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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1)
마 27:11-19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마 27:11-19 / [빌라도의 심문;막15:2-5,눅23:3-5,요18:33-38] 예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시자 총독은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말대로다'하고 말씀하셨다. 12)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하여 떠들어대는 데는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다. 13) 그래서 빌라도가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하고 물었으나 여전히
40마 27:14 예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았다. 총독은 이를 매우 이상히 여겼다. 15) [사형 판결을 받으시다;막15:6-15,눅23:13-25,요18:39-19:16] 유월절 잔치기간 중에는 총독이 군중의 요청대로 누구든지 유대인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 해에는 바라바라는 이름난 죄수가 갇혀 있었다. 17) 빌라도는 명절날 아침 관저 앞에 모여든 군중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 바라는가? 바라바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인가?' 18) 빌라도는 백성 사이에 예수를 존경하는 자가 많아지자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붙잡아 온 것임을 잘 알고 이렇게 물은 것이었다. 19)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 빌라도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고한 사람의 일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 하고 당부하였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으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 생각했지만 빌라도는 결국 사형을 선고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1-14)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반역죄로 몰아세우려는 의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를 빌미로 반역죄로 예수님을 몰아세우며 고발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가혹한 고소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닫혀버린 사람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었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논쟁을 통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애쓰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길어진다면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재판을 속히 끝내려고 합니다. 빌라도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을 향한 평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15-19) 유월절 명절이 되면 축하하는 의미에서 죄수 한 사람을 사면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지켜왔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고소한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죄라고 선포하고 싶었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해야 했습니다. 고민하던 빌라도는 한 가지의 타협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례대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하면서도 판결즉시 석방시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수 중에 악명 높은 죄수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백성들 스스로 석방시킬 사람을 선택하라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재판장에 앉아서 백성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에 아내가 사람을 보내 빌라도를 말립니다. 예수님에 관한 꿈을 꾸고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적용: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처럼 인내할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핍박을 받을 때 변절을 요구받았습니다. 폴리갑이라는 사람은 주후 155년경에 순교를 당한 서머나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정부에 잡혀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재판관은 폴리갑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그분은 한번도 나를 저버린 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이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믿고 섬겨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의 침묵
마 27:11-26 / 인명진목사
옛 어른들은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신수였는데, 외모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언변을 보았는데, 말을 얼마나 조리 있게 하느냐를 유심하게 보았습니다. 세 번째로 본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의 필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교육제도가 없던 시절 필체로서 사람됨을 평가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학벌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네 번째로는 사리를 분별하는 판단력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전 당나라 시대 때부터 적용된 인재등용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에서 여전히 이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못생기면 면접에서 탈락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하기 위해 성형까지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말솜씨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에 스피치 학원을 다니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정당성과 논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좀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반면에 말을 못하는 사람이나 말이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당하곤 합니다. 그런데 얼굴은 함께 살 때 1주일이면 그 수명이 끝이 나고, 말은 인격이 동반되지 않으면 1달 안에 유통기한이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판단기준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신언서판의 기준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신언서판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요, 바보 중 바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 외모로는 흠모할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언변으로 보면 자신을 향해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한마디 변호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가문과 학벌도 없는 갈릴리 촌사람 목수에 불과 합니다. 또 판단력에서 본다면 어리석어 수없이 이용당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배반할 사람을 위해서도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자신을 못 박는 사람을 위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잠시 후면 자신을 밀고 하여 유대 관원들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게 성만찬까지 떼어줍니다.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면서 마지막 순간에도 유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바보 같은 예수님이라 원망도 생기고 왜 저렇게까지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는 바보처럼 사셨고, 바보처럼 죽으셨습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이고, 크리스천인 김병종 교수는 “바보 예수”라는 화첩 집을 내었습니다. 그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을 보면 정말로 세상의 바보 중에 최고의 바보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굳이 이 화가의 그림으로 보지 않더라도 예수는 바보였습니다.
자기 몸에 걸친 속옷까지 모두 빼앗긴 바보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사용하셨지만 자신을 위해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저들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으셨고, 조직조차도 만들지 않으셨던 바보였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무리들에게도 아무런 대답 없이 바보처럼 침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바보 중에 바보였습니다. 2014년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은 왜 바보가 되었을까? 예수님은 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 하셨을까? 이것이 고난주간의 우리의 묵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바보 같은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처럼 약은 계산기만 두드리고 사신 분이었다면 우리 중에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해당하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정당성 주장하고, 자기 정의를 드러내기 언어폭력 동원하고,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고 동원합니다.
결국 말로서 자기 정당성 주장하고, 물리적 행위로서 이겨야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는 세상이 말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대 위에 세워서 남을 죽이고 이기는 심판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심판대 위에 서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정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영악한 짓을 많이 합니까? 자기 정당성 주장하기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다 빼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사람을 자기 편 만들기 위해 여론 형성하고, 힘 있다는 것 보여주기 위해 때로는 객기까지 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이것이 인간사회의 정의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겨야 정의이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정의라 생각합니다. 2 천 년 전 로마 군인 빌라도 가졌던 정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세상은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인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르기로 결단한 오늘의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자기 정당성 주장하기 위해 말로써 죄짓고, 다른 사람 짓밟지 않습니까? 빌라도의 힘의 방법을 추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세상의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 바보 되고,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 이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 관원들과 로마 군인에 의해 붙잡히고 난후 군중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열렬하게 환영했던 군중들이 단 하루가 지나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노예 하나의 값인 은 삼십에 눈이 멀어 자기 선생을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에도 불구하고, 난 예수를 절대로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다 도망가 버리고 홀로 고난과 어두움의 밤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 이런 상황을 당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도망간 제자들을 욕하겠습니까? 자신을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무리들을 향해 침을 뺕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죄가 없다고 고함치겠습니까? 자신의 억울함을 과연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배신하여 메시아의 길 가지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항변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세 본문은 동일하게 고난 받으시면서 침묵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관을 현장을 다시 한 번 재현해 보십시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3년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었던 사람을 살려내었습니다. 폭풍이 일렁이는 바다도 그의 말 한마디로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능력 많으신 분이 스스로 무력해지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니 그에게서 손톱만큼 폭력성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 후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물어 보아도 예수님은 말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도대체 이 사람이 재판정에 왜 끌려 나왔으며, 이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인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의 철학은 시세로의 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세로의 철학은 강자철학입니다. 강자가 정의며 오직 승리만이 진리입니다. 약자는 죄인입니다. 신은 강한 자의 편이며, 강한 자만이 정의입니다. 이것이 로마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입니다. 이것은 비단 2천 년 전의 논리가 아니라 여전히 이 사회를 움직이는 강자의 철학입니다.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강자 중에 강자입니다.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로 인정하고 따랐습니다. 더군다나 며칠 전 유월절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예루살렘까지 따라 올라와서 열렬하게 환영했던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과거의 행적으로 비춰볼 때 그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또한 민중들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가지고 있는 로마 군인의 철학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막강한 능력이 있는 예수가 자신을 누명 씌워 죽이려는 세력 앞에서 왜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빌라도의 아내가 지난 밤 꿈이 어찌나 뒤숭숭한지 사람을 보내어 "여보, 예수라는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유대 사람들이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니, 죄 없는 예수를 놓아주세요!"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심문 내용을 말하며 예수를 놓아주려고 설득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또다시 들어와 예수를 심문하는 등 안절부절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도대체 그가 무슨 악을 행했느냐 하며 죽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제사장들이 총독에게 "만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 황제의 신하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압력을 가하면서 죽이길 요청합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계속 침묵하십니다. 심약한 빌라도는 결국 헤롯당,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집단적인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넘겨줍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어서 대야의 물에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면서 예수를 유대인들의 처분에 맡기고 맙니다.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님만 침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당신의 아들의 고난 앞에 침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2차 대전 독일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도 있었습니다. 인종청소를 하겠다고 유대인을 포로수용소에 가두고, 사람을 불에 태워 기름을 짜고, 실험용으로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13살 된 소년 한 명과 어른 두 명이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아습니다. 히틀러 군대는 다시는 탈출하는 자가 없도록 공개 처형을 단행하게 됩니다. 운동장 중앙에 십자가를 세 개를 세우고 교수형을 집행했습니다. 중앙에는 13살 소년을 목매달고, 어른 두 명을 좌우편 십자가에 목을 매달았습니다. 어른들은 고함치면서 발버둥질하다가 빨리 죽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중앙에 있는 13살 된 소년은 순한 양같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달려 있습니다. 이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가슴 깊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아니라 절규가 운동장에 메아리칩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13살 소년이 빨리 죽지 않자 더 깊은 울음과 탄식이 들여옵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말합니다. “예수님은 저 소년과 함께 고난 받고 있다. 예수님은 저 소년이 달린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했습니다. 막부시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배경으로 엔도우 슈사꾸는 침묵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적이자 크리스천인 고니시 유끼나까를 제거하고 규슈 지역에 있는 키리스탕 스물 여섯 명을 처참하게 처형을 합니다. 기독교 역사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잡혀간 사람이 3명이 순교자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던 페레라 신부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고문에 굴복해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를 가장 존경했던 제자 3명의 신부가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로드리고 신부였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도 잡혀 취조를 받게 되는데 교활한 일본인들은 '후미에'라 불리는 예수님 형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주었습니다. 차마 밟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차마 그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저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그러자 로드리고 신부는 울면서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만 고난 앞에 버려둔 것이 아니라 13살 된 소년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함께 고난당했습니다. 일본에 있던 로드리고 신부의 고난에도 주님께서 함께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당할 때도 주님은 분명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앞에서도 침묵하셨고,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 앞에서도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다가오는 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우리 눈에는 단순한 침묵처럼 보여도 그 속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너무도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압 받아야 하고, 약한 자들이 고난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 모순과 부조리 앞에 한 마디 정도는 말할 만도 한데, 예수님은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계속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왜 침묵하셨을까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침묵하셨고, 성도들이 고난당하는 데도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침묵하시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침묵은 모순과 불합리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느끼겠지만 때로는 세상이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고 불합리 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고민이 생기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세상 일이 나의 생각과 이치에 맞지 않으니 당황하게 되고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이 세상이 모순되고 불합리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재판받는 장면만큼 엉터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침묵하시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엉터리와 모순 앞에 말문이 막혀 버린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처럼 세상의 엉터리와 모순을 만나거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자기 말에 순종을 잘하지 않는 며느리를 꾸중했습니다. 그러나 입이 똑똑한 며느리는 계속해서 시어머니에게 꼬박꼬박 말대답합니다. 참다못한 시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말대꾸하겠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사실 며느리는 말대답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치를 따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의 이치만을 따진다면 언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핏방울 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밤이 맞도록 자신의 죽음 때문에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어째서 정작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말없이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나라에 있었습니다. 모순과 부조리가 지배하는 세상나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보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나라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침묵 자체가 세상을 향한 심판입니다. 말이란 통할 때 하는 법입니다. 말하면 들을 수 있고, 설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을 때라야 말이 필요한 법입니다. 말해야 들을 귀가 없고 통하지 않는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침묵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침묵은 일종의 심판적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수준 높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죄가 크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요? 듣기는 들었는데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전혀 듣지 못한 사람,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러나 지금 비록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살더라도 구원의 향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그 고통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앞에서 침묵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높은 권세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과 수치를 주는 빌라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빌라도 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높은 권세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설득하는 빌라도가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하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금 이렇게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지 힘이 없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라도의 이 재판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며 치욕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일을 역사하고 계심을 보았기에, 그런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위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그것이 있을 때 침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당할 때 침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을 주는 대상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침묵합니다. 또 그 하나님께 나의 모든 삶의 주권을 위탁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결정적인 이 순간을 변명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치를 따진다면 도저히 침묵할 수 없고 희생할 수 없습니다. 이치를 따져 가며 할 수 있는 희생이란 없습니다. 날짜와 장소를 다 생각하고 계산하여 순교한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마귀의 유혹에 빠져 모순과 부조리로 고통 받는 세상이지만,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이 침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앞에 두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탁하는 예수님의 그 침묵이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아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 세대만을 바라보고, 사람들만 쳐다보며, 형식적인 것만 평가하는 데 익숙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는 모순과 엉터리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더 큰 역사와 섭리가 있음을 믿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깊이가 요구됩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것도 변명할 것, 또한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유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기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듯이, 나도 하나님 사랑 때문에 침묵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침묵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침묵이 바로 신앙의 절정입니다. 이것이 고난주간 주님과 함께 품어야 할 거룩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침묵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침묵과 십자가의 침묵 뒤에 바로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믿고 이 한 주간 침묵으로 주님 앞에 서십시다. 그리하여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이 심령 가득한 곳에서 메아리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침묵이 필요할 때
마 27:11-14 /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어떤 수도사에게 여인이 찾아와 하소연합니다. "남편과의 잦은 다툼 때문에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수도사는 물이 담긴 병을 하나 줍니다.
