였습니다(잠언21:28). 계시록21:15절에는 거짓말 하는 자는 성밖에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밖은 천국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죄입니다. 진실하여야 합니다. 말이 진실하여야 합니다. 생활에도 진실하여야 합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이행할 줄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누구의 모습입니까?
1) 주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삽니까?
2) 깨어 기도하면서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까?
3) 믿음을 앞 세우고 분노하거나 혈기를 내지 않고 있습니까?
4) 예수와 가깝습니까?
5) 성결하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여 예수를 부인하는 지경에 와 있습니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태26:7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입니다. 세 마디 단어에 집중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하나가 ‘생각나서’ 입니다. 둘째는 ‘밖에 나가서’ 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히 통곡하니라’ 입니다.
1) 생각하여야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되었나? 그 분의 말씀에는 이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나는 너와 함께함이니라’ 말씀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2) 밖에 나가야 합니다. 장소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행하였던 그 장소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통곡하여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때부터 성령충만한 베드로, 승리하는 베드로가 되어집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제까지 내가 성공적으로 살았다’, ‘실패했다’가 아닙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생각하시고 장소를 바꾸시며 회개하여서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갖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베드로의 통곡
마 26:69-75 / 박지온목사
오늘 2003년 마지막 주일이 되겠습니다. 2003년도는 지나갑니다. 2004년도가 오는데 참 이상한 것은, 뭐 그 날이 그 날이고 그렇지만 문제는 한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온다고 하면 마음이 달라져요. 문제는 사람도 별 사람 없어요. 2003년도에 그 사람이 2004년도에는 얼굴이 달라져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 역시 다음 주에 오게 되어도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뭐가 하나 달라요? 마음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그냥 무심하게 있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게 될 때에 그 사람의 삶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특별히 마음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특별히 신앙생활에서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믿음의 역사가 달라지게 됩니다. 완전 새로운 인생들이 되어질 수가 있죠.
오늘 이런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면서 상당히 의미 있는 그런 제목이 되겠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이라고 그랬습니다. 사실은 지나간 시간은 아쉽고 어떤 면에서 억울하기도 하고, 통곡하고도 싶은 그런 날들이 많죠. 늘 추억은 아름답고, 참 추억은 눈물겹고, 현실은 더럽고, 미래는 안보이고, 가물가물 거리고, 상당히 그 모순이 많이 있어요. 사는데 있어서 어떤 면에서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고생스럽게 살아도 추억은 아름다워요.
저도 시골 생활이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지금 생각하면 옛날에 고생하던 그런 때였지만, 먹는 것도 잘 얻어먹지도 못 먹고 그럴 때였지만, 요즘 같으면 물도 없어요. 옛날에 도랑물에서 고기 잡던 추억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요즘에 돌이켜 보면 그건 추억이 될 것도 아닌데, 그러나 인간이란 원래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리 좋아도 그게 현실은 즐겁다, 감사하다! 이게 잘 안됩니다. 현실은 늘 더럽고, 피곤하고, 어렵고, 미래는 복음을 안 가지고 그냥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그저 가물가물 거려요.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서 점도 치고, 미래의 불안 때문에 이러 저리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베드로의 통곡"이라고 그럴 때에 사실은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은, 그런 어떤 이야기들이 다 나올 수는 없고 오늘 간단하게 어찌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런 자리에서 통곡을 하게 되었던가? 얼른 생각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 억울해서 통곡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정 반대의 그런 어떤 것들을 보게 됩니다.
원래 베드로가 예수님께 맹세하고 다짐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네가 닭이 세 번 울고 나면 나를 부인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러느냐? 한사코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거든요. '내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겠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끌려가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은 전부 줄행랑을 다 해버렸어요. 그래도 베드로는 용감했습니다. 다른 제자 다 도망쳐버렸는데 혼자서 바로 뒤따라가지는 못하고 그저 보일 정도에서 멀찌감치 따라갔습니다.
따라 가면서 모른척하고 그러면서 딴전 피우고,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것도 적극적으로 못 박는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비자들하고 모여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 있는데, 농담하는 것 들으면서 뒤따라갔죠. 그렇게 따라 갔는데, 여자가 하나 비자라는 것은 몸종 비슷하게 요즘은 그런 것이 우리나라 제도에는 없습니다. 그 비자 한 여자가 와서, '네가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니냐? 너도 그 당이다!' 이러니까! 첫 번 부인하고, 두 번째 부인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정도 가서는 예수님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을 했습니다.
