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똑똑한 문사들이 모인 명륜당, 성균관, 서원과 일본 명륜관이 전하는 말
“과학기술은 깜깜한 어둠을 비추는 빛(Science is the candle in the dark)”칼 세이건
서양 최초의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도서관 입구에는 라틴어로
‘하나의 지식이 천 명의 생명을 구한다’라는 표어가 있다.
그러니 볼로냐 대학도 실용주의 정신에 따라 설립된 대학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중세 암흑기를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본다.
서양 근대도 ‘가장 좋은 이론이 가장 실용적이다
(The best theory is the most applicable)’
명륜은‘인륜을 밝힌다’는 최고 교육기관
명륜당 교육은 관념화된 유학에 더해 주자 해석만을 진리로 여겨다
명륜관 교육은 이론을 넘어서 응용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문사들은 성리학이란 ‘구유학’을 고집하며
일본의 무사는 문사답게 신유학을 고집 하였다
조선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조선 문사는 편을 갈라 줄을 세웠고
일본은 서양 신지식을 습득하느라
학구열 넘쳤던 무사들이 똘똘 뭉쳐서 공부에 전념했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하기(萩)의 명륜관.
유학 기관임에도 세계사와 공학도 가르쳤다.
조선의 명륜당은 조선 선비들이 성현으로 모신 주자.
관념화된 유학에 더해 주자 해석만을 진리로 여겼다
일본 무사는 오히려 문사답게 학구적이었다.
학구열 넘쳤던 일본의 무사들
하기(萩)의 명륜관은 유학 기관임에도 세계사와 공학도 가르쳤다.
하기 명륜관에선 서양 신지식을 습득하느라
무사(武士)들이 똘똘 뭉쳐서 공부에 전념했다.
일본 무사는 오히려 문사답게 학구적이었다.
뿌리 깊은 '줄 세우기'
유교의 본토 중국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
합리적 분석을 강조하는 고증학이 교차하며 근대적 사유가 싹을 틔우고,
변방 일본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徠)가 공맹(孔孟)의 가르침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때
조선에선 이미 수백 년 전 유행이 끝난 성리학에만 매몰됐다.
사회 엘리트가 총력을 기울여 유학에 ‘올인’했던 조선에서
학습의 결실이 이처럼 초라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선비들은 성현으로 모신 주자.
관념화된 유학에 더해 주자 해석만을 진리로 여겨서
조선유학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주자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선비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죽이는 일이 생겨날 정도로
조선유학은 권력 투쟁 수단으로 전락해 학문적 순수성을 잃었다.
그래서 조선 중·후기에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실학이 대두하였어도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또 조선의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받든 『논어』의 『주자집주』는
주자가 과거시험용으로 생계를 위해 쓴 책이어서
본격적인 해석서라기보다 참고서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내용을 무조건 신봉했으니 조선유학은 학문으로서 생명력도 잃었다.
더욱이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문사(文士) 출신 예비 관료들에게도 문제가 컸다.
지도층인 조선의 문사들은 파벌을 지었다
편가르기, 국론분열, 아시타비, 내로남불, 아전인수로
자신의 삶에 질문이 없었다
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유학을 익혔는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나란히 펼쳐진 동재와 서재에 편을 갈라 나누어 끼리끼리 모이고
자신이 속한 파벌에 따라 자신의 생활공간을 정했다.
유생이 공부하는 면륜당은 동재, 서재로
명륜당에서부터 이렇게 파벌의식을 키웠으니 당쟁이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한쪽은 노론 유생이 머물고, 다른 쪽은 소론과 남인 유생이 머물렀다.
명륜당에서부터 이렇게 파벌의식을 키웠으니 당쟁이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1475 동서분당의 시작으로
무오사화(1498, 연산군 4)·갑자사화(1504, 연산군 10)·기묘사화(1519, 중종 14)·
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
4대 사화(四大士禍)는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 간에 다툼이었다.
기축옥사(1589 정여립 모반 동인을 물리치고 서인이 득세 송강 정철
특히 정여립 기축옥사 때 1000명을 죽여 임진왜란시 나갈 군인이 없었다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공부의 본질인 질문을 잃었다
주자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선비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죽이는 일이을 하였다
학문을 생겨 수단 爲己之學
권력 투쟁 수단으로 전락해 학문적 순수성을 잃었다.
학문의 생명력을 잃었다
성균관뿐인가. 전국에 산재한 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서원 중 일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 서당의 주인공 격인
선비들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어떤 감흥을 줄지 궁금하다.
부실한 기초라는 부끄러운 실상은 허례허식에 대한 집착과 편 가르기,
줄 세우기로 가렸다.
노론, 소론, 벽파, 시파, 완론, 준론 식으로 집권층의 패거리는 세분돼 갔다.
이렇게 너와 나를 가르는 기준은 ‘근본 따지기’였다.
실력과 내용보다는 핏줄이 중요했고 부모가 누군지,
스승이 누군지, 자란 곳이 어디인지, 혈통, 사상, 근본 따위가 우선시됐다.
