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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한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 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 입니다. ”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부서져 있던 것이었다.
버스사고에 의해. 그리고 그의 남편 디에고에 의해.
<나의 탄생>,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5cm
(가수 마돈나가 고액에 구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07년
7월 6일 19살에 멕시코로 이민 온 유태계 독일 출신 사진 작가인
기예르모 칼로(아버지) 와 멕시코 태생인 마틸데 칼데론(어머니) 사이의
네 딸중 셋째 딸로 멕시코 코요아칸 '푸른 저택'(나중에 프리다 기념관이 된다) 에서 태어남.
독일어로 프리다는 평화를 의미.
풀네임: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유모와 나(My Nanny and I)>, 1937, 금속판에 유채, 30.5x 34.5cm
1913년(6세)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간 방에만 갇힌 채로 생활.
외로운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말라빠진 오른쪽다리 를 혐오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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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남편이 사실상 거의 실직 상태에 있었던 데다가 잇따른 임신으로 지쳐 어린 프리다에겐 거의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실제로 프리다는 자신의 어머니를 '나의 주인님' 이라고 불렀고,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유모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녀를 찾아온 수많은 시련 중 가장 첫 번째 것은 프리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1913년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에 불구가 왔다.
그녀를 촬영한 여러 사진들과 자화상을 보면
그녀가 즐겨 입는 기다란 치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다리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프리다의 유일한 나체화에서도 프리다는 아픈 다리를 성한 다리 밑으로 포갠 어설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린 프리다는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고,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의 유년 시절은 고독했다. 어머니는 늘 지쳐 있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현실에선 무능했다.
그녀의 가족 중 프리다와 가장 친했던 언니 마티타는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 가출해 버렸다.
고독한 프리다는 늘 마음 속에 자신의 분신을 품게 되었고, 1939년 <두 명의 프리다>를 통해 그런 자신 내면의 분신을 드러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또 하나의 프리다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었다.
<부서진 기둥>,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1925년(18세)
9월 17일. 프리다와 알레한드로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남.
알레한드로 고메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심한 중상을 입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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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 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 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1926, 캔버스에 유채, 79.7x60cm
1928년(21세)
알레한드로와의 이별, 좌익계 활동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
이 때 디에고 리베라와의 두번째 만남.
<Portrait of Diego Rivera>, 1937, 목판에 유채, 18 x 12 1/2 in
1929년(22세)
8월 21일. 42세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여 그의 세 번째 부인 이 됨.
스무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주변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프리다의 치료비 지출 로 심한 재정압박을 받고 있던 아버지가 승낙.
디에고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하자 그녀도 탈퇴함.
<프리다와 디에고>, 1931, 캔버스에 유채, 100×78.8cm
1930(23세)
첫 번째 임신,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자궁 이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 중절을 함.
디에고와 미국으로 이주함.
<떠 있는 침대Henry Ford Hospital>,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8cm
1932년(25세)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함.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
디에고는 다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프리다는 우울증 에 빠지게 됨.
<프리다와 유산 혹은 유산> 1932 종이에 리도그래피 31.7×23.5cm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1940, 캔버스에 유채, 40 x 27.9 cm
1934년(27세)
세번째의 유산, 난소 발육 부진으로 임신 석달 만에 다시 중절 수술 함.
디에고가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르고, 수개월간 별거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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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 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 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1934년 여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에게 남은 거의 마지막 친구이자 동지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생이었다.
설령 디에고가 세상 모든 여인과 정분이 난다고 할지라도 피했어야 할 여인이었다.
<여동생 크리스티나Christina의 초상>, 1928, 판넬에 유채, 31 1/8 x 23 5/8 in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걸 다 잃었다.
프리다는 드디어 디에고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녀에게 고난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고 매우 낯익은 존재였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몇 개의 작은 상처들>, 1935, 금속판에 유채, 29x39.5cm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옷소매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1935년(28세)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짐.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알게된다.
디에고의 협박으로 그들의 만남은 끝남.
프리다의 건강이 악화.
1937년(30세)
망명 생활로 떠돌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와 교제하며 왕성한 작품활동.
트로츠키는 프리다에게 매혹되고 둘의 만남은 사랑으로 발전되었으나 오래가지 않고 관계를 청산.
<내 치마가 저기 걸려 있다>, 1933, 목판에 유채, 46 x 50 cm
1938년(31세)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거장 앙드레 브루통과 만남.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
뉴욕에서 젊은 사진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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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의 혁명은 사랑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프리다의 해방은 남자들과 동등해지고 독점적인 사랑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프리다 칼로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를 만나 수개월 간 함께 지냈고,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는 18살 때의 끔찍한 사고 이전의 프리다처럼 행동했다. (사진에 사람의 마음이 실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증거는 니콜라스 머레이가 프리다 칼로를 촬영한 사진들인데 그의 사진만큼 프리다를 아름답게 담아낸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도 작은 이 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물이 내게 주는 것>, 1938, 캔버스에 유채, 91x70.5cm
1939(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짐.
전시회에서 칸딘스키,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극찬을 받음.
남미 화가로는 최초의 루브로 박물관에 그녀의 그림이 소장.
머레이와 이별,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이혼.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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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프리다는 앙드레 브루통의 집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이 저명한 화가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전시장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뉴욕에서처럼 파리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브루통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고, 프리다는 그의 집에서 만나게 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실망했다.
프리다가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어찌나 깊은 혐오감을 느꼈던지,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들이 어찌나 썩었는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예요. 정말 너무 심하네요. 이 예술가인 척하는 파리의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톨루가 시장 바닥에 앉아 옥수수 부침개나 파는 게 낫겠어요. 난 디에고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수다와 현학적인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중략 … 무엇 때문에 유럽이 곪아 터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 무능력자들이 히틀러나 뭇솔리니 일당을 불러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젠 정말 잘 알겠군요."