그때에 나는 예수님의 심정을 좀 볼 수가 있어요. 뭐냐하면, 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면서 그래도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는데 베드로라도 따라오니까, 좀 우리가 안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위로가 되는데 그 가만히 들려오는 소리나 이야기가 어느 시간쯤 와 가지고 따라와서 위로가 되었다 싶은데, 절망적인 소리가 나오거든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에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거든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느냐 싶어요. 그 누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뒤돌아 보셨다!'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을 마주쳤어요. 그러자 닭이 울었죠.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그래서 밖에 나가서 조용히,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서 통곡을 못하고, 통곡은 정말 뼈저린 참 너무너무 연약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이 베드로의 통곡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교단에서는 십자가 위에다가 뭘 올려놓느냐 하면, 수탉을 몇 개 올려놓고 있잖아요. 그런걸 많이 봤죠. 그러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더 나가서 '말씀을 생각하라!'는 그런 암시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여기서 조금 기억을 해야 될 것이, 베드로가 지은 죄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 너무 실망을 주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그 사람들보다도 더 못박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자 하나 따라오는 것 뭔가 위로보다도 인간적으로 봐서 고맙다고 생각하실 수 있었을 것인데, 따라온다는 이 제자녀석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느냐?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가룟유다 보다 죄가 덜하다, 더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 똑같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죄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통곡 속에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의미가 어떤 의미로서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사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때에 의도를 가지고 부인한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정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로 가는 길이 너무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러나 용감하게 뭔가 가서 대적할 수 있는 용기는 없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따라가다가 갑자기 받은 질문이거든요. 그 갑자기 질문을 받고 나니까 엉겁결에, 자기도 모르게 부인을 했습니다. 그게 한번 그렇게 되니까, 두 번! 또 세 번째는 이미 부인하게 되었으니까, 확실하게 자기가 살려고... 인간의 얕은 생각 아닙니까! 그러면서 뭐 사는 것만 생각하고 살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고, 베드로는 이 사실을 예수님과 함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이 어떠했겠어요? 아마 기가 막혔을 겁니다. 나는 인간적으로 그때에 베드로의 심정을 느껴 볼 수 있다고 그러면 아마 여러분 지금 이 순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가슴이 찡 할 것 같아요. 그 눈을 쳐다보는 순간에, 그 다음에 또 닭이 세 번 울 때에 견딜 수 없어서 나가서 통곡했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서 또 표 낼 수는 없고, 그러니 진짜 흐느끼는 느낌으로 통곡을 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길게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고, 여기서 우리가 당하는 사건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엉겁결에 말씀을 떠나고, 엉겁결에 자기유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섭섭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멀리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모르고 있어요. 만약에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그러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죠. 그래서 특별히 이 연말에, 마지막 시간에 이 말씀이 나왔다는 것은 참 의미가 있다 싶어요.
여러분들이 지난 한해에 내가 신앙 생활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예수님이 나를 쳐다보실 때에 얼마나 분노할 수 있는 괘심한 그런 행동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살려고, 자기 유익 때문에, 자기 욕심 때문에, 막말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버린 자들인 가룟유다 보다 더한 베드로의 행동들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나를 향하여 우리 주님은 특별히 성령으로 여러분들과 저를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계십니다. 아마 이 사실을 믿음으로 생각만 해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눈길과 베드로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베드로는 전혀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그런 모든 것이 베드로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거짓말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전심을 다해서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라가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결국 감정이나, 느낌이나, 이런 것들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구나! 뭐가 성취되느냐? 말씀이 성취되어 집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내 인생, 개인이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또 어떤 사건이나 일이, 내 느낌이나 내 생각이 성취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지병이 있으니까, 어쩔 때는 참 이 감정의 변동이 많을 때가 있어요. 밤에 기도할 때는 뭔가 결단해서 하다가 아침에 딱 일어나서 또 힘이 없으면 그 결단이 다 무산되어 버리고, 마치 뭡니까? 이 낙엽처럼 왔다갔다하더라 구요. 그런데 지금까지 쭉 오면서 내 개인적인 것, 뭐 다른 것, 큰 것은 놓아두고 내 개인적으로 지나오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지, 내 느낌이나 감정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구요. '곧 죽겠구나!' 그렇다고 죽는 게 아니라, 또 살아난다! 뭐 건강해 지면, '아, 이제 건강을 회복하겠구나!'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엄청난 역사 속에, 내 인생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구나!' 