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가 그 정죄됨을 보고
마 27: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 27:1-10 /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다;막15:1,눅23:1-2,요18:28-32] 아침이 되자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다시 회의를 열어 예수를 로마 정부에 인계하여 사형에 처할 방법을 모의한 뒤에 2) 예수를 결박하여 로마 총독빌라도에게 보냈다. 3) [유다의 죽음;행1:18-19] 그때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깊이 뉘우쳤다. 그래서 그 은전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돌려주며 4) `내가 죄를 지었소. 내가 죄 없는 분의 피를 팔았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그것은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요' 라고 대꾸하였다. 5) 유다는 은전을 성소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달아 죽었다. 6) 대제사장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값이므로 헌금궤에 넣을 수가 없겠소. 이런 돈을 받아넣는 것은 우리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말이오' 하고 7)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이방인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8)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9) 이렇게 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ㄱ)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받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팔려 간 그의 몸값이다. (ㄱ. 슥11:12-13) 10) 이것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이다.'
오늘 본문은 참 슬픈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시고,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고 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1-5) 대제사장 측은 예수님을 반역자로 정죄할 만한 고소 내용을 공식화하기 위해 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판결이 나오자마자 예수님을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아마도 유다는 모든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합니다(3). 그래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주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부당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당하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내용을 없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으시기 전에 은 삼심을 돌려주며 이전의 상태로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회개한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했습니다. 결국 유다는 사람들에게 버려졌고, 성소에 은을 던져 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을 택했습니다.
오늘 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6-10)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지고 간 은을 성전고에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피를 흘리게 하고 받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으로 토기장이들이 사용했던 땅을 사서, 나그네들의 공동묘지로 사용했습니다(7).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가 점토를 얻기 위해 사용한 땅에서 더 이상 점토가 나오지 않으면 쓸모없는 땅이 됩니다. 게다가 점토를 파냈기 때문에 구덩이처럼 되어있어서, 연고가 없는 시신을 던져 넣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와 마태가 기록하기까지 최소한 30년 이상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이 이 일을 피밭이라는 오명으로 불린 것은, 유다의 배반과 자살이 그 후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말자고 일깨워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유다가 던지고 간 은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9-10).
적용: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뉘우쳤을 때 사람에게 나아갔다가 사람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죄를 뉘우쳤을 때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택함의 축복을 받고 제자로서 살아온 가룟 유다가 마음속에 탐심을 키우고 끝내는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이 되어 후회와 절망 끝에 자살로 끝내는 비극적인 삶을 보면서 인간의 탐심이 얼마나 인생을 망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탐심은 욕심의 형태를 넘어서 살인도 일으킬 수 있는 큰 죄로서 즉시 물리치지 않으면 커지고 단단해져서 마음을 지배하는 죄로 자리잡게 됩니다. 탐심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계명의 하나로 철저히 경계해야 할 죄임을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가롯유다의죄
마 27:1-10 / 박지온목사
◎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1)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다윗의 환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2)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과 뜻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본문을 택했습니다.
(3)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고통하는 자들이 다윗에게 모였습니다.
(4) 그리하여 다윗은 고통하는 자들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5) 어려운 자들이 모인 것을 통해서 메시야 왕국의 기초를 삼으셨습니다.
(6) 마태복음에서도 다윗과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 어려운 때에 언약을 잡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내 가정에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는 기초가 됩니다.
(8)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교회 건축도 대구에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는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9) 우리는 죄와 사단에게 매여서 억울함과 환란을 당하는 사람들의 장관이 되어야 합니다.
(10) 우리 주변에는 영적으로 억울함과 환란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1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저주스러운 마지막
(1) 오늘 본문에는 가룟 유다의 자살 소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베드로의 죄나 가룟 유다의 죄나 똑같습니다.
(3) 그런데 가룟 유다의 죄가 어떻게 해서 더 크고, 저주스럽고, 처절한 멸망의 죄가 되었습니까?
(4)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재정을 감당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5) 베드로는 축복을 받는 길로 인도를 받은 반면, 똑같이 헌신하고 충성한 가룟 유다는 저주로 끝을 맺었습니다.
(6)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7) 오늘날에도 주의 이름으로 노력하고 헌신하고 바치며 살아가지만, 가룟 유다의 저주가 교회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8)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2. 가룟 유다의 죄
(1)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2) 그 배경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문제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3)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4)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5) 베드로는 그 언약을 붙잡았지만, 가룟 유다는 그 언약을 놓쳤습니다.
(6)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베드로는 말씀으로 돌아갔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의 감정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7)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기분에 빠지지 말고, 언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8)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으로 결단하는 것이 죄 중의 죄입니다.
(9)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0) 내 감정이나 느낌을 따라 살 때 흑암 세력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11)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12)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언약이 성취되었을 때, 베드로는 전 인생을 담대하게 살아갔습니다.
3. 헌금을 하는 자세
(1) 선교 헌금을 결단할 때도, 많으냐 적으냐에 상관없이 재정에 대한 사고 구조가 튼튼히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믿는 재정 구조가 되지 않으면, 물질이 들어와도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갑니다.
(3) 하나님께서는 헌금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을 시험해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4) 제가 십일조는 교회를 위해서, 십이조는 선교를 위해서, 십삼조는 감사함으로 드릴 때, 말씀이 성취될 뿐입니다.
(5) 인간 관계든지, 사건 관계든지, 헌금 관계든지 감정으로 빠져들지 않아야 합니다.