"남편과 다투기 직전 이 물 한 모금을 입안에 물고 삼키지 마세요.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이 물은 신비한 물입니다."
여인은 남편이 시비를 걸 때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가정이 조용해지고 부부가 화목하게 됐습니다.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와 고마움을 전하며 그 물이 참으로 '신기한 물'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그 물은 평범한 물입니다. 다만 침묵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침묵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침묵으로 받아드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리고 그 예언은 오늘 본문인 마태 27:11-14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면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심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엄청난 곤욕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을 통하여 어떤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1. 다툼을 피하려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말씀하셨으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땅의 세계만 알고 세상 나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려고 애쓰셨으나 빌라도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세상 수준에서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일하셨으나 당시 사람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리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답해도 다툼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천국의 비밀에 대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묵을 하셨다고 해서 일체의 말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되도록 말을 아끼셨고, 보다 많은 경우에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27장에서도 대제사장들에게 고발 당하시기에 앞서서 마태 26:62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62절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그 다음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침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침묵을 깨시고 64절에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해야 할 때에는 분명히 해야 할 말을 하셨습니다. 본문 11절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총독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꼭 필요한 말은 침묵하시면서도 하셨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말, 필요한 말, 참으로 깊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8:7) 예수님께서 왜 아무 말씀 없이 땅에 글을 쓰셨을까요? 먼저 말을 통하여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했다면 흥분한 사람들은 아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툼만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예수님은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말씀하기 보다는 침묵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 가정에서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는 줄 아십니까? 감정이 상해있을 때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면 상대방을 자극하여 감정은 더 상합니다. 마음의 문은 더 닫혀지고 상대의 논리에 반박할 방법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피차 상처만 크게 주고 받습니다. 이런 때는 침묵이 약입니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분한 감정이 가라앉기 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들을 여유가 생길 때에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우주에서 침묵만큼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느끼게 됩니다.
침묵은 고요함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요히 자랍니다. 어린이들은 고요히 자랍니다. 서서히 자랍니다. 고요함 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 중에 꽃이 집니다. 고요함 중에 태양이 뜨고 고요함 중에 태양이 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십시오.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식물은 소리 없이 자랍니다. 곡식은 소리 없이 영급니다
타우러스산은 독수리의 서식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독수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의 하나가 바로 두루미랍니다.두루미들이 이곳 타우러스산을 넘어갈 때 독수리들은 두루미를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공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합니다.그런데 언제나 독수리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날아가는 두루미들입니다.원래 두루미는 떠들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하늘을 날면서도 계속해서 소리를 발합니다.독수리는 두루미의 이 성향을 이용해서 먹이 감을 찾는 신호로 삼습니다.그러나 나이가 많은 노련한 두루미들은 거의 희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노련한 두루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돌을 물고 날아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입에 문 돌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많은 오해를 직면하게 됩니다. 억울한 마음에 오해를 벗어버리고자 변명을 하고 답답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또 다른 오해를 볼러 오고 관계는 더 어려워지기 일쑤입니다. 이런 때는 침묵이 약입니다. 답답해도 억울해도 분하고 섭섭해도 인내하고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단이 틈타지 않도록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 침묵을 통해 크고 놀라운 하늘의 위로와 은혜를 맛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려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입니다. 변명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상황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53:7에서 주께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신 이유는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10절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시는 아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대제사장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몇 마디의 변명만 하면 예수를 풀어 줄 생각을 했던 빌라도 총독에게 이런 예수님의 침묵은 기이하게 생각되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27;1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놀라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비록 고통스러워도, 수치스러워도, 피하고만 싶어도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감당하시려고 침묵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령님의 임재 속에 있다면 이제 구차한 변명도, 불평도, 고발도, 원망도 그만 멈추고 그분의 임재,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잠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잠잠하면 그분이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연습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도는 동안 흥미 있는 한 가지 명령을 추가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6:10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곧 행진하는 동안에 침묵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침묵의 명령이 필요했을까요? 우선 침묵이 명해지지 않았다면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번져 갔을까요? "야,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냐? 이렇게 성을 돈다고 글쎄 이 성이 과연 무너지겠나?" 틀림없이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는 쉽게 동조자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분위기와 불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침묵의 시간에 당신의 백성들이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런 침묵의 행진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인생의 여리고를 침묵하며 믿음으로 행진하여 깨뜨릴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침묵했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소리를 외칠 타이밍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는 소리들은 과연 믿음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의미 없는 헛된 소리들일까요?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이제 침묵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십시오.
옛날 어느 마을에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여인에게 몰려와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고 다그쳤습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당황한 처녀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수도사를 지목했습니다. 사람들은 수도사에게 몰려가 사실여부를 따졌습니다. 수도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사람들은 처녀를 임신시킨 주인공으로 확신하고 비난을 쏟아 부었습니다. '위선자', '이중인격자', '더러운 놈' 흥분한 이들이 던지는 돌에 의해 수도사는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죽은 수도사를 장사 지내려고 수의를 입히다가 수도사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수도사는 얼마든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왜 침묵하였을까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함으로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여 회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들추어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사람들을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일깨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침묵을 통하여 어떤 웅변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주 작은 비난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얼마나 억울해 하고 목청을 높이지 않습니까? 아주 작은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주어진 고난에 순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웅변보다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침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때입니다. 지금은 침묵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침묵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침묵을 통하여 더 깊은 영성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마 27:11-31 / 조영태목사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을 간단하게 요약해본다면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27권 중에서도 복음서는 오신 예수님의 대해서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탄생을 시작으로 기적과 표적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포와 천국백성으로서의 가르침 등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복음서의 초점은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 십자가로 가까이 가시는 주님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사역은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도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로 가까이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잘 이해하고 설교를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기도 후에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 안에서 공회의 심문을 받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제사장들은 많은 거짓 증인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고소하며 온갖 죄명을 덮어씌우려 했으나 증인들의 증언이 제 각각 이었고 어떤 고소에도 예수님은 전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느냐? 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대해서는 맞다고 답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모습으로 오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대제사장이 공회 앞에서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서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을 들어 사형에 해당하는 벌이라고 선동합니다.
그 후에 27:1-2절 내용과 같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박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을 보면 디베료 황제 곧 디베리우스가 로마 황제로 있을 당시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있었다고 역사적인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디베리우스 황제는 빌라도를 유대의 5대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총독으로서 그의 권한은 그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주둔지의 군대를 관할했습니다. 또한 총독은 생사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 이스라엘의 국회라고도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도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재판을 진행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욱이 사형집행에 대한 권은 로마의 대리인인 빌라도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으므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그 사이에 3-10절까지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4복음서에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소개가 되어있고 사도행전 1:18-19절에 배가 터져 죽었다고 이야기 한 후에 마무리 됩니다. 반대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4복음서 모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베드로가 더 나쁜 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나중에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게 되자 스승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뉘우쳐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더 양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에 자리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뉘우쳐 괴로워하기는 했으나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를 통한 진정한 회복의 기회를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차후에 일이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다시 사명을 받아 초대교회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주님 앞에서 양심에 가책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는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여러분을 안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회는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고난과 아픔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오늘본문을 포함해서 공관복음서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즉시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대답하신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요18:36이하를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고 말씀하신 후에 “내가 왕이니라” 고 대답하셨다고 좀 더 자세히 묘사함으로 빌라도에게 자신의 초월적 왕권을 신중하게 설명하시는 모습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사실은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 왕을 재판하는 빌라도와 고발하는 무리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10절 이하에 “참 빛 곧 세상에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씀대로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셔 드리기 싫어하는 인간의 부패한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고발은 눅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자신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것은 신성모독죄 였으나 종교에 관한 그 죄목으로는 빌라도에게 기각이 될 것이기에 로마에 대한 반역죄를 들어서 고발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①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 ②로마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③자치 왕이라고 떠들어 되고 있다 는 고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사실이 아닌 고발에 아무런 대꾸도 변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죄인공판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빌라도는 너무도 이상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죄가 있어도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변호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많은 거짓증언에 한 마디 변호도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크게 놀랐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이 사람은 죄인이 아니다 하는 1차 심문에 대한 내적인 판결을 했습니다. 또한 18절과 같이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발한 것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제의를 합니다.