이 사실이 너무 절실하게 부닥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일이나 교단적인 일이나, 교단 적으로도 앞으로 여러분들이 아마 기도하시면서 우리가 기다리고 또 하나님의 뜻이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우려도 되고, 또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는지 때가 되어서 정말 천만요원을 찾고 세계 복음화의 문을 여시려고 그러시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당히 뭔가 이 합동 측으로 가는 것이 진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뭐 이렇게 정죄하고 그런 과정보다도 진심으로 뭔가 이 합동을 해야 되겠다! 다시 들어가야 되겠다! 이런 과정이 되어 가지고, 아마 성명서가 나오게 되면 일단은 구실도 드려야 되니까, '이렇게 나온 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성명서도 나오고,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 혹시 여러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잘못한 것이 있던, 없던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우리가 들어가야 되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세계복음화의 문을 또 열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경우 닫혀있다는 부분입니다. 저는 또 우리 교회로서는 큰 교회를 건축을 하면서 이제 문이 열리게 되면 핵심도 이 자리 가지고는 되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아마 핵심과 합숙 같은 것은 터져 나가게 됩니다. 전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뭔가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이 작업해 가시는 것을 제가 볼 수 있거든요.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감정이나 느낌으로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만약에 합치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전도훈련은 없어집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훈련을 옳게 못 받았다! 그러면 억울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남은 시간 동안에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1,2년 안에 금방 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아마 부지런히 훈련을 다녀야 될 것입니다. 누가 훈련을 그렇게 시킬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안되어요. 그리고 특별히 우리 교회가 처음에 잘 따라다니다가 진짜 본격적인 훈련이 왔을 때는, 제 건강문제도 있지만 그만 많은 경우 쳐져 버렸어요. 훈련에 참여를 안 하면, 훈련을 안 하면 체질이 안 바꾸어집니다. 훈련을 해야 생각과 체질이 바뀌어집니다.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체질로 바꾸어지게 되면 저절로 되어지는데, 그게 안되니까 자꾸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뭐가 염려스러우냐 하면, 묵은 디이 교인일수록 체질이 안 바꾸어지거든요. 그래서 같이 합쳐놓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전도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도 잊어버리고, '이상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역사 속에 우리교회가 큰 교회를 세우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서 후대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로 뿌리를 내려서, 복음에 확실히 안 서고 뿌리를 못 내린다! 그렇게 안되면, '후대 살린다!' 말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정말 기도해야 되겠다!' 이 말을 조금 부탁해야 되겠다 싶어요. 훈련!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특별히 묵은 디이 교인들이 참여하세요. 신학원을 비롯해서 선교사 훈련원 우리 장로님들도 계십니다 만은, 선교사 훈련원 다 나오세요. 그래도 안 되는데 워낙 깊이 들어 있거든요. 저도 제 자신의 어떤 걸 느끼느냐 하면, 무슨 일이 나오면 뭐부터 먼저 나오느냐 하면, 율법부터 먼저 나옵니다. 그러다가 '아, 이게 율법이구나!' 율법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뭐 벌서 오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이라도 축복입니다. 그건 감사한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다가 진짜 훈련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그냥 그게 계속해서 습관이 되어져 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꾸어지지 않아요. 이걸 바꿀 수 있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훈련 아닙니까! 합숙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훈련을 받아 왔는데, 아마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훈련을 어지간히 시켜서 세계복음화의 문을 여는 시간이 왔는가 보다!' 그렇다 그러면 정말 이 훈련을 다져야 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런 시간 속에서 우리가 다져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 교단에 들어가게 되면, 옛날 교단에 들어가게 되면, 류 목사님 얼굴은 구경하기 힘듭니다. 부흥강사로 뛰어다니기 바쁘고, 우리는 우리 교회대로 지금까지 훈련받은 것 가지고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증인으로 서야될 이런 시간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런 시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약에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이단이라는 이런 누명을 쓰면서 왔을 때에, 이 누명을 쓰고 왔는데 지금에 와서 합쳤다는 것 때문에 전도라는 이 축복된 역사를 놓쳐버린다! 그러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더 억울한 것이 없고, 그 보다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분명히 아실 것을 성경에 말씀대로, 말세에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 된 후에야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훈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속에서 우리가 중요한 시기에 살게 있는 것을 알고, 나는 건축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저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건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 이 교회를 통해서 정말 대구를, 진짜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진짜 선교와 전도에, 그뿐 아니고 우리가 후대를 살린다고 말만하고 있는데, 우리가 후대 살리고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사실은 어떤 면에서 이게 지금 안되어 있거든요. 시설이 좀 부족하다! 안 된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 중심에 후대 살린다 그럴 때에, 후대 살리기 위해서는 여러분부터, 나부터 먼저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죽고 무슨 후대를 살립니까! 엄청난 사명들이 지금 여러분과 제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것은 완전 우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세의 사건들이 뭐 줄이어서 터져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우리가 그동안 '우리만 안 당하면 괜찮지!'