(6)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7)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8)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9) 자신의 마음대로 해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4. 감정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 마음과 생각이 달라집니다.
(2) 평안과 안식이 임합니다.
(3)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앞섭니다.
(4)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5) 내 감정이나 느낌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6)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해 보십시오.
(7)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8) 하나님의 평안 속에서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9)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불안과 근심과 염려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5. 어려울수록 언약 속으로 뛰어 들어가십시오.
(1) 2004년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축복과 은혜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2) 그 축복과 은혜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자신의 감정을 따르다가는 엄청나게 비참한 결과를 맞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감정을 고집하다가 망하고 있습니다.
(4) 지금까지 청산되지 못한 인간의 감정과 고집이 있다면 다 던져버리십시오.
(5) ‘주님의 계획이 내 삶이 되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십시오.
(6) 이 어려움 속에서,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으십시오.
(7) 모든 문제의 해결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8) 가룟 유다처럼 그 언약에서 뛰쳐나와서 스스로 목을 매는 비참함으로 떨어지지 마십시오.
(9) 어려울수록 근본 문제로 뛰어 들어가십시오.
(10) 어려울수록 언약의 말씀 속으로 뛰어 들어가십시오.
(11) 하나님의 계획으로 삶을 인도받으십시오.
생명. 삶. 존엄
마 27:3-8 / 이정익목사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
요즘 자살 소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연예인 안재환씨가 자살하면서 또 자살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자살할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자살 사례는 있습니다. 본문은 가룟 유다가 자살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9장을 보면 아비멜렉이 전쟁에서 여인이 던진 돌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장수는 여인에게 맞아 죽으면 수치입니다. 그래서 병사에게 나를 죽이라고 해서 아비멜렉은 죽습니다.(52-54) 사울은 불레셋과 전쟁 중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곧 바로 포로로 잡혀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로 자살해 죽었습니다(삼상 31:1-6). 사무엘하17장을 보면 다윗왕의 모사 아히도벨이 경쟁에서 밀려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해 죽습니다(21-23). 성경에도 이런 자살 사례들이 나옵니다.
증가 추세
특히 오늘은 20~30대의 자살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20~30대의 자살은 10만 명당 24.8명이라고 합니다. 1997년 10만 명당 13명이던 것이 2007년은 24.8명으로 늘어납니다. 사망순위 암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자살자 중 남성은 7,747명이고 여성은 4,427명입니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서 1.7배나 많습니다. 이 수치는 OECD국가 중 자살 증가율 1위입니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실패율이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지고 유약해지는 사람도 늘어 가는데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자살 원인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죽는 일입니다. 얼마나 아프면 죽겠습니까. 그래서 시인 김지하는 “죽을힘이 있거든 차라리 살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죽음을 사람들은 감행합니다. 하나는 “정신적 중압감” 때문일 것입니다. 빚 때문에 옥죄어 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헤어날 구멍이 없다고 판단되니까 삶을 포기할 것입니다. 안재환씨도 표면상 이유는 그렇습니다. 입시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는 너무 크고 나는 가능성이 전무하고 거기서 오는 중압감을 감당할 수가 없고 그래서 앞이 캄캄해서 높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삶을 포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가난의 중압감도 원인입니다. 가난은 가장 참기 힘든 고난입니다. 여러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죽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중압감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나아진다는 희망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9월 7일 대구 율하동에 사는 30대 중반 여성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비관하다 5세, 7세난 두 아들과 농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8월 27일에는 30대 초반 여성이 살기가 힘들다고 서울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에서 5세난 딸과 11세 된 아들을 양 팔로 끼고 전동차에 뛰어들었습니다.
“실패감”도 원인중 하나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스승을 팔고 배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만인이 다 알고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 실패감과 자괴감을 무슨 방법으로 수습하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으로 속죄하려 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업에 실패하고 인생을 실패하고 재기가 불가능 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자살을 감행합니다. “순간 분노”도 문제입니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홧김에 일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홧김에 살인하고 이혼하고 자살합니다. 이 화가 대부분 가정불화에서 비롯됩니다. 가정불화는 명절 다음 주부터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혼율도 명절 다음 주부터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홧김에 이혼하고 살인하고 자살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삶의 환경이 생각하고 한 번 더 두드려보는 그런 환경이 없습니다. 옛날 집 구조는 화가 났어도 안방과 건넌방을 가려면 문지방을 건너야 하고 건너다보면 화가 조절되고 중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건널 공간이 전무합니다. 부엌도 윗방도 아랫방도 거실도 현관도 거기가 거기입니다. 분노를 여과시켜 줄 생활공간이 전무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노를 조절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도, 해학도, 여유도 없습니다.
어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는데 이웃집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매일 저녁 갈비를 구워 먹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 들으라고 “저 갈비냄새가 지긋지긋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은 왜 돈을 못 벌어오느냐”는 말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남편들은 화가 납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이 슬그머니 나가더니 마스크를 사 왔습니다. 아내가 이것을 쓰면 냄새가 안 나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또 나가서 이번에는 방독면을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기가 막혀 웃으며 “당신 유머는 알아줘야 한다”며 넘어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갑자기 삭발하고 설교하셨습니다. 간밤에 목사님이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사모께서 화가 났던지 목사님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 한쪽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큰일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슬그머니 나가서 삭발을 하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 삭발했다”고 해서 잘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삶의 해학도 없고 분노를 다스리는 여과장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면 일부터 저지릅니다. 자살도 여기서 발생합니다.
