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교양을 갖고 살고 싶어’ 뒤늦게 대학에 갔다고 했는데.
“중·고교생 시절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골에 땅이 있어 농사를 지으려고 대학엔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람이 살면서 교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 경희대에 들어갔다. 아침 8시에 학교에 가 교양 강좌를 들으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됐나.
“1971년 가을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캠퍼스에 군인들이 진주했다. 교문이 닫힌 가운데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암울했다. ‘뭘 하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친구 한 명은 사찰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창조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빈 강의실에 몰래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에 홀린 듯 한 달 반 동안 16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그 소설 가운데 하나가 그해 겨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우리 문학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가는 우리 역사에 대한 치열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 소재의 보고(寶庫)를 갖고 있다. 재해석하고, 재조명하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역사가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노벨 문학상은 어떻게 보나.
“노벨 문학상을 놓고 국가적으로 난리 칠 일은 아니다. 문학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문화 전반이 성숙해지면 길이 열리는 거다. 윌레 소잉카는 나이지리아 사람이지만 영국 옥스퍼드대를 나와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자신의 나라 민담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탔다. 문학은 상이 아니라 내용, 즉 작가가 얼마나 자신의 세계를 갖고 썼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문학이 노벨상에 다가가려면 영어 번역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문학이 영어를 비롯한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독자에게 읽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작품 가운데 영어로 번역돼 해외에서 출판된 작품이 몇 개나 되나. 손에 꼽을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번역 시스템이 대단한데.
“분야를 막론하고 외국 신간 서적이 가장 빨리 번역돼 출판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번역전문 업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일본 소설이 영어로, 프랑스어로 가장 빨리 해외에 보급된다. 예를 들어 ‘선(禪)’은 한국이 강하지만, 미국에 가보면 선 관련 서적은 전부 일본인이 쓴 책이다. 일본이 문화강국이 된 건 서양 문물을 이렇게 빠르게 받아들인 결과다. 특히 효율적인 번역 시스템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국가적으로 번역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얘긴가.
“국민 모두가 외국어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얘기다. 또 영어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가 국내에 몇 명이나 되겠나? 출판사도 이익이 날 책만 번역해 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지식이 국가적으로 축적되는 양은 적어진다. 해결책은 해외유학을 마쳤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해 놀고 있는 석·박사들이 해외 논문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의 논문들을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도록 정부나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해주는 거다. 정부는 출판계가 문학뿐 아니라 과학·기술 등 모든 분야의 해외 신간 서적을 신속히 번역해 출간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 문학은 어떻게 다뤄야 하나.
“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철저히 반성했다. 그러나 독일이 위대하다기보다는 유대인이 위대한 거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겪은 고통을 다룬 소설·영화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 얼마나 많은 감동을 주는가? 우리는 왜 일제 식민지 시대를 다룬 위대한 작품이 많이 나오지 못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일본이 전 세계 앞에 반성하고, 사죄할 때까지 관련 역사를 다룬 작품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역사는 살아있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삶을 관찰하고, 보고, 쓰는 사람이다. 작품의 주인공 삶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사전취재·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나는 이걸 아주 중시한다. 『부초』란 작품은 서커스단의 얘기인데, 3년 동안 서커스 단원들과 여관 생활을 함께하고 같이 자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요즘 우리 작가들이 취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는 문제다.”
-일관되게 사회적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먹기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 무엇’이 있는 삶을 추구할 때 향기로운 삶이 탄생한다. 어릴 때 가구를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가구처럼 사회에 쓰임새가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좋은 대학이란 돈 많이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사회에 유용한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추상명사를 갖고 살 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보통 직장이나 월급ㆍ회사ㆍ가정 등 보통명사를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보통명사만으론 살 수 없다. 애국이나 우정ㆍ의리ㆍ가치ㆍ기쁨 등 추상명사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후배 작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역사에 치열하게 접근하기 바란다. 또 새 장르를 개척하길 바란다. 종이 책의 시대는 끝난 것 아닌가 싶다. 시나 소설, 희곡 같이 과거에 만들어진 장르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해외의 좋은 작품들을 원어로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행복한 인생이란 뭘까.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평화가 행복이다. 평화로울 수 있는 게 뭘까? 작게 가지라고 하지만 조금 갖는 건 쉽다. 많이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양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거다. 다만 돈과 지위로써 행복을 찾으면 불행해지는 건 확실하다. 평화는 편해지는 거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알면 살지 못하는 거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하고, 내일 떠날 것처럼 준비하겠다’는 말을 늘 새기며 산다. 나이 들면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이상 징후가 하나씩 는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걸 본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데 인위적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게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 의문이다. 나는 그냥 묘비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