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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가장자리>와 격월간지 『말과활』을 통해 '엄기호'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으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에서 그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강의를 통해 학교와 학생문제 그리고 청년 실업에 대한 그의 깊고 진지한 연구와 설득력 있는 해석이 젊은 사회학자치고는 상당해 보여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서슴없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도 택시영업 중에 읽었다. 웬일인지 나는 집에서보다 택시 안에서 책 읽는 것이 집중도가 더 높고 진도도 훨씬 잘 나간다. 어떤 때는 내가 돈 벌러 나왔는지 아니면 비싼 가스 때어가면서 책 읽으러 나왔는지 의아스러워 고개를 갸웃거려 본 적이 있기까지 하다. 돈 못 벌어도 책이라도 읽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무해보지만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어 내용을 복기해 보지만 어떻게 리뷰를 작성해야 할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서두만 열면 그나마 물꼬가 터지면서 수로를 따라 논으로 물이 콸콸 들어가듯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정리하는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접한 총체적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것이 어떤 해답이 있어 그 해답을 찾기만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더더욱 나의 머리가 혼란한 것이리라. 프롤로그에서 엄기호는 우리 사회를 "'편'을 강요하고 '곁'을 밀치는 사회"라는 말로 말문을 열고 있다. 과연 '편'은 무엇이고 '곁'은 또 무어란 말인가?
김정수 씨는 몇 년 전 정리해고를 당한 후 치킨집이며 몇몇 사업을 벌였다가 족족 망하는 바람에 빚만 졌다. 막판에는 막노동에까지 나섰지만 사고를 당해 다리 한쪽을 심하게 다쳤으며 아내와의 갈등으로 아내는 집을 나갔으며 이제 남은 것은 두 아이밖에 없다. 정규직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편의점 계산원에서부터 여건이 허락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알바로 채웠다. 그러나 죽어라 일하지만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무기력과 소진 사이를 '미친년 널뛰듯이' 왕복하기만 했다. 그때부터 정수 씨의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참조그룹(reference group)은 전무했다. 친구도 교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이는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 때 그는 자신이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하고 무중력의 우주공간에 붕 떠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교사인 김 샘은 요즘 마음이 심란하다. 새로 부임한 교장이 학교의 존립 근거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이라면서 전에 없던 여러 가지 무리한 간섭과 정책을 펼치기에 이 문제로 자신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료 교사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도 투덜거리고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식으로 교장에게 민원을 제기하자는 그의 말에 동료 교사들은 "공연한 짓 하지 마라. 그래 봤자 김 샘만 다친다"라며 말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과거에는 김 샘이 나서자고 하면 한두 명이라도 뜻을 같이했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를 피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 누구에게 말로 호소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남몰래 철학관(점집)을 찾아가 자신의 울분과 불안을 위로받는다고 한다.
지혜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자신을 감출 것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자신을 감춰야 한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자신이 괴로워하거나 혹은 힘들어한다는 것을 교사에게 내비치는 순간 교사들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만만하게 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물론 지혜가 한 번도 마음의 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어느 때엔 담임선생과 교정을 걸으며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혜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도움을 구하려 했을 때 담임선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지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무엇인가 조언이나 충고를 듣거나 해결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혜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표정에서 말투까지 철저히 자신을 단속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다.
위의 정수 씨와 김 샘 그리고 지혜의 사례에서 보듯이 관계는 단절되고 파편화되었으며, 말은 그냥 허망하게 공중에서 흩어질 뿐 그 힘을 잃어 실제 삶에 조언과 충고를 주는 이야기(서사)가 되지를 못하고 있다. 이렇듯 말에 대해 냉소하고 말문을 닫아버릴수록 우리가 잃어버리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이슈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의 상실은 관계의 단절을 정치와 정치공동체의 위기로 이어지게 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공적 공간이란 "개인의 고민과 공공의 현안들에 대해 만나서 의논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즉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리되거나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하여 공공의 해결책이 모색되고 조정되며 합의"되는 공간이 바로 공적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적 공간이 소비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그 기능을 잃게 되자 그 자리를 대신 꿰찬 게 힐링이니 상담이니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혹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판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만 보고 자신을 소진하다 보니 직장동료, 가족 간의 관계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일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며, 공적으로 남들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협력이 아닌 독자적 일처리를 당연시한다. 만남과 부딪침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단속하고 상대에게는 그저 형식적으로 예를 갖춘다. 이제는 서로에게 환대를 바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서로 예의 바른 얼굴을 한 채 그곳을 알 수 없는 적대의 공간에 서 있다.