“모방 자살”도 문제입니다. 자살도 전염병과 같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자살하면 곧 따라하는 모방 자살이 있습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이 모방 자살이 한동안 이어졌었습니다. 이번 안재환씨의 자살로 다시 모방 자살이 재발되고 있습니다. 지난 12일에는 양양군 서면 가리피리 인근 공터에서 인천에 사는 65세난 김 모 씨가 승합차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4일에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해수욕장 근처 어느 모텔에서 37세난 김 모 씨가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4일에는 울산에 사는 30세난 김 모 씨가 울산의 어느 공사장에서 승용차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질식사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자살자도 2007년도 통계를 보면 도시보다 시골이 더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강원도가 33명이었고 충청도는 31.7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충청도 사람들이 행동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자살 견해
자살은 쉽게 말하면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파괴하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나의 삶,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몫이고 은총의 선물입니다. 나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한일이 없습니다. 계획한 일도 노력도 힘쓴 일도 손끝하나 한 일이 없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섭리 중에 나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지만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은총과 수고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죽는 일도 내 계획과 무관하고 살고 죽는 일도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엄숙한 존재이고 나는 하늘의 뜻이 내포된 나입니다. 그것이 나의 주체이고 값이고 가치이고 가치관이고 의미입니다. 그런 나를 내가 포기하는 것은 곧 나를 파괴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도전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살인 행위입니다(창9:6).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고 했습니다. 성경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은 파괴행위입니다. 나의 생명을 파괴하고 나의 삶을 파괴하고 또 너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자살은 엄밀히 말하면 죽은 사람은 평안하고 산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안겨주는 파괴행위입니다. 내가 자살해서 죽는 것은 내가 단순히 죽는 것 그 이상의 고통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파괴로 안겨주는 일입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는 청산에 모시는 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먼저 간 자식은 가슴에 묻는 일은 겪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어렴풋이 위로하지만 당사자에겐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먼저 앞세운 고통을 참혹한 슬픔이라 하여 이를 가리켜 “참적”(慘迹) 이라 했습니다. 빛을 잃어 천지가 캄캄하다는 뜻으로 “상명”(喪明)이라고도 합니다.
시인 정지용은 어린 아들이 폐질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날 밤 정지용은 죽은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그 시 제목이 “밤에 홀로 유리를 닦듯”입니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하고 읊습니다. 이 때 육친의 죽음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 하여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애달픔이라 하여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파괴되고 애달픈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고통을 어느 신학자는 “고난의 제3의 성례전”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으면 가슴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슴은 오죽 부서지고 깨지고 파괴되겠습니까. 자식이 병사를 해도 가슴이 그렇게 파괴되는데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파괴가 오죽하겠습니까. 그 파괴는 나를 파괴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파괴하는 일이고 너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철없는 자식들은 살기가 힘들다고 실패했다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억울하다고 입시가 힘들다고 나 죽으면 그만이라고 한마디 하고 자살해서 죽어버립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영이십니다. 회복의 영이십니다. 소생의 영이시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살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죽이는 일이고 소멸시키는 일이고 파괴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할 일
하나는 “사전에 예방하는 일”입니다. 자살자는 죽기 전에 징후를 남깁니다. 우리들이 좀 자세하게 관심을 가진다면 징후를 보고 사전에 예방할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징후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식사량이 적어짐, 말이 없어짐, 잠을 못자고 멀리 떠날 사람처럼 신변 정리를 함, 불안해하던 사람이 갑자기 평정을 되찾고 초연해짐, 주위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 신변을 지나치게 비관”하는 일들이 징후입니다. 이런 이웃이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자살한 안재환씨도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한 후에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나눌 일이 참 많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생활도 중요합니다. 특히 명절 때 같은 때는 이 나누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는 이 나눔을 소망하는 이웃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어느 세상이나 소외된 자, 가진 것이 아주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나눔이 없으면 그들은 반항자, 비관자, 원망자가 되고 때로는 공산주의가 그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지역, 가난한 나라, 가난한 민족, 가난한 국가에서 발생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나누지 못하면 불만자들이 발생하고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반항자들이 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공산주의가 발생한 것은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고 안티 기독교가 발생하는 것도 기독교에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할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관심한 사이에, 아이들을 이끌고 전동차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셋째는 “가치관을 확립해 주는 일”입니다. 자살은 가치관의 미확립 때문에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과 허망한 꿈 때문에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유다가 좀 진정하고 예수께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면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 찾아갔으면 얼마든지 기쁘게 그를 맞았을 것이고 용서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죽음으로 끝냈습니다. 그 배신은 죽음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고 회복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유다와 똑같은 배신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저주한 것을 보면 어쩌면 유다보다 더 지독한 배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께 찾아가 용서를 빌었고 새 출발을 해서 마침내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도마의 실수도 적지 않은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용서를 빌고 그 일을 계기로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아프게 했고 핍박했고 고난을 주었습니까. 유다보다 더 지독한 배반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용서받고 사도로 활동하며 평생 동안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며 사도직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 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찬란한 역사를 일으켰습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는 가치관이 미천했습니다. 미성숙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끝내버렸습니다. 죽을 일이 아니고 용서를 빌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자살하고 죽으면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사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삶의 결산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골격이고 중심이고 뼈대입니다. 자살자는 오늘 당장 앞이 캄캄하고 짐이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으니까 삶을 포기하겠지만 그때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는 반드시 내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의무가 있고 엄숙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금물입니다. 유다는 방법 중 최악의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살아가다가 좀 힘들 때 자살 충동은 누구나 다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한 번의 생각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 충동이 일어날 때는 우리에게 부여된 가치관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나이지만 나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힘든 사람들, 실패한 분들에게 옆에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한참 힘들어 할 때 누군가 그 옆에 있어 주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유다도 용서를 받고 베드로 못지않게 큰 사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게 부여된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그 듯이 새로워질 때 거기에서 참신한 신앙인의 힘 있는 삶이 표현되고 증거되고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부여된 소중한 인생이고 삶의 몫인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통해 배울 점
마 27:3-10 / 박봉수목사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의 모택동입니다. 1960년대 한참 문화혁명을 추진해 갈 때 모택동이 공산당 간부를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일부 중죄인을 빼고는 체포하거나 숙청하지 말고 그냥 제자리에 두고 고립시킨 채 반면교사로 이용하면 된다.” 비록 반동분자라고 해도 다 숙청해 제거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그 나름대로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도 때론 그 부정적인 측면으로 교훈을 줍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구나! 나는 저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우리에게 반면교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반면교사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하나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름에서 보듯이 그는 예루살렘 남쪽 가룟 출신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대체로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비해서 그는 남쪽 유다 출신입니다. 아마도 그는 머리 회전이 빨랐고 계산에 밝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한 재무를 담당했고, 제자들 공동체의 살림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넘길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지만 무시했습니다. 단돈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겼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시자 후회합니다. 끝내 목매달아 자살하고 맙니다.
