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 고찰 마지막 글이다. 이번 글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핵심인 연기법에 대해 고찰해 나가겠다. 이번 글은 각묵스님의 번역한 디가니까야의 대인연경(大因緣經)을 기본으로 서술할 것이다.
나는 아함경을 읽고 불교교리를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원형에 가깝게 기록된 것이 아함경이다는 글을 읽고서 그 경을 보게 되었다. 동국대 역경원에서 번역한 한글대장경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었고, 대신에 동국대 고익진 교수님의 편역한 한글 아함경을 구했다. 이 책에는 한문원문이 없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한문용어를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강원에서 강의하시는 스님한테 부탁해서 한문원문도 함께 있는 아함경을 구했다. 이 책이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에서 편역한 아함경이다.
얼마 전 교보문고에 잠시 들렀다가 마침 고익진교수님의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논문집을 발견했다. 이 책은 고익진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석사학위 논문과 다른 논문을 합친 것으로 아함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이 책에는 아함경 법의의 요체가 될만한 경을 간추린 지송아함경(한문현토본)과 지송아함경팔리어본도 실려 있다. 이 책 머리말에는 남방불교의 아함에 해당되는 경장에 대해 소개되어 있어 각묵스님이 번역한 디가니까야를 보게 되었다. 각묵스님은 한글세대다. 한문경전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보다 팔리어 경전에서 직접 한글로 옮겨 놓아 한글세대가 바르게 이해하기 더 좋은 텍스트 같다. 연기법에 대한 고찰 글에서는 디가니까야에 나오는 연기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대인연경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하면 다른 텍스트에서도 인용하였다.
연기법을 다루기 전에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을 먼저 다루어보자. 오온과 육육법설에 관한 내용인데, <장아함 권2(42)>에는 오온을 육육법설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云何色如實知∘諸所有色∘一切四大及四大造色∘是名爲色
∘云何受如實知∘謂六受眼觸生受∘耳鼻舌身意觸生受∘是名受
∘云何想如實知∘謂六想∘眼觸生想∘耳鼻舌身意觸生想∘是名爲想
∘云何行如實知∘謂六思身∘眼觸生思∘耳鼻舌身意觸生思∘是名爲行
∘云何識如實知∘謂六識身∘眼識耳鼻舌身意識身∘是名爲識
고찰1. 오온 글에서 “오온에서 나오는 수, 상, 행, 식과 육육법설에서는 나오는 수, 상과 십이지연기에서 나오는 행, 식을 다 동일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일단 동일한 것으로 보면, 오온, 육육법설, 십이지연기 등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라고 지적했었다. 수, 상, 행, 식이 촉에 연해 발생한다는 내용은 한글아함경<분별경(장아함 3권)>에서도 나온다. 고찰1를 쓸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한문원본으로 육육법설이 설명된 것을 보고나서 초기불교에서 사용하는 오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육육법설을 설명하면서 아함경에서는 아래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었다.
6식(안, 이, 비, 설, 신, 의) -> 6촉(觸) ->6수 -> 6애(愛) 혹은
-> 6상(想) -> 6사(思)) -> 6애(愛)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에서는 식 -> 촉 -> 수 ->애 -> 취 -> 유 ->생 ->노사 인 12지연기로 육육법설을 설명하는 유형도 있다고 한다. 이런 육육법설은 오온의 유형(육근, 육식, 육수, 육상, 육사 -> 색, 식, 수, 상, 행)과 12연기의 유형(6식, 6촉, 6수, 6애 혹은 식,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으로 설명되어 진다. 이런 것을 보면 오온은 “생존해 있는 중생”에게 적용되는 개념으로 육체적인 요소인 색과 감각기관에 연하여 발생하는 식의 작용(기능 혹은 활동)을 각각 지칭하는 이름들이며, 육육법설은 식 작용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오온의 개념을 더 발전시킨 개념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인용하겠지만 천태의 “초계차제초문”에서는 십이지연기를 삼세, 이세, 일세십이지연기로 각각 설명한다. 육육법설은 대상에 반응하여 찰나에 일어났다 멸하는 식작용을 설명하는 것이고, “초계차제초문”의 일세십이지연기도 찰나생멸하는 식작용을 말한다. 아함경에 나오는 여러 유형의 육육법설들은 육육법설이 일세십이지연기로 논리가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로서 이해할 수 있다.
연기법을 설명하면서는 디가니까야의 대인연경(大因緣經)을 인용했다. 대인연경은 장아함 권10의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으로 한역된 것인데, 동국대역경원에서 번역한 경을 비교해 읽어보면 한글세대인 각묵스님이 팔리어경전에서 번역한 대인연경이 더 도움이 되었다. 자 본격적으로 연기법으로 들어가자.
먼저 “연기” 라는 어휘에 대해 알아보자. 연기(paticcasamuppada)는 연하여(pattica)함께(sam)일어남(uppada)을 뜻한다한다. 인용할 경전은 대인연경이다. 팔리어는 Mahanidana Sutta다. 각묵스님 역 디가니까야 2, p113의 각주를 인용하면,
----“ 본경의 빠알리어 제목은 마하니다나 숫따(Mahanidana Sutta)이다. 여기서 핵심은 nidana라는 술어인데, 이단어는 ni(아래로)+√da(to give)에서 파생된 명사로 ‘아래에 놓음’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기초, 기본, 원천, 근원’등의 뜻으로 쓰인다. 본경4장에서도 hetu(원인), nidana(근원), samudaya(기원, 집), paccaya(조건)로 나열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청정도론”에서 ‘조건, 원인, 이유, 근본, 근원, 기원 등은 뜻으로는 하나이며 글자만 다를 뿐이다’라고 설명하듯이 이 단어들은 모두 동의어다. 이처럼 본문 안에서는 근원으로 옮겼는데 본경이 연기의 이치를 심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이라서 경의 제목을 우리에게 친숙한 ‘인연’으로 옮겼다.”----
본경 4장에 해당되는 부분은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아닌 태어남이다” 이며, 장아함의 대연방편경에서는 “그러므로 아난아, 이 연법(緣法)을 통해서 늙음과 죽음은 생으로 인하여 생기고 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로 동국대역경원 한글대장경에서 인용했다.
대인연경 1장을 인용한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에서 깜마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자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 연기(paticcasamuppa -da)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
장아함경 제12권 법설의설경에는 연기법설(法說)과 연기의설(義說)을 설명한다. 연기법설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로 연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연기의설은 연기의 각 지분에 대한 설명으로 법설의설경에서는 십이지로 설명하고 있다. 연기의 지수는 12지가 표준형으로 나타나지만 무명과 행이 빠진 10지도 나오고(잡아함 권12,제287경), 인용할 대인연경에는 무명, 행, 육처가 빠진 9지가 나온다.
“연기(paticcasamuppada)”라는 단어를 설명하는데 장황하게 길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벌써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렇게 인용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paticcasamuppada)”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미루어 파악되는 단어의 의미와 실제 사용되는 용법을 통해 파악되는 단어의 의미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번역의 어려움이라 생각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원적으로 보면 연기(paticcasamuppada)는 연하여(pattica)함께(sam)일어남(uppada)을 뜻하므로 연기법설은 이것과 저것이 연해서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쓰임, 연기의설에서는 인과처럼 드러나는 것은 과만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저것만 형(and/or)상(形相)으로 드러난다(드러난 형상 혹은 현상이 法이다). 여기에 연기의 심오함이 있다. 이 부분은 사유를 통해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연기를 언설로 표현한 것이 중론의 제1장의 “소멸하지도 않고 발생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다의도 아니고 일의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라는 그 유명한 구절이다.
