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향(暗香)
그윽이 풍기는 향기(香氣)를 이르는 말이다.
暗 : 어두울 암(日/9)
香 : 향기 향(香/0)
‘갓득 冷淡(냉담)한대 暗香(암향)은 므사 일고.’
가뜩이나 쌀쌀하고 적막한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고.
정철 사미인곡의 한 구절이다. 우리 선비는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멸하고 은은하게 스며 나오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암향은 ‘어두운 향기’가 아니다. 한켠으로 비켜 있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안달하지 않는, 숨어 있는 향기다.
중국 시인들도 암향을 최고로 평가했다.
墻角數枝梅, 凌寒獨自開.
담장 모퉁이 매화 몇 송이, 추위를 타고 와 혼자 피었다.
邀知不是雪, 爲有暗香來.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구나, 암향이 코끝에 있으니.
송(宋)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의 시 매화(梅花)다. 매화와 암향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묵매(墨梅)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 의미다. 암향에 묵까지 얹혔으니 암향의 최고 경지라고나 할까.
원말명초(元末明初) 화가 왕면(王冕)은 묵매 한 점을 그려 놓고 이렇게 노래했다.
吾家洗硯池頭樹
왕희지( 王羲之)가 붓 씻던 연못가,
朶朶花開淡墨痕
가지마다 옅은 묵매가 피었다.
不要人誇好顏色
그 색깔 칭찬할 이 필요없네,
只留淸氣滿乾坤
그저 천지에 맑은 향기만 가득하구나.
매화의 그 밝은 색깔조차 화사함으로 여겨 내치는, 그 깐깐함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암향의 상징 매화의 색까지 담담한 묵흔으로 지웠다. 겉치레에 대한 옛 시인들의 경계는 이처럼 치열했다.
암향과 통하는 것이 석회(石灰)다. 석회처럼 희미한 색깔이 또 있을까. 수십 길 지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 시인들이 석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석회음(石灰吟)
우겸(于謙; 1398~1457)
석회를 읊다
千錘万鑿出深山(천추만착출심산)
수 많은 망치질과 끌 질로 깊은 산속에서 캐내
烈火焚燒若等閑(열화분소약등한)
뜨거운 불로 태워 예사로운 것이 되었구나.
紛身碎骨渾不怕(분신쇄골혼불파)
몸과 뼈가 가루가 되어도 모두가 두렵지 않으나
要留淸白在人間(요류청백재인간)
청백을 세상에 머무르게 할 수 있어야 하느니라.
명대(明代) 청백리 우겸(于謙)의 절창이다. 수만 도의 불길과 수억t의 무게를 견디고도 겸손한 표정을 잃지 않는 석회에서 시인은 황제에 폭정을 견디며 백성을 위해 꿋꿋이 버텨내는 청백리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장미 대선이 코앞이다. 암향의 향과 석회의 자태를 지닌 인물이 누구일지, 곰곰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 暗(어두울 암)은 ❶형성문자로 隌(암)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날 일(日; 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音(음; 암)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音(음, 암)은 아주 옛날에는 그늘의 뜻인 陰(음)과 닮은 발음으로서 어둡다는 뜻에 관계가 있었다. 날 일(日; 해)部는 태양, 暗(암)은 해가 가리어져서 어두움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暗자는 '어둡다'나 '보이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暗자는 日(해 일)자와 音(소리 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音자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소리'라는 뜻이 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소리뿐이 들리지 않는다. 暗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로 '어둡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暗(암)은 ①(날이)어둡다 ②(눈에)보이지 않다 ③숨기다, 은폐(隱蔽)하다 ④어리석다 ⑤거무스름해지다 ⑥깊숙하다, 유심(幽深)하다 ⑦외우다, 암송(暗誦)하다 ⑧가만히 ⑨남몰래, 은밀히 ⑩슬며시, 넌즈시 ⑪밤(=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두울 명(冥), 어두울 혼(昏), 어두울 매(昧), 어두울 몽(蒙),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명(明)이다. 