마 26: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은 저주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이런 저주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 제자로 택함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재무를 담당하면서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어제 주님의 제자로 택함 받은 영광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재무를 담당하며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12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긴장을 풀지 말고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넘어지지 말고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까지 신앙생활 잘 하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지 마십시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믿음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어 온전히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로부터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를 반면교사 삼아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경계하라
성경에 나타난 가룟 유다의 첫 번째 이미지는 돈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네 복음서 여러 곳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등장하는 곳마다 돈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 13:29를 보면 그는 돈 궤를 맡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재무를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관리하면서 늘 돈을 가까이 했었다는 것입니다.
요 12장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마리아가 값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가룟 유다가 끼어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팔아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우선 그는 그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는 것을 금방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발에 붓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돈 때문에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 12: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아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가 돈을 관리하면서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돈을 관리하다 도둑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 26:15을 보면 더욱 기막힌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3년간 모시던 스승을 팔아넘기며 흥정하는 장면입니다. 이 때 가룟 유다가 받은 돈은 고작 은 삼십입니다. 성경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은 삼십은 오늘 우리 돈으로 2-3만 원 정도 랍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 넘기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그 보잘 것 없는 돈 몇 푼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가까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돈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제 돈 때문 해서는 안 되는 자리에 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표면적인 잘못입니다.
돈은 매력(魅力)이 있습니다. 그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게 해 줍니다. 또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도 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 돈은 참 매력 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돈은 또 마력(魔力)이 있습니다. 돈의 매력을 맛 본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돈이 없어지면 못 견디게 만듭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게 끌어당깁니다. 또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가지게 만듭니다. 법을 어기고서라도 돈을 더 벌도록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깨고서라도 돈을 더 벌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경계해야 합니다. 돈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고 올바로 돈을 써서 행복해 진다면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돈의 마력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형제를 잃어버리고, 돈 때문에 신앙도 잃어버린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6월 11일 서울대는 “이용희(70)씨가 10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용희씨는 소감을 피력하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돈 때문에 말년을 불행히 보내는 부자를 많이 봤다. 자식에게 줘도 불화, 안 쥐도 불화가 생기더라. 유산문제 때문에 자식이 부모 장례식에 안 오는 경우도 봤다. 나이가 들면서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돈을 쓰고 죽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이분은 일찍이 돈의 마력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의 마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돈의 마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경계해야 합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돈을 경계하라! 잘못하다가 돈 때문에 나처럼 망한다!”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딤전 6: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요 13: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사도 요한이 가룟 유다 사건을 신앙적으로 해석해서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 넘긴 사건 뒤에 마귀가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건은 가룟 유다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의 행동은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의도적 행동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팔겠다는 생각은 마귀가 넣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생각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넣어주었고, 가룟 유다는 그 생각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귀의 행동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못된 생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보가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그런 생각을 넣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지나다가 앞에 가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죽여!” 이런 생각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 생각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요.
그러면 언제 그런 생각을 넣을까요? 그 마음에 틈이 생길 때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그런 틈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고 책망했을 땝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가로 막으셨습니다. 그가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이 전해 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편을 들어주셔야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메시야로 등극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야 할 때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원망도 생겼습니다.
마귀가 이런 틈을 노렸습니다. 그 마음에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귀가 좋지 않은 생각을 넣습니다. 섭섭할 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 무엇인가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뜰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가 그 틈을 노리고 악한 생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럴 때 그 생각을 받아들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 됩니다.
요 13:17절에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아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마귀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사탄 곧 마귀가 아예 가룟 유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가룟 유다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마귀의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본질적인 잘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 특별하게 택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았고, 아예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시오. 결코 마귀를 받아들이지 마시오!”