싶은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만 안 당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세에는 엄청난 재난과 재앙들이 다가 오는데, 그래도 복음전파를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뭐 잘났다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한가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시고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좀 하고 있습니다. 좀 걱정을 하는 분들도 있고, 어떤 면에서 염려를 하는 분들도 있고, 그러면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나님, 교회를 건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래서 저는 게아시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걱정을 할 때에, '저희 눈을 열어주옵소서!' 여러분 우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요,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사건과 일들을 정말 그 방향에다가 맞추었을 때에, 축복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엄청난 은혜의 역사가 약속이 되어있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이걸 지나치지 마시고, 오늘 제가 이렇게 프로젝트를 하니까 생각이 좀 나는데 이 말을, 이 건축에 대해서 조금 강조를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진짜 축복 속에 섰다고 그러면서 축복보다는 부담을 더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이런 시간은 한번도 안 오는 수가 많습니다. 이런 축복과 은혜의 기회가 왔다는 것은, 여러분 너무 너무 귀중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뭔가 자격을 따지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작위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일이 진행이 되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 대들 때가 있어요. '하나님, 교회건축을 시작해놓고 목사가 건강해서 팔팔 뛰어도 힘드는 그럴 때인데, 왜 목사 반죽여가면서 옳게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하시느냐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렇게 막 그냥 대들 때가 있어요. 워낙 답답하니까! 그러나 한편 마음에 돌아오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마음에 느낀 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건축해 놓고, 교회건축한 일과 사건 때문에 어떤 면에서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도, 혹시 교만과 자만 때문에 다른 데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내 개인적인 어떤 것, 자랑하는 이런 마음이나 이런 생각, 혹시라도 우리 속에 있다면 여러분 통곡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시는 역사를 이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는 이 베드로의 통곡을 보면서 정말 가룟 유다 보다도 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참 중요한 겁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이 체험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진실한 통곡이 나옵니다. 회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뭐가 없어졌느냐? 너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건에 뻔뻔스러워져 가지고, 회개를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봐요. 실컷 잘못해놓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고 대들고, 그러나 그 사람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첫 번 불림을 받을 때도, 고기 잡다가 밤새도록 잡아도 고기를 못 잡았는데,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럴 때에,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던집니다. 그랬을 때에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그때에 베드로가 한 말이 뭡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랬습니다. 말씀이 성취되어야 자신의 부족을 깨닫습니다. 혹시 회개라는 것이 안나오면, 말씀 성취가 여러분들의 삶에 실제로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성취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주님 앞에, 그 엄청난 축복의 주님 앞에, '나는 너무 부족하구나!' 그리고 '그 은혜를 너무 많이 입었구나!' 저절로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심정, 이 마음, 이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마지막 불림을 받아서, 고향에 돌아와서 또 물고기를 잡았을 때도 똑같이 말씀이 성취될 때에,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너무 잘못했구나!'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우리 신앙생활에 적은 것이라도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이 내게 체험되면, 뭐가 나옵니까? 회개가 나옵니다. '주여, 이렇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렇게 은혜 주셨는데 내가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이런 회개가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너무 몰라서 멀리 떠났습니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절로 뭡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는 이 말이 너무 절실한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이 성취된 사실을 보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 말씀 성취 외에 다른 것이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언제 베드로에게 일평생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축복으로 가게 되느냐 하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비로소 성령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열두 제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그 성령을 통해서 충만하게 말씀이 성취되는 사실을 보고 난 후에, 베드로의 인생은 옛날의 감정과 느낌과는 전혀 다른 완전한 성령의 인도 받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사실이, 말씀이 성취된다는 사실이 그 인생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그런 삶으로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베드로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잘 알잖아요. 내일 죽게 되는 그 밤에도 베드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걸 깨달으니까, 염려할 것이 없어져버렸어요. 그냥 옥중에서 정신 없이 잤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지, 천사가 깨워도 몰라! 흔들어가 모르니까, 천사가 발길로 차버렸습니다. 놀라 가지고 벌떡 일어났잖아요. 놀라 가지고 벌떡 일어나니까! 원래 감옥에 가면 허리띠를 안줍니다. 정신이 있으면 허리춤을 딱 쥐고 일어나야 되는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베드로가 그만큼 나중에 모든 걱정근심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지...
