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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하늘은 언제나 푸르다
< 5 > 비, 구름, 하늘 그리고 해
재호가 교실을 나간 것과 동시에 지애가 고개를 들었다. 정연이 쳐다보자 두 팔을 쭉 펴고 하품을 했다. 교복이 올라가면서 배꼽이 살짝 보였다. 하지만 지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정연을 바라보며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간식 먹을 시간 지났지? 배고파. 빵 먹고 싶다. 아! 떡볶이 먹고 싶어. 콜라도. 그리고 … 에이씨. 다 먹고 싶잖아. 안 되겠다. 매점 가자.”
먹고 싶은 것을 잔뜩 늘어놓더니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 눈을 동글동글하게 뜬 지애가 정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 가지에 열중하면 그것 밖에 몰랐다. 졸리면 꼭 자야했고, 배가 고프면 든든하게 속을 채워줘야 했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아이가 지애였다. 그건 사람을 사귀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믿었다. 순수한 지애의 모습에 어느새 물들어 버렸다. 배를 쓰다듬으며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지애를 뒤따라갔다.
생각 외로 매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시계를 보니 쉬는 시간이 3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애는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내들었다. 팥빵에다가 콜라 새우깡을 먹나? 아니야 꽃게가 맛있지? 라고 지애는 연신 중얼 거리면서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같은 반 남자애가 매점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200원에 해줘요.”
500원짜리 소시지를 200원에 달라고 남자애는 조르고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재호가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손에는 빵과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매점 아주머니는 애교 섞인 남자애의 목소리에 한 손은 입가로 가져가고 한 손에는 소시지를 든 채 혼자 키득키득 웃더니 말했다.
“그럼 요거 반에 200원에 해줄게.”
“그냥 그거 하나 다 주세요. 네?”
“이거 반에 200원에 준다니까. 키득.”
“누나. 진짜 200원 밖에 없어요.”
“알았어. 키득. 이번 한번만이야.”
“고마워요, 누나.”
입으로는 연신 키득키득 웃으며 눈으로는 반 아이를 흘기더니, 매점 아주머니는 소시지 값을 깎아주었다. 낚아채듯 소시지를 받아들고 재호 옆으로 다가간 남자애는 소시지를 까며 이죽거렸다.
“누나라고 해주니까 좋아하기는. 지가 귀여운 줄 알아.”
중얼거리는 것도 멈춘 채 지애는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재호가 바라보자 숨을 들이키던 지애는 남자애의 말에 급기야 폭소를 터트렸다.
“아, 새끼. 진짜 골 때린다. 파하하하하하하.”
눈물을 찔끔 거리며 배를 쥐어 잡고 웃고 있는 지애를 보더니, 남자애는 톡 쏘아댔다.
“지남이 너 뭐하냐?”
남자같이 서글서글한 지애의 별명이 지남이었다. 한참 웃어재끼던 지애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온 몸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남자애를 향해 달려갔다.
“너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거기 안 서?”
“야, 오지 마!”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남자애는 급기야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애를 잡기위해 지애도 있는 힘껏 뛰어갔다. 멀뚱히 지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연의 시선이 재호에게 향했다.
재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전, 수업시간에 재호는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조용히 있기엔 그게 편했다. 얼마를 누워 있었는지, 어쩐지 정연의 시선이 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정연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운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드디어 미쳤구나, 김재호.’
속으로 비웃었다. 왜 정연을 자신을 바라보았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허탈해져 교실 문을 열고 나오자, 친구 녀석이 매점에 가자며 따라 나왔다. 멀찍이 떨어져 녀석이 매점 아줌마와 실랑이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해서 돌아보자 지애와 정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연은 살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내내 시선이 정연에게 향했고 그래서였는지 작은 변화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엔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만 보던 아이가 요즘 들어 아주 가끔은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에 땀이 차올랐다. 지애와 친구 녀석이 장난치듯 사라지고 나서야 재호는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서 깨어났을 때, 둘만 남았고, 정연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자 재호는 당황을 숨기려 툭하니 말을 던졌다.
“뭐 사러 온 거 아냐?”
“아, 지애가…….”
정연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종소리가 울렸다. 재호는 손에 들린 빵 봉지를 정연에게 내밀었다.
“받아.”