약 4: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귀가 다가올 때 마음을 잘 지키십시오.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회개하라
가룟 유다는 여러 차례 예수님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 1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깨끗지 않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함께 떡을 먹던 사람 가운데 배반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직접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6절에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이 때라도 그는 돌아섰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룟 유다는 주님의 다섯 차례의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뒵니다. 마 27:4을 보면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자기가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룟 유다의 최후의 실수입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우리를 향해 몸부림치면서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시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시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와 회개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후회와 회개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그 죄를 자기 스스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돌이켜 보려고 돈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그 죄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는 회개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죄를 깨닫고도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그날 나는 천국 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살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룟 유다는 우리에게 반면교사입니다. 돈을 경계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회개하라! 교훈을 줍니다. 그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마 27:3-8 / 안효관목사
여러분, 이름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아십니까? 누군가의 이름에서 향기를 맡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의 이름에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이름에서 향기가 난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들을 때에 그 이름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 그러면 여러분 어떤 향기를 느끼십니까?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말하는 슈바이처라는 이름에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이름에서 나는 향기는 그 사람의 삶에서 나는 향기요,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처럼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들으면 몸서리가 쳐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그렇고, 히틀러가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나고, 그 이름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악취 나는 이름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참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가롯 유다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평가한 평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사람”(마태복음 26:24)입니다.
가롯 유다를 생각하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당시로 말하면 엘리트였습니다. 욕망도 있었고, 야심찬 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11명은 모두 북쪽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 그러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천민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가롯 유다만 남쪽 지역 출신입니다. 가롯이라는 말은 그의 출신지역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8명이나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미’ ‘하나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은 유다라는 이름을 참 좋아했고,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 앞에 출신 지역을 붙여서 ‘가롯 유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성경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쪽지역 출신인 그가 북쪽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커다란 꿈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치적인 야망입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큰일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큰일을 해서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면 자신도 당연히 한 자리 할 것으로 기대하고, 고향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나라의 비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 가졌던 욕망 대신에 복음으로 변화되어 참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공동체의 회계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믿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는 수치스러움만 남긴 채 그의 생애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스승을 팔아먹고 만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배신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은 오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을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인생 자체가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인생을 잘 살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죽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슬퍼해 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합니다. 그러나 헛되이 인생을 산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의 출발은 참 좋았습니다. 죽기 3년 전에는 참 큰 꿈도 있었고, 용기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뭔가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큰 세상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스승인 예수님으로부터도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스승을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버린 다음, 그는 굉장히 후회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집행을 위한 최종적인 재가를 얻기 위해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 때서야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뉘우쳤다는 것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왜 내가 스승님을 팔았나’ 후회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감 짓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자살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예인이나 사회 저명인사들 가운데도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뭘 그런 일을 가지고 그 귀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절망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하기만 합니다. 현실도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에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살하게 됩니다.
물론 자살하는 것을 잘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적인 윤리로 본다면, 자살은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과 같은 범죄로 취급합니다. 옛날 유럽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은 살인자와 똑같은 죄목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그 시체를 말에 매어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재산을 몰두 몰수해버렸습니다. 자살을 그만큼 중한 범죄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의 입장 또는 자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자살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살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과 같습니다.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푸르른 나무나 풀과 같이 생명력이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게 부서지고 깨어지고 엉망진창입니다. 자살하기 전에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희망도 죽어 있고, 마음속의 생명도 죽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가롯 유다가 자살했다는 것 자체도 비참하고 수치스럽지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도 얼마나 비참했을 지 짐작이 갑니다.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그의 인생은 모든 게 실패로 끊나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몇 십 년을 살아온 모든 인생이 한 순간에 다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뭔가 희망을 안고 예수님을 따랐던 지난 3년도 모두 헛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모든 생애가 다 실패요 헛된 것이었습니다. 오직 부끄러움과 수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살하고 난 다음의 그의 모습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사도행전 1:18절에 보면, 목매어 자살한 유다의 시체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말씀해 줍니다. 쉽게 표현하면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렇게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모양새가 있고, 명분이 있고, 고상하게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6-7장에 나오는 스데반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아 죽었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때문에,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라는 아주 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평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을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단지 초대교회가 7명의 집사를 선택할 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을 뽑았는데, 스데반이 그 중에 한 명이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 나가 다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우리의 인생을 잘 살았는지, 헛되이 살았는지’ 판가름해 줄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어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만 죽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고 아이이고 할 것 없이 알지 못하는 때에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이 수치스러운 죽음이 되지 않고, 명예스러운 죽음이 되도록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다 죽었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죽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죽고 나면 누구에게나 유산이 남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가롯 유다가 남긴 유산은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가 남긴 물질적인 유산은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가롯 유다는 노동자의 4개월 치 품삯에 스승을 팔아버렸고, 그 돈이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그 ‘은 30세겔’이라는 돈이 당시에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배상해 주는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고작해야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자기 스승을 팔아먹고 죽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나 종교지도자들이 죽이기 위해서 혈안되어 있던 예수님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몸값입니다. 자기 스승을 고작 노예 한 사람 정도의 가치로 밖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3년 동안 따라다닌 예수님의 가치가 고작 노예의 몸값 밖에 되지 않습니까?