연기의 원리를 보자. 연기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 연기법설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사고의 비약을 막기 위해 이것을 상기하자. 불교는 (의)식의 활동으로 我을 고찰해 간다. “이것”과 “저것”은 식 작용의 드러남이다. 法이라 이름 한다. 연에는 넷이 있다. 四緣論이다. 인(因), 등무간(等無間), 소연(所緣) , 증상(增上) 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과가 있다. 사과가 눈에 연해 안식이 생한다. 안식은 연기에 의해 드러났다. 눈이 因이다. 안식에는 所緣이 없다. 所緣은 사과다. 안식은 찰나찰나찰나생멸한다. 사과는 끊어져 보이지 않는다. 前法과 後法이 간격이 없다. 等無間이다. 눈의 망막에는 사과의 상이 맺혔다. 대상과 인이 함께 일어났다. 增上이다. 쉽게 야그하면 결과이다. 이게 識身足論에 나오는 4연에 대한 설명이다. 중론 1장에서 전개된 논리를 보자. 4연에 대한 설명이다. 법의 자성은 緣속에 있지 않네, 법들은 연해서 발생하기에 緣이라 부른다. 존재하는 법은 所緣이 없다고 가르치셨네. 법들이 발생하면 소멸을 하고, 소멸했을 때는 연이 없으니, 연이 있으려면 전법과 후법사이에 간격이 없어야 하네, 緣속에서는 그 결과가 없으니, 결과는 연에서 형성된 것이며 자기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자기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은 것에서 생긴 결과가 어떻게 연에서 형성된 것이겠는가? 즉 增上은 因과 所緣이 결합하여 증폭되어 일어남을 말한다.
연기의설로 들어가자. 대인연경 제2장에서 연기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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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老死)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죽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죽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生)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존재(有)을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취착(取)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취착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갈애(愛)을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감각접촉(觸)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정신. 물질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물질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알음알이(識)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 물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신.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제3장
아난다여, 이처럼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촉이, 촉을 조건으로 하여 수가, 수를 조건으로 하여 애가, 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가, 취을 조건으로 하여 유가, 유를 조건으로 하여 생이,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와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일어난다.
제4장
“생을 조건으로 노사가 있다(生緣老死)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 그러면 이처럼 태어남이 소멸해버려 태어남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늙음.죽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늙음.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아닌 태어남이다”
제5장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有緣生)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 이처럼 존재가 소멸해버려 존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태어남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이다”
제6장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取緣有)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 취착이 소멸해버려 취착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취착이다”
제7장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愛緣取)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 갈애가 소멸해버려 갈애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취착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취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갈애이다”
제8장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受緣愛)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 느낌이 소멸해버려 존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갈애를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갈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중략...
제19장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觸緣受)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중략...감각접촉이 소멸해버려 감각접촉이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느낌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접촉이다”
제20장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名色緣觸)고 말하였다. 중략..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名身)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무리(色身)에서 이름 붙이기를 통해 생기는 정신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물질의 무리(色身)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의 무리(名身)에서 부딪힘을 통해 생기는 (색의)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고유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 짓기로 얻어지는 감각접촉이나 부딪힘으로 얻어지는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 물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감각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물질이다”
제21장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물질이 있다(識緣名色)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정신. 물질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어간 뒤 잘못되어 버렸는데도 정신, 물질이 그러한 상태를 생기게 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동자나 동녀와 같은 어린아이일 때 잘못되어 버렸는데도 정신. 물질이 향상하고 중장하고 번창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정신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알음알이이다.”
제22장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고(名色緣識)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정신, 물질에 확립됨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 죽음과 괴로움의 일어남이 생긴다고 천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알음알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물질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 물질의 상호조건]에 의해 이름 짓는 토대가 생기고,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통찰지의 영역이 생기며, 이 알음알이와 정신,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 물질은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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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3장은 유전연기를 4장-22장에서 유전연기와 환멸연기가 섞여있다. 그리고 생략한 9장에서 18장까지는 9가지로 벌어지는 있는 갈애에 대한 설명이다. 느낌-> 갈애 ->추구 ->얻음 ->판별 ->욕망 -> 탐착 -> 거머쥠 -> 인색 -> 수호 ->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의 생김이 갈애에 의한다.
대인연경에 나오는 연기는 표준형인 12지연기와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첫 번째가 9지연기로 설명되어있다. 표준형에서 무명, 행, 육처가 빠진 형이다. 둘째는 노사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올라가면서 설명되어있다. 셋째는 유전연기는 단독으로 설명한 후에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를 함께 섞어 설명한다. 넷째는 갈애의 전개 상황을 9가지로 자세히 설명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렇게 설명된 것이 이해하기 더 좋았다.
노사 <- 생,
생 <- 유,
유 <- 취,
취 <- 애
애 <- 수
수 <- 촉
촉 <- 명색, (* 촉 <- 육처 , 육처 <- 명색 )
명색 <-> 식,
(* 식 <- 행)
(* 행 <- 무명)
설명해 나가겠다. 연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식 <-> 명색
21장과 22장은 연기를 살펴보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알아들으면 연기법은 끝난다. “식<->명색” 이支 하나만으로 我라 이름 하는 인간존재의 실상이 표현된다. 입태하여 엄마 자궁속에서 인간존재가 만들어져 탄생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전 글에서 불교는 (의)식활동으로 인간존재를 설명한다했다. “명색과 식의 상호조건에 의해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윤회가 전개”(괴로움의 무더기)된다.
다른 경전을 인용하겠다.
<중아함 권54 다제경>
---- 다시 세가지가 모이어 비로소 어머니 태에 들어간다. 아버지 어머니가 한 곳에 모여 어머니가 가득한 정을 참고 견디면 향기로운 음기가 이미 이르나니, 이 세 가지가 서로 모이어 비로서 어머니 태에 들어가며 어머니 태는 아홉 달이나 열달 동안 가지고 있다가 이윽고 낳는다. 낳은 뒤에는 피로써 기르나니, 피란 이 거룩한 법에서는 어머니 젖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는 모든 근이 갈수록 커지고 갈수록 성취되니, 밥이나 보리 가루를 먹게 되고 소유를 몸에 바른다. 그는 눈으로 빛깔을 보아 좋은 빛깔은 즐겨하고 나쁜 빛깔을 미워하며, 몸을 세우지 않고 못된 마음만 생각하여,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함을 참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서 생긴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은 즐겨하고 나쁜 법은 미워하며 몸을 세우지 않고 못된 마음만 생각하여,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함을 참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서 생기는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을 남김없이 부서지게 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싫어하고 싫어하지 않는 느낌을 따라 혹은 즐거워하고, 혹은 괴로워하며, 혹은 괴로워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느낌을 즐겨 구하고 집착해서 그 느낌을 받아 들인 뒤에, 만일 즐거움을 깨달으면 이것을 취함이라 한다. 그래서 취함을 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연하여 남이 있으며, 남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 시름, 슬픔, 울음, 걱정, 괴로움, 번민이 생기게 되며, 이리하여 이와 같이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게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갈애에 완전히 얽매어 서로 계속하는 것이 저 어부의 아들 사아티 비구와 같지 않은가? ..........-----------