명절에는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례를 따라서 예수님을 석방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마침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 살인자가 있었는데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살인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심 빌라도는 사람들이 그럼 예수를 풀어주시오 하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으나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바라바를 달라고 공모하고는 군중들이 바라바를 내어주라고 요청하자 매우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내가 사람을 보내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요청을 해오게 되니 더욱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부인이 민감한 재판상황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자신이 꿈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과 함께 재판에 대한 건의를 해 온 것입니다. 아내의 이 말도 빌라도에게는 많은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계획이 빗나가자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하게 합니다. 빌라도가 채찍질 한 것은 흥분한 군중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면서도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채찍질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가죽 끈으로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죄수의 옷을 벗겨 등을 들어내고 허리를 굽게 하여 기둥에 묶든지 틀에 달아 맨 다음 금속조각이나 날카로운 뼛조각들 유리조각들이 달려있는 가죽채찍으로 사정없이 어깨를 시작으로 등 엉덩이 정강이까지 계속해서 내려치는 형벌입니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유리공업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채찍에다 유리조각을 많이 달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을 쓴 것이지만 그 숨은 뜻을 모르는 무자비한 군인들은 돌아가면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과 출혈로 인한 쇼크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요19:4절에 보면 빌라도가 채찍질 당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데리고 나와서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면서 또 한 번의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아 이미 만신창이 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빌라도가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고 변호하자 더욱 소리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며 성난 군중들이 폭도로 변하기 직전의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왜? 무엇이 군중들을 폭도로 변하게 해버렸습니까? 유대 군중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여기며 그를 추종했습니다(요 6:24-26).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로마로부터 식민지 독립을 계획하며 기대했던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자 그들은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원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아, 로마군대를 쓸어버릴 능력자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뜻에 맞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러한 관점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말과 칼의 힘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미움으로 바뀐 것이고 예수님을 처벌하는 것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임에도 그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혈안이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자신의 죄를 이루지 못할 때 오히려 더 흥분하여 불법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무죄한 예수님을 죄인으로 내몰았으며 법 없는 이방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오순절 설교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잘못을 날카롭게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2:2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예수가 눈에 가시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쌓아놓은 명성과 종교적인 기득권이 흔들리고 군중들의 마음이 젊은 예수에게로 향하고 많은 사람이 따르자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로 못 박게 만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빌라도도 더 이상 예수님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곧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신명기 21:6절 이하에서는 자신들이 모르는 살인사건에 대해서 손을 씻으며 피 흘린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구절이 있으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모함을 당했고 죄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재판관의 자리에서 의를 따르기 보다는 민중의 만족과 자신의 정치적인 안녕을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은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손을 씻음으로 무죄한 자를 죽게 했다는 자신의 마음 한 켠에 있는 죄책감을 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예수님을 죽인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엘서 2:13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길은 진심으로 잘못을 돌이키고 마음을 씻는 것이지 손이나 씻음으로써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얄팍한 술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그 진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그 진리를 따르고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과 지위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거나 시인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고통이 되고 불편한 진실이 될 때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십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리는 외로운 길이기에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의로운 선택이기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과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실 것도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
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고통과 수난의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 한 사람의 잘못도 아닙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 거짓증거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군중들을 선동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예수님을 희롱하고 그의 옷을 제비뽑는 군병들, 하다못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모두 어쩌면 그렇게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게 하는지 한 명도 주님의 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 의해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탓하기 전에 그들의 죄를 정죄하기 전에 만약 여러분들이 빌라도의 재판과정에 있었다면 어떤 무리에 속해져 있을까?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그 분을 죽이려고 선동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친 군중이 바로 나이며 예수님을 채찍질 한 것도 바로 나였다는 것이 가슴에 와 박혀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생명의 진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죄인들을 향한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십자가로 점점 더 가까이 가시는 모습입니다. 조금 오래된 복음성가인데 십자가를 잘 표현한 곡 중에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라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 몸 버려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가사에서처럼 주님이 십자가 지심은 우리를 향하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엇을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담당시키시지 않고 자신이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는 생명의 문,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한 그 분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리라” 롬 5:8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그 분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십자가로 가까이 가신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음을 깨닫는 다면 우리의 삶도 십자가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수많은 고발과 조롱, 수욕과 채찍질 그 고통 앞에서도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묵묵히 십자가로 가까이 가시면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라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도 나를 편드는 사람이 없고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 그 순간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통과 조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하는 선생이며 나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머리가 아닌 체험으로 만나게 되는 구원의 전당이 될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성탄절기가 기쁨과 찬양의 절기라면 고난주간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과 부활의 감격이 있는 절기입니다. 오늘 주보에도 있듯이 고난주간에는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십자가를 묵상해야 하지만 이번주간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기 위해서 복음서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거나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일 또한 평소에는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보고 싶은 대로 보았다면 이번주간에는 끼니를 금식한다든지 금요일 하루를 금식한다든지 하면서 음식을 절제하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음식보다도 무분별한 미디어 사용으로 영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은데 TV 드라마 뉴스 게임 카톡 페북 등 미디어를 절제하고 금식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갖는 고난주간 특별 수요예배와 예수님의 못박히심을 기념하는 금요예배에 참석하셔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도 절기에 대해서 설명하시고 온 가족이 예배에 자리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자녀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아이들이 영적으로 더 민감하여 표현을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구역단위로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인가를 나누는 것도 매우 유익한 일이 되겠습니다.
진실로 이번에 맞는 고난주간을 통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맛보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침묵
마 27:11-14 / 박봉수목사
재판은 공정과 정의가 생명입니다. 재판과정이 공정하고, 재판결과가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해서 늘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재판 가운데 하나를 손꼽으라면, 오늘 본문의 빌라도 재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재판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죄인으로 재판장인 빌라도 앞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처음으로 주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간단하게 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온갖 거짓증언을 동원해서 주님을 고발했습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주님께서 나름대로 변호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억울하다든지, 아니면 저들의 고발이 잘못됐다고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방어하든지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답답해서 빌라도가 나섭니다. 변명도 좋고, 억울함에 대한 호소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자기가 경험해 본 죄수들의 태도와 그리고 자기가 예상했던 주님의 태도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주님께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풀어줄 생각으로 여러 시도를 해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고발 태도가 너무 완강했고, 자칫 이 재판이 정치적 소요로 비화될 조짐을 보게 됐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이 재판을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게 됐습니다. 진실을 밝히려 하기 보다는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하고 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빌라도가 이렇게 공정과 정의를 외면한 정치적 재판을 진행했고 판결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또 침묵하셨다는 점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거짓과 음모로 고발한 것에 대해서 침묵하셨던 주님께서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또 침묵하신 것입니다.
침묵하신 이유
그러면 주님은 왜 침묵하셨을까요?
오늘날 재판과정에 ‘묵비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할 때,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기본권의 하나로 법에 명문화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침묵은 ‘묵비권’을 행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이 묵비권은 존중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에게 불리한 진술에 대해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주어진 발언 기회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묵비권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고발이 너무도 확실해서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증거가 확실하고 증인들의 증언도 명백하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서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번번이 이기셨기에, 이번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 빌라도의 권위에 압도당해서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로마군대의 위세가 너무도 등등해서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아서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들을 제어할 힘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침묵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말할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재판과정이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재판에서 십자가형이 선고되고, 그 선고에 때라 십자가형이 집행되도록 기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실 어제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필사적으로 기도하시면서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이지만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중국여행을 하면서 우리와는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중국의 한 시골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비행기 출발시간이 연기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처음에 2시간 연기된다는 것입니다. 직원에게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답답했고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저희 외에 몇 사람 중국 분들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눈 감고 묵묵히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2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비행기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찾아가서 물어보니 비행기가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오늘 예약한 단체가 내일 출발하기로 해서 승객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대신 공항근처에 호텔을 잡아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 시간에 출발해야 계획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됐습니다. 그래서 항의를 했는데 막무가내입니다. 제가 더 놀란 것은 함께 기다리던 중국승객들의 태도입니다. 아무소리 없이 안내를 따라 호텔로 가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이런 일을 여러 차례 겪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결정해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따져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지금 주님도 그러신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도록 정해놓으셨고, 지금 그 절차가 진행될 뿐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악을 저지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용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침묵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사 53:7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보여주실 모습을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결정적 순간에 침묵하시는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서 침묵하실 것은 이미 수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예언대로 침묵하신 것입니다. 참 놀랍고도 원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결정적 상황에서 섭리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침묵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한 예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침묵하고 순종했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가라하셨을 때, 침묵하고 순종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침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묵종(默從)해야 합니다.
