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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6 : 11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
고전 6 : 11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And such were some of you. But you were washed, but you were sanctified, but you were justifi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by the Spirit of our God."
한글 성경에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 말씀이다.
씻음을 얻었다 또는 씻음을 받았다는 말은 But you were washed,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은 But you were sanctified,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But you were justified 이다.
그러므로 고전 6: 11절을 다시 쓰면,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by the Spirit of our God) 씻음을 받고(you were washed), 거룩함을 얻고(you were sancitified)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you were justified)"는 말씀이다.
영어 성경에는, 이 세 문장은 모두 수동태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그렇지 않다. 세 문장 중 둘째, 셋째 문장은 수동태로 쓰여져 있고, 첫째 문장은 수동태가 아니라 중간태로 쓰여져 있다.
ἀπελούσασθε 아페루사스데 ἡγιάσθητε 헤기아스데테 ἐδικαιώθητε 에디카이오데테
헬라어에는 세 가지 태(voice)가 있다. 능동태, 수동태, 그리고 중간태다. 능통태(Active Voice)는 동사가 나타내는 행동을 주어가 하는 것이며, 수동태(Passive Voice)는 동사가 나타내는 행동을 주어가 받는다. 헬라어의 능동태와 수동태는 우리말과 영어의 능동태, 수동태와 같다.
중간태(Middle Voice)는 동사가 나타내는 행동을 주어가 일부나 전부 하고 또한 받는다. 마치 재귀용법 같은 것이라 한다.
거룩함을 얻고(you were sancitified)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you were justified)는 말씀은 수동태로 쓰여져 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룩함을 얻고, 의롭다하심을 얻었다(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by the Spirit of our God, you were sanctified, you were justified.) 라는 의미이다.
거룩케하심과 의롭다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다(by the Spirit of our God)는 말씀으로 곧 성령께서 거룩하게하시고 의롭다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씻음 받았다(you were washed)"란 말씀은 수동태로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태로 쓰여져 있다.
ἀπελούσασθε(아페루사스데) 그러므로 "you were washed.(너희는 씻음 받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you had yourselves washed. 또는 "you washed yourselves.(너희가 너희 자신을 씻었다)" 라는 의미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너희가 너희 자신을 씻었다(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by the Spirit of our God,you washed yourselves.)라는 의미이다.
성령님께서 씻어 주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너희가 너희 자신을 씻었다는 말씀으로 너희가 너희 자신을 씻었다는 말씀은 세례(물세례)를 의미한다. 성령님에 의해 너희가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를 너희가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를 너희가 받아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즉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말이다.
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바울은 고리도 교인들의 옛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본 절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있더니'(*, 에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1) 미완료 과거로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지난날에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죄악에 빠져 있었으나'를 뜻한다.
(2) 미완료의 반복적 의미라면,
그 뜻은 '지난날에 너희가 죄악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러한 죄악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후자는 '티네스'(*, '너희 중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몇 사람' 또는 '일부'(개역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음)가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 절은 전체 문맥 속에서 의미를 재고해 볼 때 전자의 의미가 강한 것 같다.
바울은 지금 죄악들을 나열하며 지난날 고린도 교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살 때의 죄악과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을 비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너희 중에 이러한 죄에 빠져 있던 자들이 있었으나'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과 사역을 포함한다(Morris).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들을 정결케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화(聖火)의 소망을 갖게 하였다.
특별히 본 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영위하는 성화의 삶의 원동력임을 시사한다.
* 롬 8: 4, 14, 17 -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3]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제는 더 이상 죄악 가운데 묻혀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헬라어 원문은 접속사 '알라'(*, '그러나')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세 동사 앞에 각각 하나씩 기록했다.
이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 일어난 세 가지 사실을 열거한다.
먼저, '씻음'에 해당하는 동사 '아펠루사스데'(*)는 부정 과거중간태로서 죄로부터 씻음을 받은 것을 뜻한다.
* 행 22: 16 -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 계 1: 5 -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보통 신약성경에서는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세례를 받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에밥티스데산'(*,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을 사용하여 그 의미를 전달하였다.