그래서 마태복음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이 말씀 성취의 사건이 안보이게 되면 저절로 뭐가 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말세에 어떤 면에서 정신병이 폭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죠. 여러분들이 뭐 정신병이 다른 게 아닙니다. 이 마태복음 11장에 있는 이 사실 자체가 벌써 그런 문제 아닙니까! 옛날보다도 오늘날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몰라요. 우리 주변을 조금 돌아보고, 교회 안을 이렇게 좀 돌아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왠 걱정이 그렇게 많은지! 뭐 말할 수 없이 많은 걱정들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온 사람들 얼굴을 보면 예배드리러 오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이 없어요. 말씀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다 내어놓으세요.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 그 말씀 때문에, 그 성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굶었다! 하나님이 가만히 안 있습니다. 그럴 믿음이 없어서 그렇죠.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왠 걱정이 그렇게 많습니까! 내일이라도 죽으면 천당 가는 것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겁이 납니까!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을 보시고, 정말 하나님 앞에, '아, 이렇게 큰 축복 속에 서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하구나!' 소리 없이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너무 하나님 앞에 이런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말 하나님 앞에, '이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아니구나! 완전히 이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구나!' 조용히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말씀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약속이 성공의 약속이에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잘했다!' 칭찬 받지는 못해도, 주님이 오실 때에 섭섭해서 주님이 괴로워하시는 일은 안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말씀이 성취됩니다.
여러분과 제게 이 든든한 언약 속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러분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분이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셔서 문제와 사건을 받는 데로, 있는 데로 영접하는 순간 순간마다 여러분 성령으로, 여러분 마음과 심령 속에 오셔서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가 할 수 없어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고 있는데도 주님은 나를 바라보십니다.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험한 세상, 정말 말세에 여러분과 저를 세워서 세계를 바꾸시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에 성취를 보시는 기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의 닭소리는
마 26:69-75 / 김상수목사
지난 한 주간 6일 동안 육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오늘 하루는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육신보다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바로 되어야 삶이 바로 되며, 가정이 바로 되고, 또 그 인생 자체가 바로 되어지며 아무리 육신을 가꾸고 건강을 위해 온갖 수고를 해도 이 영혼이 떠나면 그 육신은 시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보다도 성경은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건강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혼이 하늘나라 가기까지 성숙해지고, 다듬어지고, 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칭찬들을 수 있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서 주 앞에 가기 위해 계속해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받고, 기도하고, 헌신, 봉사하는 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 일생의 목표를 여기에 두어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탁월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수제자이며, 초대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결단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영적인 직감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예수님이 물었을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영적인 탁월한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그 외에도 베드로는 많은 좋은 것을 보여주었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잡혀서 심문 당하실 때에 따가 가다가 거기서 같은 통속들과 어울려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그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인간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이 배신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큰 죄를 베드로가 범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를 보고 ‘아! 나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노력해야 하겠으나 나도 베드로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생각하시고 근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베드로의 실패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지나친 자기 과신입니다.
저녁 만찬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 떠날지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말은 자기의 의지를 믿고, 자기 재능, 재물, 건강, 이런 것들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 그 대상은 변하고 소멸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하십니까? 어느 순간에 쓰러질지 모릅니다.
며칠 전 어느 장로님이 밤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가 치료를 받았는데 평소에 장로님이 얼마나 건강하셨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차와 충돌하면 그 순간모든 것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것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대상은 오직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 말씀, 예수님이십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예수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 외에 더 믿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과신하다가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를 밥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직분자들 중에도 많습니다.
목사는 목사안수 받기까지는 힘을 다해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됐다’하면서 방심합니다. 그런데 그때 마귀는 밥으로 생각합니다. 장로는 장로기 되기까지는 뭐든지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장로안수를 받고 나면 방심을 하게 됩니다. ‘장로가 되었으니까’ 이럴 때 마귀는 ‘너도 내 밥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되고, 엉뚱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 일에 지장이 됩니다.
여러분, 잊지 맙시다. 교회의 중직자는 마귀의 목표입니다. 장로 한 분이 마귀에게 넘어지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목사 한 사람이 마귀에게 넘어지면 교회가 흩어집니다. 그래서 마귀의 총공격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예수님께 인정받고 사랑을 받았으나 어느 순간 그렇게 떨어진 것을 보십시오.