예수의 침묵
마 27:11-14 / 이필재목사
오 제이 심슨(O. J. Simpson)이라고 하는 풋볼 선수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재판을 받은 일 있었던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재판은 개인 범죄 재판 기록으로 몇 가지 신기록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재판 기간이 1년 6개월이나 계속되는 재판 과정을 거친 것이 첫째 특징이고, 재판 비용이 개인 범죄 재판으로 가장 많은 비용이 변호사비로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은 대 다수의 국민들은 그를 범인으로 생각하는데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여론 조사 한 것을 보면 7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그가 살인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가 있었는가? 변호사들이 잘했다는 것입니다. 천문학적 숫자의 변호비를 받으면서 일을 잘 해낸 것이 그를 석방시켰다는 여론이 나왔습니다. 어떤 경우는 절대 범인이 아닌 청렴결백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기도 하고 감옥살이하는 경우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데 대개 이런 경우의 사람들은 변호사가 없거나 시원찮아서 인생을 망치는 억울함이 생겨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필요하는 증언 한마디는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누구든지 살아남기 위해 자기 방어에 필요한 모든 말을 열심히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꼭 필요한 말을 해야 될 때 발언권이 주어져야 할 수 있습니다. 언권 회원이라는 말도 있고, 비언권 회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우리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 발언권을 줄 수 있는 사회자가 발언권을 무시하는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매우 중대한 재판 과정의 기록이 나타나 있는데, 이 과정에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권력자와 언권 회원의 일대일 만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세상의 모든 법정은 구조가 똑같습니다. 재판관이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그 중앙에 죄수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재판의 비중에 따라서 이러한 제도는 더 엄격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죄수의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재판관 자리에는 빌라도가 있습니다. 검사의 자리에는 유대 나라의 온 백성이 고소를 하여 죽이라는 판결을 내리라고 검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한 가지가 없습니다. 변호사가 없는 재판입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한 성격의 재판이 되었는데, 변호사가 없으니까 재판관이 변호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 복음서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도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해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라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죄수를 놓아주려고 철저히 변호사 역할을 하는 이상한 재판 자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식민지 국가라서 사형에 해당하는 권한은 로마 정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법정인 가야바 법정에서 이 사람은 사형을 해야 한다고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법정의 허락을 받아야만 실시할 수 있습니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가야바 법정의 판결은 내려진 상태입니다. 빌라도의 허락만 받으러 온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의 판결이 대법원 판결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상한 일은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를 사형 선고한 것이 새벽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재판은 반드시 낮에 하도록 법문화되어 있습니다. 밤에 하는 재판은 율법에 어긋나고 낮에 하면 혹시나 예수의 추종자들이 무슨 일을 꾸밀 지도 모르니까 새벽에, 다른 사람들이 다 잠 잘 때 결정하고 이른 아침에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 마지막 재판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이제 대법관으로 자신의 권리를 이미 피고인에게 정확히 밝혔습니다. “나는 대법관이다.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느니라. 나한테 달려있다.” 이것을 피고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네가 이야기 하라.” 그러니까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말할 수 있는 언권을 주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결백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더구나 최고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빌라도는 예수를 무죄 석방 시켜 주려고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다만 명분을 만들기 위해 예수와 협의를 하고 있는 이상한 재판이 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여! 나는 당신 편이요. 사람들에게 내세울 대법관의 명분을 당신이 만들어야 돼! 그러니까 말하시오. 나는 당신을 무죄 석방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말 한마디만 확실하게 하라. 네가 변호해서 너를 도와줄 것이다. 당신은 내가 보니까 죄가 없어. 당신을 죽이려 하는 저 놈들이 나쁜 놈들이오. 말해서 자신을 변호하면 당신은 자유인이 되고 저 나쁜 놈들은 내가 무고죄로 처리해 버리겠소. 말하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에 이런 법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재판장이 주고 있는데도, 오늘 말씀 12절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안 하시는지라.” 이 재판석에 누명을 쓰고 죽음의 자리로 가야 되는 피고인은 태연하고 대법관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이상한 재판 자리가 되었습니다. 13절에 빌라도가 답답해서 예수를 독촉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간증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왜 가만히 있냐? 제발 말 좀 해라. 이 답답한 친구야!” 지금 빌라도는 안타까워 야단이 났습니다. 그런데 14절에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기이히 여기더라’라는 말 속에 빌라도의 답답함이 들어있습니다. “아니, 이런 이상한 친구! 살려주겠다는데! 대법관이 지금 자기편에서 선언해 주려고 하는데, 군중들 앞에 대법관의 명분만 세우는 말을 하라!” 그런데 “아니하는지라.” 합법적 논리 하나를 성립시킬 좋은 자리에서 이 바보 같은 친구는 어찌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까? 이 아우성치는 군중들 앞에서 총독의 명분이 서는 말 한마디를 그렇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마 빌라도는 그의 집정관 생활 가운데서 오늘과 같은 일은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기회를 만나면 자기변호에 온갖 거짓말까지 다 동원할 텐데 이 사람은 사람도 아닌가? 재판관이 철저하게 피고 편에 서서 있는 재판 자리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런 중요한 기회에 왜 침묵하셨을까? 거기에 우리의 관심사가 있습니다. 이 침묵에 가장 중요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의 고민은 겟세마네에서 끝났습니다. 철야 기도의 결론을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의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몇 군데 침묵 사건에 대한 교훈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군중은 최대 위기를 만납니다. 홍해라는 바다 앞에 도달했을 때 마음이 변한 바로가 군대를 동원해 출애굽을 막으려고 합니다. “가서 잡아와라!” 이제 그들은 애굽 반역의 죄로 인해 살해되던가 아니면 과거보다 더 참혹한 노예 생활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가 가로막힌 길목에서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흥분하지 않겠습니까? 아우성을 치기 시작합니다. 우리들도 많이 경험합니다. 절박한 위기감이 있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군중의 심리는 누가 유언비어 한마디만 하면 수라장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이래서 이랬다더라.” 거짓말인데도 그 말로 아수라장이 됩니다. 누군가 한마디 하는 소리에 영향을 받아 삽시간에 그 자리는 전쟁터와 같이 됩니다. 그래서 짓밟혀 죽는 사고가 나는 겁니다. 침착하게 되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교회도 그렇습니다. 평온하던 교회가 한 두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면 삽시간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군중 심리입니다. 성난 군중들 앞에 모세는 나타나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가만있으라.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보라. 소리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면 가만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온갖 아이디어를 내고 잔머리를 굴려서 성급히 부산을 떠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망칠 수 있습니다. “예수여! 빨리 말 좀 해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 이 바보 같은 친구야, 이 중요한 시간에 왜 입을 다물고 있느냐?” 예수는 “나는 이미 내 아버지께 말했느니라. 이제는 아버지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되어지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이니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마차에 실려 법궤를 도로 찾아오는데 길이 나빴는지 마차가 흔들려서 법궤가 위태롭게 되니까 웃사라고 하는 사람이 재빠르게 달려들어서 법궤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불쑥불쑥 손 내밀지 말라.” 그 뜻 밖에는 다른 일이 없습니다.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바로에게 항복하고 돌아가자.”, 모세는 “가만있어라. 하나님이 일을 하실 것이다. 조용히 있으라.”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요한을 잉태했을 때부터 출산하였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 저 말 함부로 하지 말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보라. 침묵하라.” 그래서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또, 마리아는 성령의 잉태를 지시받았을 때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침묵은 하나님께 일을 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렇게 가만히 계신 것인가?’ 이런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 나설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내가 조용할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교회 분쟁이 났다고 서로 옳다고 온갖 주장을 펴며 난리를 치는 젊은 친구들 여섯 명이 나를 찾아와서 “이럴 때 해결점을 목사님께 듣고 싶습니다.” “당신들 누구야? 뭐하는 사람들이야? 당신들 때문에 교회가 분쟁이야. 이 시간부터 해결을 찾고자 하면 아무 소리하지 말고 모이지 말고 기도만 해. 하나님께 맡겨드린다고 하면서 내 의견대로 안 되면 화내고 때려 부수고…. 그게 무슨 하나님의 일이야? 몰려다니지 마. 전화도 하지 마. 각자 조용히 기도만 해. 당신들 나서는 그 바람에 안 되는 거야. 이제 당신들이 이렇게 나서면 교회는 수라장이 될 거야.” 그들은 수라장 쪽을 택하여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갈보리교회까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목사님 말을 안 듣고 제가 그 교회 떠났습니다.” “잘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냐? 내가 한 말 기억하지? 네가 대장 자격으로 나한테 왔었지?” “그런 적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해야 될 일이 있는데 사람이 해야 될 일은 모두가 이기주의적 선택이 되기 때문에 그가 문제가 된다.”
지금 주님의 침묵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내가 빌라도의 동정이 필요 없다.’ 피해를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은 변명스러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 피해 부분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보라! 저 사람들이 얼마나 악의적 거짓말로 너희를 모함하고 있는가? 왜 너는 입을 다물고 있느냐? 나는 너를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예수는 군중들의 악의에 찬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도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 예수의 침묵입니다. “이 자리에서 변명을 늘어놓고 살기위해 빌라도와 협상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군중 심리로 떠들어대는 저 무지한 백성들과 맞붙어서 말다툼을 벌리는 추잡스럽고 비겁한 일에 무슨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하셨습니다. “이대로 죄인처럼 골고다의 길을 갈 것이다. 이후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예수의 침묵! “빌라도여! 너의 판결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판결을 받았노라.” 예수님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빌라도의 평가로 본다면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예수의 침묵, 그러나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사역을 지금도 쉬지 않고 계속하고 계십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답답하게 아무것도 안하시는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해마다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은 미국인들이 최대 관심 문화일 것입니다. 그날은 온통 TV 앞에서 누가 무슨 수상을 하는지 온통 미국이 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느 해인가 “포레스트 검프”라고 하는 영화는 그 주인공이 바보 역할로 나옵니다. 지금 세대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딴 세상 사람이 와서 사는 것같이 그 주인공이 비춰졌습니다. ‘어휴, 저런 바보 같은!’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주인공이 그 당시 최대 영화 흥행 기록을 세우고 그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습니다. 논평이 나왔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모든 사람은 그런 세상과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겁니다. 모두가 약삭빠르고 자기의 이익만 열심히 챙기는 이기주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은 바보처럼 살아가야 이 세상은 살기 행복하여 지지 않겠는가? 저렇게 바보 같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세상 평가로 기준하지 말고 미련한 것처럼 마치 실력이 없는 자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제때 말 한마디 못하고 묵묵히 바보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과거 역사 때문에 무슨 경쟁 사건이 생길 때마다 민족 감정이 유발합니다. 이번에 야구 경기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두 번 이기고 한번 졌는데 일본팀이 우승하니까 약이 오릅니다.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괜히 이런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일본을 상대하면서 우리가 한 가지는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 나가서 애국심은 못 따라 갑니다. 자기가 소속한 공동체를 위해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우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있는 공동체를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야마사키 요시꼬의 “대벌”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국가 공무원, 기업체 간부들에게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으라고 했습니다. “대벌”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일본 사회에서 무식한 사람이요, 대화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본 군인이 러시아에서 생포가 되어 수용소 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비록 수용소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질서를 지키면서 삽니다. 젊은 총각이 계급상 상관입니다. 그런데 부하 가운데 처자가 달린 나이 많은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나이 많은 군인은 그 수용소 안에서도 절대 복종하면서 공동체 질서를 지켜갑니다. 어느 날 러시아의 군관이 수용소 안에 들어와서 그 나이 많은 일본 군인을 이유 없이 심하게 괴롭힙니다. 총각 상관이 러시아 군관 앞에 다가왔습니다. “여보쇼! 이 사람은 나의 부하요.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괜히 괴롭히시오? 이 사람이 잘못했다면 내가 책임지겠소. 내가 상관이요.” 대들었습니다. 러시아 군관이 “아니꼽게 포로 주제에 너희들이 무슨 상관 부하 따지고 항의를 하느냐? 기가 막히네. 죽어라!” 총을 빼 들어서 나이 많은 일본 군인을 죽이려고 총을 갖다 대니까 이 젊은 상관은 순간적으로 러시아 군관에게 달려들어서 현장에서 그를 죽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나이 많은 포로를 보면서 총각 상관이 말합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시오. 나는 처자가 없소.” 이제 그는 끌려가서 처참하게 사형을 당해야 됩니다. 그는 그 수용소의 지붕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같은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동료들이여! 이 전쟁이 끝나고 그대들이 고국에 돌아가면 이 말을 전해주시오. 나는 일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고….” 떨어져 투신자살합니다. 이런 애국심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일본을 다시 부활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누구든지 읽으라고 했던 책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다소 영리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부분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바보같이 손해 보면서 비록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하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빌라도 법정에서 입 다무신 예수의 모습에 그 뜻을 바라보면서 이 사순절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주님이 침묵하셨는가? “아버지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다.” 이 숨어있는 깊은 신앙의 뜻을 저희들이 잘 깨달아서 사순절을 지내는, 주님처럼 거룩한 바보처럼 살아갈 수 있는 영력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바보같은 예수
마 27:11-14 / 이필재목사