* 행 19: 5 -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런데도 본 절에서 '아펠루사스데'가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함께 기록된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때문이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사역에 따라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 행 2: 4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 롬 6: 3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1)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자는 '아펠루사스데' 를 중간태로 기록한 것은 세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세례는 세례를 받는 자의 선택과 신앙고백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두 동사와 구분하였다고 한다('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모두 부정 과거 수동태로 기록하고 있다, Bachmann).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더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을 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Barrett). 그러므로 '아펠루사스데'는 중간태로 쓰였으나 본 절의 문맥상 그 의미는 수동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Lenski).
다음으로, '헤기아스데테'(*, '거룩함')와 '에디카이오데테'(*, '의롭다 하심')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의롭게 된 것과 거룩하게 된 것은 이미 과거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主導的)인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본 구절에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세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의 현재적 신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의'의 개념 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Calvin).
즉, '죄 씻음'과 '거룩'과 '의'는 그들의 죄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들이 새로운 의의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법정적 선언의 개념을 가진다.
(1) 바울은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원문에는 “그러나 씻음을 받았고, 그러나 거룩하여졌고,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되었다.
성도는 과거에 큰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씻음을 받았고, 과거에 심히 더러운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거룩하여졌고,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며,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었다.
(2) 본문의 교훈.
첫째, 성도 사이의 분쟁
우리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판결에 복종치 않는 자는 제명, 출교할 것이요 그런 자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
우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자.
우리 자신이 과거에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것을 깨닫고 모든 불의와 죄악을 멀리하자.
4] 다투지 않기 위해 : 박 조준 목사
본문 말씀은 법에 대한 소송 문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헬라 사람과 관련이 있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동네에서 싸움이 생기면 그 동네의 교회 장로 앞에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회에서 옳은 것이란 법의 정신에서보다 가족적인 정신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의 율법에서는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의 법정에 고소하는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헬라 사람은 본래 성격상 소송을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헬라 사람의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덴의 법률을 보면 법정이란 아덴의 시민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의 경우도 아덴의 사정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가령 아덴에서 어떤 다툼이 일어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개인적인 중재인을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각각 한 사람의 중재인을 선정하는 양쪽 당사자의 합의하에서 공평한 재판관으로서 세 번째의 중재인을 선정합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40인 회라는 것이 있어서 40인 회가 그 문제를 공정 중재인에게 보냅니다. 공정 중재인은 60세 이상의 전 아덴의 시민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공정 중재인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간에 자기 의무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만일에 이 주어진 의무를 감당하지 않은 경우에는 시민권이 박탈되었습니다.
거기서도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문제가 배심원들에게 송치됩니다. 그것도 그 정도에 따라서 배심원의 인원수가 달라집니다. 가장 작은 문제는 201명이 배심원이 되고, 그 이상의 큰 문제에 있어서는 1,000명에서 6,000명까지의 시민 배심원이 차출되었던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배심원은 30세 이상의 아덴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배심원으로 일할 때만은 하루에 얼마씩의 보수도 받았습니다. 배심원의 자격을 가진 시민들은 오전에 모여서 어떤 사건을 취급할 것인가 하는 것을 추첨했습니다.
헬라의 도시에서는 누구나 법에 대한 상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재판하거나 재판을 방청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헬라 사람들은 소송 사건을 체질적으로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언제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방면에서 악명이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나 옛날에 소송하는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이 교회라고 해서 조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고린도교회 교인에게 있어서는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서 볼 때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면서도 현실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모든 면에 열심인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습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남과 북이 갈리고 영남과 호남이 맞서고 해서 사분오열(四分五裂)되는 것을 보면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것은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남과 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영남, 호남이 어떻게 갈라질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마다 이런 실망스러운 일,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부끄러움입니다. 문화 민족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살고 있음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거 우리 민족 역사를 볼 때 이름만 달랐지 파쟁을 계속하여 왔는데, 이것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단이 갈리고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모습과도 너무 비슷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른 재판을 구해서 불의한 자에게 호소하는 모순된 행위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처사가 바울에게 있어서 더욱 우스꽝스럽게 생각된 이유는, 이제 곧 올 황금시대에 메시야가 만물을 통치할 것이며 메시야가 모든 사람을 판단할 것이며 더욱이 성도들이 메시야와 함께 그 판단에 참여할 것이라고 바울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만국 백성을 판단할 것이며 만민을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언젠가는 너희가 세상을 판단할 것인데, 더구나 천사들도 너희의 판단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인간들, 더구나 이교도들에게 판단받기 위하여 고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판단받지 않을 수 없다면 교회에서 판단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세상을 판단해야 할 너희가 하잘 것 없는 싸움에 말려들어서야 되겠느냐?”