가롯 유다는 나중에 스승을 팔아먹은 게 양심에 가책이 되었는지, 스승을 판 대가로 받은 돈 은 30을 다시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을 그들 앞에 던져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그 벌을 받아라.” 그래도 한 때는 내통했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은밀하게 만나고, 작전을 짜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때까지는 한 패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가 은 30세겔을 가지고 다시 찾아갔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가롯 유다를 무시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가롯 유다는 철저하게 외톨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자살하자 종교지도자들은 가롯 유다가 던져놓고 간 그 돈을 꺼림직하게 여겼습니다. 가롯 유다는 분명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성소에 드려진 돈은 6절에 말씀한 것처럼 성전고에 들여놓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선행을 베푸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을 부정하게 생각해 성전고에 넣지 않았고, 나그네를 위한 공동묘지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피밭’이라고 붙였습니다. ‘스승의 생명을 팔아 피를 흘리게 한 돈으로 산 밭’이라는 뜻입니다. 그 공동묘지마저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러지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남겨놓고 간 것은 은 30세겔로 산 공동묘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치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롯 유다는 ‘피밭’이라고 불리는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유산을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재벌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나 그 많은 유산 때문에 자식들끼리 원수처럼 싸우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재판을 합니다. 여러분! 그게 유산을 잘 물려준 것입니까? 그런 유산은 결코 아름다운 유산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유산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진정 가치 있는 유산은 많은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살아가도록 하는 유산입니다. 그래서 신앙 유산이 최고의 유산입니다.
가롯 유다에게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 영원토록 치욕스런 이름의 대명사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롯 유다’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배신자’라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가롯 유다도 귀한 집의 자식입니다. 그는 -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 남쪽 지역 출신입니다. 당시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북쪽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사람들은 북쪽에 비해서 귀족이고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많이 배웠고 부유했습니다. 가롯 유다도 그랬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다의 부모가 그를 낳고는 이름을 ‘유다’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이름입니까?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에는, 그 부모의 마음에 큰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장성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집을 떠나올 때 그의 부모는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름처럼 크게 성공해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은 고사하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스승을 팔아먹은 배신자란 꼬리표를 남겨놓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는 그가 쓴 대서사시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은 가롯 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로마의 황제인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 100-44)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브루터스(Marcus Junius Brutus, BC 85-42)입니다. 스승을 배신한 자 그리고 친구처럼 가까이에서 모신 황제를 배반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애굽왕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헤롯,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죄로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신앙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본디오 빌라도,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의 이름이 치욕스런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은 단연 가롯 유다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 주시면서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할 때,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쫓겨났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능력이 그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신이 나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병자도 고쳤고요, 귀신들도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만한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잠언 10: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롭게 살다간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에 칭찬과 영광이 더해집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드신 분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렸기 때문에 그 이름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분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이완용이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좋은 감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일제에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잠언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 이름은 썩은 이름’입니다.
가롯 유다는 ‘배신자’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들으면 좋았던 기분도 달라질 것입니다. 듣기를 싫어하는 이름 - 썩은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귀하게 그리고 멋있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정말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허비하며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마지막 역시 그렇게 끊나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인생 자체가 수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유산도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그의 이름 자체가 수치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삶을 살다가 수치스러움만 남기고 간 사람이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지 않도록 사십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자처럼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답게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이름이 복되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멋진 이름이요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을 수 있도록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조용히 여러분의 이름을 가슴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이 나에게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그 이름을 듣는 내 주변의 사람에게도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내 이름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부르실 수 있는 이름입니까?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
마 27:3-8, 전도서 12:13-14 / 안효관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待臨節, The Advent, 대강절, 강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표현 그대로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를 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이 대림절로 지킵니다. 오늘부터 4주간 우리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와 시므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에도 평화가 찾아와야 하고, 정치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채 투쟁과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평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이런 모든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수 있는 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셔야 우리의 삶에 평화가 깃들 수 있습니다.
여기 앞에 양초가 다섯 개 있고, 오늘은 그 중 하나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대림절 한 주가 지나면서 촛불이 하나씩 더 켜질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의미로 촛불을 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 있는 하얀 초에 성탄절에 켜질 것입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맞을 준비를 하시는 거룩한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은 언젠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언제 다시 이 땅에 오실지 모르지만,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심판의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에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정결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림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야고보 사도는 농사를 짓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놓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데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약 5:7-11) 사람이 "무엇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 하는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누구)이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대림절 절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지금 신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이 절기를 깊은 신앙으로 잘 준비하며 지내면 굉장한 은혜와 축복의 절기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대림절 기간이 우리 모든 교우님들 한 분 한 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요, 은혜와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던 가롯 유다가 왜 스승 예수님을 팔아먹고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실패한 인생을 살다 간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유다처럼 실패한 인생을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날들을 통해서 아름답고 영원한 것을 남기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길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가롯 유다가 남긴 유산은 아주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유산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 고작 은 30개뿐이었습니다. 은 30개라고 하면 은 30세겔이란 말입니다.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 품삯입니다. 그러기에 유다가 남긴 것은 노동자가 120일 정도 일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정도의 돈입니다. 또 은 30세겔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에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은 30세겔로 배상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유다가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갖고 있었던 이 은 30은 정상적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스승인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로 표현한다면 인신매매를 해서 벌어들인 아주 추악한 돈일 뿐입니다.
인간이 벌어들인 돈 가운데서 가장 추악한 돈이 다른 사람을 팔아 벌어들인 돈입니다. 강도처럼 강제로 남의 돈을 빼앗는 것도 추악한 짓이지만, 더욱 추악한 것은 다른 사람을 팔아서 치부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IMF가 시작되면서 살기가 힘들어지자, 어떤 부모는 자기의 딸을 윤락가에 팔아서 돈을 받아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채업자들 가운데는 사채를 빌려 쓴 사람에게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을 쓰게 해서, 돈을 갚지 못한 사람을 윤락가에 팔아먹기도 해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참담한 생각까지 듭니다. 몸은 단지 육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인격 모두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몸을 천히 여기는 것은 인격과 영혼과 사람됨 그 자체를 천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인간의 몸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몸을 팔아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짓입니다.