<증일아함 권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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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인연이 있어야 식(識)이 태(胎)를 받게 된다.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비구들아, 어머니가 애욕(愛欲)의 마음이 있어서 부모가 한곳에 모여 함께 머물러 잔다 하더라도, 그러나 또한 바깥에서 식(識)이 와서 호응해주지 않으면 곧 태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또 식(識)이 와서 들어가려고 하더라도 부모가 한곳에 모여 있지 않으면 역시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머니가 애욕의 마음이 없는 상태로 부모가 한곳에 모여 있을 경우, 그 때 아버지가 아무리 애욕의 마음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그리 간절하지 않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을 경우 어머니가 아무리 애욕의 마음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그리 간절하지 않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풍병(風病)이 있거나 어머니에게 냉병(冷病)이 있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부모가 한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풍병이 있거나 아버지에게 냉병이 있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몸에 물 기운[水氣]이 지나치게 많으면 어머니에게 그런 질환이 없어도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상(相)에는 자식이 있으나 어머니의 상에 자식이 없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상에는 자식이 있으나 아버지의 상에 자식이 없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의 상에 모두 자식이 없으면 태는 성립되지 못하느니라. 또 때로는 식신(識神)이 태에 나아가더라도 아버지가 떠나 있어 없을 경우엔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꼭 한 곳에 모여 있어야 할 것이나, 그러나 어머니가 멀리 떠나 있어 없을 경우엔 태는 성립되지 못하느니라.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더라도, 그러나 아버지가 몸에 위중한 병이 있을 경우, 그 때는 식신이 태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태가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일 만하고 식신이 와서 태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위중한 병을 앓을 경우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어느 때에 부모가 한 곳에 모일 만하고 식신이 와서 태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러나 부모가 모두 병을 앓을 경우 태는 성립되지 못한다. 또 비구들아, 만일 부모가 한 곳에 모여 있고 부모에게 질환이 없을 경우 에야 식신이 오는 것이고, 그리고 또 부모에게 모두 자식을 둘 상(相)이 있을 경우에 그는 곧 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세 가지 인연이 있어야 태가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방편을 구하고, 이 세 가지 인연을 끊어야 한다. 이와 같나니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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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부모은중경 제2장, 제1절에는 열달 동안 일이 월별로 묘사되어 있다(이경은 비록 위경으로 남아있지만 사실상 정경처럼 유통되어왔다고 한다) 태생학적인 기술이 있어 흥미로운 부분만 인용해 보면, 2개월에는 땅에 쏟아진 식은 우유와 같고, 3개월에는 마치 엉긴 핏덩이 같고, 4개월에는 사람의 모습이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6개월에는 뱃속에서 오포가 이루어지는데, 오포라 함은 머리와 두 팔과 두 무릎이니라. 6개월에 육정이 이루어지고 7개월에는 3백60뼈마디와 8만4천의 털구멍이 생기고, 8개월에는 의지가 생기고 구규가 자라난다. 구규는 두눈, 두귀, 코와 입과 배꼽과 대변도와 소변도니라.... (소아과 과장한테 형태적으로 사람형체를 갖추는 시기를 물어보니 16주라 한다. 이 경의 번역 혹은 작성시기로 수나라말기나 당나라 초기설, 1250년 부모은중경소의 필사본이 전함, 1381년 고려 우왕7년에 간행한 판본이 우리나라의 것으론 가장 오래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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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밑줄 친 발전하겠는가?에 대한 주석서에는 “발전 하겠는가란 재생연결식이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다른 순수한 명색이 모태 안에서 깔랄라등의 상태로 적집되고 혼합되어 존재하겠는가라는 말이다“라고 해설되어 있다고 각주에 적혀 있다. 다제경에는 입태하는 식이 “향기로운 음기”로, 증일아함에는 “識神”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神은 매우 중국적인 표현이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분화되어 십 이내의 세포수가 될 때(정확한 세포수와 그 상태를 지칭하는 명칭은 기억의 저편에 있다), 자궁벽에 착상된다. 거기서 태반이 형성되며, 한 인간이 자궁 내에서 만들어 진다. <증일아함 권12(3)>은 수태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현대의학이 밝힌 자궁벽에 수정란이 착상되어 태반을 형성하는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살피고 있다. 사실, 임신초기에 유산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원인도 모르고... 적어도 천년 이전에 기술된 것인데 놀라울 뿐이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에 識이 들어와 수태하니 그것을 구별되게 識神이라 표현했다. 태속에서 10달 동안 생명활동을 하는 조직체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명색이 쏟아진다(중론의 십이연기를 관함에서 나온 표현)고 하였다. 오온(오음)이 구체화, 물질화 된 것이 명색이다. 이것이 한 생명체로서의 我인 것이다. 엄마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해 가는 것이나 태어난 신생아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나 조건은 마찬가지다. 태속에서는 태반을 통해 엄마로부터 성장에 필요한 것을 얻지만 태어나서는 직접 음식물과 호흡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얻는 차이뿐이다. 이것이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있다(識緣名色)라는 불교적표현의 내용으로 이해한 바이다.
<증일아함 권12(3)>은 입태될 때를 중점적으로 설명하며 <다제경>은 유전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이번 글에서 인용한 것은 9지연기다. 10지연기에서 육처가 빠진 형이다. <증일아함 권12(3)>과 <다제경>의 내용을 합쳐서 본 유전연기와 대인연경의 9지 유전연기를 비교해서 보면 나의 이해가 오해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아함부에 속하는 경들이 모두 부처님의 교설을 담았던 거라면 연기법도 처음부터 표준형인 십이지연기로 설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자, 그러면 입태하는 식과 명색을 조건으로 하는 식은 같은 가 다른 것 인가? 이것을 사유해 보자. 9지, 10지 혹은 12지 연기는 모두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르면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가 “명색을 조건으로 식이 있다”보다 선행한다. 먼저 식이 수정란에 들어와 착상되어야 태아가 만들어 지겠다. 연기법설을 적용해 보자. 因은 식이다.所緣은 오온이다. 增上은 명색이다. 태아가 커나간다. 태아도 생명활동을 한다. 식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때 벌어지는 일들을 안다. “명색을 조건으로 식이 있다”의 내용이 된다. 因이 명색이고 增上이 식이다. 사실 자세히 사유해 보면 선후 관계를 정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리 같은 중생들은 입태하는 것을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왜인가? 입태 과정과 명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지 못하고 관념적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후 성장해 나가고, 그건 곧 늙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상태, 즉 세상살이에서는 선후가 없는 “명색과 식의 상호조건”이다. 그러면 입태 할 때의 식과 태어나서 명색을 조건으로 하는 식은 같은가 다른가? 이건 딴소리가 나오지 않는 문제다. 당연히 다른 ‘상태’다. 그러면 다른 식인가? 다른 식은 아니다.다른 사람의 식이 아니고 같은 사람의 식이다. 식은 존재하는 사람 그 사람 고유의 식이다.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만 있는 그 사람의 식이다. 한 살 때와 열 살 때는 같은 식인가 다른 식인가? 열 살 때와 스물 살때는 어떤가? 또 한번 상기시켜야 겠다. 불교는 오직 識이라는 관점에서 我를 고찰한다. 우리가 영혼이나, 영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유체이탈을 경험해 보시라. 몸밖에 있어도 똑같이 식작용이 벌어진다(유체가 영체는 아니다). 식이라 부르는 단어는 기능적인 이미지만 표상한다. 입태하는 식을 구조적인 의미가 강하게 품기는 다른 단어로 바꾸어 보자. 靈(體)이 그러한 단어다. 魂(혼)魄(백)이란 단어도 있다. 情, 氣, 神이란 단어도 있다. 靈, 魂, 魄은 구조적인 의미가 강한 단어이고 神, 氣, 精은 기능적인 의미가 강한 단어다. 靈神이고 魂氣이고 魄精이다. 사람은 靈이 입태하고, 호흡을 통해 氣을 받아들여 魂이 만들어지고 음식물을 통해 精을 받아들여 魄이 만들어 진다. 사람은 신,기, 정으로 표현하고 그 count part가 영, 혼, 백이다. 요가에서는 세가지 몸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 기, 신 - 백, 혼, 영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우리민족의 의식에 깊이 뿌리 박힌 개념이다. 도가적 영향으로 생각된다. 증일아함에서 입태한 식을 識神이라 한역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면 입태할 때의 식과 명색을 조건으로 하는 식은 다른가, 같은가 하는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靈은 입태 할 때나 태어날 때, 10살 때나, 20살 때나, 죽을 때나 그놈이 그놈이다. 기능(靈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능 중에 한가지 기능)으로서의 識은 세월이 흘러가매 常하지 않다. 無常이다. 식 작용으로 찰나 찰나 생멸하는 찰나식이 드러난다. 찰나식의 개념은 어느 정도 공부한 불자라면 다 아는 개념이다. 찰나식은 끝임 없이 지속된다. 찰나식, 찰나식, 찰나식, 찰나식이 서로 간격이 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등무간(等無間)이다. 찰나식은 무에서 일어났다가 무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근원이 되는 것이 識体이다. 識이 因이다. 찰나식은 識을 조건으로 한다. 찰나식에는 緣한 바(所緣)가 없다. 찰나식을 조건으로 업이 형성된다. 業識의 개념이 되겠다. 찰나식의 활동내용이 육육법설과 일세십이지연기다. 업이 형성되어 식에 갈무리 된다는 의미가 되겠다. “集” 이다. 識은 동일한 사람의 識이지만 갈무리된 내용은 각각의 찰나식이 생멸 할때마다 다르다. 이를 언설로 표현하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같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입태하는 식과 명색을 조건으로 하는 식이 같다는 산냐를 내어 웅켜지면 常見에 着한 것이며, 다르다는 산냐를 내어 웅커지면 斷見에 着한 것이다. 이와 같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같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중도”를 말하고 “연기”를 말한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識의 있음에 바탕을 두고 글이 전개된다고.... 有변에 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건 연기를 모른다는 소리와 한가지다. 여기까지 잘 따라오신 분은 금방 이해하실 것이다. 唯識을 상견으로 보는 것 역시 연기를 모른다는 표현이다. 識이 중도다. 연기라는 말이다.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有가 아님도 아니고 無가 아님도 아닌 것이다. <기신론>의 전개방식과 동일하다. 識이 일심이다. 중도공관과도 동일하다. 識이 空이다. 간단히 말하면 識은 증득의 영역이다. 멋있게 표현하면 언설이 끊어진 자리가 되겠다.