크리스챤 법조인들의 말을 빌리면 교회 사이의 소송 문제가 제일 다루기 어렵고 창피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대원리를 들고나옵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것, 더욱이 형제를 고소하는 일 따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표준에서 멀리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플라톤이 말하기를 “선인은 불법을 행하기보다는 불법한 일을 당하는 것을 좋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조금만 있어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창피를 주거나 손해를 끼치거나 하는 것보다 오히려 창피를 당하고 손해를 입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언제 어디서라도 가질 수가 없고 가져서도 안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성경은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는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사랑하는 데 있지 서로 미워하고 물고 찢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로 다투는 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시편 23편 5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일반적으로 양을 키우는 곳은 따뜻한 곳입니다. 더운 지방에서는 여름을 ‘파리의 계절’이라고 부르는데 날씨가 더우니까 양들을 해치는 여러 가지 해충들이 많이 생깁니다. 가축을 키워 본 사람이 아니면 여름철에 짐승들에게 피해를 주는 해충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모릅니다. 짐승들은 이 해충들 때문에 미칠 정도로 고통스러워합니다.
특히 양들은 코에 와서 붙는 파리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이 조그마한 파리들은 양의 축축한 코 점막에 붙어서 알을 까려고 양의 머리 주위를 날아다닙니다. 만일에 이 파리가 코에 알을 까게 되면 이틀 후엔 구더기가 되어 양의 콧구멍을 거쳐 양의 뇌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경우 양이 미쳐 버리고 살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 유충은 심한 염증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양들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부딪칩니다. 땅에다 머리를 문지르며 흔들어 대고 뒹굽니다. 해충의 침입으로 고통이 정말 심하게 되면 의식을 잃어버리고 허둥거리다가 죽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파리가 양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게 되면 어떤 양들은 공포에 휩싸여서 제 정신을 잃는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저들은 파리를 필사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목장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 다닙니다. 어떤 양들은 너무 달려서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양을 잘 보살피는 목자는 이렇게 양에게 손해를 끼치는 파리에게서 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파리가 나타나면 아마로 만든 기름을 머리와 코에 발라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조용하게 풀을 뜯으며 자리에 누워서 만족하게 쉰다고 합니다. 양을 키워 본 경험이 있는 다윗은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양을 해치는 모든 해충, 특히 파리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의 무리인 우리 성도들에게도 말하자면 파리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안식하지 못하게 괴롭히는 파리입니다. 때로는 우리 심령에 불안을 주고 미치게 하는 파리, 사소한 일 때문에 고통과 노여움을 이기지 못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의 행동이 옆에서 보기에 처량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수치스러울 정도로 좌절의 심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가 파리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양들에게 계속 새로운 기름을 그 머리에 발라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에도 주님께서 계속해서 성령의 기름을 발라 주셔야 합니다. 양의 머리에 한 번만 기름을 바른 것으로 긴 여름철을 그냥 지낼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기름을 반복해서 발라야 합니다. 신선한 기름을 계속 발라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성령의 기름을 한 번만 바르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을 바로 하려면 계속적으로 날마다 성령으로 발라 주어야 내 상처 받은 심령이 치료를 받고, 계속 달려드는 마귀의 파리를 막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성령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우리 심령 속에 날마다 성령의 기름을 부으려는 것은 논리적이요, 합리적인 욕망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어줄 수 있고 성령만이 평온한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괴롭히는 파리와 같은 마귀의 도전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환경이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할 때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심으로 이 외부적인 세력을 격퇴할 수 있고 만족과 평화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사랑과 화평과 기쁨, 인내와 온유와 만족 그리고 덕 같은 인격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이와 같이 날마다 성령의 기름을 우리 마음에 부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성내고 미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는 이렇게 조그마한 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짜증이 나고 마음이 평안치 않고,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주님, 제 마음속에 성령의 기름을 흠뻑 발라 주세요. 그래서 마귀의 파리가 달라 붙지 못하게 해 주세요.”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여름철에 양들은 파리 때문에 고생을 할 뿐 아니라 옴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옴은 양들에게 감염률이 높은 전염병입니다. 양들은 서로 머리를 비벼대며 애무하기를 좋아합니다. 끼리끼리 뭉쳐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마리의 양이 옴이 오르면 얼마 안 가서 다른 양들에게도 그 옴이 전염됩니다. 파리와 마찬가지로 가장 효과 있는 해독 방법은 감람유를 발라주는 방법입니다.
