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백신
코로나 여파로 예년보다 수능이 보름 늦추어져 십이월 초에 시행된다. 수능을 삼십여 일 앞둔 시월 하순이다. 구월까지만 해도 수시전형 원서 위한 자료 수집과 수능 원서 작성 등으로 긴장하던 학생들이 요새는 많이 느슨해졌다. 이즈음 고3 교실은 해가 서산에 기운 오일장 장터 같이 썰렁해졌다. 상당수 학생들이 수시 전형으로 대학 진학이 판가름 나게 되어 더 그런지 모른다.
지역교육청 장학사가 파견 나와 수능 고사장 영어듣기 방송 점검이 두어 차례 지나갔다. 교무부장은 수능 감독관 추천으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올해는 고사장마다 코로나 방역담당관도 몇 명 추가되어야 한단다. 나는 지난해부터 자택에 머무는 대기 교사를 맡기로 했다. 감독관 가운데 혹시 유고가 생기면 교체되는 예비 인력이다. 그날 하루 남녘 해안 트레킹이나 가볼까 한다.
수능 감독관 업무는 몇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다. 아무래도 고사실로 들어가는 정 감독관과 부 감독관 임무가 가장 크다. 본부 요원으로 방송 담당자가 있으며 매 교시 시험 후 회수한 문제지와 답안카드를 확인하는 봉철 요원도 있다. 그 밖에도 복도 감독관과 대기실을 맡거나 옥외에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도 있다. 거기다가 올해는 방역담당관이라는 직책도 새로 생겼다.
이전 근무지에서는 수능일이면 나에게 고사실 감독관은 아니라도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수고한 수당도 나오게 되어 날이 저물녘 지기들과 맑은 술을 한 잔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그 업무에서 배제되니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허전하다. 수능 감독관에서 면제 받는 이들은 고3 수험생을 둔 교사나, 출산을 앞둔 여교사거나, 정년이 가까운 고령교사니 난 당연히 맨 후자다.
시월 다섯째 화요일은 고3들에겐 마지막 전국연합 학력평가 날이었다. 수능을 출제 관리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연 2회 시행하는 모의평가는 유월과 구월에 지나갔다. 시도교육청으로 위임한 전국연합 학력평가도 연 몇 차례 보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다. 고3 학생과 재수생은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출제 경향이나 난이도를 파악하며 시험 부담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는 기회다.
수 년 전 수능일 직전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나 혼란을 겪은 적 있다. 그해는 고사장 준비와 수험생에게 수험표 교부와 예비소집까지 마친 상태에서 수능이 1주일 연기되어 시행했다. 올해는 당초 계획한 일정에서 2주일 연기해 치르게 된다. 아마 수능 출제위원으로 위촉된 교수나 교사는 지금쯤 산중 콘도로 집결하고 있으려나. 한 달여 격리된 채 보내다 수능일에 풀려나지 싶다.
전국연합 모의고사는 어느 학교에서나 교과 수업에 드는 교사가 감독으로 들어가게 된다. 같은 시험이라도 정기고사와 감독 체계와 긴장감이 확연하게 다르다. 정기고사는 평가부서에서 복수의 교사를 편성해 교실 앞뒤 정 위치에서 엄정히 감독한다. 모의고사 때는 그날 수업교사가 문제지를 배부하고 답안지를 회수하는 정도다. 나는 책을 들고 들어가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네 시간이었으니 교실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하루를 보냈다. 이재원이 지은 ‘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라는 부제가 붙은 ‘김홍도’를 읽었다. 화원 김홍도의 생애와 그림 세계를 더 이해한 계기가 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와실로 드니 해가 짧아져 멀리 산책을 나서기는 어중간했다. 가까운 연사들녘을 둘러 연초삼거리 농협 마트나 다녀올까 싶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와실을 나섰다.
거제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연사 들판으로 나가니 벼 수확이 끝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연초천 산책로에 알록달록하던 코스모스는 거의 저물어갔다. 연효교를 건너 효촌교에서 연초삼거리로 갔다. 농협 마트에 들려 저녁 반주로 삼을 곡차를 몇 병 골랐다. 감자된장국을 끓일 때 넣을 두부를 샀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천변을 걸으니 해는 기울고 동녘엔 만월로 채워지는 달이 걸렸다. 20.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