“식”과 “찰나식”과의 관계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같지 않음도 아니고 다르지 않음도 아니다. 위에 적었지만, 무명의 개념을 도입해서 다시 설명해 보자. “식”의 바다에 “무명”의 바람이 불어 “찰나식”의 파도를 일으킨다. 바다의 水나 파도의 水는 물의 성질이 같다. 그러나 파도의 水는 바람이 실려 있다. 바다에도 바람이 불지만 바다의 水에 실리고 못하고 파도의 水에만 바람이 실린다. 바람을 싣고 있는가 없는가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파도는 바다와 분리되지 않는다. 바다를 体라 하고 파도를 用이라 한다. 바다의 水를 性이라 하고 파도의 水를 相이라 한다. [기신론]에서는 보다 정교하게 설정되어 있다. 바다전체가 “심진여문”이며 “심생멸문”이다. 바다에는 무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바다를 衆生心, “심진여문”의 바다를 心眞如, “심생멸문”의 바다를 心生滅이라 이름 했다. 이 바다는 무명의 바람이 양쪽 문에 불어도 희한하게 “심생멸문”의 바다만 動하여 파도가 일어나고 “심진여문”의 바다는 動하지 않는다. 무명의 바람에 動한 것을 如來藏, 파도를 阿黎耶識이라 이름 했다. 이것이 기신론의 설정이다. 그렇게 되면, 심진여의 体나 심생멸의 体나 그놈이 그놈이다. 그래서 하나다. 一心이다. 심진여의 水가 佛性이며, 심생멸의 水는 無明風이 실려 있다. 相이다. 如來藏이다. 파도의 水도 역시 無明風이 실려 있다. 相用이 드러난다. 그래서 여래장에는 여래의 性이 숨겨 있다 하는 것이다. 體, 性은 숨고 用, 相은 드러난다. 이런 기본 설정을 바탕으로 기신론을 읽어 가면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 다시 한번 강조하자. 불교에서는 (의)식 활동으로 인간존재, 我를 고찰해 가고 있다.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영혼을 말씀하지 않았고, 윤회를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또한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성장해서 소멸하는 지를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이런 것들을 부정하셨다고 소설을 쓰지 말자. 我를 알지 못하고서 이러한 것들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이런 종류의 의문에 대한 질문에 아무 답변을 하시지 않은 이유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이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고 화촉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화촉에 묻은 독극물은 어떤 종류인가 이런 것들은 위급한 문제들이 아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몸에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화살을 뽑는 일이다. 인간존재, 我를 바르게 고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의)식 작용을 정확히 아는 것이 我를 바르게 고찰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삼천포로 빠지겠다. [선문촬요법어]에 참선의 열세 고개가 있다. 참선공부로 성불까지를 13단계로 나눈 것이다. 1.송화두, 2.염화두, 3.주작화두, 4.진의돈발, 5.좌선일여, 6.동정일여, 7.몽교일여, 8.오매일여, 9.생사일여, 10.입태일여, 11.주태일여, 12.출태일여, 13.영겁일여, 이렇게 13단계다.
10번째인 入胎一如:비록 이 몸 버리기를 자유로 하여 생사일여가 되었다 할지라도 내생에 부모될 인연을 만났을 때에 문득 망상을 일으켜 생사일여가 없어지고 태중의 피덩이가 되어서 생리(生理)에 묻히고 만다. 11번째인 住胎一如: 설사 입태할 때에 일여하였다 할지라도 주태 열달 동안에 미혹하는 수도 있고 태중 열 달동안에 일여 했다 하더라도 출태할 때에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12번째인 出胎一如: 출태할 시에 일여하면 영겁에 일여한다. 13번째인 영겁일여: 이렇게 영겁에 일여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한다.
입태할 때, 엄마태속에 있을 때, 태어날 때의 과정을 아는 이가 있다는 야그다. 죽음저편에서 언급한 이안스티븐슨 박사의 연구소에서 모아져 있는 파일 중에 이런 걸 기억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인된 경우가 있었다.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는 아이가 성불한 경우라고는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연구소 소속학자들의 논문과 저서를 보면서 불자의 입장에서 사유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 연구소에서 모은 자료를 열람하려 그곳으로 연수가고 싶었을 정도였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다. 윤회하는 real entity가 있는가? 윤회한다는 것은 常見인가?
본궤도로 다시 돌아오자.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과 “명색은 식과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구절은 불교적 고유의 표현방식으로 연기의 내용을 아주 잘 나타내는 구절이라 하겠다.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 즉 “연기”가 “我”의 실상인 것이다. 통찰지의 영역까지도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에 의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표현을 보자. 性相 體用은 본래 한때이다. 그것도 아니며 아 닌것도 아니요(離卽離非) 또한 그것도 되며 아닌 것도 된다(是卽非卽). 마음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원심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취상심(無明取相心)이다 <선가귀감> : 본원심이 체이고 무명취상심이 용이다. 소멸하지도 않고 발생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다의도 아니고 일의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離卽離非) <중론>.