예수님의 3년 동안에 복음 사역을 통해 넉넉한 메시아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보통 신학적으로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라고 말하는데, 구약에 예언된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이 복음의 성격입니다. 마태복음에만도 구약 성경 인용구절이 40군데가 나오는데 그 모든 목적은 “구약에 이렇게 예언되어져 있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하고 마태복음에 기록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700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마리아를 통한 동정녀 탄생으로 이렇게 성취되었으니 그가 곧 베들레헴 출생인 이 예수다” 라고 구약의 예언이 오늘에 성취된 것을 확약하는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초능력적 기적 창출과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복음의 선포로 예수님은 “내가 그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는데, 제자들의 반응은 그 반대로 나타났던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습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큰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적 사건이 자신들의 감각 기관에 너무나도 확실히 증거된 경험적 사실에 황홀한 자기 미래를 꿈꾸게 되었고, 마치 예수님과 3년 정도 지내며 보낸 시간에는 이 사람들은 무슨 총선이나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과 같이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인간의 최대 어려운 문제인 먹는 문제 해결의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이 나라는 앞으로 먹을 염려는 하나도 없다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를 날마다 만들어주면 되니까.’ 하는 희망을 가졌고, 질병 치유 사건을 보면서 그들은 건강한 일생의 약속을 보장받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 불치의 병에서 다 고침을 받았으니 예수님 주변에 있는 우리들은 건강한 평생은 확실하게 약속 받았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갈릴리 바다에 몰아닥친 천재지변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순식간 평온을 찾았는데 이것을 통해 인간의 어떤 고난도 해결된다고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자기들과 평소 친분의 관계가 있던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되어 있을 때 예수님이 나사로를 회생시킨 사건을 목격하면서 제자들은 우리들은 절대 일찍 죽을 염려는 없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장차 이 나라 왕권을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와 같이 회복시키시는 그 날에 자신들은 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영광이 보장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 속에 있었는데, 그 희망과 소원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사순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인 자리로 내려가셔야만 되었고 제자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무능자, 바보같이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종류를 우리가 사순절에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새로 제작된 예수님에 대한 영화의 반응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영화보다 가장 강한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극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약한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다가 몇 사람이 충격을 받아서 현장에서 사망하는 그런 일도 벌어졌고,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본 이후 그 참혹한 장면에 대한 감정 처리가 매우 어려워서 이제는 심장 약한 사람은 보지 말라는 그런 충고까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금 “이 영화는 유대인에 대한 모독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영화 상영 금지에 대한 데모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도 상영된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이 가룟 유다의 배반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 가운데 지옥에 가면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저를 배반하여 칼을 뽑은 ‘부르터스’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장 충성을 해야 될 사람이 가장 큰 배반을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성경에 큰 인물들은 거의 모두 이런 배반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마지막에 롯과 불화하여 슬프게 헤어지는 기록이 나오는데 은혜를 입은 젊은 조카 롯이 삼촌을 사막으로 내어 쫓고 자기가 좋은 땅을 차지하는 역사를 아브라함이 겪었고, 다윗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까?’생각하다가 아버지가 데리고 살던 궁중의 후궁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농락해 버리는 그런 일을 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의 결과는 모두 처참한 재앙으로 끝이 나는데, 가룟 유다는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압살롬은 말 그대로 압살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롯은 자기 두 딸과 살아서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라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 소돔과 고모라의 주인공이 되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조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딸 간에 퍼진 종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수난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는데, 베드로의 변심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을 마지막으로 지켜주어야 될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을 지켜주어야 될 충성자가 예수를 모른다고 배반했을 때 주님의 마음 고통이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마지막 버팀목이 빠져나가, 이제 외로운 단신이 되신 예수님이 고난의 사순절에 겪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돌아선 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의 3년 동안의 사역 기간에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은 수만 명이 됩니다. 그가 큰 희망의 빛으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는 예루살렘의 모든 군중이 나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가 가는 길에 폈다고 합니다.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모두가 “호산나”하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환영하던 인파가 돌변을 해서 이제는 정반대의 소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살기찬 눈동자를 보시며 갖는 인간 예수의 실망감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 가운데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어떤 배반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예수는 군 장병들의 물리적 힘에 의해 체포를 당하시는 고난을 겪으십니다. 예수님이 이때 하도 기가 막혀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 내가 무슨 반항을 한다고, 성전에서 날마다 앉아 조용히 가르쳤는데 …….” 갈보리 교회에서는 매월 안양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수감자들을 위한 위로와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물리적 힘에 의해서 체포를 당해보지 아니한 사람은 체포당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최악의 인격 모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죄가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죄없이 체포당하는 그런 고난을 겪으시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결박을 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신체적 제한을 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죄수에 대한 첫번째 작업은 손을 쓸 수 없도록 묶어버리는 일입니다. 경찰관의 휴대품 제1호는 수갑입니다. 그런 죄수의 취급을 받으셨고, 그 다음은 끌려갔다고 성경에 표현이 되었는데 이 고난은 짐승대접입니다. 묶어서 끌고 가는 것은 짐승에게나 하는 일인데 예수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끌려간 데서는 재판을 받으시게 되는데, 이 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아니한, 비록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여도 그 자리는 싫은, 그 자체가 가장 큰 인격의 불명예 이력서가 되는 것이 법정에 서는 일입니다. 죄가 있어서 그 자리에 섰다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겠지만 죄 없는 예수님은 최악의 자리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부터 군중의 야유가 쏟아져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많은 말로 욕하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교회에서 받으신 직함을 들어 욕하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권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네가 권사냐?” 그때 기분이 어때요? “너 같은 놈이 집사냐?” 저 같은 사람에게 “네가 목사냐?” 그때 기분 아주 죽을 맛이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메시아냐?” 가장 치욕스러운 욕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했습니다. 이 행위는 가장 더러운 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침을 뱉지 아니하고 받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일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최악의 경우, 다시는 안볼 때 마지막으로 쓰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에게 마지막 내려진 결론은 사형 판결입니다. 이 사형 제도는 살려둘수록 세상에 큰 손해가 나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끊어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국가적 약속입니다. “죽여버려라.” 우리 모두는 사형 판결을 받아본 일이 없으니까 그때의 기분을 우리가 모릅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다고 그랬습니다. 갈대로 머리를 쳤다고 그랬습니다.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가게 했습니다. 군인들이 채찍으로 무수한 매질을 가했다고 그랬습니다. 죄수 복장의 상징으로 홍포를 입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조롱의 팻말로‘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다고 그랬습니다. 가시관의 고통과 손과 발에 못을 받히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렸는데, 이 모든 고통의 현장은 공개처형이라서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으므로 그 수치감이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신 이 많은 고난의 종류를 그 중에 어떤 것 하나라도 여러분이 당해 보신 것 있으십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러한 모든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여러 군데 동일하게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유대 나라 정치 상황은 로마 통치권 영향 밑에 있습니다. 헤롯의 자치 정부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치 정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사형에 관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로마 통치권에 있다는 법적 조항을 알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나이다. 당신이 죽이라 명하소서.”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운명은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결정이 되어집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죄를 심문하였습니다. 마지막 빌라도가 내린 판결이 무엇인가? 무죄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내게로 끌고 왔으나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보라! 저의 행한 일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무죄 선언입니다. 집정관 최고의 대법관이 최종 판결로 “죄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오시면 일은 끝이 난 것입니다. 오히려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무고죄로 고소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보같이 무죄 판결을 받으시고도 그 자리에 그냥 앉아 계십니다. 하도 답답하여 집행관이 오히려 죄수되었던 예수에게 사정을 합니다. “말 좀 하라.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놓아줄 권세도 있는 줄 모르느냐? 이제 네가 내게 말만하면 너를 자유인이 되고 저 나쁜 놈들은 오히려 내가 혼내줄 수 있다. 그러니 네가 너를 변호하라! 그런데도 예수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바보처럼 가만히 계십니다.
빌라도가 사실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벌써 빌라도는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놓아주어야 되겠다고! 왜? 죄가 없으니까! 그 많은 군중 앞에서 다만 합법한 논리 하나를 성립시키기 위해, 총독의 자존심 하나를 살려놓기 위해서 예수께 말하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많은 말로 고소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짖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그런 모든 이유는 로마법에 하나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 그게 무슨 사람을 죽일 죄냐?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나더러 죽이라고 하니 어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예수여! 빨리 당신의 그 무죄성을 이 많은 고소자들 앞에서 말하라. 그리고 어서 자유로이 이 법정을 나가라.”
저는 본의 아니게 법정에 많이 출두를 했어요. 교인들 관계에 증언을 서기 위해서 OJ심슨이 섰던 그 자리에도 내가 가서 법정 증인으로 선서를 하고 “여기에 대해서 거짓 없이 내가 증언하겠다”고 증언한 적이 있었고, 죄수 데리고 가서 재판관 앞에서 죄수하고 나하고 둘이서 재판을 받은 일도 있고, 법관이 이렇게 말해요. “이 죄에 대해서 목사인 네가 좀 책임을 지고 교육을 시킬 수가 있겠냐?” 난 그때 알았어요. ‘아, 놓아주려고 그러는구나!’ “하겠습니다.” “그럼, 네가 책임지고 사인할 수 있겠느냐?” “사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코 죄가 없습니다.” “그럼 이후에 그가 또 다시 그렇게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목사가 보장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인하고 데리고 나가라!”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온 적도 있었어요.
지금 예수는 최고의 법정 기관이 선언을 했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나오면 됩니다. 이 재판은 예수의 승리로 끝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재판관 자체가 피고인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바보처럼 예수는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오늘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그랬습니다. 빌라도는 지금까지 자기의 위치에서 이런 일을 수없이 많이 보아온 경험자입니다. 누구든지 이 자리에 서면 죄가 있는 사람도 온갖 말을 아름답게 해서 죄를 모면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이 바보 같은 사람은 이렇게 재판관이 놓아주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고 답답하게 가만히 있느냐? “아, 제발 나 좀 도와 달라! 말 좀 해라!” 기이히 여기더라.
사실 지금도 이태리 사람들은 우리 개신교에서 하는 사도신경을 고치라고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을 빼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지 빌라도가 얼마나 예수의 무죄성을 주장하고 변호해 주었는데 거기다 로마 사람이 죽였다고 영원한 신앙고백을 하느냐? 사도신경 하지 말라!” 사도신경 안 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태리 나라 사람들이 만든 영화에는 빌라도의 의로움이 많이 나타나도록 제작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예수를 무죄 석방시켜 주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씁니다. 유월절 명절을 기한 사면령! “온 백성이 다 기억하고 있는 흉악범 바라바를 동원시키면 아마 예수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바는 온 국민이 다 기억할 수 있는 사형수요, 흉악범입니다. 아마도 민중들이 바라바를 내세우면 ‘그래도 예수가 바라바보다 낫지!’ 예수를 선택할 희망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성을 재판관으로써 인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최고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도 최종 재판관이 원고나 피고의 편에서 편견 발언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런 편견 발언을 하면 검사 쪽이나 변호사 쪽에서 즉각 이유를 말해서 재판관을 바꿔 달라고 말합니다. 바꿔버립니다. “너는 재판만 할 것이지, 왜 양쪽 편견을 드느냐?”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지금 철저하게 피고 편에 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좋은 기회에 왜 예수는 바보처럼 침묵을 지켰을까요? 지금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판결이 났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여기 오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 철야기도 과정에서 예수의 마음에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문을 예수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문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내가 가야 할 길을 빌라도한테 내가 아름다운 말로 사정을 해서 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이미 결정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사흘 후에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판결하신 메시아가 가야할 고난의 길에 말없이 들어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약 이때 예수께서 “빌라도야, 네가 옳다. 나는 정말 죄가 없으니 나를 좀 구해다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이 나타났겠는가? 바보라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은 바보의 평가를 받아서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바보같이 살아야 되는 부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어떤 희생의 삶을 지불하면서 바보같이 살아야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의가 성취되는 그런 진리가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라고 하는 영화가 나왔을 때 미국인들이 그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당시에 최대의 흥행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하도 요란해서 청년들하고 저도 가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는 아카데미 6개 부분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보시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입니다. 뭐가 재미있는지……. 그런데 그것이 온 국민의 공감대를 가져온 것은 논평이 이렇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그 사람 같이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든 악이 생겨간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같이 바보처럼 손해 보면서 살아주는 사람이 그립고 필요한 시대가 지금이다. 저런 사람이 있어주어야 될 것 아닌가? 모두가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만 재빠르게 쟁취하는 이 세대에 너무나 훌륭하고 신선한 충격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바보처럼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이 사회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아닌가?”
