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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서글픈 사랑
황약사와 함께 도화도로 돌아온 아형은 《구음진경》 한 권을 전부 묵사(默寫)해 냈다.
황약사는 대단한 일을 해낸 아형이 장하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기억력은 따르지 못할 거요."
"《구음진경》상권만 얻으면 이 책은 완벽해질 거예요."
아형도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상권을 얻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겠소."
황약사가 《구음진경》을 읽어 보니 확실히 그 내용이 심오하고도 광범위했다. 그러나 《구음진경》을 완벽하게 터득하려면 상권을 먼저 읽어야 했다. 수련에 필요한 입문 지식과 법문(法門)이 상권에 있는 모양인데 그것을 모르고서는 《구음진경》하권에 있는 초인간적인 무공들을 습득할 수가 없었다.
"이 《구음진경》하권을 잘 보관해 놓았다가 나중에 상권을 구하면 그때 함께 보고 익혀야겠소."
황약사는 사랑스런 아내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덧 아형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황약사는 매일 아형과 마주앉아 시와 문장을 담론했다.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면서 매일 시를 논하시는군요. 애를 장원 급제라도 시킬 작정이세요?"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장원 급제? 그 따위는 해서 뭘 하오. 사내아이라면 절세의 무공을 지니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여자들이 잘 따른단 말이오."
그러자 아형이 피식 웃었다.
"여자애라면 풍류를 알아야 남자들의 이목을 끌지요."
그렇게 말하는 아형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미화·병묘·치음 삼대 공자는 말할 것 없고 태호방 방주 필소해나 학 영감까지 아형에게 반해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여자는 풍류를 알아야 사내들의 이목을 끈다는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만일 딸을 낳으면 이름을 용아(蓉兒)라고 하는 게 어떻소?"
황약사가 물었다.
"용아요? 무슨 용자인데요? 용이(容易)하다는 용(容)자인가요, 부용(芙蓉)이라는 용(蓉)자인가요?"
"물론 부용이라는 용 자를 써야지. 맑은 물 위에 피어난 부용처럼 예쁘고 총명하라고 말이오. 당신처럼."
두 사람은 정이 가득 담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한편 황약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육승풍 등 세 명은 원래 내공과 외력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자 그 무공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 셋은 황약사를 더욱더 숭배하게 되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의 무공은 그들 세 사람을 따르지 못했지만 황약사는 오히려 이 두사람의 전도가 더 밝다고 말했다. 이들은 나이도 육승풍네보다 어렸고, 전에 무공을 익힌 적이 없었으므로 도화도의 내공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 것이다. 진현풍은 장력 (掌力)을 수련하고 있었으므로 황약사는 그에게 천하장법(天下掌法)을 가르쳤다. 그리고 매초풍은 긴 채찍인 장편(長鞭)을 썼으므로 독룡십팔식 (獨龍十八式)과 기연산 조씨 삼십육편(祁連山趙氏三十六鞭)을 가르쳤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그들의 사제인 육승풍네보다 더욱 열심히 무공을 배웠다. 그들 둘은 건강성 내의 염방사람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무공을 다 익힌 후에 그들을 처참하게 죽일 작정이었다.
어느 날 하루의 수련을 마친 진현풍과 매초풍은 복숭아 나무 아래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현풍은 매초풍과 단둘이 있으면 은근히 겁이 났다. 매초풍의 성미가 점점 더 괴팍해져서 걸핏하면 발칵발칵 성을 내는 통에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쩔쩔 매곤 했다. 언제나처럼 매초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형 생각엔 무림에서 우리 사부님을 이길 사람이 누구 같아요?"
진현풍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이전에는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 했지. 왕중양이 죽은 지금은 나머지 몇의 실력이 사부님과 엇비슷하다더군. 개방 방주 홍칠공, 대리 황제 남제 단지흥, 서독 구양봉, 이들 모두 무림에서는 첫손 꼽히는 고수들이 지."
매초풍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형은 사부님한테 헛 배웠군요. 자기 사부님도 잘 모르면서 나한테 어떻게 사형 노릇을 한단 말이에요? 정말 가소롭군요."
진현풍은 눈을 둥글게 뜨고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서독 구양봉이 독하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사부님보다 독하진 못해요."
진현풍은 깜짝 놀라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사매, 무슨 말을 그렇게……."