“아냐, 괜찮아.”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이 곧 손을 내저었다. 손에 들린 빵 봉지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번쯤은 호의를 말없이 받아들여도 좋을 텐데… 재호는 조금 화가나 퉁명스레 말했다.
“……지애는 배고프면 시끄러우니까…….”
분명 지애에게 주면 정연도 같이 먹을 꺼라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 같이 먹어, 라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제야 주섬주섬 빵을 받는 정연이었다. 빵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연의 시선이 어색해진 재호가 말했다.
“수업 시작 했는데 안 가?”
항상 괴롭히고 자신의 한 마디에 적어도 열 마디는 하는 여자들을 봐와서 그런지, 차분하고 조용한 정연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래서 말을 돌리거나 퉁명스레 말하게 됐다. 이번에도 습관처럼 톡 내뱉은 말에 정연은 깜짝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다가 뛰어갔다. 정연이 뛰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재호도 행여 놓칠세라 교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깐죽거리는 같은 반 남자애를 겨우 따라잡아 몇 대 때려주었을 때 수업 종이 울렸다. 교실로 돌아오니, 당연히 반에 돌아가 있겠거니 생각했던 정연도 그리고 재호도 보이지 않았다. 빈 두 자리를 보며 지애는 한숨 쉬었다. 그렇게 흥분하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후회해 보았자 엎질러진 일이었다. 아마 지금 또 누가 자신을 지남이라고 놀린다면 발끈할 것이었다. 자신은 지남이란 별명이 싫었고, 특히 재호 앞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 왜인지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싫은 걸 참고 넘어 갈 성격도 아니었다. 아까 일을 떠오르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교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정연이 들어오고 뒤따라 재호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와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 사이, 정연이 자리에 와서 앉았다.
“미안, 그 자식 때문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지애에게 정연은 빵을 내밀었다. 지애의 표정이 곧 밝아졌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고팠던 배가 한참 요동치고 있었다.
“역시 친구 밖에 없어. 안 그래도 얼마나 배고팠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고는, 봉투를 뜯어 빵을 한 점 떼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냐, 내가 주는 게 아니라 재호가 주는 거야.”
“어?….”
예상치 못한 정연의 말에 지애는 빵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목에 걸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얼굴이 빨개졌다.
“괜찮아?”
정연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지애는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정연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된 지애는 괜찮다는 듯 남은 빵을 한 입에 모조리 집어넣고 몇 번 씹고는 그대로 꿀꺽 삼켰다. 입안이 퍽퍽해지자 침을 모아 꼴깍 삼켰다. 빵 봉지를 바라보는 재호를 발견하고 큭큭 웃었다.
“야야, 김재호 땡큐.”
“시끄러.”
재호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지애는 시끄럽다는 재호의 말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 지애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긴 교복 치마가 바닥에 끌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 누가 먹고 버린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눈에 띠었다. 막대를 집어 들고 한참 바닥을 응시하던 지애는 가만히 재호의 이름을 적어보았다. 그리고는 누가 보았을 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란 지애는 서둘러 바닥에 적힌 재호의 이름을 지웠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이내 지애는 지금 기다리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바닥에 다시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하자 주저앉을까 고민하며 바닥에 메롱의 ‘ㅇ’을 다 그렸을 때 삐걱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교복 바지에 한 손을 집어넣은 채 나오다, 지애를 발견 하고 흘깃 쳐다보는 남자 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자신을 너무도 잘 안 다는 듯한 목소리. 그게 못마땅한 지애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같이 가려고 기다렸다. 왜! 그럼 안 돼?”
퉁명스런 대답에도 지혁은 그저 슬며시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어서. 17년 한동네 살면서 이 시각에 너를 보는 건 처음이라서 적응이 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린 거였다. 그랬는데도 막상 지혁의 저런 태도에 신경질부터 났다. 항상 그랬다. 같은 해에 태어났으면서도 마치 어른처럼 여유롭기만 한 녀석이 가끔씩은 너무도 얄미운 지애였다. 지금처럼 자신을 잘 안다는 것 같은 말투는 더더욱 신경질 났다.
“에이씨.”
