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병마용갱은 '20세기 중대한 세계 고고학 발견중의 하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汉)나라의 사학자 사마천(司马迁)의 '사기(史记)'에는 진시황릉 건축의 호화로움과 배장(陪葬)의 풍부함 그리고 진시황릉 지하궁전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재돼 있지만 진시황릉 동쪽 1.5km에 있는 병마용갱에 대해서는 한 글자의 기록도 없었고 역대 역사서에서도 병마용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본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의 전시홀이 밝고 광장 또한 넓고 평탄하지만 30년 전 병마용이 발견되기 전에는 이곳이 감나무숲이었고 주변은 현지 마을 사람들의 묘지였으며 밤중에 늑대가 자주 출몰한 매우 황량한 곳이였습니다.
1974년 3월, 임동현 서양촌(临潼县.西杨村)에서는 봄가물로 물이 부족해지자 생산대는 가뭄을 대처하기 위해 마을 남쪽에서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우 공교롭게도 우물을 파기로 결정된 곳이 1호갱 동쪽 끝에 있는 갱 가장자리였습니다. 우물을 3m 깊이 까지 팠을 때 농민들은 벌겋게 태운 흙덩이와 도용(陶俑) 조각들을 발견하였고 4m 남짓 깊이 까지 파냈을 때 는 벽돌을 깐 바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때 인민공사의 수보원(水保员.농지보존관리원)이 마을에 와서 우물파기 진행상황을 검사하였는 데 이 도용 조각들을 보고 유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농민들에게 우물파기를 중지시키고 즉시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임동현 현지 문화관의 문물 간부 조강민(赵康民)이 현장에 들어가 산실된 문물을 수집하는 한편, 파손된 도자기 조각을 접착하고 보수하였습니다.
마침 이때 가족 방문하러 임동에 돌아온 중국신문사의 기자 린안온(蔺安稳)이 이러한 도용을 보고 매우 놀랐으며 북경에 돌아온 후 그는 즉시 '인민일보(人民日报)'에서 편집 인쇄한 '정황휘편(情况汇编)' 2396기에 임동에서 진나라때의 대형 도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발표하였습니다.
리선념(李先念) 당시 국무원 부총리는 "문물국은 섬서성 당위원회와 상의해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여 이 중점 문물을 적절하게 보호할 것을 건의한다"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어 국가문물국에서 전문가를 파견하여 현장을 시찰했고 성문물국에서도 진시황 병마용 고고학팀을 발굴 현장에 파견했습니다.
처음에 고고대원들은 이곳이 그리 크지 않은 고대 유적지일 것이라고 여겼는데 파면 팔수로 유물이 늘어날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965㎡의 시굴(试掘) 장소에서 실제 사람이랑 말과 비슷한 도용 500여 점, 도마(陶马.도자기 말) 24마리, 목제 전차(战车) 6승과 대량의 청동병기(兵器), 차마기(车马器) 등을 발굴하였고 고고학 발굴로 이곳이 2,000여년전 진시황릉원의 대형 병마용 배장갱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의 장안성, 반부의 중국사'라는 말이 있는 듯, 중국의 수많은 유명한 고대사 이야기가 시안에서 펼쳐졌습니다. 시안에 오래간 거주하다 보니 저절로 역사에 대해 흥미가 생기게 된거 같고 언젠가 무미건조하게 생각한 역사서적들은 소설책 마냥 재미있게 읽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시안에서 직접 보고, 찾은 유적과 들은 역사이야기에 역사사료를 참고해서 세분화된 '시안역사관광모음집'을 정리중인데 중국 고대사를 좋아하신 분들, 시안여행계획을 잡은 분들 한번 찾아 읽어주시면 감사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 다른 견해나 지도글, 지적글을 남겨주시면 앞으로 차츰 완비해 나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