진현풍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떨려 나왔다. 이 말이 사부님의 귀에 들어가면 매초풍이 야단맞는 건 물론 자기까지 크게 혼날 것이었다.
"겁낼 필요 없어요. 사형이 한 말도 아니고 내가 한 말인데……. 우리 사부님은 일생 동안 숱한 사람을 죽였는데 한결같이 강호에서 명성 높은 자들이었어요. 사부님이 부리고 있는 노복들을 봐요. 사부님한테 귀가 멀고 혀를 잘려 병신이 되었는데도 제 발로 찾아와 종 노릇을 하고 있잖아요. 그들 모두 옛날에는 강호에서 큰소리치고 다니던 실력자들이었어요. 이것만 봐도 사부님이 구양봉보다 세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진현풍은 머리를 끄덕였다.
매초풍은 계속 종알거렸다.
"북개 홍칠공도 우리 사구님보다 강하지 못해요. 홍칠공이 악인들만 골라 백 명도 넘게 죽였다고 해서 평판이 제일 좋은 모양인데, 사실 백 명이 뭐 그리 대단해요? 우리 사부님은 해마다 중원에서 몇십 명씩 악인들을 잡아 오는데, 홍칠공은 악인들을 그냥 죽여 버리지만 우리 사부님은 병신을 만들어 한평생 고생을 하다가 죽게 하잖아요."
"글쎄, 이치가 있는 말이긴 한데……"
진현풍이 수긍하자 매초풍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남제 단지흥과 비교해도 사부님이 못할 게 없죠. 이름은 무슨 제왕이나 황제 같지만 문무도략(文武稻略)이나 기문술수(奇門術數)로 말하자면 우리 사부님도 무소부지(無所不知), 무소불통(無所不通)이거든요. 우리 사부님이 생각이 없으니 그렇지 정말 황제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천하를 독차지했을 거예요."
"사매 말이 옳긴 옳아."
진현풍이 맞장구를 치자 매초풍은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그리고 사모님에 대한 사부님의 애틋한 정을 보아도 다른 남자들한테선 찾아볼 수 없는 면이 있어요. 사부님의 장점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은 바로 정이 많다는 거예요. 북개는 일생 동안 여색엔 접근도 하지 않는 무정한 인간이니, 따지고 보면 영웅도 아니죠. 그런가 하면 남제 단지흥은 엄청난 후궁과 궁녀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참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서독 구양봉은 여인을 가지고 놀 줄밖에 모르니 역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천하에서 인물
잘나고, 여인에게 사랑을 쏟을 줄 알고, 풍류를 아시면서도 무공이 제일인 분이 우리 사부님이 아니고 누구겠어요?"
매초풍은 말을 마치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진현풍은 속으로 적이 놀랐다. 매초풍이 사부님에게 반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제자라면 사부님께 마땅히 존경심을 가져야지, 그 외의 사념을 가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진현풍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훌륭하셔도 우리한텐 사부님일 뿐이니, 분수에 넘치는 생각은 하지 말아."
그 말에 발끈한 매초풍은 매서운 눈길로 진현풍을 쏘아보았다.
"사형, 지금 질투하나요? 그렇다면 사형이 날 좋아하는 거예요?
진현풍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윤기가 흐르는 매초풍의 검은 머리에서 청결하고 달콤한 처녀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매초풍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건강부 거부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참변을 당하여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황약사가 목숨을 구해 주어 그를 사부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제 두 사람 모두 이성에 눈뜰 나이였다. 매초풍의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찔해진 진현풍은 그녀의 매서운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사형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 알아요? 사형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부님 발꿈치도 못 따라가요.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사형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난 진현풍 역시 기개가 있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칭찬만 해주었더니 이 계집애가 나를 아주 우습게 아는군.'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매초풍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정말…… 이게……."
하지만 연약한 여자를 때릴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매초풍의 멱살을 잡은 채 바보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게 정말……."
매초풍은 여전히 진현풍을 쏘아보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이 손 놔요. 당장 놓지 않으면 사부님께 일러바칠 거예요. 사부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사형 목숨은 끝장이라구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겁이 덜컥 났다. 사부님과 나이가 비슷한 사제들도 사부님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노하면 어떤 벌을 내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데, 종종 그 벌이 너무나 참혹했다. 진현풍은 사부님의 벌을 생각하자 손이 떨려서 매초풍을 얼른 놔주었다.