일본의 야마사키 요시꼬의 “대벌”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일본 기업의 회장들은 그 책을 읽지 않고는 회장을 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되어 누구든지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지 아니하면 대화가 되지 아니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일본의 정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정신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은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러시아에게 일본군들이 포로로 잡혀서 수용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신은 비록 포로로 수용소에 잡혀 있으면서 그 안에 위계질서가 분명해서 같은 포로의 입장에서도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며 수용소 포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계급이 높은 사람이 총각이에요. 나이가 어립니다. 부하는 처가 있는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보다 나이 적은 총각 상사에게 절대 복종하면서 일본의 정신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러시아의 군관이 그 수용소에 들어와서 그 나이 많은 포로를 죄없이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총각 상관이 앞을 막으며 반항을 해줍니다. “여보시오. 잘못이 없는 내 부하를 왜 괴롭히는 거요?” 그랬더니 러시아 군관이 “뭐라고? 포로가 반항을 해? 그래, 얼마나 네가 훌륭한 상사인지 내가 보여주겠다.” 그래서 총을 빼 들어서 그 나이 많은 일본 포로 군인을 죽이려고 해요. 그러니까 총각 상관이 순간 덤벼들어서 현장에서 러시아 군관을 죽여 버려요. 그러고 나서 죽음을 모면한 나이 많은 자기 부하 포로를 보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시오. 나는 아직 처자가 없는 몸이요.” 이제 그는 러시아 군관을 살해했으므로 틀림없이 끌려 나가 직결 심판으로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집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지붕에서 외쳤습니다. “동료들이여! 고국에 돌아가거든 이 말을 전해주오. 나는 일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투신자살해서 죽습니다. 바보 같은 사람이죠. 가만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우리는 다른 면에서는 매우 영리하고 지혜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예수님을 닮아서 바보같이 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사는 힘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국가 지도자들 간에도 필요합니다.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자기 입장만 고수하는 그런 공동체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바보같이 집행관이 “최고의 대법관인 내가 너를 살려주겠으니 네가 말하라. 너는 죄가 없다.” 무죄 판결을 내렸는데도 바보같이 십자가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손해 보면서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기지 말고 지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억울함을 주면서 살지 말고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보입니다. 사순절에 바보 예수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보같은 예수
마 27:11-14 / 이필재목사
예수님의 3년 동안에 복음 사역을 통해 넉넉한 메시아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보통 신학적으로 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라고 말하는데, 구약에 예언된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이 복음의 성격입니다. 마태복음에만도 구약 성경 인용구절이 40군데가 나오는데 그 모든 목적은 “구약에 이렇게 예언되어져 있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하고 마태복음에 기록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700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마리아를 통한 동정녀 탄생으로 이렇게 성취되었으니 그가 곧 베들레헴 출생인 이 예수다” 라고 구약의 예언이 오늘에 성취된 것을 확약하는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초능력적 기적 창출과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복음의 선포로 예수님은 “내가 그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는데, 제자들의 반응은 그 반대로 나타났던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습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큰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적 사건이 자신들의 감각 기관에 너무나도 확실히 증거된 경험적 사실에 황홀한 자기 미래를 꿈꾸게 되었고, 마치 예수님과 3년 정도 지내며 보낸 시간에는 이 사람들은 무슨 총선이나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과 같이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인간의 최대 어려운 문제인 먹는 문제 해결의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이 나라는 앞으로 먹을 염려는 하나도 없다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를 날마다 만들어주면 되니까.’ 하는 희망을 가졌고, 질병 치유 사건을 보면서 그들은 건강한 일생의 약속을 보장받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 불치의 병에서 다 고침을 받았으니 예수님 주변에 있는 우리들은 건강한 평생은 확실하게 약속 받았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갈릴리 바다에 몰아닥친 천재지변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순식간 평온을 찾았는데 이것을 통해 인간의 어떤 고난도 해결된다고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자기들과 평소 친분의 관계가 있던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되어 있을 때 예수님이 나사로를 회생시킨 사건을 목격하면서 제자들은 우리들은 절대 일찍 죽을 염려는 없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장차 이 나라 왕권을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와 같이 회복시키시는 그 날에 자신들은 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영광이 보장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 속에 있었는데, 그 희망과 소원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사순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인 자리로 내려가셔야만 되었고 제자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무능자, 바보같이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종류를 우리가 사순절에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새로 제작된 예수님에 대한 영화의 반응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영화보다 가장 강한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극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약한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다가 몇 사람이 충격을 받아서 현장에서 사망하는 그런 일도 벌어졌고,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본 이후 그 참혹한 장면에 대한 감정 처리가 매우 어려워서 이제는 심장 약한 사람은 보지 말라는 그런 충고까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금 “이 영화는 유대인에 대한 모독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영화 상영 금지에 대한 데모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도 상영된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이 가룟 유다의 배반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 가운데 지옥에 가면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시저를 배반하여 칼을 뽑은 ‘부르터스’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장 충성을 해야 될 사람이 가장 큰 배반을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성경에 큰 인물들은 거의 모두 이런 배반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마지막에 롯과 불화하여 슬프게 헤어지는 기록이 나오는데 은혜를 입은 젊은 조카 롯이 삼촌을 사막으로 내어 쫓고 자기가 좋은 땅을 차지하는 역사를 아브라함이 겪었고, 다윗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까?’생각하다가 아버지가 데리고 살던 궁중의 후궁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농락해 버리는 그런 일을 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의 결과는 모두 처참한 재앙으로 끝이 나는데, 가룟 유다는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압살롬은 말 그대로 압살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롯은 자기 두 딸과 살아서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라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 소돔과 고모라의 주인공이 되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조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딸 간에 퍼진 종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수난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는데, 베드로의 변심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을 마지막으로 지켜주어야 될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을 지켜주어야 될 충성자가 예수를 모른다고 배반했을 때 주님의 마음 고통이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마지막 버팀목이 빠져나가, 이제 외로운 단신이 되신 예수님이 고난의 사순절에 겪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돌아선 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의 3년 동안의 사역 기간에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은 수만 명이 됩니다. 그가 큰 희망의 빛으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는 예루살렘의 모든 군중이 나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가 가는 길에 폈다고 합니다.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모두가 “호산나”하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환영하던 인파가 돌변을 해서 이제는 정반대의 소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살기찬 눈동자를 보시며 갖는 인간 예수의 실망감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 가운데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어떤 배반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예수는 군 장병들의 물리적 힘에 의해 체포를 당하시는 고난을 겪으십니다. 예수님이 이때 하도 기가 막혀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 내가 무슨 반항을 한다고, 성전에서 날마다 앉아 조용히 가르쳤는데 …….” 갈보리 교회에서는 매월 안양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수감자들을 위한 위로와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물리적 힘에 의해서 체포를 당해보지 아니한 사람은 체포당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최악의 인격 모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죄가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죄없이 체포당하는 그런 고난을 겪으시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결박을 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신체적 제한을 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죄수에 대한 첫번째 작업은 손을 쓸 수 없도록 묶어버리는 일입니다. 경찰관의 휴대품 제1호는 수갑입니다. 그런 죄수의 취급을 받으셨고, 그 다음은 끌려갔다고 성경에 표현이 되었는데 이 고난은 짐승대접입니다. 묶어서 끌고 가는 것은 짐승에게나 하는 일인데 예수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끌려간 데서는 재판을 받으시게 되는데, 이 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아니한, 비록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여도 그 자리는 싫은, 그 자체가 가장 큰 인격의 불명예 이력서가 되는 것이 법정에 서는 일입니다. 죄가 있어서 그 자리에 섰다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겠지만 죄 없는 예수님은 최악의 자리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부터 군중의 야유가 쏟아져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많은 말로 욕하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교회에서 받으신 직함을 들어 욕하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권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네가 권사냐?” 그때 기분이 어때요? “너 같은 놈이 집사냐?” 저 같은 사람에게 “네가 목사냐?” 그때 기분 아주 죽을 맛이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메시아냐?” 가장 치욕스러운 욕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했습니다. 이 행위는 가장 더러운 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침을 뱉지 아니하고 받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일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최악의 경우, 다시는 안볼 때 마지막으로 쓰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에게 마지막 내려진 결론은 사형 판결입니다. 이 사형 제도는 살려둘수록 세상에 큰 손해가 나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끊어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국가적 약속입니다. “죽여버려라.” 우리 모두는 사형 판결을 받아본 일이 없으니까 그때의 기분을 우리가 모릅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다고 그랬습니다. 갈대로 머리를 쳤다고 그랬습니다.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가게 했습니다. 군인들이 채찍으로 무수한 매질을 가했다고 그랬습니다. 죄수 복장의 상징으로 홍포를 입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조롱의 팻말로‘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다고 그랬습니다. 가시관의 고통과 손과 발에 못을 받히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렸는데, 이 모든 고통의 현장은 공개처형이라서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으므로 그 수치감이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당하신 이 많은 고난의 종류를 그 중에 어떤 것 하나라도 여러분이 당해 보신 것 있으십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러한 모든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여러 군데 동일하게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유대 나라 정치 상황은 로마 통치권 영향 밑에 있습니다. 헤롯의 자치 정부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치 정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사형에 관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로마 통치권에 있다는 법적 조항을 알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나이다. 당신이 죽이라 명하소서.”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운명은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결정이 되어집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죄를 심문하였습니다. 마지막 빌라도가 내린 판결이 무엇인가? 무죄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내게로 끌고 왔으나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보라! 저의 행한 일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무죄 선언입니다. 집정관 최고의 대법관이 최종 판결로 “죄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오시면 일은 끝이 난 것입니다. 오히려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무고죄로 고소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보같이 무죄 판결을 받으시고도 그 자리에 그냥 앉아 계십니다. 하도 답답하여 집행관이 오히려 죄수되었던 예수에게 사정을 합니다. “말 좀 하라.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놓아줄 권세도 있는 줄 모르느냐? 이제 네가 내게 말만하면 너를 자유인이 되고 저 나쁜 놈들은 오히려 내가 혼내줄 수 있다. 그러니 네가 너를 변호하라! 그런데도 예수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바보처럼 가만히 계십니다.
빌라도가 사실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벌써 빌라도는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놓아주어야 되겠다고! 왜? 죄가 없으니까! 그 많은 군중 앞에서 다만 합법한 논리 하나를 성립시키기 위해, 총독의 자존심 하나를 살려놓기 위해서 예수께 말하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많은 말로 고소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짖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은 “그런 모든 이유는 로마법에 하나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 그게 무슨 사람을 죽일 죄냐?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나더러 죽이라고 하니 어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예수여! 빨리 당신의 그 무죄성을 이 많은 고소자들 앞에서 말하라. 그리고 어서 자유로이 이 법정을 나가라.”
저는 본의 아니게 법정에 많이 출두를 했어요. 교인들 관계에 증언을 서기 위해서 OJ심슨이 섰던 그 자리에도 내가 가서 법정 증인으로 선서를 하고 “여기에 대해서 거짓 없이 내가 증언하겠다”고 증언한 적이 있었고, 죄수 데리고 가서 재판관 앞에서 죄수하고 나하고 둘이서 재판을 받은 일도 있고, 법관이 이렇게 말해요. “이 죄에 대해서 목사인 네가 좀 책임을 지고 교육을 시킬 수가 있겠냐?” 난 그때 알았어요. ‘아, 놓아주려고 그러는구나!’ “하겠습니다.” “그럼, 네가 책임지고 사인할 수 있겠느냐?” “사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코 죄가 없습니다.” “그럼 이후에 그가 또 다시 그렇게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목사가 보장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인하고 데리고 나가라!”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온 적도 있었어요.
지금 예수는 최고의 법정 기관이 선언을 했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나오면 됩니다. 이 재판은 예수의 승리로 끝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재판관 자체가 피고인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바보처럼 예수는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오늘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그랬습니다. 빌라도는 지금까지 자기의 위치에서 이런 일을 수없이 많이 보아온 경험자입니다. 누구든지 이 자리에 서면 죄가 있는 사람도 온갖 말을 아름답게 해서 죄를 모면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이 바보 같은 사람은 이렇게 재판관이 놓아주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고 답답하게 가만히 있느냐? “아, 제발 나 좀 도와 달라! 말 좀 해라!” 기이히 여기더라.