양을 키우는 데는 양들을 소독하고 목욕시키는 세척 탱크가 다 설치되어 있는데 양들의 머리는 세척 탱크에 잠그지 아니하기 때문에 머리 부분에는 목자가 직접 기름을 발라 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으로 바르셨으니”라고 한 말에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기름은 양에게 있어서 옴을 없애는 유일한 약입니다.
옛날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병을 치료하는데 주로 향유가 섞인 감람유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길르앗의 유향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가정에서 만든 이 원시적인 약은 양을 괴롭히는 파리, 또는 옴에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며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요소는 대부분 우리 마음에서부터 생깁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심령을 병들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이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 했는데 세상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날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마음에 성령을 채우고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들이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양은 온순한 짐승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도 가끔 싸웁니다. 소는 뿔로 받으면서 싸웁니다. 닭은 주둥이로 쪼며 싸웁니다. 양들은 머리로 밀며 싸웁니다. 그런데 양의 머리에 기름을 흠뻑 발라 주면 머리를 밀고 싸우려다가도 기름이 미끄러워서 빗나가기 때문에 싸울 의욕을 잃고 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다가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리 다툼을 합니다. 시기도 합니다. 나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형편이 그렇게 안 돼서 하지 못하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저 사람이 뭔데 저렇게 앞에 나서서 서둘지?” 그럽니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밀어내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불러다 놓고 밀어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당신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하면서 뜨겁게 봉사하는 사람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도 일을 하고 싶으면 우리 모임에 들어오세요. 우리 모임에 들지 않으면 일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해서 일하는 사람을 맥빠지게 합니다.
옛날 예수님 때도 그러지 않았어요? 열두 사람밖에 안 되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높아지냐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습니까? 어떤 때는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내 두 아들이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앉게 해 주시고 다른 한 아들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세요”하면서 엽관운동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은 그 형제와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어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높고자 하면 낮아지겠고 낮고자 하면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까? “누가 목사의 신임을 받고 일하냐?”하는 데 시기도 있고 오해도 있고 그래서 마음 상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때로는 다툼까지 생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다툼을 극복할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일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면 충돌과 싸움이 계속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될 때 화평과 기쁨과 인내, 그리고 관용이 마음에 생기게 됩니다. 자기 주장만 옳다고 내세웠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이 사람과 부딪치고 저 사람과 다투고 자기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지 아십니까? 아직도 그 머리에 성령의 기름을 흠뻑 바르지 못해서 그럽니다. 전에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함께 생활하고 좋은 말씀 듣고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살았어요? 그 마음이 아주 강퍅했어요. 날카로웠어요. 자기와 생각이 조금 달라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없애 버리자고 할 정도의 벼락같은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순절 때 그 머리에 성령의 기름을 흠뻑 바르고 나니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에 그의 어리석은 주장의 동기가 되었던 모든 사소한 질시와 경쟁의 악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살았고, 흑심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완전히 변했습니다. 좁던 마음이 넓어졌습니다. 강퍅하던 마음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증오에 가득하던 마음에 사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용서할 줄 모르던 마음이 용서하게 되고 원수 갚으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핍박을 받아도 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셔서 한국교회가 다시는 부끄러운 자리에 이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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