둘째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약해지고 약해지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극복해야 하기에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자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은 마귀의 밥이었습니다. 마귀의 전략에 아무 힘도 없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로마 군인들이 왔을 때에 베드로가 한 일은 검을 가지고 휘둘렀습니다. 혈기를 부렸으며,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참을 줄 알고 인내할 줄 압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인격적으로 비하됩니다. 화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참고 견딜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누가 화를 잘 냅니까? 어린아이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는 사람이 화를 잘 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고, 참고 견디고 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약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 어떤 집사님이 시험이 들었는데 그때 장로님을 모시고 심방을 갔습니다. 이 집사님이 막 화를 내서 장로님을 공격하는데 사실은 제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차마 못하고 장로님에게 하는데 못할 소리 없이 다 하시는데 참 감사했던 것은 그 장로님은 끝까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그냥 받아 넘기고 은혜로 풀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이나 가정에서 마음에 은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교회에 오면 화가 납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도, 사람들이 무엇을 해도 화가 납니다. 그때는 영적으로 병들거나 허약할 때입니다.
여러분, 그때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엉뚱안 행동을 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더니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본 마음이 아닙니다. 절대 베드로의 본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칼 휘두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도 절대로 베드로의 본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약하고, 넘어지니까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해야합니다. 말씀공부하고, 찬송 부르고, 열심히 봉사하고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평이 날 때가 언제입니까?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또 마음에 불평이 날 때는 스스로 마음이 교만해졌을 때 입니다. 이때는 언제일까요? 영적으로 잠을 자는 때 입니다. 영적으로 잠을 자는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볼 줄 모릅니다. 깨어나서 거울을 쳐다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기도해야하고 회복해야합니다.
셋째 멀찍이 따라가다가 실패합니다.
58절은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속들과 함께 따라 들어가 앉았습니다. 참 신통한 일입니다. 이것이 타락하는 순서입니다. 시편1:1절은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는데 악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타락하는 순서가 처음은 따라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같이 어울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같이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타락의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따라가지 않아야하는데 따라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순서를 밟아서 결국은 순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시고, 교회 가까이 하시고 목사 가까이 해야 은혜 생활 할 수 있습니다. 난로가 멀리 있으면 춥습니다. 등잔에서 멀리 있으면 책을 볼 수 없습니다. 등잔불에 가까이 가야 책을 볼 수 있듯이 여러분이 교회를 가까이 해야 은혜 받고, 목사와 가까이 해야 은혜 받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의 행동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첫째는 제자의 신분을 감춥니다.
예수님의 제자냐고 물을 때에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신분을 감춥니다. 무리 속에 함께 속해서 신분을 감추고 있는 모습이 오늘 우리 모습이 아닙니까? 교회에서는 거룩한 성도인데 직장에 가서는 교회에 다니는지 아닌지 모른다면 베드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분은 교회에서는 거룩한데 밖에 나가서는 담배를 못 끊어서 피우고 다닌다고 합니다. 제가 못 보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잘 모르지만 몇 분은 우리교회에도 계신 것 같습니다.
동두천 어느 교회 유명한 부흥강사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교회 집사 한분이 담배를 피운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마침 어디를 갔다 오다가 골목에서 그 집사님이 담배를 피우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보통 때 같으면 그분 인격을 생각해서 피해주었을 텐데 그날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목사님을 만나자 얼마나 다급했던지 담배를 피우다가 호주머니에 넣어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다 아시면서도 능청을 떨면서 한참을 붙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망신을 톡톡히 당한 뒤에 그분은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가 부인한 농도는 점점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어느 하녀가 “너 갈릴리에서 왔지?”라고 했을 때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묻자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셋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갈수록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잘못되는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타락하지 않아야합니다. 죄는 점진적으로 더욱 나빠집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모든 것을 교훈 삼아 영적으로 잠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닭 소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시대를 알리는 소리입니다.
지금은 새벽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에 보니 밤중입니다. 죄악의 밤중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고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런 시대이므로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닭소리는 시대를 알려주고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설교가 베드로가 들은 새벽 닭소리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정신 차리라’고 오늘 목사를 통해서 이 설교를 주시는구나!’라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음란한 시대입니다.
극도의 음란과 육신의 쾌락, 안일주의를 추구하는 시대, 모든 상품이 성과 관련되어 광고하고 있는 시대, 그래서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편하게 살려고 동거하는 문화가 보편화 되고 있으며,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입니다.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또한 음란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라고 있는데 장래가 큰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성공회에서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 주교가 되어서 야단이 났습니다. 이것이 우리시대입니다. 빨리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집니다.
둘째는 이시대의 특징은 혼돈의 시대입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질서가 혼돈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 이십니다. 곡식이 클 때는 질서 있게 크다가 열매가 다 익으면 넘어지면서 헝클어집니다. 그때 낫을 대고 추수합니다. 그때가 지금의 시대입니다.