사실 지금도 이태리 사람들은 우리 개신교에서 하는 사도신경을 고치라고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을 빼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지 빌라도가 얼마나 예수의 무죄성을 주장하고 변호해 주었는데 거기다 로마 사람이 죽였다고 영원한 신앙고백을 하느냐? 사도신경 하지 말라!” 사도신경 안 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태리 나라 사람들이 만든 영화에는 빌라도의 의로움이 많이 나타나도록 제작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예수를 무죄 석방시켜 주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씁니다. 유월절 명절을 기한 사면령! “온 백성이 다 기억하고 있는 흉악범 바라바를 동원시키면 아마 예수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바는 온 국민이 다 기억할 수 있는 사형수요, 흉악범입니다. 아마도 민중들이 바라바를 내세우면 ‘그래도 예수가 바라바보다 낫지!’ 예수를 선택할 희망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성을 재판관으로써 인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최고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도 최종 재판관이 원고나 피고의 편에서 편견 발언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런 편견 발언을 하면 검사 쪽이나 변호사 쪽에서 즉각 이유를 말해서 재판관을 바꿔 달라고 말합니다. 바꿔버립니다. “너는 재판만 할 것이지, 왜 양쪽 편견을 드느냐?”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지금 철저하게 피고 편에 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좋은 기회에 왜 예수는 바보처럼 침묵을 지켰을까요? 지금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판결이 났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여기 오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 철야기도 과정에서 예수의 마음에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문을 예수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결문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내가 가야 할 길을 빌라도한테 내가 아름다운 말로 사정을 해서 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이미 결정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사흘 후에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판결하신 메시아가 가야할 고난의 길에 말없이 들어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약 이때 예수께서 “빌라도야, 네가 옳다. 나는 정말 죄가 없으니 나를 좀 구해다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이 나타났겠는가? 바보라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은 바보의 평가를 받아서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바보같이 살아야 되는 부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어떤 희생의 삶을 지불하면서 바보같이 살아야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의가 성취되는 그런 진리가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라고 하는 영화가 나왔을 때 미국인들이 그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당시에 최대의 흥행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하도 요란해서 청년들하고 저도 가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영화는 아카데미 6개 부분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보시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입니다. 뭐가 재미있는지……. 그런데 그것이 온 국민의 공감대를 가져온 것은 논평이 이렇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그 사람 같이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든 악이 생겨간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같이 바보처럼 손해 보면서 살아주는 사람이 그립고 필요한 시대가 지금이다. 저런 사람이 있어주어야 될 것 아닌가? 모두가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만 재빠르게 쟁취하는 이 세대에 너무나 훌륭하고 신선한 충격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바보처럼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이 사회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아닌가?”
일본의 야마사키 요시꼬의 “대벌”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일본 기업의 회장들은 그 책을 읽지 않고는 회장을 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되어 누구든지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지 아니하면 대화가 되지 아니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일본의 정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정신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은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러시아에게 일본군들이 포로로 잡혀서 수용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신은 비록 포로로 수용소에 잡혀 있으면서 그 안에 위계질서가 분명해서 같은 포로의 입장에서도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며 수용소 포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계급이 높은 사람이 총각이에요. 나이가 어립니다. 부하는 처가 있는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보다 나이 적은 총각 상사에게 절대 복종하면서 일본의 정신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러시아의 군관이 그 수용소에 들어와서 그 나이 많은 포로를 죄없이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총각 상관이 앞을 막으며 반항을 해줍니다. “여보시오. 잘못이 없는 내 부하를 왜 괴롭히는 거요?” 그랬더니 러시아 군관이 “뭐라고? 포로가 반항을 해? 그래, 얼마나 네가 훌륭한 상사인지 내가 보여주겠다.” 그래서 총을 빼 들어서 그 나이 많은 일본 포로 군인을 죽이려고 해요. 그러니까 총각 상관이 순간 덤벼들어서 현장에서 러시아 군관을 죽여 버려요. 그러고 나서 죽음을 모면한 나이 많은 자기 부하 포로를 보고 말을 합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시오. 나는 아직 처자가 없는 몸이요.” 이제 그는 러시아 군관을 살해했으므로 틀림없이 끌려 나가 직결 심판으로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집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지붕에서 외쳤습니다. “동료들이여! 고국에 돌아가거든 이 말을 전해주오. 나는 일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투신자살해서 죽습니다. 바보 같은 사람이죠. 가만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우리는 다른 면에서는 매우 영리하고 지혜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예수님을 닮아서 바보같이 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사는 힘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국가 지도자들 간에도 필요합니다.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자기 입장만 고수하는 그런 공동체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바보같이 집행관이 “최고의 대법관인 내가 너를 살려주겠으니 네가 말하라. 너는 죄가 없다.” 무죄 판결을 내렸는데도 바보같이 십자가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손해 보면서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기지 말고 지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억울함을 주면서 살지 말고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보입니다. 사순절에 바보 예수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버린 빌라도
마 27:11-26 / 박은호목사
지난 8월 14일에,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광복57주년을 맞이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자성'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이광수 등 일제강점(日帝强占) 하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하였던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름을 다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습니다.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최남선, 김동인, 유진오, 유치진, 이무영, 정비석 등의 이름이 눈에 띄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왜 이미 지나간 과거 역사의 오점을 지금에 와서 들추어내고, 굳이 그 명단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선배문인들의 친일 부끄럽습니다"고 사과했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한 이유는, 광복 57주년을 맞이하면서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친일문학작품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단죄나 혹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반성과 용서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국어의 참된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좀더 속 깊은 마음을 표현한다면, 선배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있는 과거역사의 부끄러움과 같은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다시 보기위한 몸부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왜 42명의 유명한 문인들이 친일문학 활동을 했을까요? 왜 그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문학작품을 썼을까요? 그들은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한 것뿐입니다. 어디 문학하는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왜, 그들은 민족의 역사의 오점을 남기는 부끄러운 친일문학 활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자기 앞에 던져진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주어진 그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죄인이 되고 만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이 저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입니다. 빌라도의 죄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때 그의 신분은 예수를 재판한 재판관이었고, 유대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궁극적인 관심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의 문제보다 그 결과를 가져오게 한 원인의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불의한 재판관이 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가 정직한 재판을 하지 못했는가? 바로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죄인인 빌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도, 빌라도처럼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우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유대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보고서에 관심가지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빌라도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사람인가? 그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십자가 처형 현장의 지휘관이었던 로마의 백부장이름)가 말한 것처럼, 저는 진실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가이사 황제에게 보고한 빌라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불순종합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방황합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압니다. 수도 없이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빌라도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본문을 좀더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마 27, 11)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 총독 빌라도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가질 말씀은,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질문이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세워 놓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14,6)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면(對面)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빌라도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인생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빌라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슨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을까요? 이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지금 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으신 예수님이, 병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던 예수님이,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시던 예수님이, 지금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 그 사건이 빌라도에게, 전에 없었던 중대한 인생의 고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빌라도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은, 빌라도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없는 인생의 기회(機會)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위기(危機)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마주하고 서 계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에서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기회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신고 있던 자기 신을 벗고 맨발로 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 찾아오신 주님과 대면했습니다. 두 눈을 보지 못하면서, 거꾸러지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처음으로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 대답을 듣고는, 다시 질문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만남을 통해서, 핍박자(逼迫者) 사울의 인생은 선교사 바울의 인생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빌라도에게는 그의 앞에 서신 예수님은, 기회가 아니라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역사적인 죄악을 범하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가장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가장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사실은 지금 하나님 만나면 큰 일 아닙니까? 주님 만나면 큰일 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어야 할 내 인생의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운 겁니다. 주님 만나기가 싫은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저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빌라도에게 마주 서 계시던 그 주님이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 앞에 서 계신 주님을 기회로 삼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주님을 내 인생의 위기와 절망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차선책을 찾는 빌라도(마 27, 17)
명절이 되면, 로마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전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고소한 대제사장, 장로들,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즉, 빌라도는 차선책으로 죄 없는 예수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정치범 '바라바'가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빌라도 생각에는, 자신이 죄를 찾지 못한 무죄를 확신하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서,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흉악한 정치범, 살인범인 '바라바'와 '예수'를 흥정하면, 그래도 대제사장들, 장로들, 무리들이 '바라바'대신 '예수'를 놓아주자고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도리어 무리를 선동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는, 거짓과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요, 나중도 진리입니다. 비진리가 상화에 따라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거짓과 흥정해서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같이 놓고 흥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영접하는 겁니다. 거짓된 것을 처음부터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는 겁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을 비교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진리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리임을 알 때, 바라바의 거짓됨을 아는 겁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때로는 법이 불의한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미국의 행동들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지나간 미국 역사에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예를 사고파는 것은 합법이었습니다. 노예들이 주인에게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았건 깨닫지 못했건 피부가 검다고 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린 백인들이 범죄한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하고, '노예제도'를 불법(不法)이라고 선언한 다음부터 노예제도가 잘못된 제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노예제도는 늘 잘못된 제도인 겁니다. 결국에는, 법이 노예제도를 불법이라 인정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노예제도나 나치학살, 힘에 의한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입니다. 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의 문제도 아닙니다. 시대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에 속한 겁니다.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흥정의 대상도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이고, 나중도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바와 비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대적인 제도나, 상황이나, 전통이나, 비진리인 법과 흥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예수님'과 '바라바'가 있을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진리를 버린 빌라도(마 27, 24과 26)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론은, 빌라도가 왜 불행한 인간인가? 왜 역사적인 죄인이 되었는가? 그는 왜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였는가 입니다. 빌라도는, 아무 성과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합니다. 그러고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24, 26절).
빌라도가 드디어 예수님을 포기한 겁니다. 진리를 버린 겁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포기했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결론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내 인생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에스라성경학교에서 성경공부하는 젊은 교우 한 분이 최근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직장은,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수백억 원의 자산과 수십억 원의 현금을 운용하는 작지 않는 회사였습니다. 진급이 되어서, 그 회사에서 회계업무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월급도 더 많이 받게 되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게 되어 처음에는 굉장히 기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가 하면, 회사의 일반회계업무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회사의 회장님과 사장님을 위해서 매월 3,000만원 규모의 비자금을 만들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처음에 진급해서, 몇 달은 전에부터 해오던 관행이라 생각하고 죄의식 없이 능력 있게 그 일을 잘 처리했는데, 저와 같이 비유복음말씀을 공부하면서부터 그 일에 대한 고민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셨는데, "목사님, 저 회사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았습니다. 그런 후에, 저는 회사 그만 두지 말고, 말귀를 못 알아들을 분들도 아니시니, 회장님과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그 회사 회장님과 사장님은 서울의 유명한 모 교회에 출석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고민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장님, 사장님 저는 이 회사 절대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직한 방법으로 이 회사가 운영되도록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투명한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경계하고, 의심하고, 곱지 않는 눈초리로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로부터 두 달을 더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왔습니다. 그 회사의 회장이나 사장은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과 비자금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버린 빌라도와 같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빌라도가 왜, 진리를 포기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그는, 정치적인 욕망이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보다는 거짓된 무리들의 여론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무리들이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니니이다"(요 19,12). 이 한 마디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빌라도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준 말입니다. 끝없는 정치적인 욕망을 가진 빌라도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匕首) 같은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 한 마디 말에, 서둘러 진리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리도 헌신짝처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가이사에게 잘 보이는 일이라면, 거짓된 군중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좋아하기만 하면, 진리를 포기하는 그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한국에서 26년이나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 씨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한국·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쓴 내용 중에, 그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전과자가 떵떵거리는 나라라고 비판했습니다. 전과자라고 해서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창기와 세리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또 국회의원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당선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겁니다. 전세계를 통틀어, 국회의원 가운데 전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만큼 높은 나라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연세대학교 안용식 교수님이 쓴 논문 가운데,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의 일제관련 경력분석'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어 보면, 기가 찹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행정의 실제 집행자였던 국장, 과장의 55.2%가 일제시대 관료를 지낸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랏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맞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좀 생각하는 분들은, 우리나라가 일제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 57주년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광복은 되었지만 아직 진정한 해방은 얻지 못했습니다. 식민통치라는 구속에서는 풀려났지만 진정한 자유는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평화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직, 거짓, 사기, 교만, 이념적인 싸움, 지역갈등, 부정직한 권력,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욕망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랏일이라고 언제나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내 일이 곧 큰 나랏일이고, 큰 나랏일이 곧 나의 작은 일입니다.