이전 글에서 불교에서는 (의)식의 활동으로 인간존재를 파악한다고 했고, 오온, 육육법설, 연기법 모두 (의)식의 활동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팔, 다리라는 色이 없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살아가는게 행이니 불교용어인 업을 짓는다(어리석은 우리같은 중생들은 그렇다). 그러면, 심장이란 색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도 살 수가 없는데, 심장이 없으면 그런 인간은 태어나지도 못한다. 유산된다는 말이다. 폐라는 색이 없으면 엄마 태속에서는 살수 있다. 태속에서 폐를 쓸 일이 없다. 엄마 폐에서 필요한 일이 벌어지니 그렇다. 태어나면 another story다. 뇌란 색이 없으면 어떻게 되네. 무뇌증이라 기형이 있다. 인간의 형태를 다 갖추었지만 살수가 없다. 이렇게 색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색이 있고 없어도 되는 색이 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관념적으로만 사색하여 소설을 쓰지 말라는 야그다. 대표적인 것이 무아를 나란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경우다. 한번 불교사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한테 내가 없다고 해봐라. 웃긴다고 할 것이다. 왜 내가 없나. 비단금이라 이름하는 나란 놈이 없는데 이 글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으며, 지금 제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또 누구인가 말이다. 그러면 실체가 있다는 말인가? 有에 대해서는 위에서 논의하였다. 연기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또 같은 말이 반복된다. 핵심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대념처경에 몸에 관한 관찰에서 인체구조의 이름이 나온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다 아셨다는 말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그 당시 엘리트들이 많았다. 그 제자들이 오온, 연기, 및 무아 등 불교의 기본 교리를 부처님한테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때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데 그걸 진리로 받아들이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월과 관계없는 진리를 담고 있지 않는데 2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 많을 수 있을까? 오온이 我가 아니다(無我). 이것이 나다, 저것이 나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등등 하는 것은 산냐(想)라 이름하는 식활동이다. 我에 대한 어떠한 산냐도 거머 움켜쥐지 말라는 말씀이 무아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식과 명색의 상호조건”을 계속 고찰해 나가자.
흔히 교학하는 분들이 불성, 진여자성은 연기로 존재한다. 공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참나니 진아니 하는 단어는 심하게 말하면 불교가 아니다라고 까지 한다. 그런데 가만히 그 글을 읽어보면 연기로 불성이니, 진여자성을 말하지만 담아 있는 내용은 자신이 비판하는 참나니 진아의 산냐에 해당되는 경우가 흔하다. 식이 없는데 명색이 있을 수 있나? 인간존재한테는 식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또한 드러나지만 그게 그것인지 모른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있다니 없다니 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된다. 식을 불성, 진여자성, 참나, 진아라 이름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그 무엇인가 말이다. 이름이 달라도 내용물이 같은 거면 그만이지.. 사과, apple,그 외에는 무식해서 모르겠다, 이 지구상에 언어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사과라 이름하는 그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언어 수 만큼 그 이름이 있다.
명색 -> 촉
명색을 다 갖추었으면 엄마 배속에 있을 필요가 없겠다. 당연히 바깥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식작용을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이 세상에 나와 ‘으앙~~’ 하는 걸 기술하나 하지 않으나 마찬가지다. 촉은 육감각기관에서 연해서 생기니, 인체감각기관은 명색에 있으니 육처를 빼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촉 -> 수 , 수 -> 애, 애 -> 취, 취 -> 유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다. 또 나온다. 불교는 식의 활동으로 我를 고찰한다고 했다. <잡아함 권 13, 304 六六經>를 읽어 보시라. 대인연경의 제23장에서 32장까지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육육법설은 찰나식의 관찰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6식, 6처, 6촉, 6수, (6상, 6사){색, 식, 수, 상, 행}가 내가 아니다<무아>. 이렇게 바르게 관찰하지 않고 갈애의 따라 我를 취한다. 찰나식이 폭포수처럼 계속 쏟아진다. 그게 삶이다. 취를 조건으로 그 갈애에 해당되는 有를 형성된 채로...有는 세가지 있다. 욕계, 색계, 무색계다. 유 다음이 태어남이다. 여기서도 죽어서 어떻게 되고 하는 이야기가 없다. 불교는 실존을 논한다. 이 땅에서의 삶만 논한다. 이번 삶에서 유가 형성이 되면 언젠가는 다시 이 땅에 태어난다. 죽었다 몇 개월 만에 다시 몸을 받거나 수십년 후에 혹은 수백 년 후에 몸을 받는다. 이 과정은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계십니까? 식에서 유까지가 금생의 일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자아(我)라고 천명하는 가를 제23장에서 말씀하신다. 4가지를 말씀하신다. 1. 색을 가진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색을 가졌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2. 색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3. 색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고 천명한다. 4.색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면서 나의 자아는 색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고 천명한다. 정리해 보면 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산냐를 이렇게 크게 4가지 범주로 나눌수 있을 것 같다. 有身見과 無身見, 常見과 斷見이다. 이런 4가지 범주에 들어가는 我에 대한 산냐를 움켜지는 것이다. 그것이 有가 된다.
유 -> 생
생 -> 노사
후생의 일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무더기다. 그래서, 대인연경의 연기는 이세(금생과 내생)연기가 된다. 여기까지가 유전연기이다. 무명, 행이 들어가면 전생이 되어 삼세십이지연기에 해당된다.
그러면 괴로움의 무더기를 끊는 방법은 무엇인가? 滅의 길이다. 조건을 형성하지 말라 말씀 하시는게 환멸연기이다. 또 한번 강조한다. 식의 활동으로 파악하는 거다. 식이 멸하면, 명색도 멸하고, 촉, 수, 애, 취, 유 가 멸해 다음 생에 태어나지 않는다. 식이 멸했다면 무슨 뜻인가? 식이 멸하면 생각하고 뭐 그런 식 활동이 멸한 상태가 되는가? 잠시 생각만 해도 금방 알 수 있겠다. 我에 대한 어떠한 산냐도 거머 움켜쥐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길이 8정도이다. 正見, 正志, 正語, 正業, 正明, 正方便, 正念, 正定이다.
자 바른 길을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식활동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어떠할까? 대인연경의 일곱가지 식의 거주처와 두가지 장소에 대한 말씀에서 고찰할 수 있다.
제33장
“아난다여, 참으로 일곱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住)와 두가지 장소(處)가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
1.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지고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2.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지고 [태어난]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여기 이세상에서]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범중천에 태어난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3. 모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4. 모든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5. 물질에 대한 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산냐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6.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식’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7.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식의 거주처이다.