"일러바치라지. 사부님이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왜 안 믿어요? 내 머리를 수세미처럼 헝클어뜨리고 옷을 북북 찢은 뒤 울며 말하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안 믿으실 수 있겠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진현풍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둘이 한참 다투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사람 살려!" 하는 비명이 들려 왔다. 둘은 깜짝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사나이가 아이 하나를 밀치며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사나이 셋은 어린아이를 넘어뜨리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지만 이제 네 애비 에미를 따라가거라. 저승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을 게다. 돈 좀 있다고 우쭐대더니 꼴 좋다! 공연히 우리 형제들 비위를 건드려서 이 모양이 되는구나. 우리가 너희 집 돈을 몽땅 차지했으니 대신 널 부모에게 보내 주마."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다른 말을 꺼냈다.
"우선 말야, 돈 문제부터 해결하자구. 셋이 똑같이 나누는 게 좋을까, 아니면 수고한 정도에 따라 나누는 게 좋을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다른 한 사람이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그 은 1천 냥을 10등분 해서 1백 냥씩 묶어 놓고, 이 아이를 단 칼에 죽이지 말고 돌아가면서 한 번씩 칼을 내리치는데, 칼질을 제일 묘하게 하는 사람이 은자를 제일 많이 가지는 거야. 어때?"
그 말에 나머지 두 놈이 좋다고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말도 못하고 입술만 앙다물고 있었는데, 어찌나 세게 물고 있는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한 놈이 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첫번째로 칼을 댈까? 이 검법은 '일도구룡(一刀九龍)'이라는 거라구. 칼질 한 번에 칼자국이 아홉 개 나는데 그 생채기들이 용처럼 구불구불하지 않으면 오씨라는 내 성을 갈겠어."
그리고는 칼을 치켜 들더니 아이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아이를 구하려고 얼른 일어서다가 흠칫 놀라 멈추어 섰다.
오씨 성을 가진 사공이 칼을 내리치는 찰나, 황약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웃는 얼굴로 오씨가 잡은 칼을 두 손가락으로 잡았다.
"여보시오, 지금 그 일도구룡으로 내 손가락을 치는 거요?"
사공 오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기 칼과 황약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칼엔 적어도 4, 5백 근의 기력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손가락 끝으로 잡아낼 수가 있지? 아무래도 이자는 요술장이가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사공은 자기 혓바닥을 확 깨물더니 피를 황약사에게 내뱉었다. 요술장이는 피를 보면 꼼짝못한다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황약사는 그가 피를 내뱉는 것을 무슨 암기를 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소매를 휘둘러 얼른 막았다. 그 바람에 사공이 뱉은 피는 주인에게로 되돌아갔고, 사공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황약사는 어느새 그의 칼을 들고 있었다.
"일도구룡이란 검법이 무척 희한한 모양인데 어디 나도 좀 배워 볼까?"
황약사는 칼을 번쩍 치켜 들더니 사공의 얼굴을 슬쩍 내리쳤다. 얼굴에 칼을 맞은 사공 오씨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꼿꼿이 서서 황약사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오씨의 얼굴에 구불구불한 흰 줄 몇 개가 생겼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얼굴에 난 아홉 마리 백룡 같은 생채기가 붉은 혈룡(血龍)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그 생채기들이 벌어지면서 참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었다.
칼을 맞은 순간 감각을 잃은 사공 오씨는 얼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자, 그제야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 황약사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그를 피하지도 않고 빼앗았던 사공의 칼을 뚝뚝 부러뜨려 사공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한 조각은 사공의 왼쪽 발을 뚫고 땅에 박혔으며 또 한 조각은 오른쪽 발을 뚫었다. 그리고 양 어깨에 하나씩, 양쪽 귀에도 하나씩 박혔다.
사공이 휘두르던 주먹은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발과 어깨, 그리고 귀에 박힌 칼 조각이 살을 찢는 바람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두 사람은 기가 질릴 대로 질려 냅다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이 놈들, 게 서라!"
황약사는 손을 번쩍 들더니 나머지 칼 조각 두 개를 힘껏 던졌다. 두 놈은 칼 조각에 어깨를 맞고 모래밭에 고꾸라졌다.