가롯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는 스승을 팔아서 은 30개를 얻었습니다.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고, 스승의 목숨의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은 30개는 참으로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중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정죄받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못된 짓이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서 자신이 스승을 팔아서 받은 돈 은 30을 되돌려주려고 했습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돈이 더러운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헌금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은 헌금으로도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더러운 돈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헌금으로 받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유다가 가져온 돈이 어떤 돈인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을 판 값으로 자신들에게 받아간 돈이었습니다. 배신의 대가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다에게 준 것이었지만, 유다의 손에 들려진 이상 그 돈은 이제 더러운 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돈을 헌금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자 가롯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집어 던져놓고는 돌아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더러운 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도저히 성전을 위해서 쓸 수 없는 돈이라고 판단하고는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공동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동묘지의 이름은 '피밭'입니다. 스승의 피를 팔아먹은 유다의 더러운 돈으로 산 묘지라는 뜻이고, 자살한 유다의 더러운 피가 묻어 있는 묘지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남긴 은 30은 결국 시체들을 장사하는 묘지로 쓰여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얼마의 재산이 있습니까? 그 재산으로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많이 모아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재물로 유산을 물려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서 그 재산을 잘 관리하고 좋은 곳에 쓴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00이면 90 이상은 부모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고 다 탕진해버리고 맙니다. 재산만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은 실패하고 비참해지고 말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진국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재산 대신에 지식을 물려주고, 공부하거나 기술을 익혀서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쳐줍니다. 그것으로 부모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나 대학교만 마치면 자식들에게 뒷돈을 대주지 않습니다. 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까 제 앞길은 이제 제 스스로 알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돈은 전부 사회에 환원을 합니다. 복지사업에 기부한다든지, 교회에 기부해서 교회나 복지사업기관에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데 쓰게 만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값지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진국일수록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유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얼마나 있습니까?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면 그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지들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의 인생을 망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참으로 값진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연초에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3천만원을 작정하고 첫 번째로 천만원을 헌금한 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교인들 가운데 몇 천만원씩 헌금할 수 있을 정도로 여력이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작년 연초에 천만원을 헌금하면서 2년 안에 3천만원을 헌금하겠다고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에 두 번째 천만원을 헌금했고, 지난주에 마지막 천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헌금을 했습니다만, 이 적은 숫자에서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매달 일정 금액을 적금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 돈만은 이미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천만원을 만들어 헌금한 것입니다. 그 천만원은 그분의 형편을 생각하면 몇 억, 몇 십억의 가치가 있는 정성어린 헌금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 몇 억을 은행에 저축해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부모를 둔 자녀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유산으로 받지는 못할지라도, 디모데처럼 가장 위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복된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몇 달 전에는 오랫동안 직장생활하다 퇴직하신 집사님 한 분이 퇴직금 중에서 십분지 일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몇 십, 몇 백만원도 아닌 천만원이 넘는 것을 헌금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으로 헌금할 수 없는 분들에게 부담을 드리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들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분들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재물보다 중요한 것이 많은데 그분들은 재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 믿음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남기는 것은 '피밭'이라는 공동묘지, 죽음을 남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가롯 유다는 그의 죽음을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남기고 갔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유다의 처음 출발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꿈도 있었습니다. 남쪽 지방 출신이 북쪽 지방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좋지 않았습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스스로 나가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시작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나타난 병폐 가운데 하나가 생명을 경시여기는 풍조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36명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2시간에 세 명씩 자살하고 있는 셈입니다. 엊그제는 서울의 한 대학 음대 교수가 5층에서 투신해 자살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자살하고, 학생들은 성적이 좋지 않다고 자살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권을 무시한다고 자살하고,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살폭탄테러가 계속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도 않고,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자살한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그들을 마치 영웅처럼 취급하고 있는 사회적인 풍토입니다. 지난 4월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자살한 홍콩의 배우 장국영씨를 추모하는 열기가 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9월에는 WTO협상에 반대하며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살했는데, 국내에서는 열사라고 추앙하며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수능시험을 치던 도중에 첫 시험을 망쳤다고 자살한 학생을 추모하는 집회까지 열렸으니, 이 사회는 자살을 미화하는 사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살로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이며 가장 비참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 자살은 절대로 미화되거나 추앙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롯 유다의 자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치 없는 자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비참한 최후로 그의 인생을 마감 지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유다가 자살 때에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러 아켈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행 1:18-19)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옵니다. 그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가장 비참한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가장 아름다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인 전도서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쓴 글입니다. 솔로몬의 그의 인생의 마지막 때에 지혜서를 쓰면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는 지혜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사람입니다.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도 누려보았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솔로몬 시대의 풍요로움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얼마나 풍족하게 썼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에게는 왕비가 700명이나 되었고, 후궁이 300명이나 되었습니다.(왕상 11:3) 천명이 되는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어느 것에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솔로몬이 인생의 말년이 이런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심지어는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전 6:6)
전도서의 말씀이 바로 그런 솔로몬의 인생 허무를 노래하는 말씀들입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고, 아무리 많은 쾌락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솔로몬은 거기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인생을 가장 참되게 살아가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내가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정말 인생의 보람과 가치는 오직 하나 뿐이더라' 그런 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 이 이상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던 많은 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완성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사람들에 둘려싸여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황홀한 광경을 보면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 스데반의 거룩하고 장엄한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고, 그의 죽음은 사울이라는 마음이 완악한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지막 생애를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어떨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 어떤 마지막이고 싶으십니까? 부끄러운 재산을 남기는 것도 수치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죽음을 맞는 것은 더욱 큰 수치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7:1-10
찬송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다(1-2절)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새벽에’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고, 기도하시기 위하여 겟세마네로 향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끝난 한밤중에 체포되시고, 공회(산헤드린)에 서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최고의 법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중벌을 내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나와서 거짓으로 증언했지만,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서서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죄로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증언에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자, 의아하게 생각한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자, 사람들은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소리 지르며,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밤중, 새벽이 되기 전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언제나 낮에만 열렸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말겠다는 욕망 때문에 불법적으로 밤에 회의를 열고 그들 스스로가 검사와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사형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새벽(프로이아)’으로 번역된 단어는 ‘이른 아침’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눠주시는 빵 조각을 받고 나간 때가 ‘밤(요 13:30)’이었던 반면에,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둔 시점은 ‘새벽’이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일을 자행했던 그때는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여명이 밝아오는 때였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에 어둠만이 가득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무관심한 듯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을 빌면 그때는 ‘눈물 골짜기(시 84:6)’를 지나갈 때기도 하고, 다윗의 고백을 빌면 그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로 다닐 때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아무리 어두움이 가득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총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는 때입니다.