그리고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가 있고 두 번째로 비상비비상처가 있다.” ------------
각주를 참조해서 보면 욕계천, 초선-범중천, 제2선-광음천, 제3선-변정천, 제4선-무상유정처 (제4선천의 두 번째가 무상유정천이다. 색계에서 최고로 높은 천상이다. 산냐를 없애 버리려는 의도로 가득 배어 있다고 한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순이다. 두 가지 識處와 7가지 識住 있다고 한다. 식처가 둘이 있다 한 것에 대해 주목해 볼 만 하다. 모두 想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멸진정처럼 想이 멸한 것이 아니다. 이전 글에서 “우리가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 내에 국한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우주에까지 작용을 한다. 의식의 세계는 육체를 바탕으로 작용하지만 무의식은 육체를 떠나 전 우주에 작용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주가 마음에 비춘다고 하는 것이 옳은 소리일 것이다” 라고 쓴 적이 있다(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식은 작용범위가 육체에 한정되지 않아, 수행을 통해 식의 활동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면,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식활동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위글처럼 識住와 識處는 식이 우리 몸내에서 위치하는 곳이 아니라, 기능적인 측면에서 식의 작용범위로 보면 이해가 쉽다. 디가니까야의 대인연경을 보고나서 유식의 이해도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유식을 말하면 8식-7식-6식, 전오식으로 식의 깊이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내가 그랬다는 의미다. 그런데, 七식주와 二식처를 유식30송과 함께 보면서 새로운 통찰이 일어났다. 유식의 식이 12연기의 식을 말했다. 찰나식을 말하고 있다. 오온, 육육법설, 십이지연기, 유식 모두 같은 대상을 고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찰 내용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유식에서는 식 활동 내용을 매우 세밀히 관찰하여 분류하고 있었다. 야뢰야식은 찰나식이다. 유전하는 것이 폭포수와 같다고 했다. 등무간의 표현이다. 야뢰야식이 능변하니 말나식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세 번째 능변이 여섯종류의 식, 6식이다. 전오식은 야뢰야식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각각 일어나기도 한다. 음악 공연장에 가면 안식과 이식이 함께 일어 나겠다 등등... 意識에 대해서는 의식은 항상 일어나는데 무상천, 무상정, 숙면 때, 기절 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송16) 무상유정처와 관련이 된다. 아라한의 멸진정과 무심정에서는 말라식이 존재하지 않는다(송7) 비상비비상처, 상수멸과 관련이 된다. 8식은 아라한 위에서 버린다(송4) 상수멸과 관련이 된다. 유식 30송의 자세한 기술은 기회가 있을 때..... “轉識得智” 식이 반야지로 된다는 말인데, 전오식이 성소작지, 6식이 묘관찰지, 7식이 평등성지, 8식이 대원경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8정도에 따라 바르게 길을 걸어가면 8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탈 - 초선에 들어 욕계를 해탈한다. 두 번째 해탈 -제2선정에 들어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세 번째 해탈-제3선정에 들어 깨끗하다고 확신한다. 네 번째 해탈- 색에 대한 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각가지 산냐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구족한다. 다섯 번째 해탈-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무한한 식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구족한다. 여섯 번째 해탈-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일곱 번째 해탈-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여덟 번째 해탈-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滅의 道이다. 해탈 열반의 길은 지금 여기서 가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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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我을 섬으로 삼고 我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모두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 열 두가지 법이 펼쳐 굴러서 능히 결과를 부르므로 “因(인)”이라 하고, 서로 말미암고 의지하여 있으므로 “緣(연)”이라 한다. 인연이 서로 잇달으면 생겨나고 사라지고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다. 만일 무명을 알아 取(취)함과 有(유)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삼계의 스물다섯가지 모든 존재의 나고 멸함이 모두 쉬게 되니, 이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긴요한 방도이다.
성인의 가르침의 문 가운데 설해진 십이인연은 세 종류가 있으니 서로 같지 않다. 첫째 삼세를 잡아 십이인연을 밝힌 법이요. 둘째 결과로 받는 이세를 잡아 십이인연을 밝힌 법이며, 셋째 한 생각의 일세를 잡아 십이인연을 밝힌 법이다.
삼세(三世)십이인연
무명, 행 --- 과거세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 현세; 번뇌, 업, 고
생, 노사 ---- 미래세
이세(二世)십이인연
[대집경]에 자세히 나오지만 경의 문구를 간략히 요약했다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십이인연은 가라라의 때에서부터 무명을 밝히므로 과보라고 한다고 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 현세
생, 노사 --- 미래세
무명에 대한 설명란에 참조할 만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무명:
[대집경]에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무명을 살핀다고 말하는가? 먼저 중음을 다음같이 살피는 것이다. 부모가 낸 탐애심, 그 탐애심의 인연으로 사대가 화합하고, 남녀의 정과 혈의 두방울이 합하여 한 방울을 이루면 크기가 콩알만 하니 이것을 “가라라”라고 한다. 이가라라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목숨(命)이고 둘째는 알음알이(識)이고 셋째는 따뜻한 기운이다. 과거세 가운데 업으로 반연한 과보이므로 지은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
고맙습니다...이렇게 올려주시면 되지요..나머지는 보신 분들이 판단할 일이지요..그런데 이것도 남의 것인 즉 말이 그러나 글이 그러하니 님이 공부한 것을 내 보이시면 어떨지요? 남을 말을 백날 해 봐야 소용없이 남의 밥 먹는 이야기 백날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남의 글이나 말은 내것이 아니고 내 살림살이가 아니니 ...견주어 보아 똑같을 수는 없으니...님의 살림살이를 내보여야지..그 살림살이가 님의 소견이 아닌지요?...말 배우면서 공부했다고 할 수 없으며 수행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여기서 말한 그 자리에 가서 한 번 보세요...봐야지 알지 말해서는 말과 글로는 되지 않지요..어쩌거나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통님의 말은 꼭 싸우러 댕긴 사람 같구료. 남의 것을 내 놓으라느니 그럼 그 점검은 누가 하나요 ? 칠통님 ! 오직 칠통님 ! 옛성인의 말을 가져다 주면 엄숙히 돌아 보아 그릇 된 것을 고쳐 잡아야지 남의 공부를 내놓으라 , 그게 깡패짓 아닌교, 그자리라니 어디에가 그 자리가 정하여 져 있어서 그 자리라고 하는 가요 ?혼자꿈속에서 그 자리가 있지 어디 정법에가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자리를 본다 못본다하시요. 이런 것을 사견이라 한것이요. 석가불법을 칠통불법으로 바꿔 말할 샘이요 ! 비단금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미 모른 것을 올려주시니 나를 점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됨니다.
단전공부 한이들이 기운이 차오르면 어쩌지 못해 그 객기에 지혜를 잃은 나머지 세상을 활보하듯하나 다 고무풍선 바람 빠지면 쭈굴 쭈굴 하듯 허망한 기운인 것이요.그래서 유위법인 것이요, 여러분 ! 헛기운을 믿고 그 기운에 붙들린 줄 모르고 내놓아 보라느니 이런 것은 본인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스스로 밖을 향함이니 객기라고 하고 도를 밖으로 향하니 外道라 한 것이요. 본인은 듣기 싫겟지만 다른 님들을 위하여 !
님도 비단금님도 또한 저도 바르게 공부해 가야하겠지요..말장난하지 말고..자기 자신을 알아주기 바라지 말고 하심과 겸손 속 바르게 수행하며..작금의 일로 일어난 생각을 써서 제 카페에 올려 놓았으니..그 글을 쓰게 하여주셨으니 어쩌거나 감사하다 하겠지요..^0^...()
혼자 도에 대한 꿈 많이꾸시오, 컴화면은 님께서 글을 쓰면 그냥 쓰여 질 뿐 아무 듣거나 말하거나 없답니다. 다만 이 창을 본사람이 그 믿음에 따라 그 깊이를 가늠한 것이요. 님은 님의 경험한 바른 원리만 써 놓으면 되지 그 거치른 기운으로 도를 말해서 뭘 하겠소,남의 믿음이 없는지 있는지 구별하셔야지 혼자 떠들면 보기가 좀 헐덕거림이 심한 것 같소이다. 환상에서 그만 !
글은 웃는 글인데 웃음소리 들리지 않으니 혼자 떠드는 취미로군요. 칠통불님 만세입니다. 억지 웃음이라도 좋구료. 이창에서 많은 교도들을 얻어가시소. 그대교단이 커나가는 것 한 번 보고싶군요.사교단이라도 만들려면 더 많이갖추어야 될 분이요.첫째 무식이 유식으로 바뀌어야 되겠고 아는 것이 지혜로, 또 좁은견문이 넓어져야 되겠고, 상식이 못미친 것이 더, 등등이 교주로서 실력 미달이요..