우리가 처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엄기호는 '단속'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남을 믿지 않고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단속(團束)'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단속하면서도 SNS니 페북이니 블로그니 '취향의 공동체'니 하는 곳에 중독자처럼 접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어딘가에 늘 접속해 있으면서 어떤 경우에는 벼락같이 연결을 차단했다. 차단하고(斷) 연결하는(續) '단속(斷續)'이라는 동음이의어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편처럼 끊어져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공허해하고 무의미해한다. 삶이 연속적일 때 비로소 개인과 사회의 서사(敍事)가 완성되고 이 서사를 갖춰야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이나 목동같이 중대형 평형의 중산층 아파트단지는 입시학원과 서로의 운명을 같이 하며 폐쇄적인 그들만의 공간, 즉 '빗장 건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학생들 역시 자기 아파트 평수와 계급에 맞추어 또래집단을 형성하며 끼리끼리 논다. 구미나 울산같은 대규모 산업단지가 소재한 지방의 경우엔 부모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에 따라 학생들이 따로 모이는 경향이 있고 그들의 노는 문화 또한 분리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 아이는 남다르게 키우겠다며 학원을 보내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독서를 하며 바른 정신을 키우는 데 힘쓰는 학부형이 있다면 빗장 건 사회의 성채 안의 사람들은 그 학부형을 이웃으로 보지 않고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며 낯선 것과는 단절된 채 비슷한 것, 동질적인 것 안에서 무한 반복되는 삶이라면, 사냥감이 되지 않을 확률은 높일 수 있을지언정 낯선 존재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성장한다는 인간 본연의 세계관은 좁아들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밀양 송전탑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상반되어 있다. 한쪽은 주민들의 이기심으로 전력 수급이 차질을 빚으면 국가 경제에 타격이 올까 걱정하며, 또 다른 한쪽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국가는 자기들이 살던 마을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마을 주민들을 질서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고 격리와 고립이라는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사하고 있다. 사회 발전의 이면에는 그 '발전'이 만들어내는 위험을 고스란히 떠맡는 사람들이 있다. '풍요로운 전기'라는 환상은 정부에 의해 전기를 파격가로 공급받는 기업인이나 누리는 것이고, 그 전기를 생산하기 의해 발생하는 위험은 고리 · 밀양 같은 변두리 지역민의 몫이 된다. 즉 이익은 위로 가고 위험은 아래로 분배되는 것이 이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이것이 실체인데 이것을 꿰고 있는 국민은 많지가 않다. 이렇게 바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희망버스를 타고 멀리 밀양까지 달려가 그곳 주민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함께 연대해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과 결탁한 합법적인 폭력기구인 국가라는 존재는 이 연대의 고리를 끊고자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적'으로 몰아붙이기에 바쁘다. 대다수 국민들의 시선 또한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는지라 희망버스를 탄 사람을 자기 편이 아닌 국가 질서를 파괴하는 공범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시골의 노인네 몇몇의 삶이 파괴가 되건 말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곁'이 절실한 밀양 주민들을 더더욱 사지로 몰고 있다. 과연 여러분이 사는 곳에 송전탑이 들어서고 원전이 들어선다고 해도 대의를 위해서 그냥 찍소리 안 할 자신이 있으면서 그렇게 쉽게 내뱉는지 자신부터 뒤돌아보기를 바란다.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하지만 타인의 고통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차단하고 외면하며 이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는 '곁'이 없고 오로지 네 편 내 편하는 '편'만 있는 것이다.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밀양의 주민들은 안됐지만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처럼 세상이란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인간은 남의 생명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일말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야차夜叉가 되고 만다. 우리가 밀양의 주민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나 몰라라 한다면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편의 정치는 끊임없이 적대를 창조하고 그 적대로 사람들을 몰아가며 너는 누구 편이냐며 윽박지르고 '곁'을 파괴한다.
지금 이 시간 밀양과 제주 강정 주민뿐만 아니라 당신의 직장동료와 가족 모두는 '곁'을 절실히 원할지도 모른다. 아니 원한다. 그 '곁'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남의 한숨과 한탄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고장 난 시디플레이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때는 짜증이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힘들 때 그 누군가가 내 곁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할지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남의 얘기를 듣고 공감하는 '곁'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진정으로 사람 사는 곳이 되어가지 않을까 싶다. 송파 세 모녀에게도 그런 곁이 있었더라면…….
첫댓글 좋은 글. 중간중간 넘겨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