(1-2)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유죄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들에게는 유죄판결을 내릴 권한도, 집행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죄수에게 형량을 언도하고 집행하는 것은 총독 빌라도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 파견을 받은 유대의 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AD 26-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인류역사상 최악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매주일 예배 때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유다가 목매다(3-10절)
불법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자행되고 있을 때, 그 재판의 원인을 제공했던 유다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유다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동안 어떻게 말씀하시며,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늘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거짓 증언과 모함, 과장으로 인해서 내려진 사형이라는 결론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도 각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았던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죄를 범하다(하마르타노)’가 ‘과녁에서 벗어나다’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과녁을 잘못 정함으로 예수님을 팔았고, 이제는 자신의 과녁을 교정했으니 다시 예수님을 놓아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며 반어법으로 답변했습니다. 예수를 우리에게 팔아넘기는 것은 당신이니,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당하시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라고 3절은 증거합니다. ‘스스로 뉘우치다’가 헬라어로 ‘메타멜로마이(metamellomai)’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다’는 ‘메타노에오(metanoeō)’입니다. ‘스스로 뉘우치다’가 ‘양심의 가책’을 의미한다면, ‘회개하다’는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유다는 ‘회개(悔改)’ 중에서 ‘회(悔)’는 했을지라도, ‘개(改)’는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엄청난 일임을 알았을 때도,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와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속에 두고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첫 출발은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만 두면 해결책을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 사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한 일을 자기 속에만 두고 있었던 유다가 어떻게 행했는지를 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가 결정한 것은 스스로 제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성소(나오스)’는 성전의 안쪽 부분입니다. 그곳에는 지성소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사장 외에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그곳까지 가서 자신이 받았던 은(돈)을 던졌다고 하는 것은, 유다가 자신의 스승이자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팔았다는 죄책감과 완전히 무너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들어가 은을 던지고는 제 길로 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6-8)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지고 간 은을 성전고(성전 헌물 보관소)에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고서 받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제사장들은 신명기(23:18)에 있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사람의 소득을 하나님의 전으로 갖고 오지 말라’는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은 30을 줄 때 성전고에서 꺼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꺼내 준 은(돈)이 이미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불의하게 사용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불의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으로 토기장이들이 사용했던 땅을 사서, 나그네들의 공동묘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토기장이’는 점토를 파서 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점토가 나오지 않자, 그 땅은 토기장이들에게는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점토를 파냈기 때문에 구덩이처럼 되어있어서, 연고가 없는 시신을 던져 넣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이 일어난 때와 마태가 부분을 기록했을 때 사이에는 최소한 30년 이상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이 ‘피밭’이라는 오명으로 불린 것은, 유다의 배반과 자살이 그 후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회자되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말자고 일깨워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9-10)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유다가 던지고 간 은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스가랴(11:13)입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라고 한 것은, 예레미야에 토기장이의 비유와 옹기 비유, 밭을 사는 비유 등이 나옵니다. 학자들은 마태가 구약의 밭과 토기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성취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을 내리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정말로 가까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결코 가깝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중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욕망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었습니다. 그 나무가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자신의 인생이 자기 것인 줄 알았습니다. 유다가 자신의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닌 줄 알았다면, 자신과 예수님 사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더라면, 그렇게 비극적인 길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인 줄 알면, 우리도 대제사장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삶의 영역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지 않으면, 우리와 가룟 유다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은총의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예수님이 무죄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겉사람만이 아니라, 속사람까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된 결정을 했는지를 자각했음에도,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음으로 가지 말아야 할 비극적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다의 모습을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빌라도 총독에게로 넘겼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 주님을 외면하곤 하십니까?
2. 가룟 유다는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알고서도 뉘우치기는 하였지만, 회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뉘우치고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하셔야 하겠습니까?
3.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을 성전고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사실 그 은은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받기 위해서 준 것이므로 이미 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가 낭패를 당한 일은 없었습니까? 혹 있었다면, 그 일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4. 삶의 구석구석에 자신이 피조물임을 기억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고,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