황약사는 넘어져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저 놈들이 네 부모를 죽였느냐?"
어린아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영리하게 생긴 아이를 보고 황약사는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풍묵풍이라고 해요."
"풍묵풍이라……. 무슨 풍자냐? 바람 풍(鳳)자냐, 풍년 풍(望) 자냐?"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땅에다가 풍묵풍(馮默鳳)이라는 이름 석 자를 크게 썼다.
그것을 본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아이의 이름이 제자들의 이름과 항렬이 같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쓰러져 있는 두 놈에게 걸어갔다. 놈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어느 놈이 네 부모를 죽였지?"
아이는 두 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 놈을 먼저 가리키고, 이어 또 한 놈도 가리켰다. 사공 오씨가 두 놈을 시켜 한 놈은 풍묵풍의 아버지를 물에 처넣게 하고, 다른 한 놈은 어머니를 물에 처넣게 했던 것이다.
"이 놈이 네 아버지를 죽였단 말이냐?"
황약사가 한 놈을 가리키며 물으니 풍묵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약사는 그 놈의 허리에서 비수를 뽑아 아이에게 쥐여 주었다.
"얘야, 놈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라."
그러자 아이는 비수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깐 은자를 빼앗으려고 네 부모를 죽이고 너까지 죽이려 했는데 놈을 죽이지 못하겠단 말이냐?"
풍묵풍은 이제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놈들 손에 부모가 죽은 생각을 하면 원통하고 분했지만 막상 죽이자니 몸이 떨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자기 대신 원수를 죽여 달라는 듯이 애달픈 눈빛으로 황약사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놈들에게 너희 부모가 몰살을 당하고 집안이 망했는데도 네 손으로 원수를 갚지 못한단 말이냐? 네가 두 놈을 죽이면 널 내 제자로 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 놈부터 죽이겠다."
황약사가 가장 흉악한 놈을 쉽사리 죽여 버린 것을 본 풍묵풍은 그의 말에 겁이 더럭 났다.
어린 풍묵풍은 이를 악물고 비수를 들어 원수의 가슴에 칼을 찔렀다. 놈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황약사가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던져 아혈을 맞추자 놈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풍묵풍은 눈을 꼭 감은 채 정신없이 죽은 사람을 계속 찔렀다.
그러자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이젠 됐으니, 다른 놈을 찔러 죽여라."
풍묵풍이 눈을 떠보니 칼에 난자당한 피투성이 송장이 눈앞에 있었다. 비수를 집어 던진 아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사람을……."
"이 놈아, 이 세상엔 살인을 안 하는 놈이 없다. 상인은 돈으로 살인하고 서생은 책으로 살인하고 부모는 이런저런 단속으로 살인을 하지. 세상엔 좋은 사람이란 없단 말이다. 나머지 한 놈도 어서 죽여라."
황약사의 말을 들은 아이는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싫어요! 난 못 죽여요!"
황약사는 얼른 아이를 잡아당겼다.
"이 놈아, 원수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 거야!"
그가 풍묵풍의 대별을 툭 건드리자 풍묵풍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황약사가 말했다.
"놈들 손에 억울하게 죽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넌 원수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장차 악한들을 만나 싸우게 되더라도 두려움이 없어져. 정 놈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네가 대신 죽겠느냐?"
풍묵풍은 하는 수 없이 아직도 피가 흥건한 비수를 집어 들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 걸어가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야! 죽어! 죽어 버려!"
이윽고 어린 풍묵풍은 기절하여 쓰러졌다.
먼 곳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진현풍과 매초풍은 사부가 아이를 죽인 줄 알고 돌 뒤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차디찬 황약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현풍인 뭘 하고 있는 게냐?
두 사람은 황약사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풍아,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푹 쉬게 해라."
황약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아이를 안고 얼른 사라졌다. 달려가는 진현풍을 보며 황약사가 매초풍에게 물었다.
"넌 현풍이와 바위 뒤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매초풍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사부님을 향한 내 사랑을 고백해 볼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우리와는 말 한마디 나누는 적이 없는 사부님이시니 말이야. '
이 순간 황약사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틈만 있으면 아형과 문장을 담론하느라 제자들과는 이야기 한 번 나누어 본 적이 없었구나. 가장 불행한 아이가 매초풍과 진현풍일 거야. 이 애들에게 내가 좀더 따뜻하게 대해 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한 황약사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물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도 한 번 들어 보자꾸나."