칠통 마구니요. 듣으시게, 님은 도가에서 사용하는 "도"자의 "ㄷ"도 모르는 단계요. 도가에서 대주천 단계에 들어가서 한소식한게, 인선이라 하오. 그단계는 불가에서 색계를 벗어나는 단계요. 천선의 단계가 비상비비상처요. 아시겠소. 님이 본성이라 체험한것은 유식의 용어를 사용하면 7식 중간정도가 의식으로 드러나는 거요. 단전, 경락 소주천, 대주천 하는 것은 오음 중 색음과 수음이 멸하면서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요. 상음이 멸하는 과정에서 무상정에 들어갑니다. 제4선정으로 색계가 벗어나는 거요. 님의 천계니 광계니 헛소리 하는 것은 다 님이 식의 작용이요. 제대로 된 스승밑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님처럼 맛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디 쓸데가 없소. 정신병원에나 가야지. 정신병에는 인격장애라는 것이 있소. 조금 유식하게 말하면 personality disorder라 합니다. 칠통마구니께서 해당되는 정신병이 인격장애요. 그래서 제가 미쳤다고 하는 거요. 무식한게 자랑이 아니요. 무식한 자가 하는 대표적인 말이 경전으로 알수 없데... 내참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칠통마구님은 무식할 뿐만 아니라 무지합니다. 지혜도 없어요. 지 딴엔 지혜가 있데요. '지혜'가 깔깔 웃고 있소. 칠통마구님은 그소리가 들리지 않소?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선정체험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지혜는 바른 앎입니다. 칱통마구니는 전형적인 마구니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자신의 식작용을 이해하여 바르게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식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허망한 망염, 망상에 잡혀서 헤메고 있는 모습이 지금 칠통마구니의 모습입니다. 불도를 배우고 부처님을 따르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불제자는 이 칠통마구니의 모습에서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부처님을 공경합니다. ()()().
두 분이 컴퓨터상에서만 대화하지 마시고 , 사나이답게 한번 만나서 툭 터 놓고 대화하시고 난 후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느낀 점을 컴퓨터에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로의 단점이 아닌 장점(본 받을점) 10가지만 써 주세요. 더 쓰셔도 좋고요. 물론 만나시고 안 만나시는 건 두 분 마음 가는대로 이시겠죠.
내 칠통마구니 글에 댓글을 달지 않으려 했죠. 정말 이건 쓸데없이 짓이요. 이세상에 저런 인간이 한둘이 아니요. 저 양반 글을 읽어보면 이 곳에 들어온 이유를 알 수 있지, 저 정도 체험 한 것 가지고 심하게 말하면 사기를 치려하고 있소. 저런 인간이 사나이라고 내 참. 내가 왜 댓글을 달고 이 글을 올린 줄 아시요?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모르고 계신 이들이 저런 인간한테 혹 해서 허송세월 할까봐 이짓을 하는 겁니다. 저 마구니는 불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도도 아니요. 죽도 밥도 아니요. 시중에 알려져 있는 선도수행하는 이 중에서 그래도 맞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인선 정도에 든 이들이요. 저 마구니는 그도 아니요.
아이고~오~ 비단금님, 칠통님이 빛한번 본것을 유식의 제7말라식에 비유하다니요! 유식에서는 1찰라에 생각이 9백번 생멸한다 하지요 1찰라는 1초를 1600분의1로 나눈것을 말하며 1찰라에 9백번 마음이 생멸하는데 너무빨라서 자기가 일으키고도 자기가 모른답니다, 눈뜨고 깨어있으면서도 자기가 일으킨 생각을 모르는 분에게 몽중위의 경계란 있을수도없는 너무나도 과분한 말씀인듯 합니다
제눈에는 윗분들이 마구니들로 보이는것은 어쩐 일일까.....굳이 엘로드로 측정해볼 필요도 없을거 같네...마구니란 소리 듣기가 그러하면 엘로드란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자신을 측정해보심이...이것도 나만의 꿈이요 환상이겠지....거 그런 마구니라면 나도 마구니 한번 되어봅시다 그려...머 이건 불교인이건 아니건 거의 말하는 수준이 쩝..하긴 예전에 임수정씨와 관련하여 악플다는 사람 검찰에서 조사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교수등 엘리트출신이라더니...쯧쯧...많은 생각 교차되네요...
해보셨습니까?...배워서 했더니 마구니가 됩디까?...자기 살림살이를 측정해봤습니까?..해보지도 않고 왜 미리 걱정하신데요?....그거로 남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살림살이도 알수있다는데 왜 해보지도 않구서 다들 궁시렁 궁시렁 하시는지....다들 자기살림살이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건 아닌지...하긴 예전엔 그런 방법이 없어서 속고 속이는게 가능했으니....쯧쯧...일반인들도 깨달음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얘기해도 궁시렁 궁시렁 되면서 실험해보지도 않으니....쯧쯧쯧...꽉 막히고 막혀도 모든일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구만유..언제까지 밥을 떠먹여주길 바라십니까?...언제까지 속임을 당하고 사시렵니까?
첫댓글 이글은 부처님 말씀을 고찰함1.2.3 중에 마지막 글 입니다. 다시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올렸습니다.
누구이신 줄 모르오나 님은 정법을 믿고 공부하신 불자님이시요. 나는 그렇게 박식하지 못해 논리에 쩔 쩔 메는데 옛 성인의글을 차곡 차곡 올려 주시니 덕분에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이렇게 올려주시면 되지요..나머지는 보신 분들이 판단할 일이지요..그런데 이것도 남의 것인 즉 말이 그러나 글이 그러하니 님이 공부한 것을 내 보이시면 어떨지요? 남을 말을 백날 해 봐야 소용없이 남의 밥 먹는 이야기 백날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남의 글이나 말은 내것이 아니고 내 살림살이가 아니니 ...견주어 보아 똑같을 수는 없으니...님의 살림살이를 내보여야지..그 살림살이가 님의 소견이 아닌지요?...말 배우면서 공부했다고 할 수 없으며 수행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여기서 말한 그 자리에 가서 한 번 보세요...봐야지 알지 말해서는 말과 글로는 되지 않지요..어쩌거나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비단금님...감사하는 마음으로...이해가 될 때 까지 읽고 또 읽어 보려는 마음내면서.. 스크랩을 해 갑니다....()...
칠통님의 말은 꼭 싸우러 댕긴 사람 같구료. 남의 것을 내 놓으라느니 그럼 그 점검은 누가 하나요 ? 칠통님 ! 오직 칠통님 ! 옛성인의 말을 가져다 주면 엄숙히 돌아 보아 그릇 된 것을 고쳐 잡아야지 남의 공부를 내놓으라 , 그게 깡패짓 아닌교, 그자리라니 어디에가 그 자리가 정하여 져 있어서 그 자리라고 하는 가요 ?혼자꿈속에서 그 자리가 있지 어디 정법에가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자리를 본다 못본다하시요. 이런 것을 사견이라 한것이요. 석가불법을 칠통불법으로 바꿔 말할 샘이요 ! 비단금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미 모른 것을 올려주시니 나를 점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됨니다.
단전공부 한이들이 기운이 차오르면 어쩌지 못해 그 객기에 지혜를 잃은 나머지 세상을 활보하듯하나 다 고무풍선 바람 빠지면 쭈굴 쭈굴 하듯 허망한 기운인 것이요.그래서 유위법인 것이요, 여러분 ! 헛기운을 믿고 그 기운에 붙들린 줄 모르고 내놓아 보라느니 이런 것은 본인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스스로 밖을 향함이니 객기라고 하고 도를 밖으로 향하니 外道라 한 것이요. 본인은 듣기 싫겟지만 다른 님들을 위하여 !
하하하~~ 재미있습니다...웃음밖에 나오지 않네요...놔주면 놔주는지 알아야지...아래 댓글에서 비단금이 이글을 빌려 말씀하신 것이 맞나요..왜 그렇다고 보세요..흔들리기 때문이고 바로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님 역시도 아래서..도...무엇이 도입니까? 도라 하니 도가 아니고 도가 아니라 하니 도인 것이니 무엇을 도라 하나요?..