용례로는 넌지시 깨우쳐 줌을 암시(暗示), 희망이 없고 막연함을 암담(暗澹), 어둡고 답답함을 암울(暗鬱), 머릿속에 그대로 외어서 잊지 아니함을 암기(暗記),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활동함을 암약(暗躍), 남몰래 사람을 죽임을 암살(暗殺), 해면 가까이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바위를 암초(暗礁), 책을 보지 않고 글을 욈을 암송(暗誦), 캄캄함을 암흑(暗黑),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암우(暗愚),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음을 암묵(暗默), 연필이나 주판을 쓰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는 셈을 암산(暗算), 남몰래 돌아다님을 암행(暗行),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서로 적대 행위를 하는 일을 암투(暗鬪),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몹시 껌껌하고 어두움을 흑암(黑暗), 어두울락 말락 할 정도의 어둠을 박암(薄暗), 어리석고 못나서 일에 어두움을 혼암(昏暗),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찾는다라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사물을 알아내려 함을 이르는 말을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둠 속에서 날고 뛴다는 뜻으로 남모르게 활동함을 이르는 말을 암중비약(暗中飛躍),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는 뜻으로 뜻밖에 일이 잘 해결됨을 이르는 말을 암중방광(暗中放光), 어두운 거리에 밝은 등불이라는 뜻으로 삶의 가르침을 주는 책을 이르는 말을 암구명촉(暗衢明燭), 비가 올 듯한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다는 뜻으로 위험한 일이나 중대 사건 따위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정세를 이르는 말을 암운저미(暗雲低迷), 남몰래 일을 꾸밈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암중공작(暗中工作), 그윽한 향기가 은근히 떠돎을 일컫는 말을 암향부동(暗香浮動), 어두운 천지 또는 암담하고 비참한 사회를 일컫는 말을 암흑천지(暗黑天地),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암중순목(暗中瞬目), 백성의 뜻에 영합하여 민심을 제 편으로 끌어들임을 일컫는 말을 암요인심(暗邀人心), 그윽한 향기와 성긴 그림자라는 뜻으로 매화를 두고 일컫는 말을 암향소영(暗香疎影), 어둠을 등지고 밝은 데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배암투명(背暗投明),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서 불안해 함을 이르는 말을 의심암귀(疑心暗鬼) 등에 쓰인다.
▶️ 香(향기 향)은 ❶회의문자로 薌(향)과 통자(通字)이다. 黍(서; 기장)와 甘(감)의 합자(合字)로 맛이 좋은 기장의 뜻이다. 기장을 삶을 때 나는 좋은 향기로부터, 전(轉)하여 향기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香자는 '향기'나 '향기롭다', '감미롭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香자는 禾(벼 화)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香자를 보면 口(입 구)자 위로 벼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입으로 벼를 먹고 있는 듯한 모습과도 같다. 香자는 이렇게 밥을 먹는 모습으로 그려져 '향기롭다'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밥을 짓는 향기나 밥맛이 '감미롭다'는 뜻이다. 香자는 부수로의 활용은 낮아 거의 단독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香(향)은 ①노리개로 몸에 지니는 물건의 하나. 향내가 나는 여러 물건을 가루를 지어 반죽하여 만듦 ②흔히 제사 때 피우는 향내가 나는 물건. 향나무를 깎은 부스러기나 또는 향료의 가루를 반죽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듦 ③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향기(香氣), 향(香), 향기로움, 향료(香料), 향기롭다, 감미롭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향기 분(芬), 온화할 은(誾)이다. 용례로는 향냄새 또는 향기로운 냄새나 좋은 느낌을 주는 냄새를 향기(香氣), 좋은 느낌을 주는 냄새를 향취(香臭), 향료를 섞어 만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물을 향수(香水),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기름 또는 참기름을 향유(香油),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향축(香祝), 향을 피우는 데 쓰는 자그마한 화로를 향축(香爐), 향나무의 즙으로 된 다갈색의 물감을 향염(香染), 상여를 메는 사람을 향도(香徒), 향을 만드는 재료를 향료(香料), 향기로운 맛을 향미(香味), 향기로운 나물을 향채(香菜), 향내 나는 풀을 향초(香草), 향기로운 바람을 향풍(香風), 향을 피어 올리는 단을 향단(香壇), 향로를 놓는 받침을 향대(香臺), 봄철의 꽃 필 때에 꾸는 꿈을 향몽(香夢), 향기롭고 아름다움을 향염(香艶), 고상한 향기와 제일가는 색깔이라는 뜻으로 모란을 달리 이르는 말 또는 절세미인을 이르는 말을 천향국색(天香國色), 벌과 나비가 향기를 따른다는 뜻으로 남자가 미인을 좇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봉접수향(蜂蝶隨香), 그윽한 향기와 성긴 그림자라는 뜻으로 매화를 두고 이르는 말을 암향소영(暗香疎影), 차를 마신 지 반나절이 되었으나 그 향은 처음과 같다는 뜻으로 늘 한결같은 원칙과 태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말을 다반향초(茶半香初)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