빌라도의 정치적인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의 욕망은 진리이신 예수를 버리고 마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 말입니다.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의 그 욕망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치(政治)하고, 교회 일하고, 직장 다니고, 기업경영하고, 공부한다면, 우리와 우리나라는 언제나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해방과 자유와 평화는 진리로부터만 옵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고, 포장되어 있는 온갖 빌라도의 욕망을 버리고 진리를 택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다 죄의 종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광복 57주년 맞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새로운 부르심과 기대라고 믿습니다. 아멘.
빌라도의 비겁
마 27:11-26 / 김태복목사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빌라도를 통해서 교훈 받고자 합니다. 빌라도 하면, 곧 이어 따라 붙는 대명사가 '비겁자'입니다. 빌라도의 비겁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모습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수요일날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예배 중에 항상 고백하는 '사도신경' 중에 예수님 외에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본디오 빌라도'로 2000년 동안 수억의 교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악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빌라도는 무슨 비겁을 나타냈습니까?
1. 빌라도의 비겁은 양심의 소리대로 따르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유대 당국은 일상적인 소송문제는 자치적으로 취급할 수 있으나 사형선고만은 로마 총독만이 선고하고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최고 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끌고 온 것입니다. 사실은 산헤드린에서 판결된 고소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목으로는 로마 총독이 사형시킬 수 없는 줄 알기에 저들은 마치 로마의 반역자처럼 서류를 조작하여 고소를 한 것입니다. 사형시켜 달라는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1)예수님이 백성들을 미혹했다는 것입니다. 즉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 사회질서를 파괴했다는 죄입니다. (2)예수님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즉, 정치질서를 파괴했다는 죄였습니다. (3)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사칭함으로 로마 황제 가이사를 항거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마귀의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사형시키려고 광분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종교적인 시기심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경계할 일은 시기심입니다. 그 시기심을 이용하여 사탄이 얼마나 많은 교회들을 어지럽히는지 모릅니다. 때로 노회 일을 하면서 분쟁이 되고 있는 교회를 가서 보면 무슨 큰 문제보다 지도자끼리의 시기심이 그 밑바닥에 깔리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터무니없는 고소장을 받은 빌라도는 그 죄목대로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오랜 세월동안 군대 지휘관으로, 혹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습니다.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강하고 거친 사람들이요, 혹은 온갖 정치범이나 강력범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어느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간파해낼 만큼 동물적인 본능을 가진, 숙련된 수사관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예리한 눈으로 아무리 뜯어보아도 예수님은 범죄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일 뿐 아니라, 그가 늘 정보로 들었던 범상치 않은 분임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묻기를 "이 여러 증인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 데 당신은 답변할 말이 없느냐?"라고 했습니다.
반대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빌라도는 기이히 여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통 죄를 짓고 검사 앞에 끌려온 사람들은 증거물을 제시하는 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극구 부인하며 자기는 대단히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십시오. 온갖 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끌려온 사람들이 '자기는 절대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나같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많은 증거를 대면 그 때야 마지못해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말로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요, 자기가 무죄함을 말씀하시기 시작하면 빌라도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심문한다 할지라도 당해내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침묵하셨을까요?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를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군중들의 어리석음과 빌라도의 비겁을 아시기 때문이요, 더 나가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 길만이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길이기에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오직 침묵으로만 일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태산같은 침묵, 온갖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예수님의 호수같이 깊은 평안이 담겨 있는 눈동자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분도 있다니' 빌라도는 큰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적의(敵意)에 가득한 얼굴로 몰려온 군중들을 향해 단호하게 외칩니다. 눅23:13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그릇 인도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으나 그대들이 보는 대로 내가 그대들이 있는 데서 친히 심문해 보았는데 그대들의 고소를 입증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 분명히 이 사람은 무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 행동한 빌라도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그런 양심대로 행동했다면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추앙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19:12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과 이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이 외치기를 "이 사람을 놓아준다면 빌라도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라고 하자, 점점 자기 출세욕이 발동하여 양심을 저버리고 야욕을 따라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준 것은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양심을 따라 역사상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욕심을 따라 넓은 길로 감으로 영원히 악한 자로 성경에 기록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어느 때는 양심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욕심을 따라 넓은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는 과감하게 양심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길을 친히 인도하셔서 복된 길로 인도할 줄 믿으십시오. 언제도 마씀 드렸지만, 미국 그랜 브란드 대통령이 청소년 때, 한번은 가까운 친구 뿌란 그린과 영화관으로 구경을 가다가 교회당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랜 브란드는 그 날이 주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양심에는 교회를 가야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영화관을 가자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랜 브란드는 양심에 따라 교회에 들어가고 친구는 영화관으로 가서 악한 내용의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아 점점 범죄에 빠지더니 나중에는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가 사형언도를 받던 날이 바로 그랜 브란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언제나 양심을 따라 좁은 길을 택하는 자들이 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빌라도의 비겁은 군중의 압력 때문에 예수님을 택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빌라도는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라"는 함성이 법정 뿐 아니라 온 도시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가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발견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자, 군중들은 대제사장과 그의 부하들에게서 일당을 받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5만원을 받기로 하고 우선 반만 받은 후에 얼마나 고함을 지르냐에 따라 나머지를 받기로 약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너나 없이 경쟁적으로 목이 터져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을 것이요, 그러다 보니 군중들의 소리에 스스로 휘말려서 나중에는 무엇엔가 분노에 가득 차서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분노의 감정을 어느 정도 풀어주기 위해서 눅23:16에 보면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사납게 매질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예수님을 풀어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군중들은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보자, 피에 굶주린 이리처럼 더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책자에 보면 빌라도가 쓰기를 <저는 가끔 시민 폭동에서 노한 군중을 목격하여 왔으나 이번처럼 격렬한 폭동을 본 적인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의 모든 유령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온 것 같았다고 밖에는 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걸어다닌다기 보다는 갑자기 땅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는데 총독 청사의 입구에서부터 시온산까지 이르는 군중들은 넘실거리를 파도를 따라 움직이는 소용돌이처럼 보였고 가지가지 해괴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아마, 빌라도는 큰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서 그 동안 갖은 노력을 다해 쌓아온 이 총독의 자리가 일시에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으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죄수로 끌려온 예수님, 그 분 혼자만이 침착하고 조용하게, 아니 평화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온갖 참혹한 전투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선 빌라도는 사색이 되어 있는 데, 군중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살인적인 고함을 치든지, 심한 매로 때리든지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소개한「빌라도 보고서」에서도 세상에 이처럼 사람에게 평온을 주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오, 주여 내가 망하게 되었나이다. 내가 어찌하여야 옳습니까?"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엄청난 은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비상한 빌라도는 그 위기를 세상의 수단을 통해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는 살인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함께 세워 놓고 "유월절에는 죄수 하나를 사면하는 것이 관례인데, 내가 이 예수와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아주랴"고 외쳤습니다.
빌라도의 생각에는 '아무리 예수란 사람이 미워도 잔인한 살인강도 바라바에 대한 미움보다는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군중들은 "예수를 놓아주고 바라바를 사형에 처하소서."라는 대답이 나올 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치기를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선을 버리고 악을 택했습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군중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은 바라바보다도 더 악한 위치로 전락되셨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완악해질 수 있습니까? 왜 그런 수치, 그런 모욕적인 자리까지 떨어지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이십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자,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대세에 밀려 진리의 길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들을 보십시오. 더욱 미친 듯이 소리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복을 버리고 영원한 저주를 택한 것입니다. 완전히 돌아버린 군중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맹세가 수 천년 동안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습니까? 돈 몇 푼에 자기와 자기 후손들의 장래까지 다 팔아먹은 너무나 어리석은 군중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조건으로 한 유대인들의 맹세가 저주를 불러들이어 2000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세계 곳곳에서 추방당하고 학살당하였으며 지금도 이스라엘 땅은 피로 얼룩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하나는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택하면서 "예수님이시여, 당신이 하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고백함으로 영원한 복의 문을 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이냐, 바라바냐? 십자가의 좁은 길이냐, 욕망의 넓은 길이냐, 복이냐, 저주냐의 갈림길에서 여러분들은 아무리 대세가 넓은 길을 주장함으로 잘못하면 혼자가 되는 입장일지라도, 앞길에 손해와 고난이 보인다 할지라도 십자가를 택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가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빌라도의 비겁은 출세욕 때문에 성령의 지시를 무시한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빌라도가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아내에게 전갈이 오기를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빌라도의 발치에 엎드려 울면서 호소하기를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그는 거룩한 분입니다. 어젯밤, 저는 환상 중에 그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오, 빌라도여, 악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내인 제 애원을 듣지 않으신다면 로마 중의원으로부터 받을 저주가 두렵고 가이사에게 당할 괴로움이 두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 아내를 통해서 지시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출세를 위해 예수님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만큼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서기 26년부터 36년까지 정확하게 10년 간 유대 땅의 총독으로 재위했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한 총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로마에게 아부했고 로마 황제숭배를 강요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총독들은 보통 한 5, 6년이면 떠났는데 이 사람은 10년 동안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분명히 죄가 없는 줄 알았으며, 자기 권한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풀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을 방면함으로 분노한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킨다면 자기 출세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 같으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하늘의 지시보다 출세욕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승승장구 출세하여 로마정부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결국은 사마리아 학살사건 때문에 로마의 정부가 그를 소환합니다. 중앙정부로부터 빌라도가 소환을 받자 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빌라도가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출세지향적으로 달려가던 빌라도의 비참한 종말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성령의 지시대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대로 나갔다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 복된 길, 은혜의 길로 나갔을 것입니다. 과연, 그의 아내 크라우디 아프로그는 후에 아주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교회사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같은 집에서 살던 부부였으나 한 사람은 예수님과 십자가와 성령을 따라 사는 길이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출세욕 때문에 저주의 길을 갔으나 부인은 좁은 길을 택함으로 영원한 복된 길을 갔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한 마디로 순간 순간 결단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냐 세상이냐? 성령이냐, 악령이냐?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그 선택에 따라 용단이냐, 비겁이냐? 복된 삶이냐, 저주의 삶이냐? 판가름지는 줄 믿으시고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는 새로운 결단을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9년 4월, 미국의 유명한 신문인「유에스 투데이」지(誌)에는 17세난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읽은 기억이 있으시겠지만,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나 총기난사사고 때, 학생 25명이 죽어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범인 중에 한 사람이 캐시버넬이라는 17세된 소녀 앞에 총을 겨누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옆에 있었던 소녀가 살아 나와 목격자가 되어서 이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총기를 든 범인이 소녀에게 한 질문은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안 믿어요 이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소녀는 침착하게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범인은 총부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기를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라고 하자, 캐시는 침착하게 한번 더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당신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범인의 총구는 불을 뿜기 시작했고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 생명을 거두었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믿음의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사건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크리스찬 10대들이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라는 쓴 T셔츠를 입은 소년소녀들이 거리를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로리다 한 도시에서는 2,500명의 10대 크리스찬들이 모여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캐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고백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 집회는 도시마다 불을 당기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에 참담하게 배척을 당하셨고 비겁한 빌라도에 매질과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인강도 바라바보다 더 천박한 자리에 내려가셨고 결국 모든 고난 속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 만분지 일이라도 갚기 위해, 이번 고난주간 동안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을 따르지 말고 캐시처럼 어떠한 손해, 어떠한 위험이 온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을 따라 좁은 길로 가기로 결단하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