님도 비단금님도 또한 저도 바르게 공부해 가야하겠지요..말장난하지 말고..자기 자신을 알아주기 바라지 말고 하심과 겸손 속 바르게 수행하며..작금의 일로 일어난 생각을 써서 제 카페에 올려 놓았으니..그 글을 쓰게 하여주셨으니 어쩌거나 감사하다 하겠지요..^0^...()
혼자 도에 대한 꿈 많이꾸시오, 컴화면은 님께서 글을 쓰면 그냥 쓰여 질 뿐 아무 듣거나 말하거나 없답니다. 다만 이 창을 본사람이 그 믿음에 따라 그 깊이를 가늠한 것이요. 님은 님의 경험한 바른 원리만 써 놓으면 되지 그 거치른 기운으로 도를 말해서 뭘 하겠소,남의 믿음이 없는지 있는지 구별하셔야지 혼자 떠들면 보기가 좀 헐덕거림이 심한 것 같소이다. 환상에서 그만 !
으~ 하하하....아이쿠 참...
이렇게 신나게 웃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웃는 글인데 웃음소리 들리지 않으니 혼자 떠드는 취미로군요. 칠통불님 만세입니다. 억지 웃음이라도 좋구료. 이창에서 많은 교도들을 얻어가시소. 그대교단이 커나가는 것 한 번 보고싶군요.사교단이라도 만들려면 더 많이갖추어야 될 분이요.첫째 무식이 유식으로 바뀌어야 되겠고 아는 것이 지혜로, 또 좁은견문이 넓어져야 되겠고, 상식이 못미친 것이 더, 등등이 교주로서 실력 미달이요..
칠통 마구니요. 듣으시게, 님은 도가에서 사용하는 "도"자의 "ㄷ"도 모르는 단계요. 도가에서 대주천 단계에 들어가서 한소식한게, 인선이라 하오. 그단계는 불가에서 색계를 벗어나는 단계요. 천선의 단계가 비상비비상처요. 아시겠소. 님이 본성이라 체험한것은 유식의 용어를 사용하면 7식 중간정도가 의식으로 드러나는 거요. 단전, 경락 소주천, 대주천 하는 것은 오음 중 색음과 수음이 멸하면서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요. 상음이 멸하는 과정에서 무상정에 들어갑니다. 제4선정으로 색계가 벗어나는 거요. 님의 천계니 광계니 헛소리 하는 것은 다 님이 식의 작용이요. 제대로 된 스승밑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님처럼 맛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디 쓸데가 없소. 정신병원에나 가야지. 정신병에는 인격장애라는 것이 있소. 조금 유식하게 말하면 personality disorder라 합니다. 칠통마구니께서 해당되는 정신병이 인격장애요. 그래서 제가 미쳤다고 하는 거요. 무식한게 자랑이 아니요. 무식한 자가 하는 대표적인 말이 경전으로 알수 없데... 내참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칠통마구님은 무식할 뿐만 아니라 무지합니다. 지혜도 없어요. 지 딴엔 지혜가 있데요. '지혜'가 깔깔 웃고 있소. 칠통마구님은 그소리가 들리지 않소?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선정체험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지혜는 바른 앎입니다. 칱통마구니는 전형적인 마구니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자신의 식작용을 이해하여 바르게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식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허망한 망염, 망상에 잡혀서 헤메고 있는 모습이 지금 칠통마구니의 모습입니다. 불도를 배우고 부처님을 따르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불제자는 이 칠통마구니의 모습에서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부처님을 공경합니다. ()()().
두 분이 컴퓨터상에서만 대화하지 마시고 , 사나이답게 한번 만나서 툭 터 놓고 대화하시고 난 후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느낀 점을 컴퓨터에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로의 단점이 아닌 장점(본 받을점) 10가지만 써 주세요. 더 쓰셔도 좋고요. 물론 만나시고 안 만나시는 건 두 분 마음 가는대로 이시겠죠.
내 칠통마구니 글에 댓글을 달지 않으려 했죠. 정말 이건 쓸데없이 짓이요. 이세상에 저런 인간이 한둘이 아니요. 저 양반 글을 읽어보면 이 곳에 들어온 이유를 알 수 있지, 저 정도 체험 한 것 가지고 심하게 말하면 사기를 치려하고 있소. 저런 인간이 사나이라고 내 참. 내가 왜 댓글을 달고 이 글을 올린 줄 아시요?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모르고 계신 이들이 저런 인간한테 혹 해서 허송세월 할까봐 이짓을 하는 겁니다. 저 마구니는 불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도도 아니요. 죽도 밥도 아니요. 시중에 알려져 있는 선도수행하는 이 중에서 그래도 맞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인선 정도에 든 이들이요. 저 마구니는 그도 아니요.
선도로도 어디에 명함도 못내미는 수준이요. 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칠통마구니는 전형적인 마구니요. 댓글도 다른이를 위해 다는 건데, 저런 인간을 내가 왜 만나봅니까? 글을 봐도 어떤 상태인가를 아는데.....
아이고~오~ 비단금님, 칠통님이 빛한번 본것을 유식의 제7말라식에 비유하다니요! 유식에서는 1찰라에 생각이 9백번 생멸한다 하지요 1찰라는 1초를 1600분의1로 나눈것을 말하며 1찰라에 9백번 마음이 생멸하는데 너무빨라서 자기가 일으키고도 자기가 모른답니다, 눈뜨고 깨어있으면서도 자기가 일으킨 생각을 모르는 분에게 몽중위의 경계란 있을수도없는 너무나도 과분한 말씀인듯 합니다
제가볼땐 7식 중간정도가 의식으로 드러난게 아니라 1찰라중에 한순간이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것을 본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헛것을 본건 아니겠지요 다만 순간적으로 흘러지나간 자기의 생각중 하나일뿐^^
그래도 지딴에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정도는 해주어야 지요. 그래야 칠통동네에서는 위신이 조금 설 거 아니겠습니까?
칠통님 만세 해주십시다. 비단금님 ! 요즈음 세상에 저만큼한 부처 나오기도 어려운땐데 우리 응원 해주ㅂ시다. 님의 글을 보고 내 좁은 불교에 대한 폭을 좀 넓혔습니다.자상한 글 올려주심 감사합니다.
제눈에는 윗분들이 마구니들로 보이는것은 어쩐 일일까.....굳이 엘로드로 측정해볼 필요도 없을거 같네...마구니란 소리 듣기가 그러하면 엘로드란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자신을 측정해보심이...이것도 나만의 꿈이요 환상이겠지....거 그런 마구니라면 나도 마구니 한번 되어봅시다 그려...머 이건 불교인이건 아니건 거의 말하는 수준이 쩝..하긴 예전에 임수정씨와 관련하여 악플다는 사람 검찰에서 조사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교수등 엘리트출신이라더니...쯧쯧...많은 생각 교차되네요...
엘로드 ! 엘로드 ! 엘로드라 !!! 허 어 참~ 그것만 좀 배우면 마구니 않되요???
해보셨습니까?...배워서 했더니 마구니가 됩디까?...자기 살림살이를 측정해봤습니까?..해보지도 않고 왜 미리 걱정하신데요?....그거로 남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살림살이도 알수있다는데 왜 해보지도 않구서 다들 궁시렁 궁시렁 하시는지....다들 자기살림살이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건 아닌지...하긴 예전엔 그런 방법이 없어서 속고 속이는게 가능했으니....쯧쯧...일반인들도 깨달음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얘기해도 궁시렁 궁시렁 되면서 실험해보지도 않으니....쯧쯧쯧...꽉 막히고 막혀도 모든일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구만유..언제까지 밥을 떠먹여주길 바라십니까?...언제까지 속임을 당하고 사시렵니까?
밥 버러 먹기도 바쁜 시절에 애혀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