애초에 저 녀석에게 뭘 물어보기로 한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었어. 지애는 씩씩 거리며 지혁을 지나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찬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꼭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눈치 빠른 너는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고. 이상형이란 그 말이 그런 의미였냐고. 밤 잠 설치며 했던 고민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와 지애의 발걸음을 자꾸 늘어지게 만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걱정 섞인 목소리에 지애는 결국 멈춰 섰다. 어느새 옆에 와 서 있는 지혁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녀석의 이런 얼굴을 한 번 더 본적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연기자가 되고 싶어서, 예고에 가겠다는 자신이 아빠의 반대에 부딪혀 울며 집을 나왔을 때였다. 한참 거리를 헤매다 결국 돌아오고 만 집. 하지만 차마 들어 갈 수 없어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심부름을 하려 나오던 지혁이 자신을 발견하고 저런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에 다시 쏟아져 내렸던 눈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을 땐,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까맣게 변해 있었고, 지혁은 그때까지 가만히 옆에 있어주었다. 능글능글 다 안다는 듯 언제나 마주치면 잔소리만 해 오던 녀석이었는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무심한 눈동자가 가만히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아끼던 머리를 짧게 자르면서 끝까지 싸워보았지만 결국 예고에는 갈 수 없었다.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자 내심 자포자기,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혁과 같은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벌써 몇 달이 흘렀다. 그때 일을 잠시 잊고 지냈구나. 지애는 새삼 놀랐다.
‘쉽게 잊을 수 있었던 건 그 애 때문이었을까?’
입학 첫 날, 지애더러 남자라고 놀리던 몇몇 남자아이더러 시끄럽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재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그 애를 좋아한 게. 지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일인데?”
생각에 빠져 잔뜩 어두워진 지애의 얼굴을 보며 지혁이 재차 물었다.
항상 어른인 척 하는 지혁이 솔직히 밥맛이었지만, 내심 힘든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생각이 났다. 처음으로 가출했었던 날, 말없이 지켜봐주었던 그날 이후, 조금쯤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눈치 빠른 녀석이라 말을 꺼내면 바로 알아차릴 거였다.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모르는 척 해주는 거라면 그냥 가만히 묻어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지혁을 본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를 통해 확인하게 되면, 멈출 수 없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아니, 사실은 밤이 지나자 미칠 것 같던 감정이 가라앉고 용기가 사라져버렸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지애는 팔을 들어 지혁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는 지혁의 복부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어쩐지 약이 올라 힘을 약간 실었더니 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를 향해 뛰어가며 소리쳤다.
“어제 내 머리 만진 벌이야. 내가 널 왜 기다리냐, 복수하기 위해서지. 속았지? 바보. 캬캬캬”
이거 진짜 무슨 일 있나본데. 지혁은 아픈 배를 감싸며 생각했다. 저렇게 억지웃음 지으면서, 장난처럼 말하면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긴 한숨과 함께 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나 활기찬 아이가 지애였다. 몇 달 전 활발하던 아이가 한동안 가라앉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별 일 아니겠거니 넘겼었다. 아니, 겉으로는 여전히 명랑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눈빛이 틀렸다. 웃고 있어도 눈빛에 힘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아픈데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안 건 며칠 뒤 지애의 눈물을 보고 나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여자는 강한척해도 약하다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힘들 때까지 몰랐다는 사실에 충격도 많이 받았다. 배신감보다 무심한 자신한테 화가 났다. 녀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이번에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려는 걸까? 심각한 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 자신과는 달리 감정에 많이 치우치는 지애였다. 그런 열정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자칫 상처 입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결국엔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게 힘이 되길 바라는 수밖에. 지혁은 지애를 놓칠 새라 뛰기 시작했다.
교문까지 쉼 없이 달려 왔을 때 지혁은 운동장에 멈춰서 한곳을 응시하는 지애를 겨우 따라잡았다.
“바보, 도망친 곳이 겨우 여기냐?”
지혁이 지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물었다. 지혁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지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쳐다보았다. 의아함을 느낀 지혁의 시선이 멈춘 곳은 찰랑이는 긴 생머리의 소녀의 모습이었다.
저 애는…
“네, 이상형?”
“어?”
지혁이 정연을 바라보며 물어오자 지애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커다란 눈으로 다시금 고개를 정연에게로 돌렸을 때, 지애는 정연의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재호를 발견했다. 자신에게는 늘상 찌푸린 얼굴만 보여주었는데… 지애는 끝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네 친구 아냐?”
물어오는 지혁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하고 말했다. 엉켜버린 생각들 사이,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 한가닥 튀어 나왔다. 차마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말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지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형이라니?”