1940(33세)
멕시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2인의 프리다 상처받은 식탁'을 출품.
디에고는 여자 관계 정리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립성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 리베라의 54세의 생일에 재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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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하게 되나 여전히 디에고는 불성실한 남편이었다.
영화배우이자 디에고 작품의 모델이며 칼로의 친구였던 마리아 펠릭스(Maria Felix)와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이 시기의 칼로의 작품 <디에고와 나> 에 그의 체념적인 상태가 보인다.
<디에고와 나>, 1939 목판에 유채 29.5×22.4cm
칼로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혀 있으며,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진 상태로 목에 칭칭 감겨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답답함과 섬뜩함을 함께 주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과, 매우 짙고 단정한 눈썹과 이마에는 디에고의 초상이 덤덤하고도 냉정하고 당당하게 그려져 있다. 분노와 충격이 아닌 체념과 무관심이 눈물 방울과 흩어진 머리카락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의 이마 위에 놓여 있는 디에고의 이미지는 그래도 버릴 수 없다는 칼로의 디에고에 대한 미련과 수용을 나타낸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5 x 173 cm
1941(34세)
아버지 기예르모 사망.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 코요아칸의 푸른저택에 정착
1944(37세)
석고와 가죽 코르셋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해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게 됨.
1946(39세)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음.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 1946, 캔버스에 유채, 55.9x40.6cm
1950(43세)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9개월을 보냄.
<Roots (Raices)>, 1943, 금속판에 유채, 11 7/8 x 19 3/8 in
1952(45세)
반전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참여함.
1953(46세)
멕시코에서 회고전이 열림. 개막식날 침대에 실린채 참석.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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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에 회저병이 생겨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고,
영국의 병원에서 골수 이식 수술을 받다가 세균 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여섯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아야 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누워있는 병실을 떠나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했다.
그녀 스스로의 말대로 부서질대로 부서진 육신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철제 코르셋과 석고 붕대에 공산당의 별과 낫, 망치를 그려넣었고 디에고는 그런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통은 곧 언어였다. 프리다는 물감 대신 자신의 피를 짜내 그림을 그리는 여인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위해 그녀의 기념전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것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환송 잔치가 될 것임을 어쩌면 디에고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념전을 준비하는 중에 프리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디에고는 그녀의 침대를 들것에 실어 화랑으로 옮기도록 했다.
기념전은 대성황리에 끝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것은 물론 멕시코 전역에서 쏟아지는 열광에 젖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도 잠시였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서 결국 그녀는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혈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결국 프리다는 디에고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가슴아픈 기억Recuerdo>, 1937, oleo sobre tela, 40 x 28.3 cm
1954(47세)
폐렴이 겹침. 건강 악화 고생하던 중에도
6월 2일 반미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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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6월 프리다의 건강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고,
그녀는 회화의 새로운 세계와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한 디에고의 투쟁에 함께 했다.
그녀는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과 아르벤스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비를 맞았고 결국 폐렴이 도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화장되었다.
<상처입은 사슴>, 1946, 캔버스에 유채, 22.4x30cm
7월 13일 사망
1954년 7월 12일 일기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디에고에게 17일 가량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미리 건넸다. 디에고가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 묻자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1958년 푸른저택 프리다 박물관으로 개장
<우주와 지구, 그리고 멕시코에서 나와 디에고, 솔로틀Xolotl이 벌이는 사랑의 포옹>,
1949, 캔버스에 유채, 70x60Cm
한 평생 자유롭지 못한 몸 속에 갇혀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지 못한 비운의 여성 프리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그림들 만큼은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어 행복할 것이다.
잘 보셨다면, 댓글은 예의입니다.
당연하죠, 스크랩 마음껏 하세용^^
이런 자료 너무 좋아요.. 스크랩 해갈께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가네요.. ㅠ 이런 글 너무너무 좋아요ㅠㅠ
와... 정말... 다 읽고났는데 이루말할수 없는 기분이에요... 감사해요~ 스크랩해갈께요 제 플래닛으루~
얼마전 수업시간에 이 분 그림을 잠시 다룬적이 있었는데 자세하게는 몰랐어요. 영화도 있다니 한번 보고 싶네요. 좋은 자료 감사드려요^^
이번 학기 "스페인 문화와 예술' 수업을 들으면서 남은 시간에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도 배웠거든요~ 그 때 미술부분 배우면서 프리다칼로에 대해서 공부하고, 영화도 봤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런 삶이었군요.. 디에고리베라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벽화 화가였죠~정말 잘보고갑니다!
스크랩해요 나를잊지마세요.. 그말만으로 가슴이 쿵하고 떨어져요
잘봤습니다 비공개로 스크랩하겠습니다염
정말 잘 봤어요. 그림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프리다의 마음을 말해주는거 같아요. 기괴하고 우울한 그림들이 그녀의 마음을 전해주는거 같네요..
정말 대단하세요..좋은 게시물 잘봤습니다^^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잘봤어요 스크랩해갈게요
좋은 자료네요. 인상깊게 잘 봤습니다.
아 정말 잘 읽었어요 좋은 자료 정말 고마워요
잘 봤습니다! ^ㅡ^
정말 잘봤습니다. 스크랩 해갈게요. 프리다의 강렬함을 느끼고 갑니다.
우와 고맙습니다 잘 봤어요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너무 잘 봣습니다. 담아갈게요~!
잘봤습니다
잘봤습니다
잘 봤어요. 예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다시 또 보고 싶어서 찾았어요....스크랩해갈게요~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메일로 담아갈게요!
진짜 잘 봤습니다. 감사해요♥