‘상복을 몇 년간 입느냐’(예송논쟁),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냐 다르냐’(호락논쟁),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중 누가 서열이 높으냐’(병호시비)
공허한 입씨름만 거듭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을 부질없이 시비
시비선악이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라서 본인의 입장에서만 판단할 건 또한 아니다.
사대, 친일, 진보, 보수, 훈구, 신진 편을 갈라 죽기 살기로 시비만하는 곳이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는지 돌아보고 다시는 그리 되지 않도록 해야죠.
이조 말기에도 서로 물고 뜯고 하다가 외침을 당한 거예요.
나라가 망해도 편갈라 싸운다. 참 씁씁하다
일본의 명륜관은 일본 무사는 오히려 문사답게 학구적이었다.
학구열 넘쳤던 일본의 무사들은
하기(萩)의 명륜관은 유학 기관임에도 세계사와 공학도 가르쳤다.
하기 명륜관에선 서양 신지식을 습득하느라
무사(武士)들이 똘똘 뭉쳐서 공부에 전념했다.
일본 무사는 오히려 문사답게 학구적이었다.
명륜관은 1719년 조슈번(야마구치현)의 5대 번주 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가 세웠다.
처음에는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끔 교과목을 대폭 개편했다.
이 작업은 1849년 8대 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가 기존의 명륜관을 크게 확장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새로 이전한 명륜관에선 사서오경에 더해 영어와 세계지리 및 세계사,
심지어 공학도 가르쳤다.
교과목을 이처럼 확대 개편한 건 변화하는 세계사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명륜관의 이런 교육은 결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춧돌을 깔았다.
메이지유신은 죠슈번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하급 무사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이 정변으로 250년간 일본을 다스려 왔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무너지고,
새로운 혁명정부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들어섰다.
이때 혁명정부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게 산업화를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래서 혁명의 명분으로 내건 존왕양이(尊王攘夷) 중에 양이,
즉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는 걸 포기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작업에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명륜관에서 교육받은 죠슈번의 젊은 무사들이다.
하기 성하(城下)마을은 물론이고,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크,
일본 최초의 근대적 금속용해로인 반사로(反射爐),
서양식 군함을 처음 만들었던 조선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그래서 하기 일대를 돌아보면 일본이 어째서 이른 시일 안에 공업화를 이뤄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차례로 이긴 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서양 학문에 눈뜬 요시다 쇼인
죠슈번의 젊은 무사들 가운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그 선두에 있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3걸 중 하나이다.
그 밖에도 막부 말기에 풍운아였던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메이지유신의 원훈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재직 기간 8년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를 지낸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있다.
하기 성하(城下)마을은 물론이고,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크, 일본 최초의 근대적 금속용해로인 반사로(反射爐), 서양식 군함을 처음 만들었던 조선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그래서 하기 일대를 돌아보면 일본이 어째서 이른 시일 안에 공업화를 이뤄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차례로 이긴 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명륜관은 영국인과 스위스인도 초청해 공학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었다.
첨단 공학을 익힌 무사들은 일본 공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일본이 공업화에 착수한 지 50년도 채 안 돼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산업국가가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일본 공학교육의 주축이었던 도쿄공대(東京工大)도 명륜관에서
시작된 공부학교(工部學敎)가 그 출발점이다.
또 우리나라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용어 중 상당수가 일본어인 건
이때 일본에 불었던 공업화의 물결 때문이다.
일본 근대화를 설계한 요시다 쇼인.
명륜관이 공학교육에 일찍이 눈을 뜬 데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교육철학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고향인 하기에 쇼카손쥬크(松下寸塾)라는 학당을 세웠는데
여기서 공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학당 학우들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엔도 긴스케(遠藤謹助)가
영국에 함께 밀항해 산업혁명 현장을 직접 목격하면서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스승 요시다의 가르침 때문이다.
일본인은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죠슈 파이브’라고 부른다.
근대국가 일본의 기초 닦아
일본의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쥬크 학당.
‘죠슈 파이브’는 영국에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리더격인 히로부미는 공업 행정에 관심을 둬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공부성(工部省)을 설립해 초대 공부장관에 취임했다.
공부성은 광산·제철·철도·전신 등 근대국가 건설에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을 총괄했는데 철강업 중심의 공업 국가로 나아가는 데 밑그림을 그렸다.
가오루는 화폐 제조의 기계화에 착수하면서 이토에 이어 2대 공부장관에 취임했다.
마사루는 철도건설 및 기술자 양성에 애썼다.
요조는 기술자 양성을 위한 공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긴스케는 동전주조의 기계화를 이뤄냈다.
또 와다나베 고조(渡辺蒿藏)는 선박제조의 근대화를 담당했다.
이들은 정한론(征韓論)을 실천해 한국인에게 별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자마자 야심 찬 ‘경제개발계획’을 세운 건
이들의 행동을 본받은 듯싶다.
배움의 소프트웨어 의식이 강한 분이다
박정희 50년을 내다보고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사신 선각자이다
대한민국을 선진국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 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논산 돈암서원.
우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인데도
이를 알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이것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유산인데도
그만큼 우리의 소프트웨어 의식이 부족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