매초풍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억누를 길 없는 이 연정을 사부님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도화도 안팎을 다 뒤져 봐도 진짜 사나이는 사부님밖에 없으니 말이야. 내가 솔직하게 고백한다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생각이 이쯤 미친 매초풍은 진현풍과 함께 오대 고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기가 사부님을 가장 높이 칭찬했다는 얘기부터 넌지시 꺼내었다.
그러자 황약사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황약사의 느닷없는 물음에 매초풍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부님도 날 좋아하실 거야. 내게는 다른 제자들보다 친절하게 대해 주셨으니까. 이번 기회에 사부님의 속마음을 알아보자.'
"사부님, 전 몇 달째 잠이 안 와요……."
매초풍은 황약사의 기색을 살피며 슬그머니 말했다.
"왜, 병이라도 났나?"
매초풍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저는…… 사부님을……."
매초풍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초풍은 황약사가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줄 알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인간은 그 생각에 묻혀 있어서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매초풍 역시 이와 같아서 상대방인 황약사의 마음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와 똑같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사부님, 전 매일 밤 사부님 생각뿐이에요. 밤만 되면 사부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매초풍의 말에 황약사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낙영신장의 초보 장법을 익히느라 너무 애써서 그런 모양이구나. 나도 처음에 그 장법을 배울 땐 너무 어려워서 잠이 안 왔지. 눈앞에 장법이 자꾸 어른거리는 거야. 초풍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익히거라. 그래야 성공하는 거야."
그러나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매초풍은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전 꿈에도…… 언제나 사부님과 함께……."
그러다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황약사는 허허 웃었다.
"글쎄, 나도 그랬다니까. 나도 처음에 무공을 배울 땐 매일 밤 꿈마다 사부님이 보였지. 물론 우리 아버님이었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꿈에 사부님과 함께 무공을 익히는 게 아니라 사부님과……."
황약사는 진작부터 매초풍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매초풍이 스스로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정을 조절하기는커녕 이제 노골적으로 고백을 하려는 걸 보자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스승이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자 매초풍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부님이 저를 구해 주신 그때부터 저는 사부님을 사모했어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아 가슴이 후련했지만 매초풍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매초풍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초풍아, 네 이름이 원래는 매초풍이 아니었지?"
"예, 매약화였죠."
황약사는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왜 네 이름을 매초풍이라고 고쳤는지 알고 있느냐?"
"알아요. 사부님의 제자로 들어오면서 이름을 그렇게 고친 거죠."
황약사는 화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면서도 그 따위 수작이냐? 네가 내 제자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스승과 제자는 부자지간과 다름없다는 걸 모르느냐?"
서릿발 같은 스승의 꾸지람을 듣고도 매초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설령 사부님이 절 죽이신다 해도 제 마음은 죽이지 못하실 거예요."
매초풍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내심 놀란 황약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초풍아, 너 내 말을 따르겠느냐?"
"예, 사부님께서 칼을 물고 불바다에 뛰어들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매초풍은 그렇게 말하고 무릎을 꿇었다.
황약사는 재빨리 손가락을 뻗어 매초풍의 혈도 하나를 눌렀다.
"초풍아, 너는 도화도의 율을 어겨 우리의 명성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러니 네 발로 바다에 뛰어들어라. 죽음은 모든 번뇌를 잊게 해줄 것이다. 내가 네 혈도를 눌러 놓았으니 편안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초풍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스승에게 큰절을 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결연히 말했다.
"사부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는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녀는 바닷가로 다가가면서 멀지 않아 사부님이 자기를 불러 세우리라 믿고 있었다. 이윽고 차디찬 바닷물이 발목을 적셨으나 사부님이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이 날 생각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구나. 사부님은 누구에게나 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셨지. 하지만 내겐 다른 줄 알았어. 그래…… 이렇게 몇 걸음만 더 나가면 사부님의 마음이 변해서 나를 부르실지도 몰라. 그러면 난 평생 사부님을 모시고 그 분이 시키는 대로 할거야.'