여러분, 호주제를 폐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을 왜 가집니까? 성 필요 없이 이름만 가지고 살지 왜 그렇게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가 아닙니다. 그 외에도 대법관을 임명하는데 서열과 기수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혼란이 생기겠습니까! 성경의 원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을 존경하고 질서를 따르라는 것인데 이러한 모든 것이 뒤죽 박죽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 온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순리를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기억하시고 말씀 충만하시고, 기도로 무장해서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신부의 옷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시며 때가 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새벽 닭소리는 주의 말씀이 기억나며, 자신의 잘못이 기억나는 소리입니다.
닭소리를 듣더니 예수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자기가 큰소리 쳤던 것이 기억나서 그래서 통곡을 하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잠을 자면 말을 못 듣습니다. 귀가 멀게 됩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 못 듣는 분들은 잠자는 분들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졸기 시작하고, 설교가 끝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집에 가면 잠을 실컷 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오셔서 설교 말씀이 들리기만 하면 그분은 삽니다. 그분은 변화되는 사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가다가 냇가를 건너니 거기에 어떤 젊은 자매가 대바구니에 옷을 세탁해서 행구고 있다가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저는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언제 무슨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느냐”고 하자, 그것은 잘 모르지만 꼭 이 옷을 빠는 것과 같아서 바구니를 들면 물이 빠지는데 물이 빠져도 옷은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기만 하면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회개의 기회를 알리는 소리입니다.
그때 나가서 통곡을 하며 울었다고 했는데 기독교 신앙은 가장 핵심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시작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회개했는지 안했는지를 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할 때에 모든 문제가 주님 앞에 해결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회개합니까? 베드로가 자만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잠을 잘 때에는 자기가 교만한줄 모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나니 이전에 자기가 수제자라고 했고, 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마음속에 가진 자부심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 통곡했습니다. 통곡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부끄러움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나와서 부끄러운 줄 알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 이렇게 봉사해서 되겠나? 부끄러운 줄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회개는 우리를 살리지만 후회는 아닙니다. 베드로는 회개해서 살았고, 가롯 유다는 후회하다가 죽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고, 후회는 인간 스스로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회개한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베드로만큼 부자가 없을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베드로 성당이 있는데 참으로 큽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 베드로라는 이름이 붙은 예배당은 헤아릴 수 없고, 또한 성 베드로 병원만 숫자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역사에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없습니다. 회개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항상 깨어 있기 바랍니다. 또한 잘못했을 때는 회개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새벽에 닭소리를 들은 베드로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다 이 시대를 알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회개하고 새롭게 주 앞에 드릴 수 있는, 주 앞에 깨끗이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새벽닭의 울음소리
마 26:69-75 / 박상훈목사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0세기 초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여객선 한 척이 영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배는 선실에 물이 차더라도 부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도록 특수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절대로 침몰하는 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1912년 4월 14일, 그 배는 2,200명이 넘는 많은 승객을 태우고서 첫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영국을 출발해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뉴욕 항구로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덧 밤이 깊었습니다. 배는 대서양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들떴던 승객들의 마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처를 지나가던 배에서 그 배로 무선전문이 날아왔습니다. 전문의 내용은 항로 앞에 큰 빙산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선사는 그 전문을 받아 쥐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 배는 그까짓 빙산 따위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배야!"
그러나 똑같은 전문이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날아왔을 때, 무선사는 어쩔 수 없이 전문을 들고서 선장에게로 갔습니다. 선장도 그 전문을 받아 쥐더니 픽 웃으면서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똑같은 전문이 계속해서 날아왔습니다.
"항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빙산과 충돌할 것이다!"
그 전문을 받아든 선장은 역정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어림없는 소리! 아니, 그까짓 빙산 때문에 항로를 바꾸라고? 설사 이 배가 빙산과 충돌한다 할지라도 이 배는 끄떡하지 않을 배야! 절대로 침몰하지 않을 배야!"
그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난 뒤 결국 그 배는 빙산과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배는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수심이 4,000m가 넘는 깊은 바다 속에 침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2,200명이 넘는 승객 가운데서 겨우 700명 남짓한 사람들만이 구조 받았을 뿐입니다. 나머지 1,500명이 넘는 승객들은 물에 빠져서 죽고, 물위에 떠 있다가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타이타닉호입니다. 절대로 침몰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했던 배였습니다. 그까짓 빙산에 충돌해도 끄떡하지 않으리라고 큰소리쳤던 배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처구니없게도 빙산에 충돌해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애당초부터 우리 인간들에게는 "절대로,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베드로도 큰 소리치다가 뼈저린 실패를 겪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를 쳤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은 마음대로 깎아 내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모습은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치는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 자신의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베드로는 당연히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서 "오,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라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또 장담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는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배신해 버렸습니다. 비겁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오늘 본문 75절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심히 통곡하면서 철저하게 자기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심금을 울렸던 새벽 닭의 울음소리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교만을 깨뜨리는 소리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다짐시키는 소리입니다. 새벽 닭의 울음소리가 이 아침 우리에게도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잘못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한데 있었습니다.