“난 쟤를 보면 네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김인애나 이민영이 생각나더라. 네 이상형이잖아.”
많이 달라서 많이 싸웠다. 이젠 그런 다른 점이 더 익숙하지만 한 땐 너무 다르기 때문에, 통하는 부분이 오히려 신기할 때가 있었다. 다른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 예전처럼 자주 마주치지 않던 여름방학이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지애네 집에 갔다가 놀다가라는 아주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소파에 앉게 되었다. 지애는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함께 보게 되었다. 화면에는 큰 스케일에 쟁쟁한 배우로 한때 떠들썩했던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내심 여배우가 예쁘고 연기도 잘한다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지애도 여배우가 나올 때마다 여지없이 예쁘다고, 멋지다고, 연기 정말 잘한다고 감탄했다. 그후로 가끔 서로 비디오가게에서 만나 함께 영화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묘하게 남자인 자신이 봐도 멋지다 싶은 여자배우를 지애도 좋아하고 있었다. 저 녀석과 여자 취향이 똑같다니. 하고 한동안 신기해했었다.
어제 지애네 반에 책을 가지러 갔을 때 한낮 복도의 햇살을 받으며 오던 긴 머리의 여자애를 보았을 때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저런 느낌을 낼 수도 있구나, 신기했다. 차분하고 주변이 마치 무중력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였다. 저 애가 지애가 매일 이야기하는 같은 반 예쁜 친구구나, 한 눈에 알았다. 말을 걸었을 땐 약간 긴장이 되었다. 긴장이라니, 의식하고 보자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지혁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여자애의 긴 머리를 바라보며 어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김인애와 이민영, 이상형이라니? 지혁의 곁에서 지애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재호 옆에 있는 정연을 보았을 때 아, 하고 깨달았다. 전율과 동시에 허탈함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 의미였다니! 지혁의 이상형이란 말이 재호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정연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밤 잠 설쳐 했던 고민들이 결국 오해였단 사실에 지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애야!”
자신을 발견한 정연이 손을 흔들며 불렀을 때,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던 재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잠시 멈추었던 것 같았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었다. 재호의 눈길이 계속 자신을 향해있자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해졌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지애는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버렸다. 상황이 어떻게 됐든 재호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예전처럼 재호를 편하게 대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댔다.
“일찍 왔네. 그러고 보니 등굣길에 만나는 건 처음이네.”
“어? 어.”
정연이 사뿐히 달려와 옆에서 말을 건넸을 때 깜짝 놀랐다. 빨간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았다. 긴장하니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혹시 눈치 채진 않을까, 지애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숨을 들이켰다. 아직 식지 않은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긴장을 숨기려 지애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하하하. 매일 지각하기 전에 들어갔는데. 근데 쉬엄쉬엄 걸어가는 거 내 체질에 안 맞는 거 같아. 몸이 근질거리는 게. 역시 뛰어야 등교하는 느낌이 나지. 나 먼저 교실로 가 있는다.”
빨개진 얼굴이 들킬 새라 지애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운동장을 뛰어갔다.
그런 지애를 보고 슬며시 웃고 있는 정연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이 느껴져 올려다보자 뛰어가는 지애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 남자애가 보고 있는 사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음을 그친 지혁에게서 제법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도 꽤나 힘들겠다.”
“?”
“저 녀석이 워낙 철부지라 같이 다니려면 고생 꽤나 할 걸.”
아니라고, 한마디 하려던 정연의 입이 지혁의 다음 말에 의해 닫혔다.
“하지만 착한 녀석이니까, 잘 부탁한다.”
지혁은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신경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말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사실 지혁은 그것보다 솔직히 지금은 다른 생각에 더 빠져있었다. 왜 어제 한번 본 아이에게 선뜻 말을 걸었을까, 옆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빠져있는 긴 머리의 여자애를 의식하며 재차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첫댓글 지애가 맘고생이 심하겠어요 정연이한테 질투많이 날텐데,,,
지애 별명이 한때 제 별명이였는데 친근하네요ㅠ.ㅠ 지애와 지혁이 정연이 재호 이 네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 흥미로워보여요 그런데 갑자기 지애가 안됐다ㅠㅠ 오늘도 달나무님 예쁜 수채화같은 소설 잘봤습니다 건필하시길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