매초풍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바닷물이 허벅다리를 적시더니 아랫배를, 그리고는 젖가슴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약사는 묵묵히 서서 매초풍이 바닷물에 빠져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매초풍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황약사가 미워졌다.
'한창 피어나는 꽃 같은 제자가 바다로 들어가 자결을 하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다니, 세상에 이런 냉혈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사랑했던 사람이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미쳤지.'
회오리처럼 물려오는 후회와 실망, 원망과 그리움이 매초풍을 휘어감았다.
매초풍은 점점 더 깊이 바다에 잠겨 들었다. 바닷물이 목까지 적시더니 순식간에 짠물이 입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무서운 절망감에 자신을 내던졌다.
'사부님이 날 거부하신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때 바위 뒤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던 진현풍은 저 혼자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풍묵풍을 집에 뉘어 놓고 이내 바닷가로 돌아온 그는 매초풍이 사부님의 명령대로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애꿎은 바위만 주먹으로 쳐서 손에 피를 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안아 들고 바다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사부님이 지켜 보고 계시니 그럴 순 없었다. 사부님의 성질이 워낙 불 같아서 까딱 잘못하다간 자기 목숨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때였다. 뒤에서 매초풍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초풍아, 초풍아!"
황약사가 돌아보니 아형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왜 그러오?"
황약사가 당황하여 아형에게 물었다.
"어서 저 애를 구해요!"
"저 아이가 글쎄……."
황약사는 말하려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형에게 할말도 아니거니와 아형의 기색을 보니 그런 말을 할 계제도 아닌 것 같았다.
황약사는 한숨을 쉬고는 바다로 첨벙 뛰어들었다
매초풍을 건져서 모래밭에 눕힌 황약사는 아형과 함께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글쎄 이 아이가……."
황약사의 말에 아형이 조용히 웃었다.
"모르다니, 내가 왜 몰라요? 제자가 자기 사부님을 짝사랑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죄예요?"
아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황약사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당신도…… 내가 그래……."
황약사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형은 매초풍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초풍아, 너도 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그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약사로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형은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여자애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기이한 인물이시니까요."
황약사는 아형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사실 아형을 만나기 전까지 황약사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풍류정사(風流情事)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실로 사랑한 여자는 아형뿐이었다. 황약사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이 순간 가장 애가 타는 사람은 진현풍이었다.
'초풍아,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버릴 거야.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몰라주고 저 냉정한 사부님만 좋아하더니…… 저 봐. 네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잖아. 이 다음에 무공을 닦으면 사부님을 죽여 버릴 테야.'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황약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형은 매초풍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됐어요. 이제 초풍이를 안아다 집에 눕히고 좀 쉬게 해야겠어요."
그러자 황약사가 큰소리로 진현풍을 불렀다.
"현풍아. 어서 나오너라!"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진현풍은 부들부들 떨며 바닷가로 나아갔다.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사부님이 자기까지 죽일 줄 알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아형이 물었다.
"아니, 자네 어디 아픈가?"
그러자 황약사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숨어 있자니 몸살이 날 만도 하지. 어서 초풍이를 데려다 뉘어라."
그 말을 들은 진현풍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그는 얼른 매초풍을 안고 날다시피 하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복숭아밭까지 와서야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는 축 늘어진 매초풍을 안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녀의 젖은 얼굴에 해초일 하나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그걸 보자 초풍이 더욱 가여워진 진현풍은 그녀를 안은 채 얼굴에 붙은 해초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다.
이때였다. 막 정신이 들기 시작한 매초풍은 소스라쳐 놀랐다. 진현풍이 자기를 꼭 끌어안고 한 손으로 자기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얼른 진현풍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놀란 진현풍은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화들짝 뒤로 물러앉았다.
"아이쿠, 아야!"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매초풍이 비명을 질렀다. 진현풍은 재빨리 그녀의 입을 감싸 쥐었다. 사부님이 들으시면 야단이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진현풍을 밀어 버리더니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너……너까지…… 날…… 업신여겨……."
매초풍은 울음 소리는 내지 못하고 어깨만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진현풍은 무릎을 꿇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사매, 왜 이래?"
이때 황약사와 아형이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아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매초풍은 두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일어나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읍을 하고는 돌아서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다 제 탓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제3권에 계속-
첫댓글 ``@-@``
감사합니다.
즐감하였습니다.
^^
즐감
즐감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