큰소리치거나 떠벌리는 사람치고 실속있는 사람은 보기 드뭅니다. 우리가 이따금씩 서부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총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언제나 큰소리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총에 맞아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없습니다. 모자를 지그시 눌러 쓰고서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 총을 뺏는지 번개같이 총을 빼들어 상대편을 쏘아 넘어뜨립니다. 그리고 나서도 주인공은 말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보다도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러면서 큰 소리쳤던 베드로는 얼마나 비겁한지,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지금 누구 앞에서 큰 소리쳤습니까? 로마의 군병이 칼이라도 빼들고 그의 목을 겨누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69절 말씀(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입니다.
여기서 비자는 계집종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하찮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또 7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두번째 역시 하찮은 여종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73절에 보니까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라고 했습니다. 그저 구경꾼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강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70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냥 부인만 했습니다. 두번째는 72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맹세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74절에 보니까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저주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벼락이라도 내리시기를 원한다!"
이런 뜻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이렇게 약해질 수 있다면 우리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차를 몰던 마부가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마부를 고용해야 되었습니다. 세 명의 마부가 지원을 해서 그들을 면접하게 되었습니다. 귀부인은 그 사람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니까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내 마차를 몰다가 아주 가파른 낭떠러지 길에 이르렀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러면 마차바퀴에서 얼마정도 여유가 있어야 당신들은 내 마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첫번째 마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대략 30cm정도 여유만 있으면 충분히 마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마부는 좀 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퀴에서 5cm정도만 떨어져도 얼마든지 마차를 안전하게 몰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부인께서 경치를 마음껏 구경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번째 마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만일 부인의 마차를 몰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저는 가급적이면 마차를 낭떠러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서 몰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귀부인이시라면,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세번째 사람을 택할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할지라도 실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0:12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 줄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늘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 압니다. 베드로는 너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과신했습니다. 그러다가 선 줄로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넘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든 제자들이 잠만 잤습니다. 여러분, 이따금씩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애를 태울 때입니다. 그 때 제일 화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잠이 안와서 애를 쓰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면서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옆으로 눕혀 코고는 것을 조금 덜 골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일부러 깨어 있으면서 나와 말동무해 주는 사람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다른 제자들은 다 잠잔다 할지라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이라고 큰 소리쳤던 베드로만큼은 깨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말과 다른 행동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잠든 제자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십일을 금식하면서 같이 기도하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일 동안 철야기도하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껏해야 하룻밤입니다.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못할 만큼 무슨 중병에라도 걸렸습니까? 허리라도 부러졌습니까? 문제는 그의 정신상태입니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깨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가 약한 존재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깨어있을 필요도 못 느꼈고, 기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잠만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시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마구 몰려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었습니다. 귀만 베었기에 망정이지, 그 칼에 말고의 목이라도 달아났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큰 일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뿐만 아니고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철저하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비겁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 일을 회상하면서, 뒤에 벧전5: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면 베드로처럼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면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병들어서 다 죽게 되고 난 뒤에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께 미리미리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다 망하고 난 뒤에 회복시켜 달라고 울부짖지 말고, 미리미리 내가 하는 일을 축복해 주시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 날 밤에 베드로만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의 갈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면 더 나을 뻔한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도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철저하게 배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는 75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철저하게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뒤에도 예수님의 사도로서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에게 75절의 말씀이 없었다면 그도 가룟 유다와 같은 운명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75절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우리는 본문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의 행동을 세 가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에게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났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습니다. 곧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잊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잘못된 길로 나아갔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우리가 그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시1:1을 보시기 바랍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베드로는 죄악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리, 아직도 믿지 않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자리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을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가 어디로 나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추측컨대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으로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땀 흘리시면서 기도하신 그 자리에 베드로는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겟세마네 동산을 적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날 밤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쳤던 자신의 자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안일하게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던 자신의 나태함에 대해서도 회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칼을 휘둘렀던 자신의 혈기에 대해서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비겁함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이와 같은 철저한 회개가 있었기에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 다시 그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의 약함도 이해해 줄 줄 아는 넓은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에 앞서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베드로의 심금을 울렸던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우리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죄악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오십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다. 주께서 눈물샘이 터지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강물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베드로가 새 사람이 된 것처럼, 주께서 우리 모두도 새로운 사람, 거듭난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이 아침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